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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浣
1546년(명종 1) ~ 1607년(선조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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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언수(彦粹), 호는 사성당(思誠堂).임진왜란 때 사도진 수군첨절제사(蛇渡鎭水軍僉節制使:종3품)로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다.
2. 생애
김완은 1546년 경상도 영천군(永川郡) 자양현 노항촌(현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1]에서 성균관 생원 김응생(金應生)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김척(金滌)과 김한(金澣) 등 형 2명이 있었다. 일찍이 정로위(定虜衛)로 복무하다가 1577년(선조 10) 별시 무과에 병과 5위로 급제하였다.#난중일기에서 근무태만으로 제일 먼저 이순신에게 벌을 받은 무장[2]으로 첫 등장한다.
그래도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따라 출전하여 해전에서 적의 배를 탈취하거나 목을 베어[3] 오는 등 용맹을 떨치며 많은 공을 세웠으며, 또한 난중일기 곳곳에 이순신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활을 쏘는 등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4] 명량 해전에서 서술된 것을 살펴본다면 이순신 스스로도 자신이 설정한 기준이 엄격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며, 이런 기준이 다른 게 아니라 현장 지휘 능력을 유지시키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김완 역시도 이러한 처벌에 수긍했을 것이다.
그 후 조방장이 되었는데 원균의 칠천량 해전 때 참전했다가 패하고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 병사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으며 일본에 끌려갔다. 나중에 탈출해서 조선으로 돌아왔고[5], 선조는 김완을 치하하면서 해동소무(海東蘇武)라는 어필을 하사했다고 한다. 김완의 후손들에 의해 간행된 그의 문집인 '해소실기'의 해소가 바로 이걸 뜻한다. 그 후 패전의 원인을 두고 원균을 비난하다가 선조에게 찍혀 파직당해 왜란이 끝난 후에야 함안 군수로 있다가 사망했다.
일본군에게 잡혀 끌려갔으나 탈출해 돌아온 뒤, 《용사일록(龍蛇日錄)》[6]에서 이 상황을 회고하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十六日五更, 賊雲集, 放砲夜驚. 我舟師已蒼黃擧碇, 疾者先出溫川, 鈍者未及出, 賊已回擁 (中略) 主將失措諸船已潰, 一半北于鎭海, 一半奔于巨濟. 時余獨掉後船鼓角促旗. 南渡浦萬戶姜應彪·會寧浦萬戶閔廷鵬·助羅浦萬戶鄭公淸·海南代將·江津大將等各從水使已走遠洋. 余獨與軍官·射夫及奴子, 放砲齊射, 殊夗力戰, 一倍厮殺之. 際勢甚孤弱, 揮旗馳進, 主將謝曰 "令公奮戰之力, 甚多也." (中略) 主將曰 "李億祺·崔浩不知去處. 惟令公戮力捕捉, 夗而後已." 聽訖回視, 賊船二隻已近百武之間. (中略) 余亦左脚中丸, 危怕之際. 高聲疾呼曰 "主將! 主將! 胡不出救!" 主將元均醉酒, 高臥號令, 軍官金大福片箭十餘射. (後略)
7월 16일 5경에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포를 쏘아 한밤을 놀라게 했다. 우리 수군은 이미 어찌할 수 없이 매우 급하게 되어 배를 멈추니 날랜 자들은 온천(溫川)으로 나아가고 둔한 자는 미처 나가지 못해 적에게 포위되었다. (중략) 주장(主將)은 명령체계를 잃어 모든 배가 무너지니 반은 진해에서 패했고, 반은 거제도로 달아나게 되었다. 이때 나는 홀로 뒷배에서 호위하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재촉하였다. 그러나 남도포(南渡浦) 만호 강응표(姜應彪), 회령포(會寧浦) 만호 민정붕(閔廷鵬), 조라포(助羅浦) 정공청(鄭公淸), 해남대장(海南代將), 강진대장(江津大將) 등은 이미 수사 원균을 따라 먼 바다로 도망가버렸다. 나는 혼자 군관(軍官), 사부(射夫), 노자(奴子)와 함께 일제히 대포를 쏘면서 사살하고 죽을 각오로 있는 힘을 다해 싸워 서로간에 많이 죽었으나 형세가 심히 허약하였다. 지치지 않고 깃발을 휘날리며 진격해 나아가 주장(主將)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분발하여 싸우는 힘이 심히 크다"고 했다. (중략) 주장이 말하기를 "이억기, 최호가 간 곳을 모르고 영공만이 죽을 힘을 다해 적을 사로잡고자 하니 죽은 뒤에야 그만 둘 것이냐"[7]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적선 2척이 이미 50보 이내로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중략) 나 역시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 위태하고 두려운 시점이었다. 큰 소리로 급히 "주장! 주장! 어찌 나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이오!"하고 불렀다. 주장 원균은 술에 취해 높이 누워 호령만 하고, 다만 군관 김대복(金大福)이 편전 10여발을 쏘았을 뿐이다. (후략)
