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9-20 23:22:05

판옥선


파일:Jwadokgi_mini_white.png 조선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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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에서 등장하는, 임진왜란기의 판옥선. 가장 잘 알려진 형태로, 당시 열악한 상황에서도 격렬한 싸움을 치러야 했다.

1. 개요2. 역사3. 설계 구조4. 크기와 전투력
4.1. 평저선 구조4.2. 탑재한 화포4.3. 판옥선의 함대 구성4.4. 일본 수군의 함선과의 비교
4.4.1. 일본 수군의 탑재 발사 무기
5. 단점6. 대중문화에서7. 관련 문서

1. 개요

판옥선(板屋船) 또는 전선(戰船)[1], 판옥전선(板屋戰船)은 조선 수군의 주력함으로, 총통신기전화약 무기를 이용한 원거리 함포전을 염두하여 설계되었다. 최초 설계자는 전라남도 진도군 남도포 만호였던 정걸(丁傑, 1516-1597)[2]이며, 1555년(명종 10년) 을묘왜란이 발발한 뒤 전선 개발의 필요성을 느껴 건조하였다. 그의 사후에는 나대용 등이 전선 연구를 계승하였다.

판옥선의 '판옥'이란 널빤지(판, 板) 위에 올린 망루(옥, 屋)나 장대를 의미한다. 즉 기존의 함선에 판(Plate)으로 한층 더 쌓고, 무관(武官)들의 지휘 및 전투용의 망루(Roof, Watchtower)를 올린 배라는 뜻이다.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군함의 지휘관이 서 있는 누각이 바로 판옥이다.

2. 역사

파일:attachment/c0036507_4c864f13ece06.jpg
조선시대 해진도에 그려진 판옥선. 거대한 기함이다.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2010120101120_1.jpg 파일:external/www.poemlane.com/chung31.jpg
후기의 해진도에 그려진 판옥선들. [3][4]

1406년(태종 8년)까지 조선 수군 전함은 크기에 따라 대선, 중선으로만 불렸다. 세종 시기에도 가장 큰 대선은 소수에 불과해 당시 조선 수군 전함 대다수는 병선이라 불리는 중간 크기 배로 이루어 졌다. 1465년(세조 11년)에 전투와 조운을 겸할 수 있는 다목적 전함 개발이 추진되어 맹선이 건조되었다. 맹선은 정해진 규격에 따라 대맹선, 중맹선, 소맹선으로 나누어 각각 80명, 60명, 30명이 승선 가능한 전함이었다. 그런데 삼포왜란, 사량왜변, 을묘왜변을 거치면서 더이상 맹선으로는 버틸 수가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맹선은 수심이 낮고 거친 서해안에서 조운선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전체적으로 튼튼한 구조의 평저선이었다. 속도가 느려서 잽싸게 움직이는 왜선은 추적하기 힘들었지만, 각종 총통들을 탑재했으며 덩치도 큰 편이었다. 그런데 16세기부터 왜구들이 중국에서 들여온 초보적인 화약무기와 누각을 탑재하면서 대형 맹선으로도 부족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결국 새로운 전선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이때 소함주의자와 대함주의자간의 토론이 이어졌고, 결국 대함주의자들의 의견대로 판옥선이 탄생했다. 이후 다른 함선들은 보조용으로 돌려지고, 판옥선이 직접 싸우는 역할을 맡았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3. 설계 구조

파일:external/cfs11.blog.daum.net/48fb6389d7d65&filename=skymentor_20044003_sj97in.jpg
조선 후기 각선도본에 그려진 판옥선.



맹선과 마찬가지로 판옥선도 배밑이 평평한 평저선이었다. 조선 후기 기준으로 판옥선중에서 가장 큰 상선(上船)은 크기가 19.7~21.2m, 일반적인 판옥선은 크기가 15.2~16.6m였다. 길이는 임진왜란~17세기 기준으로 대선은 본판(배밑)이 22.4m~23.17m, 상부는 26.13m~27.03m였으며, 차선은 배밑이 17.60m~20.68m, 상부는 20.53m~24.12m였다. 가장 작은 차차선은 배밑이 15.20m~20.2m, 상부는 17.73m~23m정도 되었다. 조선 후기 기준으로는 상선은 배밑이 27.7m, 상부는 32.8m였으며 일반 판옥선은 배밑 20.8m, 상부는 23.4m였다. 배수량은 불확실하나 최소 80톤~최대 280톤 내외로 추정된다.

