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수군(朝鮮水軍)은 조선군의 수군이다.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강을 통한 수운이 발달한 한반도에서는 수상 교통의 비중이 높았다. 당연히 왜구를 비롯한 해적[2]과 타국군의 침략과 약탈에 대비해야 했으므로 고려 수군을 이어받은 조선 수군은 건국 초부터 잘 만들어진 제도와 우수한 화력 및 전술로 해상적대세력을 압도해야 했다. (조선 수군제도의 성립 및 변화에 대해 설명한 글)
|
세종대학교 홍보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조선수군조련도. |
1.1. 조선 수군의 편제
각 도마다 주진, 거진, 제진을 두었고,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수사는 대개 현지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겸임했다. 다만,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세 명이 배치되었는데, 1명은 관찰사가 겸하며 나머지 2인은 무장으로서 좌(左), 우(右) 2명이 임명되었고 수군 만호도 더 많았다. 경기도와 충청도는 2인으로 1명은 관찰사가 겸하고 나머지 1명은 정직 무관이 임명되었다.1.1.1.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임진왜란 시기 창설되었으며 각각 지휘체계가 나눠져있었던 수군을 거의 다 총괄하는 직책으로 오늘날의 해군참모총장, 혹은 해군작전사령관에 해당한다.[6] 경상, 전라, 충청도의 하삼도의 수군을 모두 지휘한다. 실질적으로 조선 수군의 거의 대부분을 지휘하게 되는 종2품 관직이다. 임진왜란 중 각 도 수사(水使) 간의 원활한 지휘체계를 위하여 1593년 관직이 신설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순신 문서와 원균 문서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우리가 잘 아는 삼도수군통제사는 초대, 제3대 통제사를 맡은 이순신과 제2대 통제사였던 원균이다. 제4대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 이후로는 거의 경상우수사가 이를 겸하게 되었고, 임기는 2년이었으나 중임되는 경우도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지휘하는 통제영은 설치 직후에는 한산도에 있었으나 칠천량 해전 이후 고금도로 옮겼으며, 이후 통영에 설치되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도수군통제사 문서 참조.
1.1.2. 삼도수군통어사(三道水軍統禦使)
정묘, 병자호란 이후 창설된 직책이다. 삼도수군통제사가 전라, 경상, 충청수군을 이끌고 남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경계한다면, 삼도수군통어사는 경기, 충청,[7] 황해수군을 이끌고 서해안이나 북방에서 침입하는 외적을 경계하였다. 양대 호란 이후 위기 상황 시 조정이 강화도에서 농성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따른 서해안 통합 방위가 필요해짐에 따라 신설된 직책이다. 품계는 통제사와 동일한 종2품의 무관이 임명되었으며, 강화도를 관할하는 경기수사를 겸임하였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도수군통어사 문서 참조.
1.1.3. 수군절도사
조선시대 각 도의 수군을 통솔하던 정3품 외관직 무관 절도사직이었다. 오늘날의 함대사령관에 해당한다. 줄여서 수사라고도 부르며, 임기는 2년이었다. 세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하여 만들었던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를 1466년 세조 12년에 다시 개칭한 것으로 각 도의 정원은 경상, 전라에 각 3명, 경기, 충청, 평안에 각 2명, 황해, 강원에 각 1명씩 배정하였다. 이후 도의 지리적 여건이 고려되어 전임 수군절도사는 경상 전라 함경도에 각 2명(좌,우로 분도하여 구분하였다), 경기 충청에 각 1명씩 모두 6명만이 배정되었다. 나머지 11명은 해당 도의 관찰사나 병마절도사가 겸임하였다. 이 중 충청수사와 경상좌/우수사, 전라좌/우수사는 임진왜란 이 후 삼도수군통제사 직속 수사로 편제되었으며 경상우수사는 삼도수군통제사가 겸임하였다.수사는 각 도의 연해변에 있는 진, 포, 보에 소속된 전선과 주장인 첨절제사(종3품), 우후(정4품), 동첨절제사(종4품) 등을 지휘 통솔하였다.
역시 자세한 내용은 수군절도사 문서 참조.