김완, 『해소실기』 《용사일록》 출처
7월 16일 5경에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포를 쏘아 한밤을 놀라게 했다. 우리 수군은 이미 어찌할 수 없이 매우 급하게 되어 배를 멈추니 날랜 자들은 온천(溫川)으로 나아가고 둔한 자는 미처 나가지 못해 적에게 포위되었다. (중략) 주장(主將)은 명령체계를 잃어 모든 배가 무너지니 반은 진해에서 패했고, 반은 거제도로 달아나게 되었다. 이때 나는 홀로 뒷배에서 호위하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재촉하였다. 그러나 남도포(南渡浦) 만호 강응표(姜應彪), 회령포(會寧浦) 만호 민정붕(閔廷鵬), 조라포(助羅浦) 정공청(鄭公淸), 해남대장(海南代將), 강진대장(江津大將) 등은 이미 수사 원균을 따라 먼 바다로 도망가버렸다. 나는 혼자 군관(軍官), 사부(射夫), 노자(奴子)와 함께 일제히 대포를 쏘면서 사살하고 죽을 각오로 있는 힘을 다해 싸워 서로간에 많이 죽었으나 형세가 심히 허약하였다. 지치지 않고 깃발을 휘날리며 진격해 나아가 주장(主將)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분발하여 싸우는 힘이 심히 크다"고 했다. (중략) 주장이 말하기를 "이억기, 최호가 간 곳을 모르고 영공만이 죽을 힘을 다해 적을 사로잡고자 하니 죽은 뒤에야 그만 둘 것이냐"[7]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적선 2척이 이미 50보 이내로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중략) 나 역시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 위태하고 두려운 시점이었다. 큰 소리로 급히 "주장! 주장! 어찌 나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이오!"하고 불렀다. 주장 원균은 술에 취해 높이 누워 호령만 하고, 다만 군관 김대복(金大福)이 편전 10여발을 쏘았을 뿐이다. (후략)
김완, 『해소실기』 《용사일록》 출처
김경진과 안병도가 공저한 소설 임진왜란(김경진) 1권 ~ 2권의 칠천량 해전 관련 장면 대부분이 김완의 후손들이 1918년에 정리한 행장인 해소실기에 기반해서 작성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1908년에 발행된 김억추의 행장(현무공실기)과 마찬가지로 너무 긴 시간이 지난 뒤에 간행되었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려워 보임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남은 기록과 사실상 일치하며 개인의 공훈이나 유능함을 과장하는 경향을 보이지 않고 그저 사실 그대로 담담하게 작성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전 세계 공통적으로 (조상에 대한 미화 등으로 인해) 과장이 심한 행장들 사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경우. 말 그대로 가전 문서류를 그대로 취합한 사료집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책이다. 이 때문에 해소실기를 유네스코 기록 문화 유산에 올려, 기존 등재된 조선 왕조 실록, 난중일기와 더불어 정유재란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가진 조상께 대한 예의를 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3. 대중매체에서
- 1962년 개봉한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는 배우 박철이 연기했다.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박철민이 연기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김완의 사진. 그야말로 개그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명대사로는 "방포하라! 화약을 애끼지 마라! 왜놈들 대가리도 애끼지 마라!", "문어 대가리 놈들[8] 머리통에 분노의 화살촉을 꽂아라!!", "죽이는 김에 다 죽여라!!!" 등이 있다. 다만, 실존 인물은 경상도 사람인데 극 중에서는 서남 방언을 구사하는 것이 차이점.[9] 근무 태만으로 이순신에게 제일 먼저 벌을 받았기 때문인지 요령 피우는 스타일의 캐릭터로 각색되었으며 첨사매를 부리는 모습 때문에 해리 포터를 따 '김완포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첨사매와 연 등을 활용하고 야간에는 신기전을 이용하여 신호를 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고안하는 등 통신 및 정보에 제법 능하며 조류를 읽을 줄 아는 등 개그 캐릭터이지만 능력은 제법 있다. 