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05 21:22:03

칠천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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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 해전
漆川梁海戰
시기 1597년 8월 28일(선조 30년 정유년 7월 16일)
장소 거제도와 칠천도[1] 사이 해협
원인 원균의 자승자박(自繩自縛)
교전국 조선 파일:1280px-Flag_of_the_King_of_Joseon_(fringeless).svg.png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지휘관 원균
이억기
최호
배설
김완
배흥립
우치적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시마즈 다다유타
구키 요시타카
고니시 유키나가
병력 거북선 3 척
판옥선 120~130척
세키부네 60여 척
후속전선 1천여 척[2]
피해 거북선 3척 침몰
판옥선 60 ~ 70척 침몰[3]
세키부네 8척 침몰[4]
왜군 100명 전사
(가토 요시아키 왼팔 경상)
결과 조선 수군의 대패[5]
영향 조선 수군의 제해권 상실, 정유재란의 확전(擴戰).

1. 개요2. 이순신의 파직, 그 후3.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
3.1. 원균의 억지 출전3.2. 무능한 지휘관 곤장을 맞다
4. 전투의 전개
4.1. 7월 15일 : 왜군의 기습 공격4.2. 7월 16일 : 불타는 칠천량
5. 전투의 결과6. 패배의 원인?7. 경과 요약 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9. 기타10. 말말말

1. 개요

7월 18일, 맑음
새벽 나절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모레 전에 수군이 피습되어 통제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이 전사하고 수군이 궤멸했다."하였다. 들으며 통곡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난중일기 - 정유년(1597)

정유재란의 해전. 조선 수군이 대패한 수치스러운 전투로 한국 역사상으로도 비슷한 예시조차 없는 황당한 패배.[6] 이거 원균 무시하고 돌격했으면 이겼을 거다 물론 용인 전투, 쌍령 전투, 현리 전투와 같이 많은 군사를 말아먹은 전투는 있었으나, 그래도 이 세 전투는 아군의 규모만 컸을 뿐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규모만 큰 오합지졸이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적군에게 전술 / 전략적으로 와해되거나 모랄빵으로 무너지는 상황은 역사적으로 꽤나 흔한 일이다. 어이없는 패주이지만 용인 전투는 지휘권이 통합되지 않았고, 쌍령 전투는 전투 직전에 전투에 무지한 문관 하나가 무슨 약을 빨았는지 대뜸 지휘관을 참수해버리고 지휘권을 강탈했으며, 현리 전투는 긴급 징집되어 소총 사격만 몇 번 해 본 상태에서 끌려온지라 사실상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병력들이 참전했다. 따라서 이 전투들도 지휘권도 제대로 갖추고 병력도 최정예이며 무기의 질도 더 뛰어난 상태에서 한 방에 전력 대부분을 날려먹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칠천량 해전은 당시 최대 규모의 정예군이 전투를 치르지도 못하고 몰살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전쟁에 끼친 영향도 엄청났다. 원균이 칠천량에서 말아먹는 바람에 이전처럼 수군이 완벽하게 재건되지 못했고, 하마터면 호남이 뚫리고[7] 적이 서해안을 통해 '해상으로 보급하는' 사태가 벌어질 뻔했다.[8] 이후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상술한 최악의 사태를 막기는 했지만, 스스로도 하늘이 도와 이겼다고 할 정도로 매우 불리한 판세 속에서 싸워야 했다. 당시의 조선 수군이라면 공격하라고 명령만 해도 이길 수 있었는데, 원균은 아군이 싸우지도 못하고 학살당하도록 모든 전략을 틀어놓은 것이다.

원균이 최정예 병력을 어떻게 탕진했는지를 요약하면, 휴전 기간에 일본군에게 사기쳐서 욕을 먹고, 비무장 수송선을 추격하다가 해류에 병력이 떠내려가고, 병력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면서 개죽음당하게 하고, 함대 120여 척이 적선 60여 척에게 얻어맞다가, 뜬금없이 병력을 막다른 지형에다가 상륙시켜서 전멸당했고 절반만 살아남아 도주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과 일본 양쪽의 기록에서 모두 별다른 차이가 없다(...).

2. 이순신의 파직, 그 후

정유재란으로 일본군이 다시 진주한 가운데, 평소 가토 기요마사와 으르렁대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눈엣가시를 남의 손 빌어 처리하자는 생각으로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간첩질을 하던 이중첩자 요시라를 경상 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 '가토가 바다 건너서 온다니깐 빨리 처리해.' 하는 정보를 흘렸다.[9] 요시라를 시켜서 김응서에 준 편지에는 대놓고 '이 사실은 절대 비밀로 지켜야 한다. 내가 가토를 제거하려고 하는 걸 태합이 알면 내가 무사하지 못하니까 내가 가토에게 직접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에 너네들에게 부탁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적었다.

김응서는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상부에 보고했다. 권율은 소식을 접하고 조정에 알린 뒤, 동시에 이순신에게 빨리 출전해서 바다 건너오는 가토를 잡으라 명령했지만... 권율이 직접 달려와서 한산도에 명령을 내렸을 때 이순신은 마침 전라좌수영의 공무 차 여수에 있었다. 게다가 풍랑이 들어 바로 한산도로 돌아가지 못해 남해도에 있던 차에 가토가 도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첩보를 흘린 때는 1월 11일, 육로로 보고된 때는 13일인데, 이순신은 1월 10일에 이미 가토가 가덕도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즉 요시라는 이미 가토가 바다를 건너온 상황에서 '헐 가토 건너오기 전에 막아야 함'이란 떡밥을 흘린 것(...). 여기에, 김응서의 보고가 한양에 도달했을 때는 1월 19일이라 이미 가토는 가토는 부산에 도착한 뒤였다. 이러니 조정에서부터 가토를 잡으라는 명령을 받았어도 '가토가 이미 도착했는데요.' 하는 보고를 올릴 수밖에 없었고, 조정도 이해했다. 이때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이후 조정은 '비록 가토가 이미 상륙한 뒤지만 어쨌든 해상으로 압박을 주면 다른 부대는 함부로 못 건너올 것'이라는 논리로 부산포 공격을 지시했고, 이순신은 마찬가지로 충실히 복종해 부산포까지 가서 일대를 들쑤셨다.[10] 이때까지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1월 21일, 선조는 '이순신이라서 못 잡은 것임. 나라면 잡을 수 있었음.' 하는 내용으로 원균이 올린 장계를 받아보더니, 23일에 갑자기 ''''그때가 하늘이 준 기회였는데 가토를 왜 안 잡았냐?' 하면서 뜬금없이 광분했다.[11] 이런 의심병은 바로 전해(1596)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기 때문에 더 심해졌다. 의병을 모집한 후 나라를 전복시키려던 반란을 겪은 뒤, 선조는 나라를 구한 무인들이 백성들에게 인망을 얻으면 '그들이 병력을 이끌고 나라를 전복할 수 있다.'는 편집증에 가까운 경계심을 품었다. [12] 이에 무인들을 철저하게 압박했는데, 이런 이유로 희생된 인물의 대표 격이 이순신과 김덕령이다. 사실 조선이 세워진 계기 또한 이성계라는 걸출한 무인이 백성들의 인기를 등에 업고 나라를 엎어버린 것이라 걱정할 만했다.

문제는 그 히스테리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려댔다는 점이다. 그 결과 2월 4일, 사헌부에서 선조의 눈치를 보며 이순신을 탄핵했고, 선조는 딱 이틀 뒤[13]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하고 도성으로 압송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2월 26일,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었다.

3.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

전임 이순신은 배 134척과 수군 병력 1만 7천여 명, 군량미 9914석, 화약 4천 근, 여분의 총통 300자루 등을 후임 삼도 수군 통제사 원균에게 넘긴 후 2월 26일 서울로 압송되었다. 혐오하던 이순신을 내쫒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자기도 능력이 있다고 보여주고 싶어했다.

원균이 얼마나 이순신을 질투하고 혐오했는지를 묘사한 기록이 있다. 조선 중기 유학자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은봉전서(隱峰全書)에선, 안방준의 숙부인 안중홍의 처가 원균의 집안 출신이어서 막 통제사가 된 원균이 안중홍을 찾아와서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원균은 "제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라고 대놓고 말하였다. 안중홍은 "적을 무찔러서 이순신보다 더 큰 공을 세워야 진짜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지, 겨우 이순신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소?" 하고 지적했다. 원균은 "멀리서 싸울 땐 편전을 쓰고, 가까이서 싸울 땐 칼과 몽둥이를 쓰면 됩니다." 하고 대답했다. 조선 수군 전체를 총지휘하는 통제사란 자가, 어떻게 싸워서 공을 세우겠느냐는 질문에 겨우 '활 쏘고 칼 휘두르면 됩니다.' 하고 대답한 것이다. 원균이 돌아간 이후 안중홍은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 일을 하기는 글렀다. 조괄기겁도 저 따위는 아닐 것이다." 하면서 크게 탄식하였다. 참고로 조괄과 기겁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서 유명한 졸장들이다. 즉 원균의 친척조차 '저 사람은 제대로 싸울 능력이 없다. 분명 일을 크게 망칠 것'이라고 대놓고 비판한 것이다.
  • 참고로 이순신이 원균에게 인계한 이 병력과 물자들은 대부분 이순신이 중앙 정부의 어떤 지원도 받지 않고 만들어낸 전력이었다. 실제로 이순신은 중앙 정부에 손을 벌린 일은 (조정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관리들의 인사이동 건들을 제외하면) 역병이 돌아 병사자가 상당수 발생하자 의원을 보내달라고 했던 것뿐이었다. 이런 병력을 원균이 칠천량에서 허비하고 난 뒤, 이순신이 복귀해서 노량해전 때까지 이 악물고 재건한 병력은 이 때의 70%에 불과하다.(전선 85척, 병력 1만 6천여 명.) 병력은 어찌 모을 수 있었지만, 정작 이들이 탈 군선은 채울 수 없었던 것.

