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22 11:46:28

시마즈 요시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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島津義弘 (しまづよしひろ)
1535년 7월 23일 ~ 1619년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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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가문의 상징. 말 입에 채우는 재갈이다.

귀신 시마즈
꾸이시만쯔(鬼石曼子). 중국어로 '귀신(꾸이)과 같이 두려운 시마즈(시마즈의 음차, 시만쯔)'.

임진왜란 당시 사천 전투에서 7천에서 1만으로 약 4만의 조명군을 격퇴한 뒤, 명군에서 '귀석만자(鬼石曼子)'라고 부르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일본에서만 그리 주장하며, 적어도 당대의 조선 사람들은 귀석만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고 한다(1763 계미년 조선 통신사 원중거의 저서 화국지에 나오는 부분).

1. 생애
1.1. 당주가 되기까지1.2. 임진왜란 참전1.3. 임진왜란 이후
2. 대중문화 속의 시마즈 요시히로

1. 생애

1.1. 당주가 되기까지

사츠마 시마즈 가 17대 당주. 시마즈 타카히사의 차남으로 큰형인 요시히사를 도와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규슈 통일에 힘쓴 무장.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도공을 끌고 간 것으로도 악명이 높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만 5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였고, 일본으로 귀환하면서 전라도 남원성에서 박평의(朴平意)·심당길(沈當吉)을 비롯한 80여 명의 조선 도공들을 납치하여 끌고갔으며 이 도공들의 후손들은 일본 3대 도자기이자 세계 도자기의 명품으로 이름난 사쓰마도자기를 굽는 심수관가(家)라고 불린다.

원래는 타다히라(忠平)였지만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이름을 받아 요시타카로 바꿨다가 요시히로로 바꿨다고 하며, 1554년에 게도인 요시시게, 이리키인 시게츠구, 가모 노리키요, 시카리 시게토요 등의 연합군과 이와츠루기 성에서 싸우는 것으로 처음 출전하여 적의 수급을 취했지만 5개의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1560년 3월 19일에 이토 요시스케의 공격에 시마즈 타다치카를 구하기 위해 그의 양자가 되었지만 1562년에 사츠마 본가가 간부 가문의 공격을 받자 귀환하였다가 오비 성이 함락돼서 양자 결연은 풀렸다. 키타하라 가문의 영지가 이토 가문에게 빼앗기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도왔지만 키타하라 가문 내부에 배반자가 나오자 마사키인(진행원)이 되어 이이노 성으로 향했으며, 1566년에 요시스케가 이이노 성 공략을 위해 미츠야마 성을 건설하자 시마즈 요시히사, 시마즈 토시히사 등과 완성하기 전에 공격했지만 부상을 입은 채로 패하면서 후퇴했다.

1572년에 휴우가키자키바루에서 요시스케의 대군으로 적은 병력으로 격파했다가 1577년에 요시스케를 휴우가에서 추방했으며, 1578년 미미카와 전투에서 참가하거나 공격하는 오오토모 일족을 격파했다. 1585년에 히고 국의 슈다이가 되어 아소 가문을 멸망시켰으며, 1586년에 오오토모 가문을 공격했지만 시마즈 가는 오오토모 가의 타카하시 쇼운의 분전 탓에 때맞춰 규슈를 통일하지 못했다.

1587년에는 오오토모 가문의 원군 요청을 받고 큐슈에 당도한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이끄는 도요토미군과 싸웠으나 패배했고, 이후에 장남인 요시히사(후의 류하쿠)가 은퇴하였으므로 요시히로가 뒤를 이어서 가독을 상속했다. 이후 요시히사는 후시미에 있는 저택에서 살았으므로 코에이 게임 등에서 둘이 함께 있는 것은 오류이며, 비록 요시히로가 가독을 이어받아 당주가 됐지만 히데요시의 강압에 의한 성격이 짙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신들은 아직 요시히사를 당주로 생각하여 형을 무시할 수 없었다. 요시히로의 아들 타다츠네도 요시히사의 딸 카메쥬히메와 결혼하여 시마즈 가의 당주가 될 수 있었고, 타다츠네의 후계자 역시 카메쥬히메가 결정했다. 카메쥬히메 자신은 자식이 없었으나 언니의 손녀가 낳은 타다츠네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정작 타다츠네 자신은 다른 아들을 더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1.2. 임진왜란 참전