구조를 보면 일단 네모진 통나무 15개를 이어 붙여 배밑을 만들고, 양현에 판재 7쪽 하나하나에 서양의 클링커 이음과 유사하게 턱을 따서 이를 짜맞춘 뒤 나무못을 박아 고정시켜 뱃전을 형성했다. 이물비우는 직판[5] 널빤지로 15쪽을 이어 붙이고 고물비우와 양현을 붙인 다음, 뱃전 위에 멍에를 걸고 그 위에 귀틀을 짜고 겻집을 깔아 1층 갑판을 만들었다. 노는 양쪽 뱃전에 있는 멍에 뺄목에 각각 9척씩 걸었다.

여기에 멍에 뺄목 위에 신방도리를 걸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 다음, 상장 위에 이물과 양쪽 뱃전을 따라가면서 여장이 상장의 언방 위에 뱃집 멍에를 걸고 널빤지를 깔아 2층 갑판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일종의 지휘소인 장대와 이물돛대, 고물돛대가 있다. 이물돛대와 고물돛대는 뉘었다 세웠다 할 수 있게 장치가 되어 있었다. 고물꼬리에는 널판을 깔지 않고, 난간이 없이 비어 있다. 여기에 선미옥란을 설치해 대소변을 보거나 뭍에 오르내리게 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갑판이 2중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요원인 격군(格軍)은 1층 갑판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고, 전투요원들은 2층 갑판에서 방해받지 않은 채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승선인원은 시대와 크기에 따라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명종실록에는 50여명이 탑승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선조실록 1606년 12월 24일 기록에는 "거북선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射手)와 격군의 숫자가 판옥선의 125명보다 많아 활을 쏘기에 불편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보통 선장 1명, 신호용 깃발로 신호를 다루는 기패관 2명, 선박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훈도 1명, 선박 창고를 관리하는 선직 2명, 항해 요원으로 추정되는 무상 2명, 키를 잡는 타공 2명, 돛줄을 조정하는 요수 2명, 닻을 다루는 정수 2명, 군졸들의 군기와 질서를 바로잡는 포도장 2명, 활을 쏘는 사부 18~22명, 화약과 탄 장전을 맡은 화포장 10~14명, 화포를 맡는 포수 24~26명, 노를 젓는 격군 100~120명이 승선했으며 조선 후기에 배가 커지면서 약 200명이 탑승한 경우도 있었다.

4. 크기와 전투력

일단 크기는, 윗 문단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현대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물건으로 크기를 비교하자면, 후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큰 물건이 지하철 전동차 2량 2편성을 가로로 붙여놓은 것이나 참수리급 고속정보다 길이가 조금 짧은 정도의 크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유럽의 전열함처럼 강력하고 거대한 선박들과 비교하며 혹평을 하는 일부 사람들도 있지만 판옥선은 1500년대 초부터 활동했던 군함이고 전열함은 167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한 군함으로 둘 사이에는 100년이 넘는 시간 차가 존재한다. 그러나 어쨌든 1670년대까지도 조선의 주력 군함은 전혀 발전이 없이 여전히 판옥선이었으므로 완전히 부당한 비교라고는 할 수 없다.[6]

하지만 전열함이 판옥선과 마주할 일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 보다 정확한 비교 대상은 일본과 중국의 함선들이다. 병기는 필요에 따라 개발되는데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이 소극적인 해상 정책을 펴는 통에 조선도 대형 함선을 적극적으로 개발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한반도의 해안은 생산력이 빈약한 동해안을 제외하면 서·남해안이 모두 넓은 갯벌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런 지형에서 대형 첨저선을 제대로 운용하려면 대규모의 준설과 매립을 통한 항만시설 건설이 필요하니 평저선 운용에 비해 재원이 몇곱절로 든다. 서해안의 주요 항만들이 괜히 하나같이 강 하구에 모여있는 게 아니다.[7] 결과적으로 조선 수군의 작전반경은 연안, 아무리 멀어봐야 대마도 정도를 벗어날 이유가 없었고, 판옥선 역시 왜구를 격퇴하기 위한 연안 전용의 전투용 함선이 되었다.[8] 따라서 동시기 서양의 갤리온 같은 배보다 항해성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나 일본의 함선보다 명백하게 더 컸다는 것을 보면 당대 동북아 3국의 함선 중에서는 제일 강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그 배를 증기선이 나오고 철갑선이 나올 때까지 써먹으려고 했던 것이 문제지.[10] 결국 본격적인 서양식 함선과 조우하자 그간 드러날 일이 없었던 약세가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11]