    이것 외에도 군량미조차 중앙 정부의 지원 없이 모두 모두 둔전, 통행증 발급 같은 정책으로 채워넣었고, 흑색화약을 제조할때 필요한 염초도 자체적으로 만들어냈다. 심지어 조선 조정이 물자 부족으로 종이가 모자란 지경에 이르자 이순신은 직접 종이를 중앙 정부에 바치기도 했다. 물자 면에서 중앙 정부의 손을 빌린 건 최전방 환경에서 구할 방법이 없던 석류황을 보내달라고 부탁한 것 뿐이다. 그러나 이런 이순신에게 조정에서는 도움을 주긴커녕 수군의 돈줄인 우수영 관할 소속 14개 고을 중 무려 9개 고을을 육군 소속으로 징발하는 짓까지 했다. 이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사변 초기부터 수군 소속 고을의 군량을 육군에서 징발하거나 명나라 군사 뒤치다꺼리하느라 써버리는 막장에 이르렀다. 즉 정부가 군대를 지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군대가 정부를 지원했다(...).

    원래 군대가 생산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되어서 정부의 지원을 받아야 유지가 된다는 점을[14] 고려하면 그 군대의 지원을 역으로 받아먹었던 조선 조정의 무능함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원균이 통제사가 되자 선조는 원균을 못 밀어줘서 안달이 났다. 이순신과는 정반대로 도원수 권율의 육군 부하들을 빼서 원균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이순신이 1593년 11월 17일자로 보낸 <연해안의 군사와 양곡과 병기를 전부 수군에 소속시켜 주기를 청하는 장계(請沿海軍兵糧器全屬舟師狀)>[15]에서 '지난번 장계에 해군력 증강 계획안을 보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전라 좌도에 고을 5개, 우도에 14개 고을이 있었는데 9개 고을이나 육군에 전속시키고, 그것도 모자라서 수군 소속 고을에서 군량미까지 계속 징발하고, 경상우도 연해안 고을은 다 털리고 백성들은 숨어 사는데 수군이랑 육군이 병력 뽑겠다고 착취하고, 충청도 애들은 몇 번이나 도와달라고 했는데 오지도 않고 진짜 답답하고 걱정된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느그들처럼 매사를 임시 땜질식으로 처리하다가 또 망하면 어떻게 되돌릴 건데?' 하는 내용으로 항의했다. 상기한 물자들은 조선 정부의 행정적인 문제가 터지는 와중에도 피땀 흘려 어렵게 만들어낸 물자들이다. 이후 이 9개 고을은 저 물자들을 모두 말아먹고, 명량해전 이후에야 조선 정부에서 수군 육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1597년 12월 25일 수군 소속으로 돌려줬다. 하지만 임진왜란 초 이순신이 주장했던 해군력 증강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간 데다 기껏 모아놓은 건 날려먹었으니 말 그대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일 뿐이었다.

1597년 3월 9일, 거제도 기문포에 왜선 3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원균은 말아먹을 생각에 신이 나서. 군사들을 이끌고 나갔다. 당시가 휴전 기간이었기에 항왜를 보내 술과 먹을 걸 줘가면서 안심시킨 뒤 돌려보내나 싶더니 뒤를 쳤는데, 일본군에게 반격을 받아 그만 임란 최초로 해상에서 판옥선 탈취를 당했다. 판옥선 안에 실린 화포와 화약, 기타 무기는 덤. 결국 그 판옥선을 부숴버리고 왜구의 목을 쳐서 장계를 써 올리니 선조매우 기뻐했다(...).
통제사 원균(元均)이 임명을 받자마자 곧 무용(武勇)을 떨쳐 적선 3척을 포획(捕獲)하고 수급(首級) 47급을 바쳤으니 매우 가상하다. 원균과 공이 있는 사람을 즉시 논상(論賞)하고, 혹 관원을 보내 호군(犒軍)하여 장사(將士)들을 격려할 일을 의계(議啓)하라. 그리고 적의 수급과 계본(啓本)을 가지고 온 사람도 아울러 참작하여 논상할 것으로 비변사에 말하라.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3월 25일 2번째 기사##
참고로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피해는 고성 현령 조응도와 병력 140여 명이었다. 고로 왜군보다 아군의 피해가 더 크다는 소리(...)

당연히 왜군은 '아직 휴전 기간인데 이렇게 뒤통수 치는 게 어딨냐!' 하고 항의했고 조선 조정은 당황했다. 결국 원균에게 줄 포상은 없던 일이 되었다.

이후 원균은 선조의 기대대로 이순신과는 다른 행보를 걸었다. 작전은 고사하고 이순신이 만든 조선 수군의 작전회의실 운주당(運籌堂)에서 기생을 불러다 술을 퍼마시기도 했다(...) 선조는 이를 보고 나서야 이 자의 문제점을 깨달았는지 '너 부산 언제 공격할 거냐?' 하고 압박했다. 원균은 당장 부산포를 때려 부수겠다고 할 때는 잊고 말을 바꿔 '저 혼자서 부산포 공격은 무리고 30만 조선 육군이 안골포, 가덕도를 쳐주시면 부산으로 달려가 적진을 모조리 소탕하겠습니다.' 하는 내용으로 답했다. 조선 육군의 병력 규모를 몰랐거나, 부산포 공격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해서 출정을 피하려 한 듯하다.

한편 조선 조정과 원균이 이러고 있을 때 왜군은 '왜 자꾸 조선 수군에게 패배하는지' 분석했고, 그를 토대로 새로운 전략들을 구상했다. 일단 조선의 판옥선은 일본의 함선보다 월등히 강력하니 판옥선 한 척 당 일본 배 4~5척이 빠르게 접근하여 화포를 장전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백병전을 벌인다는 것, 해군 대 해군으로는 승산이 없으니 육군과 합동해서 움직인다는 것, 어둠을 틈타 밤에 기습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칠천량 해전은 이러한 전략들을 모두 활용한 사례였다.

3.1. 원균의 억지 출전

하지만 조선조정에서는 원균에게 병력 5천 명을 지원하면서[16] '나가 싸워라. 안 그럼 뒈진다.'는 무언의 압박을 넣었다. 결국 6월 18일, 원균은 조선 함대 100여 척을 이끌고 부산포로 향했는데, 부산포로 가는 길에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안골포에서 적선 두 척을 빼앗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에 보성 군수 안흥국이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자 부산포는 코빼기도 보지 못하고 귀환했다.

조정에서 까라는 부산포는 까지도 못하고 지휘관이 전사하는 피해가 발생했으니 당연히 나쁘게 볼 수밖에 없었다. 원균은 출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1597년 7월에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경상우수사 배설 등 지휘관과 조선 함대 169척을 이끌고 출전, 7월 7일에 부산포 근처 다대포에 정박했다. 8일에 왜군과 첫 교전을 하여 왜 수군의 빈 배 8척을 불사르는 전공을 세웠다. 9일 서생포에서는 일본 수군이 공격하자 겁 먹고 도망가다가 판옥선 20여 척 가까이 상실하는 패전도 겪는다. 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칠천량 사태 직전까지 판옥선을 가장 많이 잃어버린 것이다.(...) 1592년부터 97년까지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지휘했을 땐 판옥선을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7월 14일, 원균은 부산포 앞바다에서 무력 시위를 하던 도중 일본 본토에서 오던 수송 선단과 마주쳤다.[17] 이때 수송선단이 꽁지 빠지게 줄행랑치자[18] 원균원래 미친 놈이라 이게 웬 떡이냐 하며 달려들었는데... 판옥선 12척이 해류에 떠내려가버렸다.[19] 비무장 적선을 잡겠다고 격군(노를 젓는 병사)들이 지칠 때까지 뒤쫓았다는 소리다. 현대 해군으로 비유하자면 구축함 수십 척이 적 수송함 몇 척을 뒤쫓다가 연료가 바닥나서 해류에 떠밀려 표류 끝에 전사자가 발생한 격이다.

원균은 이 출전으로 왜선 10척을 부수고 조선 배 32척을 잃는, (이순신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교환비로 교전한 뒤 한산도로 돌아왔다. 이전까지 원균은 전투 지휘관으로서 능력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전투야 많았지만 죄다 도망치거나 이순신이 다 해 주었으니까 이 전투에서 원균이 처음 보여준 능력은 향후 최악의 패전을 보여주는 복선이나 다름없었다.