덕분에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하기는 했어도 상당히 늦게 갔고 병력도 사쓰마, 휴가, 오오스미 삼국을 거느리는 다이묘치고는 적은 병력을 이끌고 갔으며, 1597년 7월에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수군과 제휴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을 격파했다. 8월에 남원성 전투에 참가했다가 부여까지 북상했다가 정읍을 지나 해남에 남하했다. 10월 말부터 사천을 수비하였다.

가토 기요마사울산(현재의 학성 터)에서 농성하며 처절한 모습을 보일 적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1598년 9월에 사천에서 명군을 대파했다. 시마즈군이 약 7천, 명군 및 조선군이 약 4만으로 추정된다. 당시 시마즈군의 보고서에서는 20만으로 기록되었던 듯하다. 결과적으로 약 3만 정도의 사상자가 났다고 한다. 어쨌거나 조선과 명으로서는 대패요, 일본측으로서는 대승이었던 바, 도쿠가와 이에야스조차도 '전대미문의 대승리'라 평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마즈 요시히로 측에서도 엄청난 손해를 본다. 가장 큰 손실이라면 사천 전투 전후에서 사랑하는 후계자이자 차남 시마즈 히사야스가 거제도에서 병사한다.[1] 사천전투 및 이후 조선에서의 요시히로의 엄청난 분전은 아무래도 이 영향도 있을 듯하다. 덕분에 삼남이었던 시마즈 타다츠네가 카메쥬 히메와 결혼하며 최종적으로 시마즈 가문의 당주가 된다.

어쨌든 이 공로로 명나라에서 '鬼石曼子(귀석만자, '석만자'의 발음이 '시만쯔'로, 시마즈와 비슷하다.)'라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 강건한 기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만 조선과 명에서 이를 두려워 싸움을 피했다는 건 순전히 일본쪽 주장이다. 도리어 석만자라는 같은 시마즈 지역의 왜장이 사로잡힌 일이 있었는데 이후 요시히로 즉 의홍과 동일인물인가 하는 질문이 왕조실록에 나오기도 한다. 명사에서도 石曼子란 왜장이 등장하지만 이쪽은 진린에게 패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鬼石曼子'라는 호칭이 나오는 것도 일본, 그것도 시마즈 가문 기록 정도고, 명과 조선에서는 그렇게 불렀다는 기록이 없다. 영조때 조엄과 함께 1763년 조선통신사로 파견되었던 원중거는 일본 측 사료와 조선의 사료를 비교 정리하여 자신의 저서 화국지(和國志)를 펴냈는데...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기록을 보고 귀석만자 鬼石曼子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 일본의 귀신 이름인가 라고 기록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조선측 기록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자주 나타나는 무장이다. 흔히 한자 이름 '도진의홍'이나 '심안돈(沈安頓)' 또는 심안돈오(沈安頓吾)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일종의 존칭인 '도노(殿)'를 성에 붙인 '시마즈 도노(島津殿)'를 음차한 것이라고 한다. 가고시마 사투리로 '도노'를 '돈'이라고 하는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표준어로는 '시마즈도노'이지만, 가고시마 사투리로는 '시마즈돈'이라고 한다. 비슷한 예로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사이고 다카모리(가고시마 출신)의 경우, 가고시마에서는 '사이고돈', '세고동'이라고 불린다.