1.1.4. 첨절제사
조선시대 각 도의 거진에서 수군을 통솔하던 종3품 무관 벼슬이다. 오늘날의 전단장에 해당한다.1.1.5. 수군 만호
조선 때 각 도의 여러 진에 배치되었던 종4품의 무관직이다. 오늘날의 전대장에 해당한다. 여말선초 천호제 최후의 흔적으로써 본래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의 수에 따라 만호, 천호, 백호 등으로 구분하여 불렸으나 점차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하여 이 호칭으로 고정되었다. 임기는 900일이었고 무예를 시험하여 임명하되 무과합격자, 겸사복, 내금위 등은 시험과 관계없이 임명되었다.1.1.6. 수영
삼도수군통제영 | 삼도수군통어영 | ||||||
경상좌수영 | 경상우수영 | 전라좌수영 | 전라우수영 | 충청수영 | 경기수영 | 황해수영 |
1.2. 운용한 전선
- 맹선
- 추왜별선 - 속도가 빠른 왜선을 추적하기 위한 쾌속선이다. 이름이 비슷한 왜별선은 왜구선을 포획하여 견본으로 둔 것이다.
- 판옥선
- 거북선
- 해골선
- 방패선(방선) - 뱃전에 방패판을 둘러친 배로, 경기/충청 지역 등 대형선이 활동하기 어려운 서해안 지역의 물이 얕은 곳에 주로 배치되었다.
- 병선 - 주력함(거북선, 판옥선, 방패선)에 딸린 소형 무장선이다.
- 사후선 - 거북선, 판옥선, 방패선, 병선에 1척씩 딸린 배로, 연락이나 정찰에 쓰인 비무장선이다.
- 포작선 - 고기잡는 배, 즉 어선이다. 실질적으로 조선 수군에 제일 많았다. 화포를 거치해서 전투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수송용이나 원래의 업무인 고기잡이 용도로도 많이 사용했다.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청어 잡이로 군자금을 마련했던 걸 생각하면 포작선의 가치를 가볍게 볼 수 없다.
증기선- 조선군이 격침시킨 제너럴 셔먼호에서 증기엔진을 흥선대원군의 명령으로 복제해 조선군의 목조 군함에다가 장착했다. 이게 느려 터진 속도로 10자도 못가 멈춰서 해체후 대포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건 근세조선정감 이라는 야사에 기록된 내용으로, 신빙성이 떨어지는 내용이다.
1.3. 사용한 병기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ff> 백병 | <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ff> 도검 | 사인검 · 월도 · 왜검 · 장검 · 창포검 · 환도 · 협도 · 쌍수도 | ||||
창 | 당파 · 장창 · 낭선 · 기창 · 죽장창 · 요구창 · 겸창 · 이두표 · 표창 | ||||||
둔기 | 도끼(부월), 쇠좆매, 육모방망이, 철퇴, 철편, 편곤 | ||||||
발사 무기 | 궁(弓)・시(矢) | 국궁, 각궁, 목궁(교자궁), 죽궁, 쇠뇌 | 장전, 편전(애기살) | ||||
화기 | |||||||
<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ff> 화포 탄약・지뢰 |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별대완구,대완구,중완구,소완구,소소완구, 총통기, 호준포, 불랑기포, 홍이포, 목모포, 파진포, 지뢰포, 수뢰포 쇄마탄, 목통 | 진천뢰, 질려포통, 비격진천뢰, 죽장군, 차대전, 대장군전 | |||||
운현궁 화포(소포, 중포, 대포)\[서양식] | |||||||
개인화기 | 조총, 천보총, 대조총, 일총통, 이총통, 승자총통, 사전총통, 삼안총, 세총통, 수포, 쌍자총통, | ||||||
브라운 베스 \[영국산], Gew71 \[독일제국산], 레밍턴 롤링블럭 \[미국산], 스나이더-엔필드 \[영국산] | |||||||
화전・로켓 | 신기전 · 화차 | ||||||