3.2. 무능한 지휘관 곤장을 맞다

권율은 원균이 직접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을 두려워하여 지체하였다 하여 전령을 발하여 곤양(昆陽)으로 불렀다. 11일에 권율이 곤양에 도착하자 원균이 명령을 받고 이르렀다. 권율이 곤장을 치면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라 하고 곧 도로 보내었다. 이날 밤에 원균이 한산도에 이르러 유방(留防)하는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하였다.
《난중잡록》
원균은 물러나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권율이 고성(固城)에 있다가 원균이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며 격서를 보내 원균을 불러와서 곤장을 치고 다시 나가 싸우라고 독촉했다. 원균은 군중으로 돌아오자 더욱 화가 나서 술을 마시고 취해 누웠는데 여러 장수들이 원균을 보고 군사일을 의논하고자 했으나 만날 수 없었다. 그날 깊은 밤 왜선이 습격해오니 군이 크게 무너졌다. 원균은 달아나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해안에 올랐다.
《징비록》

이러한 원균의 작태에 분노한 도원수 권율은 직접 원균을 불러다가 곤장을 때려버린다. 다만 여기에서 기록이 서로 엇갈리는데,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7월 11일에 권율이 원균을 곤양으로 소환하여 곤장을 치자, 그날 밤으로 원균이 부산으로 출진했다고 한다. 반면 류성룡의 징비록에서는 가덕도에서 돌아온 원균을 고성으로 소환하여 곤장을 쳤고, 그날 밤으로 칠천량 해전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원균이 곤장을 맞은 것은 칠천량 해전 직전인 7월 15일이 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징비록의 신뢰도는 난중잡록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편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징비록은 칠천량 해전의 날짜부터 8월 7일로 잘못 기록했다. 이는 류성룡이 쓴 칠천량 해전의 정황이 피상적임을 보여준다.[20] ② 징비록을 일정 부분 참고한 선조수정실록도 원균이 곤장을 맞은 시점은 출진하기 전이라고 했다. ③ 조선 함대는 15일에 칠천도로 이동해서 그날 밤 붕괴되었는데, 이 한나절 사이에 고성까지 가서 매를 맞고 왔다고 보기는 시간이 빠듯하다. ④ 권율이 11일 어간에 곤양에 있었음은 난중일기로 방증되지만,[21] 15일에 고성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찌되었든 이는 해군참모총장이 장병들 보는 앞에서 합참의장에게 얼차려를 받은 격이라 원균에게는 참담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원균의 아들인 원사웅까지 같이 곤장을 맞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근거가 없다.[22]

권율이 원균을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 억지로 밀어넣었고, 따라서 권율에게도 칠천량 패전의 책임이 일정부분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미 당대부터 나온 지적이지만[23]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이런 주장에는 의문이 있다.

당시 조정이 원균에게 요구한 내용은 함대를 나누어서 해상의 적 보급선을 교란하라는 거싱었지, 죄다 이끌고 부산으로 몰려가 한 큐에 건곤일척을 벌이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곤장을 친 당사자인 권율은 물론이고, 심지어 선조마저도 당시 원균에게 그 정도 기대를 걸지 않았다.
도원수가 비밀 장계 한 통을 올렸다. (그 내용은 대강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세가 고단한 것은 원균이 말한 바와 같으나 섣불리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
『선조실록』 30년(1597) 5월 8일
가령 크게 싸우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배를 3등분해서 절영도 앞바다를 번갈아 오가며 뒤따라온 배가 이어가고 앞에 있던 배가 되돌아가게 함으로써 주사의 왕래가 끊이지 않게 하면 부산과 서생포에 상륙해 있는 왜적들은 모두 군량미 수송로가 끊길까 걱정할 것이고, 뒤를 이어 나오는 적선들도 반드시 두려워하고 주저하여 함부로 건너오지 못해서 마음대로 횡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적의 형세는 선두와 후미가 단절되어 우리가 도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5월 12일
신구(新舊)의 전선을 모두 합쳐 절반은 한산도 등에 머물러 있고 반은 운도 등처의 해양에 출몰하게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정박할 곳이 없기는 하지만 번갈아 교체하면서 끊임없이 왕래하면 형세상 반드시 피차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안골포 등처에 왜적이 있지만 본진의 선박으로 배후를 도모할 계책을 세울 수 있고 바다를 건너오는 적이 있더라도 해양의 선박으로 즉시 처치케 할 수 있으므로……
『선조실록』 30년(1597) 6월 10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비록 우리나라 수군이 오랫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낱낱이 소탕해 막지는 못하더라도 현재의 선박을 합쳐 몇 개 부대로 나누되 배설은 경상우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이억기는 전라우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최호는 충청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원균은 그가 거느린 선박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서 한산도를 굳게 지켜 근본을 삼고 부대별로 교대로 해상에 나가 서로 관측하게 해야 합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6월 26일
도원수 권율이 장계하길…… "이런 식으로 계속 번갈아 교대하며 뒤에 오는 자가 나아가고 앞에 간 자가 돌아오면, 그곳의 적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바다를 건너지 못할 것이고 혹시 돛을 달더라도 파두(波頭)에 부서질 것이니, 이곳에 있는 적들의 형세가 고단해지고 양식이 떨어져 진퇴가 궁색해질 것입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6월 28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병이 비록 해안에 나누어 점거하고 있으나 군량을 조달하고 병사를 보충하는 길은 바다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주사(舟師)를 적이 무서워하니 부대를 나누어 번갈아 나가 바다에 왕래하면서 적의 보급로를 끊는다면 이는 곧 적의 허점을 공격하는 것임과 동시에 요해처를 장악하는 것이니 현재의 계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7월 10일

그러니까 곤장을 맞은 뒤 원균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홧김에 전 함대를 이끌고 출진해버린 것이다. 원균은 이후 부산 가덕도에 도착해 물을 싣기 위해 수군 400명을 보냈다. 그런데 가덕도에 다카하시 나오쓰구가 이끄는 왜군이 있어 기습을 받자, 원균은 병사 400명을 가덕도에다 버리고 도망가버렸다! 버려진 병사들의 운명은(...)
  • 참고로 이러한 모습은 원균이 그토록 증오하던 이순신과 180도 다르다. 1597년 2월에 있었던 이순신의 부산포 출전 당시 가덕도에 물 길으러 갔던 조선 수군 5명이 왜병에게 붙잡히자 배 62척과 김응서의 육군 병력을 동원해 가덕 왜성에 무력시위를 했고 이러자 요시라가 직접 내려와 포로들을 돌려준 적이 있다. 이순신이 군율을 심하게 잡는 데도 존경을 받는 덴 이렇게 병력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던 점이 크다. 그에 비하면 400명을 버리고 도망간 원균은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능력한가.

한편 도주한 원균은 가덕도에서 거제도 북쪽에 위치한 영등포로 이동했으나 이곳에서 또다시 일본 수군의 공격을 받았다. 육지에 진을 치지 못하고 쫓겨난 원균의 조선 수군은 다음날인 7월 15일, 영등포 일대가 비바람이 몰아쳐 더이상 배가 정박하지 못하게 되자 폭풍우를 헤치고 칠천량으로 향했고[24] 그곳에 정박하며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조선 수군의 무덤이 될 줄은...

4. 전투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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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원균의 삽질로 병력을 찔끔찔끔 잃다가[25] 이렇게 된 이상 육지로 도망가자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려 수군이 흩어졌다. 적에게 습격당해서 전멸한 게 아니다.[26] 조선 수군의 압도적인 군세가 제대로 된 교전 한번 없이 그냥 증발한 셈. 이순신이 차린 밥상에 자기 숟가락만 얹어도 될 텐데, 숟가락을 얹기는커녕 아예 밥상을 엎어놓은 셈이다.

4.1. 7월 15일 : 왜군의 기습 공격

칠천량에 진을 친 후 원균은 그때까지 삽질 경과로 의욕을 잃자 술만 퍼마실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27] 이때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동태를 지켜보다 기회를 눈치채고 칠천량으로 몰려갔다. 이순신에게 늘 패배하기만 했던 도도 다카토라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있는 배를 다 긁어모아 칠천량으로 향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육군도 칠천량으로 갔다.

7월 15일 밤 10시, 조선 수군의 군량선에 불이 났다. 이는 일본 수군이 벌인 짓이었는데 조선 수군 함대가 기습을 당해 배가 불탄 적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지휘관인 원균이 만약 제정신이었다면, 주위를 더욱 철저히 경계하라고 명령했을 테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7월 15일, 왜장이 날랜 군졸들을 모집해 작은 배를 타고 우리 군사와 함대의 동태를 살폈다. 우리 병사들이 잠에 취해 코를 골고 있었으므로 적들이 포 두발을 발포했다. 우리 군사들은 몹시 당황하여 닻줄을 끊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자 적들이 병선을 타고 일거에 진격, 한산도가 마침내 무너졌다.
《해상록》

4.2. 7월 16일 : 불타는 칠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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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 해전도. 거제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에 위치.
군량선에 불이 붙은지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7월 16일 새벽 4시. 일본군이 조선 수군을 향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28] 원균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비해 전력 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원균을 비롯한 지휘부는 아무것도 몰랐다.
밤중에 적이 가만히 비거도 10여척으로 우리 전선 사이를 뚫어 형세를 정탐하고 또 병선 5척 ~ 6척으로 우리 진을 둘러 쌌는데, 우리 복병선의 장수와 군사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이미 복병선은 적에게 불태워 없어졌다. 균이 놀라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고 불화살을 쏘아 변을 알리는데 문득 각 배 옆에서 적의 배가 충돌하여 총탄이 발사되니 군사들이 놀라서 실색하였다.
《난중잡록》