조선 호랑이 사냥하면 유명한 인물은 가토 기요마사이나, 요시히로도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호랑이 사냥에 나서기도 했는데 당시의 기록화가 남아있다. 부하들을 이끌고 나갔다가 비가 내리는 통에 철포도 못 써먹고, 두 마리를 잡기는 했지만 인명피해는 피할 수 없어서 수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히데요시에게 호랑이 가죽과 고기를 바친 공로로 감사장을 받기는 했지만, 그 후로는 호랑이 사냥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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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출병 시마즈군 호랑이사냥도(朝鮮出兵島津勢虎狩絵巻)

11월에 노량해전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탈출시키기 위해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과 합세해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이순신진린이 이끄는 조명연합수군과 전투를 벌였다. 조명 연합 수군과의 노량 전투에서 막판에 진린을 구원하러 최전선에 몸을 드러낸 이순신이 혼전 중에 날아든 총탄에 전사하긴 했으나, 시마즈 또한 휘하 병력과 군선 대다수를 상실하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500여척 가운데 200여척이 침몰되고, 150여척이 대파, 100여척이 조명연합수군에 나포됐다. 살아 돌아간건 1/10정도인 50여척. 통상 근대 이후의 관점에서는 병력의 20~30%의 손실이 발생하면 단위 부대로서의 활동이 불가능하기에 전멸로 판단하는데, 손실율 90%라면 그냥 전력 자체가 증발한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하여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도주한다. 일본 영주들은 전투에서 패해 할복하는 경우는 많지만 전투 현장에서 전사하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무사들이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필사적으로 영주를 지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인이 유독 충성심이 강해서가 아니라 영주가 패해서 죽으면 휘하 무사들은 떠돌이 낭인이 되고 비참하게 생활하다 죽게 되기 때문이다. 조선에 파견된 일본 고위 무장 중에 전사자가 거의 없는 것도 이러한 일본의 사회 체제에 기인한다. 여하간 결과적으로 보면 해상봉쇄가 일시적으로 풀림으로써 일본군의 퇴로를 열었다는 점이 인정되어 전후 봉록을 받았다. 하지만 휘하 대다수의 병력이 궤멸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철수라고 보기는 힘들다. 간신히 목숨만 건진 도주라고 보는게 타당하다.

이 때의 피해에 대한 얘기는 노량 해전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1.3.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의 철수 후,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사츠마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후 시마즈는 사츠마, 휴가, 오스미 3국만을 인정받게 되는데 히데요시의 이간책으로 휴가는 요시히로에게, 오스미는 히데요시와 협상을 이끈 이주인 타다무네에게 주어졌다. 임진왜란에서도 다른 영지가 그렇듯 원하지 않았음에도 히데요시의 징병 압박에 시달렸고,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파병에 반대한 시마즈 요시히사와 히데요시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요시히로간의 반목도 시작된다. 또한 1599년에 이주인 타다무네가 반란을 일으키려 해서 미리 제거했고, 이 때문에 그의 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압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진다. 하지만 시마즈 요시히로가 처음 병사를 이끌고 간 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시미성 방어 지원요청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군을 동원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해서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해 버렸고, 후시미 성주 토리이 모토타다는 요시히로의 모반을 두려워해 입성을 거부한다.

천하의 정세가 정해지는 이 싸움에 참여해서 명분을 쌓고 이기면 콩고물을 얻어먹을 계획으로 그리고 오사카 성에 인질이 있어서 서군에 참가하기로 한다. 그래서 시마즈는 전투 내내 적극적이지도 않고 방관한다.

그러면서 본국에 지원요청을 하지만 요시히사는 들어주지 않았고, 시마즈 토요히사 등 수 백여명만이 가문의 뜻과는 별개로 각자 요시히로를 위해 달려와 줬다. 이렇게 모인 시마즈군의 규모가 약간씩 다른데 이 때문일 것이다. 보통 1500~1600명 정도로 본다. 이에 대해 요시히사가 요청을 들어줄 생각이 있었다고 해도 노량 해전 때 입은 피해 때문에 처음부터 병력 동원이 힘들었을 것이란 해석도 있다.