방어구 | 갑(甲)・군복 | 두정갑, 유엽갑, 피찰갑, 쇄자갑, 경번갑, 면제배갑, 엄심갑, 지갑, 어린갑(두석린갑) | 납의 · 철릭 · 구군복 · 포졸복 | ||||
주(冑) · 군모 | 간주형 투구, 첨주형 투구, 원주형 투구 | 전립 · 주립 | |||||
방패 | 원방패, 장방패, 등패, 장태 | ||||||
군장 | 띠돈, 동개, 활집, 광다회, 전대 | ||||||
전차・육상병기 | 화차 · 비거 | 마름쇠 | |||||
전선(戰船) | 판옥선, 방패선, 거북선, 해골선, 맹선, 과선, 협선, 사후선, 누전선 | ||||||
※ 서양식 무기 | }}}}}}}}} |
1.4. 조선 수군의 황혼기
이따금 출몰하는 황당선 외에 사소한 안보 위협조차 사라진 영, 정조 시대에 이르러 수군은 쇠퇴 일변도를 걷는다. 결정타는 영조의 균역법이었다. 조선의 수영은 대동미, 역가(수군 복무 대신 지불하는 비용), 어염세, 환곡, 둔전을 통해 운영 비용을 조달했고 이중 역가의 비중이 컸는데 균역법으로 인해 역가가 반토막나고 어염세가 통째로 날아갔다. 균역청에선 급대를 지급해 이를 보완하려 했으나 날아간 비용 대비 급대가 치명적으로 적어서 도저히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해졌다. 영조는 더 나아가 수군 진포를 폐지, 축소하거나 수군 전선을 조운선으로 전용하려는 시도를 했고 정조대에 이르면 봄과 가을로 나누어서 1년에 두 차례 열리는 것이 상례였던 정기적인 해상 기동 훈련인 수조가 중단된다.부족한 예산 속에 짜내는 데 한계가 왔기 때문이었다. 수군만 그런게 아니라서 정조대엔 육군 속오군의 훈련조차 중단되었고 이따금 수사들의 수조 실시 여부를 묻는 장계에도 전부 하지 말 것을 지시해 경신-을병대기근 속에서도 맥을 이어오던 조선 수군은 껍데기만 남게 된다.
고종 30년(1893년) 3월 22일, 강화와 갑곶, 진해에 통제영학당이 설치되었고 교육이 실시되기도 하였으나 폐지되었다. 1894년 삼도수군통제영과 각도 수영은 해산된 후 대한제국이 건국한 뒤인 1902년 대한제국 해군이 창설된다.
1.5. 전투 방식
2. 후신
2.1. 대한제국 해군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대한제국 해군#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대한제국 해군#|]] 부분을
참고하십시오.2.2. 대한민국 해군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대한민국 해군#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대한민국 해군#|]] 부분을
참고하십시오.본받자 충무공을, 찾아오자 우리 바다
忠武公을 따르자 - 李大統領의 觀覽 所懷, 조선중앙일보, 1949년 8월 26일
忠武公을 따르자 - 李大統領의 觀覽 所懷, 조선중앙일보, 1949년 8월 26일
감격의 해 난관의 해가 새고 4279년 1월 14일 군정법령 제42호가 공포된 후의 우리 해방병단은 국방사령부 군무국에 편입케 되어 同局후기나 미 해군소령의 지시를 받게 되어 겨우 일시 안도의 숨을 쉬게되었다. 이로서 정규 군사단체로의 인정을 받게 되었으니 단원 일동은 손제독과 더불어 임진 국난을 도맡아 구국하신 충무공의 위업을 계승하여 국토의 수호를 손을 높이 들어 맹서하였던 것이다. 대해군건설이라는 기치를 높이 들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삼가 이 몸을 바치나이다’라는 표어 아래 ‘충무공정신에 살고 충무공정신에 죽자’고 굳게 맹서하였던 것이다.
金省三, 우리 海軍의 걸어온 길 -나의 海軍生活의 回想을 中心으로, 海軍 創刊號(제1권 1호), 海軍恤兵會出版部, 1951, 28쪽.
金省三, 우리 海軍의 걸어온 길 -나의 海軍生活의 回想을 中心으로, 海軍 創刊號(제1권 1호), 海軍恤兵會出版部, 1951, 28쪽.