이 말인즉슨, 일본군이 조선군 진영을 휘젓고 다녀도 아무도 모르는 지경이었다는 소리다!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소리냐면 군대에서 초병 세우고 주기적인 정찰을 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에 가까운 것이다. 난중일기나 이순신의 장계에서 허구한 날 탐망선을 띄웠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게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이상한 것은, 원균 같은 똥별 말고도 이억기나 최호 같은 개념인들도 있었으나, 이런 실수를 할 위인들이 아님에도 뚫렸다는 것. 난중일기에서 좌수영 본영의 진흥국이 백의종군 상태인 이순신에게 찾아와 원균이 못되게 군다고 눈물을 뿌리며 이야기했음을 감안하면, 원균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막대한 불이익을 주었고, 이 때문에 이억기나 최호 등의 명령권이 극도로 제한되었을 수도 있다.[29]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맞서 싸웠으나 기습공격으로 당황한 채로 교전하여 싸움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김완의 《해소실기》에 따르면 초반 배 2척이 기습공격을 하자 조선 수군의 절반이 도망갔고(...) 나머지 절반은 원균이 직접 군관 김대복을 보내 후퇴를 명령했다고 한다. 급박한 상황이긴 했으나 지휘권이 가동되기는 했다는 소리다. 어쨌든 원균은 후퇴 명령을 내렸지만 기습해 온 적선이 단 두 척밖에 안 된다는 김완은 거부했고 아군이 계속 본진 쪽으로 후퇴하여 김완의 함선은 결국 점령당한다. 이때 김완은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에 사로잡혔다. 훗날 일본군에게서 도망쳐 돌아온 김완이 《용사일록(龍蛇日錄)》[30]에서 이 상황을 회고하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十六日五更, 賊雲集, 放砲夜驚. 我舟師已蒼黃擧碇, 疾者先出溫川, 鈍者未及出, 賊已回擁 (中略) 主將失措諸船已潰, 一半北于鎭海, 一半奔于巨濟. 時余獨掉後船鼓角促旗. 南渡浦萬戶姜應彪·會寧浦萬戶閔廷鵬·助羅浦萬戶鄭公淸·海南代將·江津大將等各從水使已走遠洋. 余獨與軍官·射夫及奴子, 放砲齊射, 殊夗力戰, 一倍厮殺之. 際勢甚孤弱, 揮旗馳進, 主將謝曰 "令公奮戰之力, 甚多也." (中略) 主將曰 "李億祺·崔浩不知去處. 惟令公戮力捕捉, 夗而後已." 聽訖回視, 賊船二隻已近百武之間. (中略) 余亦左脚中丸, 危怕之際. 高聲疾呼曰 "主將! 主將! 胡不出救!" 主將元均醉酒, 高臥號令, 軍官金大福片箭十餘射. (後略)
7월 16일 5경에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포를 쏘아 한밤을 놀라게 했다. 우리 수군은 이미 어찌할 수 없이 매우 급하게 되어 배를 멈추니 날랜 자들은 온천(溫川)으로 나아가고 둔한 자는 미처 나가지 못해 적에게 포위되었다. (중략) 주장(主將)은 명령체계를 잃어 모든 배가 무너지니 반은 진해에서 패했고, 반은 거제도로 달아나게 되었다. 이때 는 홀로 뒷배에서 호위하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재촉하였다. 그러나 남도포(南渡浦) 만호 강응표(姜應彪), 회령포(會寧浦) 만호 민정붕(閔廷鵬), 조라포(助羅浦) 정공청(鄭公淸), 해남대장(海南代將), 강진대장(江津大將) 등은 이미 수사 원균을 따라 먼 바다로 도망가버렸다. 나는 혼자 군관(軍官), 사부(射夫), 노자(奴子)와 함께 일제히 대포를 쏘면서 사살하고 죽을 각오로 있는 힘을 다해 싸워 서로간에 많이 죽었으나 형세가 심히 허약하였다. 지치지 않고 깃발을 휘날리며 진격해 나아가 주장(主將)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분발하여 싸우는 힘이 심히 크다."라고 했다. (중략) 주장이 말하기를 "이억기, 최호가 간 곳을 모르고 영공만이 죽을 힘을 다해 적을 사로잡고자 하니 죽은 뒤에야 그만 둘 것이냐"[31]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적선 2척이 이미 50보 이내로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중략) 나 역시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 위태하고 두려운 시점이었다. 큰 소리로 급히 "주장! 주장! 어찌 나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이오!"하고 불렀다. 주장 원균은 술에 취해 높이 누워 호령만 하고, 다만 군관 김대복(金大福)이 편전 10여 발을 쏘았을 뿐이다. (후략)
김완,『해소실기』 《용사일록》 출처

다시 말하자면 이때 후퇴는 정상적인 명령으로 작동했다는 것.

그리고 2척의 병력이 기습한 이후 본격적으로 참전한 적은 도도 다카도라의 병력으로 50척이 채 되지 않았다.
요시아키가 창과 포로 무장한 한 척의 거함에 뛰어 올라 몇 사람을 참수하자 적(조선 수군)이 그를 공격하려고 했다. 요시아키의 조카 곤시치로 등이 분전하여 드디어 배를 빼앗았다. 요시아키는 또 적의 별선에 뛰어오르려 하다 발을 헛디뎌 바다로 떨어졌다.
《정한휘보》 권4 30면

위와 같이 일본군의 전술은 군선의 돛대를 사다리로 이용해 전선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는 것인데 이 때문에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는 배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기록상 싸우다가 자결했는지, 아니면 정말로 전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보통은 자살 행위를 연상할 정도로 처절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보는 편이다. 배설은 적선 8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적선의 수가 너무 많아 결국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자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각 수사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고 전 수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칠천량 해전에서 포로로 잡혔던 김완의 해소실기에 나온 내용으로, 최소한 전투 초반 지휘 체계는 정상적으로 작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조선 수군이 한산도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통념상 칠천량 해전은, 아래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묘사한 것처럼 이 칠천량 해역의 전투에서 왜군에게 공격을 받아 조선 수군 전체가 그 자리에서 섬멸당하고 이후 명량 해전 때 참전한 판옥선 12척만이 간신히 도주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 수군의 주력 함대는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전력을 유지하였다.

위의 해소실기의 내용처럼 16일 오전 8시쯤 조선 함대가 양갈래로 나뉘었고 한쪽은 진해만으로, 한쪽은 거제도 해안을 타고 서남쪽으로 한반도를 향했다. 이 서남쪽으로 도주한 함대가 배설을 위시로 한 훗날 합류하는 함대로 추정한다. 하지만 원균 등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주력 함대는 죄다 진해만으로 달려갔고 그 결과...

최고 지휘관이 워낙 막장이었던 탓에 일본군의 공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면서 한산도가 아닌 고성현 춘원포[32]로 도망갔다. 여기서 원균이 지상에 내려서 도망치자는 결정을 내려, 이순신이 힘들여 쌓아놓은 조선 수군을 제대로 교전 한번 해보지 않고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차라리 원균이 한산도로 퇴각해 견내량을 틀어막고 버티기만 했어도 이 정도의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원균의 명령을 듣지 않고 각기 도망치거나 아예 지휘권이 붕괴된 상황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견내량은 막히지 않았고 한산도로 충분히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원균의 지시로 조선 수군을 퇴각조차 할 수 없는 춘원포로 다 몰았으니. 이 시점에 수군 지휘관들 상당수가 원균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하고 도망쳤기에 절반은 살아남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원균과 함께 전멸당했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명 ∼ 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선전관 김식의 보고. 《조선 왕조 실록》 선조 30년 7월 22일 2번째 기사##
넓은 바다라면 패전하였더라도 혹 도망하여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렇지 않아 비좁은 지역에 정박하였다가 갑자기 적선을 만나 궁지에 몰려 하륙하였으니 대체로 전군이 패몰되었을 것입니다.
선조 30년(1597년) 7월 21일 살아남은 병사가 없냐고 묻는 선조에게 이항복이 대답한 내용.

누누이 말하지만 차라리 원균이 맛이 가서 그냥 군대가 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졌으면 대다수가 무사히 도망쳐 나중에 수습할 여지라도 있었지 원균이 군대의 절반 이상을 춘원포에 꼴아박은 덕에 조선 수군이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순신이 엄청난 노력 끝에[33] 만들어 놓은 최정예의 조선 함대와 수군이 그저 왜선 50척이 기습했다고 와해되었고,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 1천 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 본 함대가 칠천량에 도착했다. 이들이 춘원포에 고립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가토 기요아키는 약간 뒤에 도착했는데 전투는 이미 한참 전이었다.
《정한휘보》

그나마 본 함대가 도착했을 시점에는 이미 삼도 수군의 절반 이상이 전장을 빠져나간 뒤였기에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5. 전투의 결과

이 일은 어찌 사람의 지혜만 잘못이겠는가. 천명이니 어찌하겠는가.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7월 22일 3번째 기사##.
  • 칠천량 패전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 이후의 수습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 중에 선조가 했던 말이다. 쉽게 말해 '칠천량 패전은 원균 잘못이 아니라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패전의 책임이 원균에게 있다면, 잘 싸우던 이순신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원균을 앉힌 선조 또한 책임이 있다. 물론 왕에게 책임을 지라고 말할 신하야 없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위신이 깍인다. 그러나 원균에게 잘못이 없고 패전은 단지 운이었다고 말함으로써 자기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얄궂게도 명량대첩 후에 이순신은 "하늘이 도왔다.(此實天幸)" 하고 전투를 평했다. 두 사람이 비슷한 말을 했는데, 전혀 느낌이 다르다.

