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말선초 인물
관련 문서: 한국사鄭津
(1361 ~ 1427)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 정도전의 장남. 정내, 정속의 아버지. 정영, 정유, 정담의 형.
봉화현 사람으로 1382년에 낭장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옮겨 사재령, 전농정을 지내다가 1391년 겨울 10월에 정도전이 나주로 유배되자 정담과 함께 폐출되어 서인이 되었으며, 1392년에는 연안부사에 임명되어 임지에 가서 사람들이 공신의 아들이라 교만하고 자부심이 많아 일을 친히 보지 않을 것이라 했지만 정진은 임지에 가서 겸손히 하면서 일을 부지런해 고을 사람이 탄복했다.
1393년에 판사재감사가 되었고 승진해서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이후 경흥부윤, 원주목사를 지내고 1398년에 중추원부사에 임명되었다가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태조를 모시고 지방에 있다가 화를 면했지만 정도전이 이방원과는 반대파에 해당되어 체포. 감옥에 갇혔다가 얼마 후 전라수군에 보내지는 조건으로 풀려났다.[1] 이후 수군생활을 했으나 그 뒤 태종의 결정으로 복권되어 1407년에 판나주목사, 1408년에 판공주목사에 임명되었다가 1416년에 직첩을 받고 1417년에 판안동대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1419년에 충청도 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5월에 왜구의 배 50여 척이 비인현을 침입하자 이를 보고했으며, 각 고을의 염한[2]들이 대마도를 정벌하러 가자 그들의 공납을 탕감할 것을 상소했다. 또한 선비를 가르치기 위해 각 고을에 훈도관을 두도록 상소해 500호 이상되는 각 고을에 훈도관에 두게 되었으며, 한판한성부사, 총호사를 역임하다가 1420년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421년에 치수에 관한 상소를 올리고 평안도 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1422년에 판한성부사, 1423년에 공조판서, 개성유후에 임명되었고 1425년에는 군자감 조성 제조를 지내다가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26년에 아록위전, 국둔전 등을 혁파하는 것을 논의하는 일에 참여했고 1427년에 사망해 그가 죽자 세종은 3일 동안 조회를 폐했으며, 시호는 희절(僖節)이다. 물론 그의 자손들 역시 대를 이어 고관대작을 지냈으며, 그 아버지 정도전도 국가의 공식 입장으로는 400여 년 이상이 더 걸렸으나 사실상 비공식적, 역사적으로는 복권되었다.
형조전서로 있을 때 최안종이라는 사람이 아내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아내는 최안종을 죽이고 그 시신을 최안종의 첩의 집 문 밖에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살인 용의자가 된 최안종의 첩은 매질을 당했고 이를 견디다 못해 없는 죄를 지었다고 자백하고 말았다. 결국 사건이 그대로 종결될 뻔 했는데 정진은 "살인자가 증거 인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어떤 살인자가 남편을 죽이고 자기 집 앞에 두겠냐?"며 최안종의 아내를 다시 수사했고 그녀는 결국 죄를 자백했다고 한다. 실록에서 최안종의 아내가 '말이 궁하여 자복했다'고 표현한 것을 보아 아내도 어떻게든 증거를 인멸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모양.
용의 눈물에서는 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 일파에게 붙잡혀 이방원 앞에 끌려오고, 이방원의 심복들은 죽이자고 권하나 이방원은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정진이 의연하고 논리있게 모두 대답하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며 감탄하고서 살려준다.
정도전(드라마)에서는 이방원이 목숨만은 살려준다며 정도전을 머리속에서 지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