전투에서 시마즈군은 본진의 서쪽에 위치해 비교적 최전선에 있었지만 침묵한다. 초반에 우키다 히데이에가 분전해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일시 패퇴시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미쓰나리가 참전을 요구하는 사자를 보내자 말에서 내리지 않고 말했다는 게 군법에 어긋나고 시마즈를 모욕했다면서 죽이려고 달려들 정도였다[2]. 전황이 밀리자 미쓰나리가 직접 와서 부탁했지만 오늘 전투는 각 부대가 스스로의 힘을 다하여 싸울 뿐이외다. 승패는 하늘이 정할 터라고 대답했고, 계속 요청을 무시한다. 나중에 우키다 부대가 패퇴할 때는 자기네 구역을 지나서 퇴각하자 사격을 가해서 '자기편에게 총쏘는 머저리 같은 놈들'이라고 욕도 먹었다.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이 동군으로 배신, 서군은 패주하게 된다. 동군은 서군 본진으로 밀고 나가면서 시마즈군의 퇴로가 끊겼고, 시마즈군도 공격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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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요시히로는 자결을 결심했지만, 조카인 시마즈 토요히사가 설득해서 막는다. 다이묘인 대장이 죽는 것은 사츠마는 물론이고 당시 일본에서 절대 막아야 할 일이었다. 이에 시마즈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요시히로만은 탈출시킨다는 결론을 내리고 퇴각을 결심한다.

문제는 퇴로가 끊겼고 후퇴하려고 해도 앞 뒤로 도쿠가와 군에게 포위되었다는 것. 후방은 산이 가로막혔고, 거기에 사츠마로 돌아가더라도 오사카에 있는 인질들도 구해서 가야 했기에 빠르게 가야 했다. 이에 시마즈군은 적진을 돌파해서 이세 로(路)를 통해 귀환환다는, 앞으로 퇴각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적이 대부분 서군 본진에 가 있기에 의외로 전방이 병력의 밀도가 낮았던 점도 고려됐을 것이고 전쟁광 이미지인 시마즈군 특유의 정신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시마즈군은 깃발을 버리고 부대표식을 부러뜨린 후 모두가 한덩어리가 되어 징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동군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를 시마즈의 퇴각이라고 부르게 된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이들을 상대하지 않았고 차츰 동군 본진으로 오자 혼다 타다카츠이이 나오마사는 이들을 포위하려 하였다. 이 때 시마즈군이 쓴 전술이 바로 가문 고유의 진법 스테가마리(捨て奸)였다. 본진이 도주하는 동안 수 명의 팀으로 나눈 저격수가 후미에 남아 추격해오는 적 부대의 지휘관을 저격하고, 저격 후에는 총을 버리고 적진에 뛰어들어 시간을 번다(이하 반복)는 진법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간벌기로 투입된 병사는 전사가 확실하기 때문에 인망이 없는 지휘관은 절대로 쓸 수 없는 전술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이 진법을 쓰는 와중에 이에야스의 본진 옆을 지나치기도 했다. 이 때 부하에게 시마즈 요시히로, 이번에 뜻하지 않게 적이 되어 싸우다가 지금 막 진압을 지나 본국 사츠마로 돌아가옵니다. 내 마음에 대해선 훗날 바로 말씀 올릴 것이외다라고 외치게 했다고 한다.

조카 시마즈 토요히사와 가신 쵸주인 모리아츠(長寿院盛淳)가 요시히로의 갑옷을 입고 카게무샤 역할을 하였다. 둘 다 전사했고, 모리아츠는 죽기 직전까지도 "시마즈 요시히로가 여기 있다!"고 외쳤다고 한다. 이렇게 적지에서 벗어났을 때, 병력은 50~80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도쿠가와 측에서는 이들을 막던 이이 나오마사가 저격당했고, 2년 후 상처가 악화돼 병사한다. 또한 나오마사의 사위로 함께 첫출전했던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吉)[3]도 저격당해서 나오마사가 죽은 후 얼마 안 돼 병사한다.