평저선은 대양에서는 풍랑에 취약하지만, 선회력이 매우 뛰어나다. 선회력이 좋다는 것은 배의 방향 전환에 필요한 회전 반경이 짧다는 것으로 암초가 많아서 좁고 물살이 거친 남서해안을 오다니기에 유리했다. 선회반경에 대해 검증된 바는 없지만 국내 자료나 창작물의 경우 신지선회(Pivot Turn, 제자리 선회)가 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전통적인 한선답게 내구력에 모든 설계를 집중했다. 재현품들도 잘 보면 살벌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국가 함선과 비교했을 때, 구조적으로는 판옥선이 훨씬 튼튼한 경우가 많다. 쓰임새를 연안에서의 화포를 이용한 해전에만 한정해서 항해 목적보다는 전투를 위한 모든 기술을 때려박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항해기능 등 다른 기능을 생각한 목재선박이라면, 비슷한 체급일 때 판옥선보다 튼튼하기가 힘들다. 즉, 함포전시 교전능력과 튼튼함을 제외하면 항해성능은 매우 떨어졌고 오로지 수비 목적의 전투만을 위한 배로 만들어졌다.

4.1. 평저선 구조

파일:평저선 첨저선.jpg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왜군의 전함에 비해 강력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큰 이유는 판옥선이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인 반면 왜군의 함대는 대부분 바닥이 V자인 첨저선이었다는 것에 기인한다.

평저선은 느리지만 안정감이 있어 파도에 강하고 선회력이 좋았다. 무려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했다. 반면 첨저선은 회전하기 위한 반경이 커서 한참을 돌아야만 회전이 가능했다. 그래서 왜군은 파도나 물살이 강한 곳에서 무리한 선회를 하다가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다.[12] 이순신 장군이 물살이 빠른 곳을 주로 활용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이런 평저선의 선회력을 이용하면, 한쪽에서는 발사를 다른 쪽에서는 장전을 하는 식으로 해서 상대방보다 훨씬 포를 빠르게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학익진과 같은 진형을 구축하는 것도 360도 제자리 회전이 가능한 판옥선이 아니라면 매우 어려운 전술이다.

해전에서는 사실상 전함의 선회력이 전투력에서 가장 큰 비중을 담당한다. 왜냐하면 당시의 전함은 좌우 측면에 함포를 달고 있기에 함포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함이 측면에 위치해야 한다. 즉, 아무리 함포를 많이 달고 있는 전함이라고 해도 적군이 측면이 아닌 앞이나 뒤에 위치한다면 함포 공격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침몰하는 수도 있다.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하여 곧바로 함포 공격을 할 수 있는 판옥선과 회전하기 위해 많은 공간이 필요한 왜선들과의 전투는 절대적으로 한쪽이 유리한 싸움이다.

또한 평저선은 첨저선에 비해 배 위에서 대포를 쏠 때 반동 흡수에 유리하여 명중률이 높았다. 반면 왜군의 전함들은 첨저선이라 흔들림이 심해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이처럼 판옥선에 대한 전투력을 알고자할 때 화포의 개수같은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평저선이라는 구조 자체에 있다. 임진왜란 때 괜히 이순신 장군이 백전백승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특히 판옥선 12척으로 (게다가 전투 초반에는 대장선 혼자서) 적선 133척과 싸워 대승을 거뒀다는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전설이 가능한 이유도 이러한 전함 간 구조적 차이에 기인한다.

4.2. 탑재한 화포

영화 명량에서 천자총통을 방포(放砲, 발포)하는 이순신의 지휘선(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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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anokseon_myeongryang_gif.gif


판옥선은 크기에 따라서 24문 이상의 화포를 적재할 수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천자총통, 지자총통처럼 대형포를 주로 썼다. 하지만 임란을 거치면서 현자총통이나 불랑기포 같은 중소형포로 전환된다. 인접한 국가들의 전투선은 정크선/세키부네처럼 소형이거나, 대형정크선/안택선처럼 대규모 화포전술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따라서, 대형포를 싣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물론, 대형 화포 자체는 보관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난중일기에는 대형, 중소형 총포류가 같이 언급된다. 하지만 나중에는 현자총통/황자총통같은 중소구경 화포, 신기전(=신호용), 완구(=당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비격진천뢰가 몇 점 바다에서 발견된 바 있다)처럼 다양한 화약무기들을 대량으로 운용했다. 판옥선의 덩치가 불어난 후기에도 유럽식 불랑기포를 개조하여 탑재했다.

4.3. 판옥선의 함대 구성

임진왜란 일부의 해전을 제외하면, 판옥선은 다양한 함선들과 해진을 형성했다. 대표적인 것이 소형 맹선 혹은 평선의 개조판으로 추정되는 방패선(防船:Shield Ship)이었다. 이들은 주로 탐(探)이라는 깃발을 세우고 정찰과 전투보조를 맡았다. 먼 거리를 정찰할 때는, 사후선(伺候船)이라는 초소형 선박이 이용되었다. 정찰선들은 주로 신기전을 쏘아서 신호를 전달했다. 또한, 잘 알려진 거북선은 돌격선으로서 직접적인 합동작전을 펼쳤다.