선조가 처음 패전 소식을 듣고 '한산을 지키면서 호랑이가 버티는 듯한 형세를 지키며 우주방어 했어야 하는데 괜히 출동해서 졌으니, 이건 사람이 아니라 하늘 때문이다.' 하는 내용으로 말했다. 그런데 괜히 출동하여 적의 함정에 들어가지 말고 한산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순신의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을 한 이순신이 빨리 출동 안 한다고 처형하겠다며 길길이 뛰다가 결국 백의종군에 처하고, 그 자리에 원균을 꽂아넣은 책임자는 선조 자신이었다. 그 전에도 원균이 구원병을 요청하여 (요즘 말로 하자면) 큰 그림을 그렸다며 터무니없이 과대평가하고 이순신을 평가절하한 적이 수 차례 있었던 점 등도 함께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이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인해 정유재란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결코 빈말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정유재란은 1597년 1월에 시작됐고, 이 전쟁의 첫 회전(會戰)인 칠천량 해전은 동년 7월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 패배를 기점으로 정유재란의 전선(戰線)이 하삼도 전역으로 본격적으로 확대되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실패했던 수륙병진의 가능성이 열리면서 왜군이 한양을 노릴 수 있게끔 됐다. 한마디로 정유재란 초반의 국면을 결정지은 전투이다. 이 수륙병진은 임진왜란 때도 시도 되었던 작전인데. 실제로 파죽지세로 평양성까지 올라간 고니시 유키나가는 선조에게 '우리 수군이 곧 서해로부터 10만 명이 당도할 것이다. 이제 조선의 임금은 어디로 가시려나이까?' 하는 글을 보내서 겁을 주기도 했다. 실제로 했다면 순식간에 전쟁을 끝낼 만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고니시가 선조에게 글을 보내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한산도 대첩으로 남해의 제해권이 완전히 조선 수군에게 들어왔기에 불가능해진 작전이었다. 이후 이 작전은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괴멸되자 정유재란 초기의 왜군의 핵심 전략으로 채택되기도 한다.

조선 수군 함선 134척 중 절반 가까이가 살아남긴 했으나 대부분 개별적으로 후퇴한데다가, 한산도에 남겨둔 배, 또는 건조 중인 배가 다수 있었으나 적의 손에 넘기지 않기 위해 모두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끝까지 편제를 유지해 명량 해전 직전까지 수군에 남은 건 배설이 도망칠 때 끌고 간 12척 정도로 조선수군은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사실, 제대로 된 전투 없이 다 도망갔기 때문에 이억기, 최호를 제외하면 지휘관 급 전사자는 거의 없었으며, 병력 손실도 규모에 비해 적었고, 함선 또한 자세한 내용은 후술하겠지만 적어도 절반 이상이 살아남았다고 보는 게 맞다. 즉, 모두 죽었다기 보다는 지휘 체계고 뭐고 모조리 무너져서 뿔뿔이 흩어진 것. 실제로 "이때 한산도의 여러 장수들은 각자 도망쳐서 본도(本道)의 피란민 등과 함께 여러 섬으로 들어갔으므로, 공이 날마다 편비(褊裨)를 보내어 여러 섬에 통유(通諭)하여 흩어진 군졸들을 불러모으게 해서, 전함을 수리하고 기계를 준비하며 소금을 구워 판매하게 하니, 2개월 이내에 수만여 석의 곡식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장사(將士)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었다."(이항복, <백사집>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 라는 기록도 남아있다.



일본군 장계에 따르면 칠천량에서만 적선 160여 척을 탈취하거나 불태웠고 연안에 남겨진 전선들 또한 불태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합류한 전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는 과장된 면이 있다. 아마도 판옥선 외에 협선 등의 작은 배들까지 합산하거나 제대 장수들의 보고가 겹친[34]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장수(배설)가 전장에서 도망친 것은 다른 경우였다면 심각한 문제였겠지만, 이 경우에는 최고 지휘관과 지휘부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었고, 전 병력이 사분 오열되어 각개 도주하는 상황이었기에 배설이 휘하 전선을 이끌고 퇴각한 것은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행동이다. 또한 배설이 그나마 명량 해전 당시 12척이라도 투입할 수 있는 배를 남긴지라 되려 재평가 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역사에 기록된 명량 해전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이후 수습된 조선 수군의 80여 척이 넘는 판옥선 대부분 역시 수색 소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배설은 자기 휘하의 챙길 수 있는 전함은 최대한 온전하게 챙겨서 도망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명량 해전 당시 참전한 판옥선의 소속이 제각각인 점이 그 근거이다. 즉 배설이 직접 지휘하는 경상우수영 소속 외에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함선은 최대한 수습한 것으로 보인다.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당장 복직한 이순신이 싸우러 나갈 배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배설은 퇴각하면서 한산도에 있던 물자들을 일본군 손에 넘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태웠다. 난중일기 8월 13일에 전라 좌수사 시절부터 여수 본영의 우후로서 이순신을 보필해오던 측근이었던 이몽구가 여수 본영에서 피난해오며 병장기를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순신은 이몽구에게 곤장 80대라는 중형을 내렸으며, 난중일기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려온 선전관이 이몽구를 처벌하라는 유지를 갖고온 것을 생각하면 배설의 행동은 전술적으로 옳은 행동이었다. 퇴각시 적에게 이로울 수 있는 물품(식량, 무기, 자재)을 폐기하는 기초적인 전술이다. 이후에도 이몽구가 멀쩡하게 임무를 수행하다가 연말에 전사한 걸 보면 처벌은 받았어도 참형과 같은 극형은 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선 처벌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엄한 처벌을 주문한 것으로 보이며 조정에서 탄핵을 받은 건 확실히 맞지만 처형인지는 알 수 없다. 이몽구는 1605년에는 원무공신 2등에 추증, 복권되었다.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후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게 되면서 함선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하는데 시간상 보면 건조하는 속도로는 그렇게 빨리 불어나기 힘들다. 노량해전 당시 조선 수군의 전선은 판옥선 83척으로, 명량 해전 이후 1년 2개월 남짓이었다. 아무리 이순신이 수군 재건에 총력을 기울였다지만 조정의 지원도 어려운 상황에서 처음부터 이 전선들을 새로 만들었다고 보긴 힘들며, 이중 일부는 칠천량 해전 이후 도망쳤던 잔여 전선들이 합류했거나 뒤늦게 찾아낸 뒤 수리해서 다시 배치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즉 살아남은 장수 대부분이 배와 휘하 병력을 데리고 숨어 있었고[35] 그나마 배설만 자기 휘하 병력을 새로운 통제사 이순신에게 인계했다는 소리가 된다. 첨언하자면, 칠천량 해전 때 배설의 함대만 유일하게 일본 수군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고,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 습격 때 최초로 응전한 장수도 배설이었다. 그러나 배설은 이때 얻은 까임방지권을 명량대첩에 참가 안 하고 탈영하면서 써버렸고[36] 임진왜란이 끝난 뒤 잡혀와 목이 잘렸다. 여러 정황상 배설의 도망은 미묘하다. 자세한 내용은 배설 문서를 참조하라.

그것보다도 더 큰 문제는 이순신이 막아내어 유지할 수 있었던 남해의 제해권이 일본군에게 완전히 넘어갔다는 점이었다. 이는 전라도가 더이상 안전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는 일본의 침략을 받지 않아 인적으로든 물적으로든 조선의 보급고였으므로 매우 중요했다. 단적인 예로 도원수 권율의 병력은 자신의 부임지였던 광주(현 광주 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수군도 마찬가지로 삼도연합수군이라고 해도 사실상 전라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이 핵심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말한 '약무호남 시무조선'은 이런 맥락에서 한 말이다. 일본 입장에선 임진년 당시 한양 이북으로 진격하는 데 가장 큰 방해요소인 해상 보급 문제가 원균 덕분에 해결되었다.

당시 조선 수군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패배도 패배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조선 수군 대다수가 갓 뽑은 오합지졸 신병들이 아닌, 임진왜란 개전부터 약 6년간 왜군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고 승리한 역전의 베테랑들이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군관들을 비롯한 지휘관들 역시 6년간 이순신 밑에서 맹활약을 펼친 실력파 부장들이 많았는데, 이 해전에서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도망쳤다. 한산도 대첩을 비롯해 6년간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온 주역들이 이 해전 한 번에 죄다 증발된 것이다. 해군에서 숙련된 인력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감안하면, 사기가 떨어짐은 너무나 당연했다. 《난중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순신이 말한 것은 아니고 이순신을 찾아온 이가 이순신에게 한탄하며 하는 말이다.
(중략) 나라 일이 이미 잘못되어 죽을 날만을 기다릴 뿐이다. (후략)
난중일기》 정유년(1597) 5월 20일, 5월 23일.

다만 일본군은 너무 뜻밖의 대승을 거둔 탓에 서해로 곧바로 진출하지 못하고 7월 말까지 주변 지역을 소탕하고 약탈하는 모습만 보였고 8월에는 이마저도 중단하여 이순신이 수습할 시간을 주었다. 왜군은 애초에 이런 식의 대승을 염두에 두지 못하여 서해로 보급 선단을 진출시킬 준비를 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이후 남원과 전주를 공격하기 위해 일본 육군과 수군이 투입되는데 사천과 곤양을 거쳐 하동 땅 두지진으로 이동하며 대대적인 살육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화 명량에서도 칠천량 해전의 이러한 상황을 잘 묘사했다. 영화 초반 일본군에게 끝까지 분전하다 참혹하게 잡혀 끌려다니다 사살된 장수와 조선 군영에서 탈영하려다 참수당한 공포에 실성한 병졸이 임란 초기부터 이순신 밑에서 여러 해전에 참전한 부장과 병졸이라는 설정이다. 칠천량 해전의 패전이 얼마나 조선 수군에게 절망스러웠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온 것과 같았다.
《조선일일기》[37]

여튼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현실을 깨달은 선조"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하면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제수했다. 이 부분을 김경진 소설 임진왜란에선 '임금이 신하에게 싹싹 비는' 상황이라고 서술하는데, 다소 과장이긴 하지만 중앙집권 국가에서 왕이 신하에게 저 정도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파격적이다. 그만큼 다급했다는 소리. 하기야, 지가 삽질하는 바람에 이순신을 죽기 직전까지 고문했다가 수군이 다 털리니까 그제야 다시 한번 나라를 구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상황이니 이렇게라도 해야지.