그리고 이들의 목숨을 바쳐서 요시히로는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이세로를 따라 이가성을 지나 오사카로 가서 인질을 구출했고, 세토 내해를 가로질러서 영지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도망가던 중에 같은 서군 소속인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만난다. 무네시게의 친부 쇼운이 시마즈 가문과의 전투에서 죽었기 때문에 무네시게가 복수를 생각한다면 80명밖에 없는 시마즈군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일전의 은원관계는 잊은지 오래입니다. 함께 힘을 합쳐 규슈로 갑시다'라며 대인배다운 태도를 보여 요시히로는 크게 감격한다. 이후 영지로 돌아간 무네시게가 주변의 나베시마, 구로다, 가토 등의 동군 세력에게 협공당하자 은혜를 잊지 않은 요시히로는 지원군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러나 출두명령을 거부하고 계속하여 군비증강에 힘쓰는 사츠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에야스는 시마즈 가를 치기 위하여 큐슈의 다이묘들에게 '사츠마 토벌'을 명하긴 하였으나 건재한 시마즈 가는 심히 부담이 되었고, 또한 싸움이 장기화될 경우 각 다이묘들의 불만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1주일 만에 철회하게 된다.

시마즈 가문 또한, 원래부터 요시히로를 당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고 세키가하라의 참전은 요시히로의 독단이었지 시마즈 가문 전체의 뜻은 아니며 요시히로 본인도 오사카 성에 인질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싸운 게 아니다. 탈출할 때만 용감해서, 이에야스가 그냥 보내줬으면 양측 모두 피해를 입지도 않을 상황이었다. 게다가 1,600명만 동원할 만큼 그리 서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은 아닌 만큼 용서해달라는 뉘앙스로 화의를 내비친다. 거기에 시마즈 가문 차원에서도 원래 요시히로가 지병으로 치매를 앓고 있다고 말했으며[4] 그래서 가문 내에서 돈을 들여 이 인간의 치매를 치료하고 있는 중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까지 말했다. 한마디로 제 정신이었으면 서군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필하는 발언이었다. 이 때 도움을 요청한 것이 이이 나오마사였다는 것이 참 특이하다. 헌데 그걸 받아준 나오마사도 대인배인 듯하다.

결국 이에야스는 시마즈 가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여 1602년, 시마즈 가에 대한 처분은 불문에 붙이고 요시히로에 대해서도 일선에서 물러나고 막부에 충성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결론이 내려지긴 했으나, 이는 이에야스가 죽을 때까지 마음에 두게 되어, 유언으로 '내가 죽으면 시신을 사쓰마쪽으로 향하게 묻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일단 요시히로는 아들 시마즈 타다츠네에게 당주 자리를 물려주고 뒤로 물러났다. 한편 타다츠네는 1609년에 류큐 왕국을 정복하여 종속시켰다.

이후 요시히사는 1619년에 85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말년에는 진짜로 치매에 걸려 식사나 화장실도 혼자서는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였으나, 가신이 출전의 소라고동을 불면 그 때 한정으로 제정신으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리 생존설에 단골로 등장한다. 오오노 하루나가, 사나다 노부시게, 키무라 시게나리 등이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함께 사츠마로 도망갔다고 하는데, 에도 시대 초기의 소설인 '사나다 삼대기'에도 등장하는 걸 보면 꽤 오래된 떡밥인 듯하다. 당시 오사카 등지에서 히데요리가 사츠마로 도망갔다는 동요가 유행했다.

2. 대중문화 속의 시마즈 요시히로

가고시마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스타 대접을 받지만 각종 매체에 나오기는 힘들다. 아무래도 센고쿠 시대 배경 창작물은 대체로 혼슈로 잡기 때문일 것이다. 규슈의 강자로 이름만 나오거나 세키가하라 전투를 다룰 때 잠시 등장하는 정도. 물론 강한 무장이라고 평가받고 게임에서도 정말 강하게 나온다.