임진왜란 당시 이 바다에서 7백 척의 왜선을 무찔러 버린 이순신 장군의 뒤를 이을 수많은 바다의 용사를 길러내기 위하여 그 이름도 충무공호라고 하였다.
5) 구호는 忠武公을 딸차, 자유신문, 1947년 2월 12일. 충무공함의 건조에 대하여.
5) 구호는 忠武公을 딸차, 자유신문, 1947년 2월 12일. 충무공함의 건조에 대하여.
그들은 이번 이충무공의 위훈과 전통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그들의 손과 그 칼의 힘으로써만 삼백 톤의 경비선을 진수시킨 것이다. 이것은조선의 처음된 일이며 더욱 일찍이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존호를 명명한 것은 새로이 출발하는 가까운 장래의 조선 해군을 위하여 힘찬 의의를 주는 것이다. 더욱 기대할 것은 전통을 살릴 그들 조선의 젊은이들이 지금부터 여하히 노력하는가에 달린 것이다. 그들 젊은이들은 말하였다. 역사와 전통을 세우고 살리는데는 불굴의 의지와 모든 청년의 정열을 바쳐 노력하는데서 산출되는 것이다. (중략)임진왜란의 예전에 우리의 선조가 미증유의 국난을 앞에 놓고 과연 그 비장한 결심은 무엇이었을까? 이 몸을 바쳐 왜적을 물리치지 않았던가. 그는 3백 년 전에 침공한 7백여 척의 왜선을 한산도 구렁이에서 전멸시킨 것이다. 세상에 유명한 制勝戰法의 역사와 피 흘린 선조의 영혼이 사모친 이 바다를 그 전통을 계승한 자손들이 이제 그 역사를 심고 지나가는 것이다.
李舜臣將軍號의 命名!, 대동신문, 1947년 2월 12일.
李舜臣將軍號의 命名!, 대동신문, 1947년 2월 12일.
대한민국 해군은 조선 수군과 대한제국 해군과의 직접적인 접점은 없으나, 엄연히 국방부에서 현재 국군의 전신 중 하나를 대한제국군이라고 명시하고 있는 만큼, 조선 수군-대한제국 해군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역사를 정신적으로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대한민국 해군의 실질적인 모체는 위의 둘이 아니라 상선사관이었던 손원일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모인 해방병단이었고, 해방병단은 1945년 11월 11일에 창설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광복까지의 35년간 조선/한국계 해양세력이란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 다만 상술한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에서는 명백히 조선 수군에 대한 계승 의식을 드러냈다. 이는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던 손원일 제독이 당대 민족사학계에서 진행되던 역사 전통 연구와 계승의식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해방병단이, 그리고 현재의 해군과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현충사를 참배하고 이순신을 '제독'으로 부르며 부대 마크에 거북선을 넣거나 대내외적으로 충무공의 후예를 자처하는 것은 기나긴 한국해양사에서 이순신 개인만을 선택편취하여 숭모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옛 한국 해양무력집단에 대한 역사적인 계승의식을 드러내어 전통이 단절된 시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보는 것이 옳다. 창군 직후인 1954년 해군본부 전사편찬관실(戰史編纂官室)에서 "한국해양사"를 편찬한 것이나 1956년 거북선을 정모휘장에 부착한 것, 이순신 외에 무의공 이순신, 장보고 등의 이름을 붙여 존경심을 표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의미에서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해군의 역사적 연원을 해방병단으로만 한정하는 풍토가 과연 바람직한 현상인지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한반도 해양전투집단으로부터 실질적으로 이어받은 것이 없다고 주장하기에는, 이미 한국 해군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조선 수군을 비롯한 이전 시대 한국 해상무력집단들을 이어받았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해군사관학교 군사전략학과 부교수 신성재가 논문 "손원일 제독의 해군건설과 수군전통 계승활동"을 통해 자세히 연구했으니 참조.