말이야 저렇게 했지만 선조의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선조가 잘못한 게 많아서 직접적으로는 말하진 못했지만, 노골적으로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기 싫다는 기색을 드러내었다. 선조의 기색을 모를 리 없었지만 신하들이 여전히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하라고 요구하자 그때서야 승인했다. 게다가 그 와중에 실제 품계는 원래보다 훨씬 강등된 절충장군을 주어 뒤통수를 쳤다. 선조 개객끼 해봐. 그러니까 중장이 억울하게 누명쓰고 해임되었는데, 정작 같은 직책으로 복귀할 때에는 소장이 된 셈이다. 이러면 이순신은 다른 수군 절도사와 같은 품계 즉 계급이 같으므로 지휘권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휘하 수사들이 통제사 명령을 잘 따랐기에 이후에 문제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배설은 도망, 김억추는 육군으로 전근 나간 이후 임명된 수사들이 권준, 무의공 이순신, 안위로 이 세 사람은 이전부터 이순신의 부장이자 최측근들이었다. 참고로 이순신이 받은 절충장군 품계는 명량해전이 끝난 지 7개월(...)이 지나도 유지되었다. 이것도 선조가 쩔쩔매는 명나라 경리 양호, 제독 마귀 등이 선조한테 빨리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라고 다그치자 올려준 것이고, 그나마 다시 올라가긴 했지만 원래의 정 2품이 아닌 아닌 종2품 가선대부(...). 이쯤 되면 너무 찌질하다.

이순신은 원통함과 울분을 뒤로 한 채 조선 수군 재건에 나서게 된다. 패전 후 상황이 얼마나 암담했는지 당시 체찰부사 한효순은 "밤낮 눈물로 배를 만들었다.' 하고 기술할 정도.#
그해 여름 사이에 수군이 싸움에서 패하고 군사들이 궤멸했다. 주상께서 애통해하며 ‘한산도 수군의 일이 일시에 무너지고 전선이 1척도 없으니 경이 급히 30척을 만들어 수군을 도우라’고 하명하셨다. 명을 받은 이후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배를 만들어 변산 지역의 배 태반을 입수했다.
《월탄연보》

이렇듯 조선 수군은 세계 해전사 사상 유례가 없는 말도 안되는 패전으로 소멸했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선 기적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할 정도였다. 허나 이순신은 불가능해 보이는 말도 안되는 일을 해냈다. 명량 해전이라는, 세계 해전사에서 유례가 없는 말도 안 되는 승리로 칠천량에서 패한 조선 수군을 수습하는 데 성공했다.

6. 패배의 원인?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원균 개인의 무능함이 제일 큰 원인이다.난중일기》에 따르면 기생을 끼고 살았다. 이 때문인지 부하들이 원균에게 반발하여 말을 듣지 않는 상황까지 되었다. 난중일기에서도 이순신과 원균의 부하들이 같이 원균을 까는 장면이 자주 나올 정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원균의 부하들마저 대놓고 원균을 깠다. 작전 중에도 경계조차 제대로 시행하지 않고 움직이다가 다급해지자 부하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겨 쳐놓고 도망쳤다.
(중략) 이때까지 이순신 휘하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원균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통제사가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부체찰사 한효순이 이 문제를 체찰사에게 보고하여 해결해보려 했지만 미처 조처를 취하기 전에 칠천량 해전이 일어났다.
이덕형이 올린 보고서. 《선조실록》34년(1601) 1월 병진 기사.

이러한 이야기는 칠천량 해전이 벌어지기 한달 전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도 나온다.
(중략) 휘하의 여러 장수 중 다수가 다른 마음을 품은 사실과, 통제사가 장수들과 더불어 의논하지 않는 상황으로 볼때 일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6월 17일

전투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대자면, 아군의 행동을 그대로 노출시킨 것, 적진 한가운데를 들이침에도 적정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여 왜선의 대대적인 기습을 허용한 것과, 그 때문에 왜군들의 장기인 백병전을 허용한 것, 제대로 된 퇴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엉뚱한 곳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수륙 양쪽의 협공을 허용한 것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왜군들도 바보는 아니니 전쟁을 또 일으키기 전에 당연히 새로운 전술을 연구해서 오지 않겠나. 실제로 이것을 대비하기 위해 이순신은 왜군이 조선 수군의 패턴을 눈치채면 전략을 바꾸었다. 그런데 원균은 이순신이 어찌 하는지 보면서도 적을 분석하고 전술을 연구하지 않았던 듯하다. 총체적 난국이었던 것

그리고 통제사보다 체찰사의 힘이 컸다. 권율이 삼도수군통제사에게 곤장을 치기까지 했으니, 통제사는 윗선에서 내린 작전 명령에 대해 아무것도 토를 달 수가 없던 상황. 원균 자신도 머리를 쓸 줄은 알았으니(...) 부산포 공격은 무리라고 판단했지만 그 자리에 앉고 나니 비로소 뭔가 좀 보였나 보다. 자신이 이순신을 모함하며 부산포 공략이 가능하다고 큰소리를 쳤기 때문에 이제 와서 못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억지로 끌고 나갔고 결국 패배로 이어졌다. 사기꾼의 몰락.

한편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는 싸우지 말라.'고 명령할 정도로 조선 수군을 두려워했다. 해안 지방 곳곳에 왜성을 쌓아 오로지 방어와 최소한의 보급로 확보에만 주력했을 뿐, 조선 수군과 정면 충돌은 극구 피했다. 다만 그럼에도 조선 수군이 외해로 나가 부산포로 진격해서 싸우는 것은 장수 김완이 무리수라고 간할 정도로 무모했다. 이 작전이 그대로 시행되었다가 처참히 실패한 전투가 바로 칠천량 해전. 이 덕분에 도도 다카도라가 조선 수군 궤멸의 1등 수훈자가 되어버렸다. 전사자가 얼마나 많이 났으면 칠천량 주변 섬에 '혈도(血島)'란 이름이 붙었겠는가.

그 다음은 이 사태의 원인을 만든 선조다,

7. 경과 요약

1597년. 모든 표기는 음력.
  • 1월 1일: 요시라김응서에게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에 상륙한다는 이야기를 흘림. 조정에서는 비변사 회의를 통해 이순신에게 출격 명령.
  • 6일: 공무차 남해로 출장을 간 이순신의 선박이 폭풍우에 정박 함.
  • 10일: 이순신이 정찰을 통해 가토 기요마사부산 가덕도에 상륙했다는 사실을 파악.
  • 13일: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에 상륙.
  • 19일: 조선 조정에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에 도착했다는 김응서의 보고가 도착.
  • 21일: 조선 조정에 원균이 보낸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이순신이 아니라 나였으면 막는다.'는 장계가 도착.
  • 24일: 이순신의 파직이 결정.
  • 2월 10일 :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함대 63척이 부산포를 공격.
  • 25일: 한양에서 내려온 파발이 한산도에 도착. 이순신은 파직과 함께 압송되고,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원균 부임.
  • 3월 9일: 거제도에서 왜군을 유인해 47명의 목을 베고 승리를 거둠. 다만 판옥선 탈취 당함.
  • 6월 18일: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 100여 척이 부산포 출정.
  • 19일: 거제 안골포 해전 승리.
  • 7월 8일: 일본군 선박을 포착한 원균의 조선 수군이 무리하게 추적하다가 판옥선 12척 손실 발생.
  • 9일: 서생포 해전에서 판옥선 20여 척 손실.
  • 11일: 원균, 도원수 권율로 부터 곤장을 맞음.(징비록엔 7월 15일)
  • 14일: 가덕도와 영등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당해 조선 수군 퇴각.
  • 15일: 기상이 좋지않아 칠천량에 정박.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조선 수군 지도부 당황.
  • 16일: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조선 수군 일부 병력을 제외하곤 와해. 원균은 춘원포에 상륙후 도주. 생사는 불명.
  • 23일: 조선 조정은 모친상을 치르고 있던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는 사절을 파견.

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8.1. 조선왕조 500년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46회에 아주 간략히 나왔다. 평상시엔 이순신에게 빨리 출전 안하냐고 대들던 다혈질로 나왔던 원균이 정작 권율이 출전 명을 내리자 출전 못한다고 버티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이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뜬금없이 나온 태도 변화인 만큼 원균 명장론을 내세웠던 이 작품이 가진 한계를 잘 보여준다. 원균을 용장처럼 묘사해놓다보니 정작 칠천량 해전 때 머뭇거린 이유가 설명이 안되는 것... 정작 전투 장면은 그냥 원균이 배타고 나가는 장면에서 해설로 때워버리면서 임진왜란을 다룬 다른 사극들과 마찬가지로 원균이 전사한 것으로 조용히 마무리했다.

8.2.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

신승수 영화 감독이 나래이션을 한 이 다큐멘터리에서도 묘사하고 있는데 원균이 권율에게 얻어터진 후 출진은 했으나 밤에 쳐 자다가 갑자기 왜군에게 불화살로 기습을 당했다. 이후 원균은 우왕좌왕하며 전투조차 못해보고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가 마치 샌드백처럼 실컷 두들겨 맞기만 했다. 이후 배를 모두 잃은 원균은 육지로 도망쳤다가 육지에서 왜군들과 싸우다 2명 정도 베더니 3번째 왜병에게 살해당해 전사했다.