NHK 대하드라마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한다는 소식이 자주 들리지만 매번 그걸로 끝난다. 아무래도 시마즈 요시히로의 주 활동 무대가 변방이기 때문에 일생을 망라하는 대하드라마 주인공으로 삼기 어려워서 그럴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또한 일본 대하드라마는 임진왜란 자체가 일본에서는 영 듣보잡 수준이라 임진왜란은 가급적 간략하게 표현하고 넘어가는 편이다. 즉 그만한 인지도가 부족해서라는 게 주 원인이다.

한편 일본에서의 관심도와는 별도로 임진왜란이란 소재 자체가 한일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제작진들도 상당히 조심스럽게 대할 필요가 있다. 한 예로 군사 간베에에서 임진왜란이 조금 비중있게 나왔고 간베에 자신도 조선으로 잠깐 넘어갔지만, 실제 역사에서 간베에가 전투를 치르진 않았다. 반면 시마즈 요시히로의 경우 다른 전투라면 어찌어찌 넘어가도 노량 해전은 반드시 넣어야 하는데 그 부담감은 더욱 커진다.

그래도 주인공 후보감으로는 계속 이름을 올리고는 있다. 2016년 구마모토 지진으로 큐슈가 큰 피해를 입어서 큐슈 부흥 분위기가 일본에서 불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2013년에 대하드라마로 도호쿠 배경인 야에의 벚꽃을 방영한 계기가 2011년 도호쿠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도호쿠를 부흥시키자는 여론 때문이었다. 2019년이 그가 죽은 지 딱 400주기 되는 해이니 나온다면 이 때는 주인공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2.1. 전국 바사라

시마즈 요시히로(전국 바사라) 참고.

2.2. 전국무쌍

시마즈 요시히로(전국무쌍) 참고.

2.3.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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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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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시리즈 내내 능력치를 놓고 보면 다치바나 도세츠큐슈 제일의 명장 1, 2위를 다툰다. 통솔과 무용이 우수하고 철포적성이 뛰어나서 자연스럽게 시마즈가의 주력이 된다. 반대로 다른 지역에서 시마즈가를 공격할 때의 최대의 위협이 되는 무장이다.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노부나가의 야망 천도에서는 모두 스테가마리 전법을 고유 특기로 들고 나와서 형제들과 함께 전법을 시전하면 오다가 철포나 스즈키가 철포 못지 않은 무식한 데미지를 뽑아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혁신까지만 해도 시마즈가에서 제일 통솔력이 높았지만 천도에서는 무용이 올라간 대신 통솔력 1위를 동생인 이에히사에게 내 주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A급 무장인 것은 사실이다.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서는 다시 젊어지긴 했는데...일러가 너무 간사해 보인다고 좀 안어울린다는 평이 많다. 시마즈 가문의 전국전에서 형제들과의 우애가 강조되고 시마즈의 퇴각도 전국전으로 만들어져서 주인공으로 동영상에 등장한다. 조카 시마즈 토요히사와 가신을 잃으면서 간신히 큐슈로 돌아오는 모습이 비장하다.

한국의 일부 노부나가의 야망 플레이 유저들은 이순신과 연관된 것 때문에 참수대상 1순위로 꼽기도 한다.

삼국지 12에서는 통솔 85/무력 96/지력 69/정치 66으로 등장 전법은 대타격이다.

2.4. 지휘봉의 행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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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신장 195cm, 비주얼 연령 55세, 취미는 낮잠, 좋아하는 것은 물고기다.