조선함대의 기함은 좌선(座船), 상전선(上戰船)이라고 불렸다. 이는 가장 거대한 판옥선[13]이 맡았으며, 사령관 전용으로서 높이도 기존 판옥선보다 1층 더 높고 화려하게 꾸며졌다. 후기에는 거대해진 판옥선을 소형화했던 창선(槍船:Spear Ship)이 방패선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밖에는, 어립선들이 화약이나 물자를 싣고 다니면서 보급을 담당했다.

4.4. 일본 수군의 함선과의 비교

의외로, 일본 수군의 화포기술은 조선에 비교해도 크게 불리한 수준은 아니었다. 일본 함선들이 함포를 동아줄로 묶어 놓았다는 루머가 떠도는데, 이는 '조선전역해전도' 같은 매체를 통해서 잘못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에서도 건조단계에서 포구를 설계하는 등, 함포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은 잡혀있었다. 이미 오다와라성 포위전 같이 해상에서 다양한 화포를 이용하여 적을 포격하는 전술을 운용한 경험도 있었다. 안택선 문서를 보면, 그럴듯한 포가에 포를 올린 구조도도 존재한다.

문제는 중세 일본의 화포가 특유의 전쟁철학으로 인하여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주로 오오즈츠라는 대구경 조총이나 여타 중소구경 화기를 엄호용으로 이용하면서, 적극적인 선상 백병전을 최고라고 생각했다.[14] 임란 당시의 기록에서도 조선군이 일본 화포에 입은 피해는 주로 오오즈츠로 지휘관이 저격당한 것이었다. 일본 전함들은 가벼운 대신 강도가 떨어지는 녹나무, 삼나무를 사용한데다 선체의 구조 자체가 얇아서 내구도가 빈약했다.

하지만 판옥선은 가시나무(뾰족한 가시나무가 아닌 도토리 비슷한 '가시'라는 열매가 열리는 상록성 참나무류), 참나무, 소나무 등 단단한 나무를 이용했다. 게다가 판옥선은 한선답게 완전조립식이라서 남은 부품들을 이용하면 수리가 용이했다. 덤으로, 평저선이었기에 선회력이 뛰어나서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유연한 움직임을 보일 수가 있었다. 판옥선은 기본적인 내구도와 그를 바탕으로 화포 탑재량, 결정적으로 조직적인 포격이 가능한 주력 전투선이었기에 일본수군을 압도했던 것이다.

심지어 백병전에서도 일본 수군의 함선들보다 유리했다. 당대 일본의 주력 함선이었던 세키부네(関船)나 코바야부네(小早船)는 판옥선보다 크기가 작고, 높이도 상당히 낮아서 도선하려면 공성전을 하듯이 판옥선의 병사들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쏘는 화살, 포, 장병기를 버티며 승선해야 했다. 설사 승선에 성공하더라도 이미 건현 등반을 통해 체력이 소진된 채로 무장한 조선 군졸들과 싸워야 했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 조선수군은 일본군 배만 보면 환호성을 지르며 공격하고, 미늘창 다루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절대적인 우위를 점한 것은 아니어서, 도선을 허용하여 배를 빼앗겼다는 기록도 있다.[15]

다만, 위에 백병전에 유리하다는건 선체가 높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거고 판옥선은 순수 포함이라 백병전을 전문으로 하는 해병(수병)을 거의 태우지 않았다. 전투원은 사수와 포수로 구성되었지 도선 접전을 전문적으로 하는 해병은 태우지 않았다. 물론 판옥선의 탑재용량상 많은 병사들과 대포를 함께 싣는 건 불가하다. 반면, 일본의 아타케부네는 대포는 적었지만 육박전을 전문으로 하는 해병을 200명이나 태우고 있었다. 당연히 도선 접전을 벌이면 수적으로 불리할 수 밖에 없고 조선 수군은 최대한 이를 피하려 했다. 그렇다고 조선 수군이 도선전을 피하기만 한건 아니고 필요하다면 왜군의 배로 건너가서(!) 싸우기도 했다. 물론 건너가는건 원거리 전투로(총통과 화살등) 왜군을 정리한 다음에 했지만. 아무리 왜군이 조선군에 비해 백병전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일단 화포와 화살로 두들겨 맞은 뒤엔 그 우위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도 이런 판옥선의 장점을 파악하여 확보하려 했고, 실록에는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이 포섭된 조선인을 통해 판옥선과 비슷한 배를 만들게 해 확보한 기록이 있다.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이운룡(李雲龍)의 첩정(牒呈)에 ‘적에 가담했다가 도망하여 돌아온 두모악(豆毛岳)·김담손(金淡孫) 등에게 물어보니, 청정이 서생포(西生浦)에 있을 적에 적에게 붙은 해척(海尺) 하감동(河甘同)이란 자가 우리 나라 판옥선(板屋船)의 제도로 배 한 척을 만들어 주어 사용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하감동을 잡아다가 물어보았더니, 청정이 서생포에 있을 때 적에게 투항(投降)하여 우리 나라 배의 제도로 배 한척을 만들어 바쳤다고 하였다.’ 하였으니, 매우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즉시 행형(行刑)하게 하소서."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16]