명대사는 "장군, 배 한 척에 불이 났사옵니다."[38]

8.3. 불멸의 이순신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가 틀리고.. 이순신이 옳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불멸의 이순신 칠천량 해전 예고2 中 원균

주소 영상 참고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91회 ~ 92회에서 나왔다. 여기서는 뒤늦게 잘못을 뉘우치던 원균이 김완·이억기·우치적의 충언을 받아들여 견내량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지만, 곧바로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고 구키·도도·와키자카가 조선 수군을 비웃는 장면을 넣었다.[39] 일본군 함대가 한꺼번에 투입된 데다 칠천량에 정박해 있던 조선군이 일본군의 기습 포격전을 맞아 포 한방 제대로 쏘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발려버렸고 일본군의 화포 사격과 접현 전투로 대다수의 배가 격침당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사실과는 거리가 좀 있지만[40] 이제껏 무적 무패 신화의 위용을 자랑하던 무적의 조선 수군이 정말 허망하게 무너져내리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이억기를 시작으로 작중에서 감초 역할을 했던 여러 군관들, 병졸들이 떼로 몰살당하는 모습은 시청자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나마 이순신이 옳았음을 깨달은 원균이 전사하기 직전에 우치적 등에게 이순신의 충직한 부하가 되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조선 수군이 더는 분열하지 않고 이순신 휘하에 완벽히 통합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손실이 워낙 컸기에 이 정도 성과(?)는 아무래도 좋을 지경.

8.4. 징비록

48화에서 간략하게 묘사한다. 원균이 죽는 장면은 안 나오고 나레이션 처리.

8.5. 명량

직접적인 전투 묘사는 나오지 않지만 전후의 전멸한 판옥선들을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하고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 꽤 자주 거론된다. 작중 배설이 칠천량을 언급하여 왜군의 전력이 강해졌음을 얘기하고 잡혀온 탈영병은 자신의 동료들이 칠천량에서 모두 죽었다며 울먹거리지만 이순신은 그걸로 할 말 다했느냐고 묻고 직접 환도로 목을 쳐버린다. 다른 탈영병들도 모조리 사형에 처해졌다.[41]

8.6. 벽람항로

국내4서버의 명칭이 옥계인데 칠천량 해전이 일어난 그 지역이다. 아래의 기타에 옥계 마을이 언급된다.

9. 기타

파일:external/www.saegeoje.com/193770_11632_157.jpg

사이트
  • 거제시 하청면의 칠천도 옥계 마을에 칠천량 해전 공원이 위치해 있다. 이름만 보면 원균 기념 시설로 오해할지도 모르나 철저히 패전으로 접근하여 패배도 기억하자는 의미가 크다. 이렇게 패전과 같은 역사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는 것을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고 설명한다. 칠천량 해전의 배경인 이순신의 파직 과정도 부산포로 진격하지 않아 하옥됐다는 통념이 아닌 실제 사실을 충실히 설명하고, 기문포 해전 등의 통제사가 된 원균의 실책이나 출진 과정의 책임에 대해서도 잘 정리하여 이해를 돕는다. 다만 정작 칠천량 해전 자체는 이 문서의 내용이 아닌 통념에 가까운 내용으로 소개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이 문서의 2번 부분까지는 이 전시관에서도 잘 다루었지만, 3번 부분의 칠천량 해역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의 공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궤멸당했다는 통념에 가까운 구성이다. 공원이 위치한 칠천량 해역을 강조하다 보니 이렇게 된 모양.
  • 반대로 평택시에 위치한 원릉군기념관에는 원균은 수륙병진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의 억지로 눈물을 머금고 출전,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설명한다. 애초에 칠천량 해전공원과 달리 원릉군기념관은 원주 원씨 종친회와 평택시가 원균 재평가(...)를 노리고 만들었기 때문에 모든 내용이 '원균은 잘못 없고 패전은 조정 탓'으로 일관한다.
  • 원균은 당대 최강의 함대를 제대로 전투조차 못하고 증발시키는 최악의 패배를 했고, 이순신은 조선 함대 전멸 사태를 겪은 직후 사기가 최악인, 애써 키워놓았지만 원균이 다 말아먹은 삼도 수군 전력의 15분의 1도 안되는 소 함대를 가지고 최대 333척 규모로 추정되는 일본 함대를 패주시키는 최고의 승리를 했다. 여기서 적선이 몇척이었느냐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다른데 일단 명량에서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기록된 적선은 133척이었다. 그러나 징비록과 정조 대에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에서는 왜군 전선 숫자가 각각 200척과 333척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것은 이순신을 띄우기 위해 뻥튀기한 것이 아니다. 명량에서 이순신의 시선으로 확인한 적선만 133척이었으니, 그 후미에서 대기하던 적선의 숫자를 포함한 여러 경로의 정보들까지 취합된 것으로 볼 정황이 되고, 서해를 통하여 곧바로 대규모의 병력을 상륙시키려고 출발한 것이었으므로 순수한 수송 선단의 규모 역시 상당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추론으로 소설 격류에서 김경진이 자세히 다루 었다. 사실상 칠천량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이득은 원균이 사라졌다는것 정도(...).
  • 조선에게는 그야말로 쓰디 쓴 참패이지만, 한편으론 이순신이 자칫 저평가를 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준 전투이기도 하다[42]. 간혹 판옥선의 성능 자체가 일본의 군함을 압도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찍어 눌렀을 뿐 이순신이 훌륭한 전술, 전략가는 아니었다고, 은근히 판옥선을 치켜세우면서 이순신을 폄하하는 경우가 있다. 만약 그 말이 진실이라면 칠천량 해전이 설명되지 않는다.[43] 물론 이순신이라면 자기 명예에서 손해를 볼지언정, 칠천량의 패전이 없었기를 바랐겠지만.

10. 말말말

상이 이르기를,
"원균 한 사람에게만 핑계대지 말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目擊時事, 胸欲裂而骨欲銷也。)
조선왕조실록》 선조 99권, 31년 4월 2일 2번재 기사.
통곡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칠천량의 패배 소식을 들은 뒤 이순신 난중일기 1597년 음력 7월 18일 일기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박문수, 《조선왕조실록》영조 71권, 26년 7월 3일 3번째 기사.