조카 시마즈 토요히사와 함께 참전했으나, 대 다이묘치고는 적은 병력과 소극적인 태도로 초반에는 적과 내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 받았다. 좀처럼 움직이기 어려우나 한 번 움직이면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잇따른 패전으로 서군 본진이 궤멸하자 퇴각할 준비를 하지만 이시다 미츠나리의 설득으로 적진을 돌파해 모리 군 진영으로 가는 미츠나리를 호위한다. 이때 미츠나리를 시험하려 "내가 도와주는 대가로 네가 내게 도게자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데, 미츠나리가 "자신은 대장이니 그런 건 할 수 없다"고 대답하자 좋다고 손뼉을 채댄다. 사실 시마즈 군은 애초부터 적진을 돌파하여 퇴각할 계획을 세우고 있기는 했다. 적진을 돌파하는 도중 조카 토요히사가 희생을 자처하고, 요시히로는 오히려 망설이는 미츠나리를 질책하여 모리 군 진영까지 무사히 도착한다. 그 후 마지막 전투까지 함께 싸워나간다.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이 승리를 거둔 뒤, 이 승리를 있게 한 조카 토요히사를 생각하며 몰래 눈물 짓는다.

'오니본탄'이라는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 시마즈의 고양이 중 가장 용맹하며, 과일 본탄(자몽의 일종)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지휘봉의 행방에서 유일하게 음성 지원이 되는 캐릭터.

2.5. 태합입지전

가문 제일 가는 용장에 정무, 지모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기본 통솔이 무려 94에 책사칭호가 부가통솔이 붙어 실질 통솔은 97. 제일 낮은 정무도 71이나 되고 시나리오에 따라선 조선과의 교역문서(정무+5)를 가지고 나와 뭐하나 꿀리는게 없는 만능형 다이묘. 전 시나리오에 출연하나 마지막 시나리오에서만 다이묘인게 아쉬울 뿐. 세키가하라 이벤트에선 나름 비중있는 전용이벤트가 존재하는데 시마즈가의 고민을 잘 살렸다. 처음 분기부터 니조성에서 서군에 붙을지 중립을 지키고 큐슈로 돌아갈지의 분기로 시작하여, 서군에 붙었을땐 전력을 다할지(호소카와와의 결전), 설렁설렁할지(역사대로)로 나뉘며 이 때 시마즈 군의 병력은 겨우 철포대 1500뿐에 사기마저 낮다. 5천 족경대의 호소카와와의 전투에서 패할 경우 당연히 서군 패배 & 참수. 승리하면 서군의 승리. 역사대로 갈 경우 위에서 언급된 적본진 돌파 이벤트로, 철포대 1500으로 사기충천 혼다 타다카츠의 족경대 4천을 뚫어야 한다. 이 루트에선 목숨은 건지지만 패할 경우 역사대로 조카인 토요히사가 사망한다. 그나마 태합에서 철포대는 사정거리가 워낙 사기에 시마즈군 장수들은 모두 철포기능이 좋기 때문에 비만 안온다면 총대장 점사를 활용할 경우 아주 어려운 전투는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다.

2.6. 십귀의 연

게임상 공식 히어로인 카자마 치토세와 절친하다고 한 설정의 인물로 등장.

성우는 히야마 노부유키.

2.7. 임진왜란 1592

4, 5회에서 등장한다. 3회에서 조선 출병 전 '히젠 나고야 성에 다른 영주들이 모이는 장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쳐다보자 감동한 나머지 '도요토미님이 날 보셨어! 날 명나라로 데려가 주실거야!'라는 매드맥스워보이스러운 대사를 지껄이는 영주가 있는데 초기에는 시마즈라고 잘못 알려졌다. 5화의 노량해전에서 역사대로 이순신과 전투를 벌이다가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1] 첫째 아들은 어릴때 병사했다.[2] 현대의 기준은 물론 그 때 당시의 기준으로도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참전을 거부한 것이다. 애초에 싸울생각이 별로 없었던 것.[3] 이에야스의 4남. 도쿠가와 씨가 아닌 마츠다이라 씨를 계승. 도쿠가와 이에야스 또한 원래는 마츠다이라 씨였다.[4] 사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보다도 일단 이렇게 우겨서 도쿠가와 가문에게 해명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