4.4.1. 일본 수군의 탑재 발사 무기

임진왜란 전후의 일본군을 이야기 할때 빼놓을수없는 서적은 바로 2008년 일본에서 발간되어 국내에선 2010 번역본으로 편찬된 구보타 마사루의 "일본의 군사혁명"일 것이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종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조총이 전해진 시기는 알려진 대로 포르투갈 상인의 배가 일본에 좌초하여 전래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최근 일본사학계의 현황을 보면 그 연구가 심화되어 그 배의 정확한 소유주는 명나라 상인이었고 단순히 포르투갈인은 승선해 있던 인물로서 그 전래의 기원을 포르투갈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이미 조총의 존재를 파악하고 어느 정도 실용화 단계로 접어들었던 명나라로 볼 것이냐라는 논쟁이 있다.

무엇이든 그 시점이 1543년임에는 변함이 없고, 일본에서 최초의 대포 혹은 총통의 전래는 이보다 17년 뒤늦은 1560년으로 그 이름은 [석화시병종자도통]으로 이미 고려 말부터 최무선에 의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기기 발달이 상당했던 조선과 비교하여 무려 200년 가까이 뒤진 시기였다.

또한 이후의 기록에도 일본의 전국시대 후반기에 그 사용된 예를 모두 뒤져도 많아야 1~2기가 동원되거나 그 빈도조차도 극소수로서 상대적으로 조총의 발달과 비교해 그 양적 수량의 제작이나 기술의 발달이 현저히 뒤쳐졌다. 이는 이미 조선 세종대에 전국에 보급된 총통 2만기나 1425년 세종7년에 전라 감사가 대형 화기인 천자총통에 탄환으로 사용되는 천자철탄자 1,140등을 새로 주조하여 바쳤다는 기록 등을 감안하면 그 발달의 정도와 보급의 격차를 유추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즉 임진왜란만 놓고 볼 때 일본 측에서는 이를 발달, 유용할 만한 물질적, 전술적인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지금부터는 전래 후, 즉 1560년부터 1592년, 일본으로의 전래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대포가 사용된 예를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 덴쇼(1573년 기점)2년 9월: 이세 나가시마의 잇코잇키를 배위의 대포로 포격한 일
  • 덴쇼3년: 나가시노성 측에서 세이로(목조망루)를 포로쏘아 격퇴
  • 덴쇼6년 5월: 이마고군이 농성하는 하리마 코즈키성을 포위할 시 사용
  • 덴쇼6년 6월: 하리마 칸키성 포위전에 세이로(목조망루)를 두개 건설한 후에 그 위에서 대포로 성내를 공격한일
  • 덴쇼10년 8월: 사누키 소고성 포위전에서 대포2정을 사용
  • 덴쇼12년: 아리마군 대포 2정으로 시마바라성 포격
  • 덴쇼13년 3월: 사이카수전에서 호수위에 배를 띄어 포격
  • 덴쇼13년 5월: 다카오성 공략전
  • 덴쇼15년: 오오토모군이 사용하여 포위를 해산시킴
  • 덴쇼막년: 오다와라성 포위 공격전시 2정으로 포격
  • 덴쇼막년 5월: 무사시 하치타카성 공략에서 1정 사용
  • 원구(1590년 기점) 9월: 이시야마 혼간지 포위전에서 대포를 운용한 일
  • 원구3년 7월: 아자이군의 치쿠부시마를 대포로 포격한 일