[1]거제시 하청면 칠천도[2] 이들 전선은 전투가 마무리될 시점에 도착해 조선 수군에 대한 추격 섬멸 작전만 수행했다.[3] 이순신이 함대를 재건했을 때 83척이었고 새로 판옥선을 건조할 여력이 사실상 없었기에 이 정도 피해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나마 막판 원균의 지휘가 붕괴되면서 도망간 함선이 많았기에 절반이나마 건질 수 있었다.[4] 배설의 전과[5] 문자 그대로 최고의 정예군이 전투 하나 없이 공중 분해되었다. 그나마 격침된 함선이 많지 병력은 다수 살아남아 이순신이 복직한 뒤 합류했지만, 이들은 원균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함선에 남아 있었던 병력이다. 즉 원균의 지휘를 충실하게 따랐던 병사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전멸당했다.[6] 세계사 전반을 살펴도 이 정도로 기적적인 졸전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판옥선의 성능이 일본의 세키부네보다 훨씬 우수하였고 거북선 역시 다수가 있었으며, 탑재화기도 천지현황 총통 등으로 일본보다 훨씬 화력이 강했다. 더구나 병력도 다수 전투에서 승리한 최정예 베테랑급 전력이었고 병력의 수도 일본에 밀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 뒤에 이순신은 정반대의 상황에서 명량 대첩이라는 희대의 전투를 이끌어내는 바람에 원균은 더욱 비참해졌다.[7] 사실 호남 전체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뚫렸다. 왜군은 남원성을 함락시켜 성 안의 백성들을 도륙한 뒤, 도원수 권율이 지킬 수 없다고 버리고 간 전주성까지 함락시켰다. 이후 왜군은 충청도까지 진격했다.[8] 말 그대로 일제강점기가 몇백 년 더 앞당겨질 뻔했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고 강이 많아서 해상수송에 대다수 운송을 의지하는 대신 육로 개척이 미진했다. 이 때문에 외세가 한반도를 침략해도 주요 거점에서 버티기만 잘 해도 침략군이 지치고 보급이 어려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고구려 시기 수나라 침입, 통일신라 시기 당나라 침입, 고려 시기 요나라 침입원나라 침입, 조선 시기 청나라 침입같이 중국의 침입 당시 주요 전술이 출입구(고구려는 천리장성을 피두로한 요동방어선, 통일신라는 기벌포, 고려와 조선은 강동6주)를 틀어막아 적의 보급을 괴롭히고 본진에서 적의 본대를 상대로 시간을 벌어 적이 제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게 하는 방법이 주요 전술이었다. 반대로 임진왜란에서는 이순신이 재해권을 장악하여 해상 운송을 틀어막자 왜군은 험악한 육로 때문에 지치고 보급이 어렵자 제풀에 지쳐서 왜성을 쌓아 버티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그러던 와중에 칠천량 해전으로 바다가 뚫리고, 한반도의 발달한 수로를 통해 왜군이 원활하게 보급을 받았다면 거기서 전쟁이 사실상 끝난 셈이었을 것이다. 명량 해전이 놀라운 전투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압도적인 전력차를 극복하고 우승을 거두었다는 점만이 아니라, 이후 전쟁의 전개과정을 완전히 바꾸는 데에도 성공했기 때문이다.[9] 고니시와 가토는 이미 센고쿠 시대에 원수지간이었는데 서로가 서로를 살해하고 싶어할 정도로 심하게 척을 졌다. 그런데 고니시가 직접 가토를 공격하면 태합에게 벌을 받을 것이 뻔하므로, 조선의 힘을 빌어 가토를 제거하고 싶어했다고 한다면 조선인들도 납득할 수 있었다. 두 사람간 원한은 전 일본은 물론 조선 사람들도 다 알 만큼 유명했다.[10] 권율과 김응서가 이때 일로 장계를 올렸고, 원균도 나중에 이순신을 무조건 까기 위해 관련 장계를 올렸다. 이순신이 이때 부산포로 진격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또 선조가 이순신을 파직하라 명령한 날짜는 2월 6일이었고, 이순신이 부산포를 쑥대밭으로 만든 날짜는 2월 9일-10일이었다. 이후 파발이 한산도 본영에 도착한 날짜가 2월 26일이었고 이순신은 파직당하자마자 압송당했다.[11] 그 전에도 선조와 이순신은 계속 아슬아슬한 사이였다. 가토 사건 전에도 선조는 계속해서 수군에게 출전을 명령했다. 육군보다 수군의 승률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수군을 이용해서 전쟁을 이기자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으로서는 하면 안 되는 전투임이 뻔히 보였기 때문에 거부하는 경우가 잦았다. 즉, 명령불복종이 누적되다가 가토 사건으로 선조가 빌미를 잡았다 볼 수 있다.[12] 고려와 조선이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지 생각하면 기우가 아니다. 또한 이몽학이 내세운 명분이 왜군에게 침략당한 무능한 정부 대신 왜적을 몰아낸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순신이 이런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될지 뻔하다. 그리고 선조는 바보가 아니라 주요인물만 제거하고 의병 대다수는 풀어주었다. 즉 군사력을 무력화했을 뿐이다. 선조는 제어하기 힘든 이순신을 무력화하고 말 잘 듣고 (선조가 보기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원균을 임명한 것이다. 문제는 원균이 장수로서 최악의 인물이었다는 점.[13] 아무리 왕이 대신을 정리하려고 마음 먹어도 보통 탄핵을 두어 번 반려하는 모양새를 취하던 시대였다. 즉 이틀 만에 파직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나마 그 신하가 무능함으로 원성이 자자하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순신은 유능한 장수라고 조정에도 다 아는 인물이었다. 이는 선조가 작심하고 이순신을 파직했다는 뜻이다. 이몽학의 난을 계기로 장수의 힘을 빼야겠다고 생각했고, 본보기로 걸린 인물이 바로 이순신이었던 것.[14] 실제로 이 때문에 막대한 규모의 군대를 항상 유지하기가 어려웠던 유럽에서는 상비군이 거의 없고 그때 그때 농노들을 징집해서 투입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당연히 질적으로 문제가 많아서 몸빵 정도 역할만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결정적인 활약은 용병이 도맡았다. 중국도 마찬가지라서 대다수의 병력들은 나라에서 그때 그때 징집한 징집병들이 대다수였고 중요한 역할은 각각의 장군들이 사비를 들여서 키워두었던 사병들이 도맡았다. 오늘날 한국군이 심심하면 대민지원을 나가는 이유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게 없어서 정부의 지원만 빨아먹고 사니까, 답례로 노동력이라도 제공하려는 것이다.[15] 출처:이충무공전서, 卷之三, 장계 36[16] 참 얄궂게도 이순신 장군이 통제사일 땐 병사 단 1명도 지원한 적이 없다. 오히려 수군 소속을 육군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선조의 총애를 듬뿍 받는 원균에겐 지원을 못 해줘서 안달이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도원수 권율 휘하의 병사들을 수군 소속으로 보내준 일이 있다.[17] 임진왜란 당시 종군한 승려 케이넨이 쓴 《조선일일기》에 수송선단이라고 밝혔다.[18] 선전관 김식의 장계에는 수송 선단이 바다로 유인한 후 뿔뿔이 흩어졌다고 밝혔지만 일본 측 기록에는 '조선 수군이 있으니 도망쳤다.'고 기록됐다(...).[19] 5척은 도모포에, 7척은 서생포로 표류했고 서생포에 표류한 인원들은 모두 전멸했다.《난중일기》 정유년 7월 14일과 16일 기사에 기록.[20] 물론 난중잡록에 기록된 칠천량 해전의 정황도 정확하지는 않다. 조선군이 식수와 땔감을 구하다 기습받은 장소를 영등포로 적은 것이 대표적이다. 실록은 기습받은 장소가 가덕도라 하였고, 해소실기는 영등포에서 적과 대치하며 하릴없이 기각지세를 이루었다고만 했다. 여러 기록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부분이다.[21] 아침에 이방(李芳)이 왔기에 밥을 먹여 보냈다. 그에게서 들으니, "원수(권율)가 구례에서 이미 곤양에 이르렀다."라고 했다.(『정유일기』 7월 8일)[22] 이 주장을 하는 쪽은 KBS 프로그램 <역사에의 초대>를 근거로 제시하는데, 정작 그 프로그램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 #[23] 지난날 주사(수군)의 싸움은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 하더라도 원수가 된 자로서는 힘을 헤아리고 시기를 보아서 대항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그 상황을 치계하여 후회가 없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러데 이러한 계획은 하지 않고 경솔한 생각과 부질없는 행동으로 원균에게 엄한 곤장을 쳐서 독촉했다가, 마침내 6년 동안 경영하여 어렵게 마련한 주사를 단번에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많은 산책을 한 곳도 지키지 못함으로써 적이 호남으로 들어가 군민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11월 4일
한산 싸움(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한 것으로 다투어 그에게 허물을 돌리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조정이 그를 빨리 들어가도록 재촉했기 때문이다. 그의 서장을 보면, 안골포가 그 앞에 있어 금방 들어갈 형세가 못되니 육군으로 하여금 먼저 적을 몰아내게 한 다음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도원수가 잡아들여 곤장을 치자, 그는 반드시 패할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과연 그가 스스로 패한 것인가? 『선조실록』 34년(1601) 1월 17일
[24] 칠천량은 임란 초기부터 조선 수군이 비바람을 피해 정박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임진장초 선조 25년 7월 15일 계본. "7월 9일 맞바람이 세게 불어 항해할 수 없음으로 거제 땅 온천도(칠천도)에 정박했다."[25] 그래도 여전히 일본군에 비해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았다.[26] 상륙 후 일본군에게 습격을 당하긴 했지만, 조선 수군의 절대다수는 죽지 않고 말 그대로 흩어졌다(...).[27] 칠천량 해전에 참전했던 김완이 쓴 해소실기에 내용이 있다.[28] 김완의 해소실기에 따르면 초기에 기습한 적선은 겨우 두 척이라고 한다. 1천 척에 달한다는 일본 수군은 기습이 성공한 뒤 한참 후에야 차례대로 도착했기에 조선 수군에 대한 수색 섬멸 작전만 수행했고, 육군은 거제도 등으로 도망오는 조선 수군을 잡았을 뿐이었다.[29] 이순신은 통제사 복직 후 서해 쪽으로 후퇴하면서도 정박할 때마다 탐망선을 띄웠다. 그 덕에 어란포의 왜선을 확인한 뒤 벽파진에서 싸워 이겼고, 그날 밤 더 많은 전선으로 일본군이 습격을 했는데도 막아내었다.[30] 김완의 후손들이 그의 글과 시문(詩文) 등을 모아 간행한 『해소실기(海蘇實紀)』에 수록되었음.[31] 즉, 경계 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상황을 개판으로 만들어놓은 상관이, 정석대로 어떻게든 적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 부하 장수에게 '다른 사람들은 다 튀어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너 혼자 죽고 싶어 안달이냐.'며 적반하장으로 큰소리를 친 것이다.[32] 크게 두 곳으로 추정하는데 현 지명 통영시 광도면 황리(우세설)와 현재 통영시 용남면 춘원포 설이 있다.[33] 이순신은 전시 중 조정으로부터 단 한 번도 지원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여러 물품을 조정에 바쳤으며 심지어 조정에서 사용할 종이가 부족한 상황이 벌어지자 이순신이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수군 육성과 이들을 먹여살릴 보급, 그리고 말도 안되는 전투를 동시에 해냈다는 소리...(...)[34] 세월호의 구조 인원 중복, 합산이 같은 종류의 예이며, 2차 대전까지 흔한 일이었다.[35] 실제로 명량 해전 이후 도망쳤던 장수들이 수군에 합류해서 도망친 죄로 처벌받은 기록이 있다.[36]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지휘에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배설이 자발적으로 먼저 떠났다고 묘사했다.[37] 일본 규슈의 우스키 성 성주의 의무관이자 주지였던 케이넨이 쓴 종군 일기. 케이넨은 주군을 따라 임진왜란에 참가해 《조선일일기》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38] 원균의 부장이 자고 있는 원균을 깨우면서 한 말이다.[39] 특히 와키자카는 "지금 이 모습을 이순신이 봤어야 하는데"라고 말한 뒤 포격전은 일본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백병전으로 조선군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도도는 거북선의 사각지대인 돛대로 사다리를 놓고 침입하는 왜군을 지휘하면서 "이걸로 메구라부네의 생명도 끝이 나겠군"이라 말하며 조롱한다.[40] 당시 일본 함선의 일종이었던 안택선은 설계 및 제작법상의 한계로 뱃머리에 2문 정도의 화포를 설치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더군다나 주력선으로는 세키부네라는 것이 따로 있었고, 안택선은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연출을 위해 과장한 셈. 덧붙여 칠천량에서 조선 함대가 막강한 타격을 입는 것으로 묘사하는 바람에,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이 조선 함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도 흩어진 함대를 불러모으는 게 아니라 일일이 새로 건조하고 신병을 모집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오류가 발생했다.[41] 한번 넘어가면 다 도망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원래도 적전탈영병은 사형에 처하던 이순신이었지만 설사 관대한 지휘관이었다 해도 이 때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42] 아니면 원균응호론에 대해 비판하고 원균이 좋은 쪽으로 재평가 받을 가능성을 없앤 전투이기도 하다.[43] 이순신이 잘 지휘하여 판옥선이 제 성능을 온전히 발휘한 것이다. 원균은 이순신 같은 전투지휘는 개뿔 그 판옥선을 다수를 끌고 가고도 제대로 전투도 안 하고 수군을 무너트린 무능한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