두루두루 제법 친한 법인데 그 중 특히 녹도 만호 정운과 친밀한 사이로 나온다. 이순신과 다투고 씩씩대며 돌아가는 정운에게 다가가 "따라가고 싶지요? 님 말 다 맞다고 해주고 싶지요? ㅋㅋ"하며 갈구기도 하며 정운이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하고 장례를 치를 때 "가지 마소, 정 만호. 이렇게는 못 보내네..."라며 오열하는 장면은 제법 찡하다. 설정상 어영담이 과거에 상급자로 근무한 적이 있어[10] 친분이 있어서 어영담은 죽음을 앞두고는 김완에게 물길에 대한 자료를 넘겨주고 "자신을 대신해 향도가 되라"고 전한다. 용맹했다는 기록과 달리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정말 낮은 전투력을 자랑한다. 칠천량 해전에서 자신이 탄 배에 적군이 침투하자 결국 직접 칼을 들고 싸우는데 단역이 맡아 이름도 표시되지 않는 듣보잡 왜군 부장 1과 1:1 대결에서 칼을 부딪친지 몇 합도 안 되어 어깨를 베이고 바로 포위당해 생포당한다.[11] 나중에 탈옥하여 돌아오기는 하는데 그 과정이 은근히 개그스럽다.[12] 노량 해전에서 마지막 회상 때 "또한 우리는 무기력하고 나태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냈다."라고 말했다.
4. 관련 문서
[1] 1980년 12월 영천댐 준공으로 수몰되기 전에는 경주 김씨 집성촌이기도 했다.[2] 임진년 2월 25일 / 3월 20일 기록. 정찰 임무를 게을리하는 편이었는데, 이 가운데에서도 3월에는 도저히 한나절 동안 돌아볼 수가 없는 지역들을 직접 보고 왔다고 거짓말을 하기까지 했다.[3] 당포 해전에서 권준의 활을 맞은 도쿠이 미치유키를 군관 진무성과 함께 도선해서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보통 조선 수군은 백병전을 피했다는 걸 생각하면 특이한 타입.[4] 이순신의 이러한 행동은 아랫사람을 다루는 올바른 요령이다. 규율을 어긴 것 자체는 엄히 벌하되, 인간적으로 미워하거나 경멸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아랫사람도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면서도 안심하고 윗사람을 따를 수 있다.[5] 조선으로 가는 어선에 숨어서 탈출했다.[6] 김완의 후손들이 그의 글과 시문(詩文) 등을 모아 간행한 『해소실기(海蘇實紀)』에 수록되어 있음.[7] 즉, 경계 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상황을 개판으로 만들어놓은 상관이, 정석대로 어떻게든 적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 부하 장수에게 "다른 사람들은 다 튀어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너 혼자 죽으려고 오버하고 있냐"고 되려 적반하장 격으로 큰소리를 친 것이다.[8] 여기서 문어대가리는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기요마사, 구키 요시타카, 시마즈 요시히로, 호소카와 다다오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비롯한 왜군들을 지칭한다.[9] 배역을 맡은 박철민이 광주광역시 출신이기 때문에 서남 방언을 쓰는 캐릭터로 각색한 것이기는 하다. 표준어를 구사하는 개그 캐릭터라는게 없는 것도 아닐테고 경상도 사투리를 잘 구사하는 배우를 섭외해도 되었을 일로 배우가 연기를 잘했고 캐릭터가 호평받아서 그렇지, 방영 중에 비판도 많이 받았다.[10] 어영담은 한때 여도 만호 직을 맡았다가 사직해서 어부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는 김완의 책임이 일부 있었다. 떠돌이 어부들인 포작들을 전임 전라좌수사 유극량이 왜구로 몰아서 목을 베도록 했는데 어영담은 이를 반대한 반면 당시 휘하 권관인 김완은 좌수사의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명을 따랐던 것. 김완이 어영담을 찾아가 "좌수영으로 들어오라"고 설득할 때 이 사건을 언급한다.[11] 물론 압도적인 패배 상황에서 지칠대로 지친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묘사된 것으로 봐서는 멀쩡한 상태라고 해도 글쎄...[12] 김완이 다른 조선군 포로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데 이것은 페이크로 난동을 진압하러 온 일본군 병사를 포로들이 제압하고 그 틈에 김완이 빠져나간다. <스페셜 열정의 400일>에서 이 장면을 다른 배우들이 모니터링하는게 나오는데 다들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보며 그 중 이상인은 "왜 저렇게 웃기게 찍혔냐"는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