총 13건이 전부인데 그 특성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 대규모 운용은 전무하여 기록상 2정의 사용이 최대치이다.
  • 배에서 사용한 예이자 최초의 등장으로1.과 6.사례로 두차례뿐이고 그 마저도 함의 설치가 아닌 단발적인 사용의 사례등으로 미루어 사실상 일본내의 자체적 발전으로 배에서의 운용은 임진왜란 후까지도 전무했다라고 보아도 무방하고 육해전을 모두 아우르고도 그 사례가 1~2정으로 고작 13차례 뿐이라는 것에서도 보이지만 그 발전의 후진성을 특유의 전통으로 해결하는 것은 에도시대 이후에도 미발달의 이유로서 적용하는 것은 일견 타당하지만 임진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매우 큰 무리가 뒤따른다는 것을 알수있다. 현실적으로 대포의 대규모 운용을 위해서는 우선 수군의 경우는 전통적인 기술의 축적이 존재하던 건조법을 일시에 전환해야 하는 상당한 기술적 난해함과 함께 배의 구조와 특성의 변화로 인한 전술의 어려움등이 필수적으로 동반되므로, 전간기에 이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무엇보다 물적으로 수백~수천개의 대포를 양산한다는 것은 그 기술적 엄혹함은 배제하더라도 시대적 한계상 역시 불가한 일이다.

이후 대포의 유용성을 대규모전에서 실감했을 임진왜란 중에도 일본군의 대포 사용의 예시는 1597년 8월 남원성 공격에서 사용했다라는 기록과 시마즈군이 당도해전 시 육상에서 포를 쏘아 조선수군을 격퇴시켰던 경우 등의 당시 일본군의 전체 사정을 총괄하면 가덕도 이하 8성에 한정씩을 배치해놓고 다음해에는 2정을 추가로 보냈다라는 기록이 전부이다.

그리고 일본 측에서의 최대 규모의 사용은 사실상 전국시대의 실질적 종결인 오사카 전투로 도요토미 측이 결사항전한 경우다. 당시의 기록으로 보아 약 126정이 성 전체에 배치되었다고 추정되며, 이 중에 상당수는 임진왜란 당시에 적군 즉 조선과 명으로부터 노획한 거여다. 그 중에는 태랑통 차랑통이라고 하여 일본 제일의 대석화시라 불린 것도 존재하였다. 즉 한마디로 위의 주장은 상당히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일본의 대포는 에도시대 후에도 그 발달이 정체되었냐 문제의 경우는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이 정권의 정책에 기인하는 바가 큰데, 우선 에도 막부는 전국시대의 교훈으로 반란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들을 다수 시행한다. 가장 대표적인 조치는 다음과 같다.
  • 대형함선 제조의 억제
  • 일국일성령이라 하여 일국에는 하나의 성만이 존재하게 한 점
  • 참근교대
  • 화포 제조의 철저한 억제

이와 비해 조선군은 양란을 거치면서 철저한 군제개혁을 통하여 군 전체가 냉무기 체제에서 화무기 체제로 전환되는 일대 군사혁명을 경험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노영구의 병학통에서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5. 단점

2층 구조이며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라 선회력을 제외하면 항해 능력은 떨어진다. 선체 높이에 비해 흘수선이 상당히 낮고 무게중심이 높은 탓에, 수심이 깊은 바다에서는 풍랑을 만나면 쉽게 균형을 잃고 전복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때문에 임란 이후에는 2층 갑판의 방패판들을 착탈식으로 만들어, 유사시 떼어놓아 바람이 통과하도록 하여 폭풍에 저항성을 높여 보자는 논의가 있었다. 더욱이 평저선이라는 구조상 유체 저항이 커서 속도가 느리고, 운용 인원이 너무 많아서 대양에서 항해하기엔 부적합했다. 화포와 인원을 만재하면 대인원을 유지할 식량과 식수를 적재할 여력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오로지 한반도 연안에서 싸우는 것만 염두에 두고 설계된 연안용 전함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실전에서 발목을 잡은 적은 드물었다. 더욱이 표해록에 나온 것처럼 밸러스트로 바닥에 짐을 두어 균형을 잡으면 풍랑을 속에서도 좌초를 막을 수 있었으며, 첨저에 가까운 화선이나 정크선도 풍랑을 만나면 위험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정크선 문서 주석에 나오듯, 첨저식 정크선 신주도 달랑 3미터만 높이기만 해도 선원들이 '아놔 풍랑 만나면 대체 어쩌려고...' 하는 기록이 고려도경에 나온다.

