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명
《훈국신조기계도설》에 나오는 조선의 죽장군.
출처 - 조선의 무기와 갑옷
대나무를 마지막 마디만 빼고 뚫어 다듬은 뒤 노끈으로 몸체를 단단히 감고 바닥을 철판조각과 점토로 보강해 석환(石丸)이나 납탄 여러발을 장전해 쏘다 버리는 식으로 운용된다. 명나라, 청나라, 조선 후기에도 떨어지는 화력을 감당하기 위해서 간간히 사용되었다.
사실은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중동 등지에서도 화기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비슷한 무기가 많이 쓰였다. 그만큼 원초적인 화약무기라고 할 수 있겠다.
1.1. 중국의 죽장군
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원시적인 화약무기이다. 기원은 이화창 같은 고대화약 무기와 마찬가지로, 송나라 즈음 중국에서 개발되었다. 이를 인류최초의 개인화기 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즉, 총기류의 역사에서 시조 쯤 되는 무기이다.이후에는 다른 화기류에 묻혀서 사용되지 않다가,
하지만 실제 위력은 미묘하다. 주로 돌격하기 전에 쏘고 버리거나, 수십명이 일제사격하여 근접한 적들에게 파편으로 피해를 입히는 형식이었다. 즉, 사격보다는 근접전이나 백병전을 보조하는 특수한 장병기 개념에 가까웠다. 이는, 비슷한 역사를 가진 이화창과도 흡사한 부분이다.
명나라는 죽장군을 좋아해서 조선과 비슷한 형식으로도 이용했지만, 다수를 이용하여 1회용으로 쏘고 버리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일부 튼튼한 죽장군은 화전 발사대로도 썼다. 청나라에서도 이를 이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2. 조선의 죽장군
조선에서 만든 죽장군은 중국의 죽장군 개념을 수입한 것이다. 운용면에서 1회용이라는 점은 원조와 비슷하지만, 돌이나 납탄을 채워서 발포시키고 나면 포신(대나무)가 박살나서 버리는 원조 죽장군과는 다르게, 철판으로 보강하여 대형 탄환이나 조란환(쇠구슬 다발)을 통한 사격도 제법 강력했으며, 1회용 사격 후에도 총통으로 몇 번 더 사용할 수가 있었다.애초에 임시대응 무기라서 총통이나 조총이 썩어나는 시절에는 예비군 개념의 무기였다. 하지만 화력이나 내구도 면에서 단순한 1회용 무기치고는 강력했으며, 긴급한 화력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제법 요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기타 매체에서의 등장
한제국 건국사에서 등장했다. 오리지널은 들고 쏘는 개인화기 형태지만, 작중에서는 지방군용 응급 곡사화기이다. 부족한 지방군의 화력을 보강하기 위해 신헌(申憲, 신관호가 1867년에 개명한 이름)이 한국군의 60mm 박격포를 참조해서 개발하였으며, 대나무를 새끼줄로 단단히 감고 찰흙을 다져넣어 뒷부분을 강화해서 포신을 만드는 방법은 전통에서 가져와 뒷부분에는 땅에 박아넣을 나무말뚝을 끼우고 간단한 포다리를 이용해 곡사를 할 수 있게 한 것.기본 탄약은 굵은 납탄 한 발 또는 조란환 10발, 혹은 황자총통에서 쏘는 화살인 피령전 1발. 피령전에 민국인 김현수가 만든 각도계와 사거리표를 적용하면 가로세로 10미터 안에 떨어지는 상당한 정밀도를 낼 수 있다. 포신 수명이 2~3회밖에 안 돼서 착탄확인 후 효력사 같은 것은 불가능하지만... 사거리표를 만드는 와중에도 포신이 터져서 여러 명 다쳤다고. 그래도 금속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지방군에서도 독자적으로 생산할 수 있어서 도입하였다고 한다.
한제국 건국사 2부 초반, 남원군 묘 도굴사건 때 오페르트 무리를 혼란시키기 위해 피령전에 CS탄을 달아서 발사하는 것으로 사용되었고, 후반에는 사쓰마 번군이 돌격할 때 50미터까지 끌어들여 '들고 쏜' 것으로 묘사되었다. 30문을 50미터에서 700명에게 쏴서 200명을 피떡으로 만들어 버렸고, 그 후 무적죽장군은 버리고 어깨에 멘 갑식 보총을 들고 반돌격[1]을 감행해 정면충돌했다.
스타트렉 TOS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The Arena에서도 커크가 급조하는 무기로 등장.
[1] 적의 돌격부대에 대해 역으로 돌격을 감행하여 그들을 격파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