3. 기타
사극에선 높은 확률로 포졸복에 水자가 적힌
또 조선 수군에는 아예 갑옷이 없었다는 낭설이 있는데, 이는 고증에서 논란이 있던 KBS측이 불멸의 이순신을 제작하며, 수군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고 단언하여 불거진 논란이다. 근거가 가관인데 갑옷을 입으면 물에 빠질 경우 헤엄치지 못해 죽는다는 것이다. 조선 수군 관련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순신 역시 장계에서 갑옷을 갖추려 한다고 보고했고, 난중일기에도 정비 상태를 확인한 병장기 목록에 갑옷이 있다.[14] 경상남도에서 당시 수군 고증에 나섰을 때도 지갑 등이 묘사되었다. 착용 비율은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분명 갑옷은 실존했으며, 철갑 외에 다양한 재질의 갑옷은 고대부터 이어져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분명 갑옷은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경상좌수영 휘하였던 동래성 해자 유적에서도 갑옷이 발견되었다.
다만 '효종 1년 1650년 04월 17일(음)' 비변사등록에 선상에서도 병졸에게 갑옷을 입히라 해서 입혔으나 일선 지휘관들에게서 불편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방패판으로 충분히 방호가 되며, 이순신 장군 역시 갑옷을 안 입게 했다는 것을 들어 입히지 말것을 하교했음이 나오는 것을 보면 최소한 선상에서는 입지 않은게 보통이었던듯 하다. 조선 해군은 승선 전투 말고도 점과 해안의 방호와 상륙한 왜구의 토벌을 하던 수륙 양용군이었음을 보면 갑주를 정비하던 다른 기록과도 충돌되지 않는 부분이다.
4. 관련 문서
[1] 군대가 행진할 때 지휘관의 앞에 세우고, 행진이 멈추면 장대 좌측에 세운다.[2]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여진족 해적도 악명 높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17세기 초반에는 전라남도 고흥 앞바다에 영국 해적으로 추정되는 서양 선박이 나타나 하루종일 조선 수군과 싸우다 달아난 사건도 벌어졌다! 더 자세한 내용은 옆의 링크를 참조할 것조선을 침입한 영국 해적선[3] 약칭은 수사[4] 약칭은 첨사[5] 이 점은 유럽도 마찬가지. 대항해시대 영국 해군은 선원이 모자라면 부랑자나 죄수를 끌어오기도 하고, 남의 배 선원을 가로채거나 납치(!)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를 전담하는 영국 해군 징집조인 '프레스 갱'들이 타국의 외교관도 납치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1812년에는 영국 해군이 미국 선원들을 납치하려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어 전쟁까지 갔던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영국의 항구 술집에서는 납치하려는 프레스 갱과 동료를 지키려는 민간 선박 선원 또는 주민들 간의 집단 패싸움도 잦았다.[6] 정확히 말하면 해군참모총장이 해군작전사령관을 겸임하고 군정권과 군령권을 모두 행사하는 개념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당시 미 해군참모총장이던 어니스트 킹 제독이 이런 방식으로 작전권을 행사했다. 애초에 군정권과 군령권을 분리하는 것은 근대 이후 등장한 개념이다.[7] 충청수사는 남해안으로 외적이 침입할 경우, 통제사의 지휘를, 서해안이나 북방으로 외적이 침입할 경우는 통어사의 지휘를 받게끔 되어 있었다.[8] 거제현 오아포에 있다가 임진왜란 이후로는 두룡포로 옮겨가고 거제현 두룡포에서 고성현 두룡포로 행정구역이 변경된다. 삼도수군통제사가 경상우수사를 겸임하였다. 이 거제현과 고성현에 있던 통제영에서 유래한 지명이 현재 통영시.[9] 충남 보령 오천면 소재 오천항이 수영이었다. 외적이 남해 방면으로 침입하면 통제영 휘하에, 서해 방면으로 침입하면 통어영 휘하에 소속되었다.[10] 해주 소재. 별개의 수사를 두지 않고 황해도 관찰사가 겸임했다. 그래서 수영도 황해도 감영과 같은 고을에 설치했다.[11] 기다란 낫인데 도선해서 백병전을 벌이려는 왜병들을 저지하는 겸 베어버리는데 사용했다.[12] 오위 중 각 위는 각각 오방색인 흰색, 검은색,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상징색이 존재한다.[13] 즉, 지금의 부대마크 개념이었다는 얘기다.[14] 임진년 3월 초5일 기록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