건조와 유지/보수에 들어가는 목재의 양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도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건조에 들어가는 목재만 해도 숲이 사라질 정도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이것은 함대를 유지할 때 목재 소비가 엄청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된다. 동아시아 선박의 건조 단계 중에는 유럽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열처리 단계가 없었다는 말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나, 거대 함선들을 마르고 닳도록 굴렸던 서양의 선박 보존 기술에 못 미쳤던 것은 사실이다.[17]

6. 대중문화에서

  • 충무공전 시리즈에 등장. 충무공전1에서는 조선과 왜 양쪽에서 사용하며(…) 자체 전투력은 없지만 아군이 탑승해 전투가 가능하다. 포수 8명을 태우면 거북선을 능가하는 화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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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전 동영상의 판옥선1. 가운데 배가 판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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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판옥선 함대의 모습. 동영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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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과 판옥선이 합세한 조선 수군의 모습. 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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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게임상의 판옥선의 모습. 저 뗏목이 판옥선이다. 참고로 일본 것도 동일하다.
  • 충무공전2에서는 겉모습은 정상적인 판옥선인데, 기능은 그저 수송선. 거기다 충무공전 1때처럼 아군 유닛들이 탑승해 발포할 수도 없고 그냥 화살을 쏜다(…). 게다가 생산 가격과 스펙 모두 일본의 수송선과 동일하다. 판옥선의 굴욕이다. 이런 왜곡 때문에 나중에 게임이 출시되고 나서 제작사를 강력히 비난한 유저들도 많았다고 한다.
  • 임진록 시리즈에서도 시리즈에 걸쳐 조선 수군의 기본 병력으로 등장. 실제와 마찬가지로 회전력은 좋으나, 속도가 거북선보다 빠르다는 고증오류가 있다.[18] 그리고 임진록2의 경우 대포가 아닌 소신기전을 쏘아 공격. 계속해서 1개의 돛대를 갖추고 거북선보다 작은 크기로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판옥선의 크기는 거북선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었고 역시나 판옥선보다 크게 나오는 명나라 소속의 사선보다도 더 크다. 통제공이 괜히 진린에게 판옥선을 선물한 것이 아니다. 일본의 누각선[19] 크기와 동일하게 나왔어야 대강 옳은 크기.
  • 이재창의 소설 기시감 연대기에 등장하는 솔시스 연방의 파녹스급 중순양함은 판옥선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 불멸의 이순신에선 조선 수군의 주력함으로 등장, 이순신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왜선들을 신나게 날려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수군의 세키부네와 동급의 크기로 나오는 굴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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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년 7월에 개봉한 명량에서도 강력한 면모를 보이며, 세키부네가 임란 후반기에 나타난 대형급으로 나왔기 때문에 크기 면에서의 고증도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자세한 건 명량/고증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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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서

  • 한국의 무기
  • 범선
  • 한선
  • 거북선
  • 과선, 검선 - 고려 중기의 전투선. 거북선 같은 돌격선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 누전선 - 고려 후기의 전투선. 맹선과 판옥선의 발달 과정을 알 수 있는 함선이다.
  • 조운선 - 해당 문서의 맹선.
    • 방패선: 중소형 맹선을 개조한 소(小)형 보조용 전투선. 후기의 해진도에서 판옥선 주변을 호위하는 축소형 선박들이 이것이다. 병선(兵船)이라고 통칭되기도 했다. 판옥선처럼 생겼지만, 일반적으로는 정찰용 보조선박이었다.
    • 창선: 판옥선과 거북선을 축소한 중(中)형 전투선. 해진도에 종종 그려지는 소형 거북선을 이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과선 문서 참조.

