최근 수정 시각 : 2024-02-11 18:24:43

손화중

동학농민혁명
東學農民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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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
孫華仲[1]化中으로 표기했고, 승정원일기 3053책, 고종 31년(1894) 12월 18일 기사에서는 孫和仲으로 표기했다. 이 밖에 孫和中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성명 손화중(孫華仲)
본명 손정식(孫正植)
초산(楚山)
본관 밀양 손씨[2]
출생 1861년[3] 6월 17일
전라도 정읍현 남일면 과교리
(現 전라북도 정읍시 과교동)
국적 조선
사망 1895년 4월 24일[4] (향년 33세)
한성부 서부 반송방(성외) 지하계 금계동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부모 아버지 손호열, 어머니 평강 채씨
사인 사형(교수형)
신장 9척(187cm)[5]
별칭 떠돌이 접주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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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의 인물로서 동학농민운동에서 전봉준김개남과 더불어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2. 생애

1861년 6월 17일 전라도 정읍현 남일면 과교리(現 전라북도 정읍시 과교동)에서 아버지 손호열(孫浩烈, 1841. 1. 8 ~ 1894. 3. 14)과 어머니 평강 채씨(1844. 4. 10 ~ 1886. 5. 11)[6]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읍현에 대대로 살던 밀양 손씨 집안은 19세기 이후 학자나 관직자를 배출하지 못한 향반(鄕班)에 속하는 가문이었지만 그래도 집안은 비교적 넉넉하였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키가 9척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하여 주위의 기대를 모았다. 이후 정읍현 서이면 향지리 음성골(現 정읍시 상평동 음성마을)로 이주했다.

12살 때 고흥 류씨(高興 柳氏, 1855. 4. 4 ~ 1912. 12. 6)[7]와 혼인한 뒤 1881년에 처남 류용수(柳容洙, 1863 ~ 1895. 1. 6)[8]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마을에 갔다가 동학을 접한다. 그리고 1884년에 동학에 입도였고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과도 인연을 맺었다.

1892년에 일어난 교조신원운동에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였고 1893년에 광화문 복합상소 때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동학 농민군의 조직 개편에서 손화중은 전북 정읍포의 대접주로 임명되었고 손화중은 33세의 나이로 동학 농민군 지도자가 된다.

전봉준이 2차 봉기를 일으켰을 때 같이 합류하여 10월 일본군의 배후상륙에 대비하는 것과 동시에 최경선과 같이 나주 부근에 주둔하였다. 전봉준이 공주를 공략하다가 실패한뒤,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지형관계로 패배하면서 농민군을 11월 말에 해산하였고 청주 방면을 공격하였던 김개남의 농민군도 해산되자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안 손화중도 12월 1일에 농민군을 해산했다.

이후 전라도 광주목(現 광주광역시)을 거쳐 흥덕현 부안면 안현리(現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송현리 안현마을 120번지)로 들어가 수강산에 있던 전주 이씨 집안의 침명재(枕溟齋)에 은신해 있다가, 재실지기로 있던 유생 이봉우(李鳳宇)의 밀고로 12월 11일 관군에 체포되어 고창현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때 관군들이 손화중의 장남 손병두(孫炳斗)를 생포한 뒤 자수하지 않으면 아들을 대신 처형하겠다고 하자, 손화중이 이봉우에게 자신을 관아에 고발하고 상을 받으라고 권유했다는 손화중의 셋째 아들 손응수(孫應洙, 1890. 12. 26 ~ 1962. 12. 2)[9]의 증언이 있으나[10], 확실치는 않다.[11] 이튿날인 12월 12일 손화중의 남동생 손익중(孫益仲, 1864. 8. 16 ~ 1894. 12. 12)[12] 또한 고창현에서 체포된 뒤 정읍현으로 옮겨져 처형되었고, 12월 27일에는 사발통문의 서명자 중 한 명인 17촌 지간의 족질(族姪) 손여옥(孫如玉, 1860. 8. 19 ~ 1894. 12. 27)[13]나주목에서 체포된 뒤 정읍현에서 처형되었다. 1895년 1월 7일에는 처남 류용수가 흥덕현 관아에서 처형되었고, 이 밖에도 1895년 3월 23일 9촌 삼종질(三從姪) 손순경(孫順京, 1867. 10. 14 ~ 1895. 3. 23)[14]이 처형되고 또 다른 족질 손무경이 처형되는 등 동학농민운동에 함께 가담한 친지들이 대거 죽거나 흩어졌다.

이후 손화중은 일본군에 인계되어 나주목의 호남초토영(湖南招討營)에 압송되었는데, 이때 나주목사 겸 호남초토사로 있던 민종렬(閔種烈)에게 손화중이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을 '소인'으로 칭하자 함께 투옥되어 있던 전봉준이 "진실로 짐승 같은 놈"이라며 사람을 잘못 보고 거사를 꾀했다며 손화중을 질책한 일화가 전한다. 그 뒤 한성부로 압송된 뒤 동학농민운동을 지도했던 같은 지도자급의 동지인 전봉준, 최경선(崔慶善), 성두한(成斗漢), 김덕명(金德明)과 함께 1895년 3월 29일 교수형선고받았고, 이튿날인 3월 30일 한성부 서부 반송방(성외) 지하계 금계동 무악재 아래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쳤다. 사후 참수되어 효수형에 처해졌다.

3. 여담


[1] 화중(華仲)은 본래 그의 자(字)이다.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1895) 3월 29일 기사에서는[2] 목사공(牧使公) 휘 책(策)파 42세 식(植) 항렬.[3] 밀양손씨대동보 권10 333쪽에는 1862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4] 음력 3월 30일.[5] 출처1출처2 키가 9척 장신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척 단위인 30.3cm로 계산하면 273cm가 나오지만 손화중의 키를 표현하는 9척은 당시 조선 후기 시대의 척 단위인 30.3cm가 아닌 조선시대에 쓰였던 척 단위 중 하나인 주척(20.8cm)을 사용하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주척인 20.8cm을 쓸 경우 187cm 정도 현실적인 수치가 나온다. 주척으로 계산한 키도 저 당시의 남성 평균 키가 161cm였음을 감안하면 당시에는 엄청난 장신이다.[6] 채홍일(蔡弘一)의 딸이다.[7] 류기린(柳其麟)의 딸이다.[8] 초명 류연도(柳然道), 자는 공선(公先) 또는 성오(星五).[9] 초명 손득조(孫得早), 족보명 손성태(孫聖泰).[10] 손응수의 차남 손홍렬(孫洪烈, 족보명 손이선(孫二宣), 1935. 6. 5 ~ )의 증언 또한 이와 거의 같은데, "(관군들이) 백부님(손홍렬의 백부, 곧 손병두)가 고창서 잽했으니 니(손화중)가 자수를 안 하면 너희 아들을 대신 처형을 하겠다"고 하니까, (손화중이) 재실지기에게 "그대는 사람을 데리고 나를 체포한 걸로 해서 니가 나를 손목을 잡고 가라. 가서 신고를 하면 군수도 시키고 상금도 삼천인가 얼마 되니까 그거라도 타서 벼슬도 하고 살림도 해야 할 거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11] 이후 이봉우(李鳳宇)는 손화중을 밀고한 공로로 1895년 1월 14일 군무아문 주사(軍務衙門主事)를 거쳐 1월 29일 증산현령(甑山縣令) 등에 임명되었다. 이후 23부제가 시행된 뒤 증산군수가 되었으나 1896년 3월 22일 면직되었다.[12] 족보명 손형식(孫亨植).[13] 족보명 손성준(孫聖準).[14] 족보명 손성수(孫聖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