[1] 당시에는 판옥선이 조선 수군 해양무기의 기본형이었기 때문에 그냥 '전선'이라 불렀다.[2] 정극인의 5세손이다.[3] 태극북과 색기(色旗)와 천막들은 훈련 때에 덧붙인 장식으로 보인다.[4] 상태가 좋은 기록화들을 보면 상당히 알록달록하다. 항상 소형선들이 함께 그려지는 것으로 일반적인 운용법을 알 수 있는데, 같이 그려지는 작은 배들은 방패선(防船)이라고 한다.[5] 조선 후기에는 곡목으로 만들기도 했다.[6] 판옥선과 포문 수가 비슷한 것은 프리깃이지만 이미 유럽의 함포는 조선과 비교할 수준을 한참 넘어섰기 때문에 비교할 만한 함선은 슬루프 정도가 될 것이다. 조선은 함포의 구경을 줄이려고 했으나 유럽은 오히려 더 큰 함포를 더 많이 탑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7] 강 하구에 위치해있지 않고 갯벌 위에 흙을 때려부은 인천항이 특이한 케이스. 이 쪽은 당시 조선이 수도 방위 문제로 한강의 선박진입에 학을 떼서 그렇지 아니었으면 역시 한강 하구에 항구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결국 인천항은 그 막장 조수간만을 극복하기 위해 동양 최대의 수문식 도크를 건설해야 했다. 유럽도 조수간만차가 큰 대서양 연안 주요 항구들은 대부분 강 하구지역에 위치한다.[8] 오히려 임진왜란 이전까지 거의 200년 간 국가의 존망을 위협할 수준의 해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양경찰 편제로 돌리지 않고 정규 해군 편제를 유지한 것을 칭찬해야 할 정도다. 같은 시기 명나라는 아예 해안가를 전면적으로 비우는 해금정책을 실시했다.[9] 그러나 항해성능 뿐만 아니라 무장 면에서도 군용 갤리온에게 뒤진다. 군용 갤리온들은 한 세대 뒤의 전열함과 맞먹는 포문 수를 자랑했으며 전열함 자체가 3열 포갑판을 갖춘 갤리온의 진화형이다.[10] 한마디로 1800년대 중반 시절 석탄때서 가는 어뢰정을 이지스 구축함이 나오는 21세기까지 써먹었다고 이해하면 이해가 쉽다. 운용한 기간이나, 크기(배수량)차이도 딱 그정도다.[11] 1614년 조선의 학자인 이수광이 쓴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에 보면,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인 흥양 앞바다에 놀랍게도 영국 배(!)로 추정되는 서양의 배가 나타나서 조선 수군과 하루 종일 결전을 벌이다가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1622년 7월 19일자 <광해군일기>의 기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전라남도 고흥인 흥양현(興陽縣)의 앞바다에 크기가 산과 같고 배 위에 30여 개의 돛대를 세운 배 1척이 들어와서 첨사(僉使) 민정학(閔廷鶴)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과 전투를 벌였다고 언급되는데, 기사를 쓴 사관은 그 배가 “아마 서양의 배였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 자세한 내용은 오른쪽의 링크를 참조 바람.링크[12] 선박은 자동차처럼 바로 U턴을 할 수 있는게 아니라 한번 선회하기 위해서는 한참을 돌아야 한다. 자동차는 수 초면 유턴이 가능하지만, 선박은 기본적으로 수 분에 달한다.리아스식 해안인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왜선들은 아예 선회하는 게 불가능했다. 반면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할 수 있는 판옥선은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유리한 게임이다. 해상 전투 게임을 해본 유저라면 해전에서 배의 선회력이 가장 중요하단 걸 알 것이다.[13] 판옥대선이라 하여 기함으로 주로 사용되며, 승무원은 일반 판옥선보다 30명 더 많은 194명이 승선하는 대형선이었다.[14] 센고쿠시대 일본의 전쟁은 어디까지나 내전이었고, 그 중에서도 이념대립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저 권력투쟁에 불과했다. 이런 전쟁에서는 상대방을 완전히 때려부수고 몰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세력을 격멸한 뒤 그 영토, 노동력, 심지어는 군사력과 인재까지도 자세력에 편입시켜 전비소모를 메꾸고 세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이는 수상전도 다르지 않아서, 센고쿠시대 해상작전의 가장 큰 목적은 세토내해 등의 수로를 통한 군자금 배달이라 적 함대를 무조건 격침시키기보다는 가능한 한 탈취하는 쪽이 이익이었고, 심지어 그 수상전력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이 전리품이 중요한 해적세력이었다.[15] 참고로 임란 최초로 배를 빼앗긴 장수는 그 유명한 원균. 1597년 3월 9일, 즉, 휴전 중일 때, 조선 수군은 거제도 기문포에 왜선 3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술과 먹을 걸 줘가면서 안심시켜서 돌려보내고 뒤를 쳤는데 반격한 일본군에게 해상에서 판옥선은 물론 그 안에 실린 화포와 화약, 기타 무기까지 덤으로 빼앗겼다. 다행히(?) 원균은 조선 함선 침몰시키는 게 특기라서 빼앗긴 배를 무사히(?) 침몰시키고 고성 현령 조응도와 병력 140여 명을 대가로 적선 3척을 포획(捕獲)하고 수급(首級) 47급을 선조에게 바쳤다.[16] 출처 : 선조실록 86권, 선조 30년 3월 24일 갑인 3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2월 28일의 도체찰사 이원익의 서장.[17] 단 동아시아의 목재 기술은 현대 수준으로도 대단히 뛰어난 편이었다. 바다를 접한 국가들은 목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려고 온갖 기술을 동원했고, 우리나라의 한선에도 수백년 전부터 석회칠과 연훈법이라는 기술이 있었다.[18] 다만 이 경우엔 거북선이 맷집과 화력으로 승부하는 타입의 저속 상급 선박이었기 때문에 바로 낮은 등급의 전투함인 판옥선이 수송선과 거북선 중간쯤의 속도를 가지게 된 것이다.[19] 이것도 누각선이 아니라 안택선으로 불러야 하고, 정작 게임상 안택선의 역할은 한 체급 아래의 관선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