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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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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전투 목록
율포 해전
(1592년 6월 7일)
한산도 대첩
(1592년 7월 8일)
안골포 해전
(1592년 7월 10일)
한산도 대첩
閑山島 大捷
시기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장소 조선 견내량 한산도 앞 바다
원인 남해 제해권 확보를 위한 조선과 일본의 결전
교전국 조선 파일:1280px-Flag_of_the_King_of_Joseon_(fringeless).svg.png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지휘관 전라 좌수사 이순신
경상 우수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무의공 이순신
권준
정운
어영담
김완
이영남
송희립
황세득
와키자카 야스하루
와키자카 사헤에†
와타나베 시치에몬†
마나베 사마노조†[1]
병력 전선 56척 전선 73척
피해 전사자 3명
부상자 10여 명
지휘관 부상
전선 47척 침몰
전선 12척 나포
결과 조선 수군의 대승
영향 조선 수군의 남해상 제해권 확보[2]

1. 개요2. 한산도 대첩의 배경3. 전투 전개4. 한산도 대첩의 결과5. 기타6. 한산도 대첩을 묘사한 미디어 매체7. 둘러보기


1. 개요

임진왜란 중 벌어졌던 이순신의 승전 중 하나로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알려져 있다. 이 한산해전의 승리로 인해 평양까지 진격한 고니시는 추가 보급 및 병력 지원이 없어 더이상 나아가지 못했고, 왜군의 수륙병진을 완전히 박살낸 대첩이다. 여담으로 당시에는 한산도 해전이 아니라 견내량 해전으로 많이 불렸다.[3]

2. 한산도 대첩의 배경

"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 같고 우레 같아,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워 버렸다.
난중일기, 7월 초8일 기사

1592년(선조 25년), 5월과 6월 사이 2차 출동을 통해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수군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로 이어지는 일본의 육군 수송 부대와 수군을 상대로 일방적인 토벌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에 해안의 수군 부대가 조선 수군에 의해 동쪽으로 밀려나가는 것을 염려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월 23일자 명령을 통해 용인에서 육군과 호응하던 수군 부대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다시 해안으로 급파하고,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수군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구키 요시타카와 그 외 가토 요시아키 등 3인을 소집하여 잔존 수군과 규합하여 조선 수군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조선 수군은 8월 12일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경상 우수사 원균의 함대 등 총 55척이 노량에서 합세하게 된다.

파일:/image/081/2005/02/26/SSI_20050225181613.jpg
▲한산도 대첩 기록화.

3. 전투 전개

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조 27권, 25년(1592년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1일(기유) 4번째 기사
6월 14일 일본 수군은 구키 요시타카를 중심으로 부산포에 집결했지만 이미 용인 전투에서 조선군이 약체임을 증명한 와키자카는 7월 7일, 자신의 함대만을 이끌고 거제도로 단독 출격을 개시했다. 그 날 저녁 무렵에 왜선 70여척이 견내량에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확인한 조선 수군은 8일 한산도 근해에서 이를 확인하게 된다.

왜군의 세력은 대선이 36척, 중선이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 구성된 함대였다. 이전의 해전처럼 항구에 정박한 왜군 함대를 포위 섬멸하는 형태로 전투를 치르기엔 견내량 주변이 협소하고 암초가 많은데다 조류의 흐름도 역류[4]여서 판옥선이 서로 부딪힐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함대 간의 전면전이 불가피하자 조선군은 한산도 근해에서 적들을 유인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5,6척으로 구성된 소규모 함대를 미끼조로 투입하여 일본 수군을 전체를 건져내는 유인책을 시작으로 작전이 전개되었다. 식견이 있는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매복을 의심할 상황이였지만 와키자카 본인은 이미 휘하의 1500명으로 조선군 5만을 격퇴한 용인 전투를 경험한 인물이였기 때문에 조선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으므로, 왜군 함대는 손쉽게 조선 수군이 던진 미끼를 물었다. 조선군의 퇴각을 확인한 그는 한산도 연안의 다도해 내로 거침없이 함대를 몰았고, 퇴각하는 척 하던 이순신의 함대는 해협을 지나 복병을 배치해둔 작전 수역에 진입하게 되었다. 와키자카의 적선이 도착하자 한산도 좌우의 섬에서 기다리던 전선들은 3개의 부대로 나뉘어 학익진을 형성, 일본 수군을 포위한 뒤 십자포화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드라마 임진왜란 1592에서 학익진 대형의 판옥선이 십자포화를 퍼붓는 장면(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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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ansando_gif1.gif


때마침 역방향으로 해류가 바뀌었고, 조선 수군은 이에 총통과 화전을 쏘며 전진했다. 전방향에서 날아드는 탄망에 주력선인 세키부네(關船, 관선)는 물론이고 일본군 내 주요 가신들이 탄 아타케부네(安宅船, 안택선)까지 줄줄이 격침되었으며, 일본군은 제대로 된 반격 한 번 하지 못하고[5] 마흔 척이 넘는 군함을 잃었다. 심지어 지휘관인 와키자카 본인도 지휘선을 관통한 화살에 맞아 부상당했다. 이후 그는 속도가 빠른 다른 관선을 타고 김해로 빠져나가 목숨을 건진다. 와키자카의 잔존 부대는 200-400여 명 정도가 한산도에 배를 내버려둔 채 인근의 무인도로 도망쳤으며,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 등은 멀리서 해전을 관망하다가 일본군의 주요 부대가 모두 격침당하자 방향을 바꾸고 김해로 후퇴했다.

4. 한산도 대첩의 결과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진출을 향한 야망에 사형을 선고한 전투.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격파당한 일본군은 16일 안골포 해전에서 뒤따라 출격한 구키 요시타카의 함대까지 각개격파를 당하게 되자 수군의 주력 부대를 모두 손실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에 더 이상 해상 전투에서 큰 의미를 두기 힘든 것을 알아차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대신 해안선 방어를 하라는 뜻에서 '해전 금지령'을 선포하면서 사실상 남해의 제해권을 조선 수군이 되찾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로 인해 조선의 서해를 통한 수륙병진이라는 목표가 좌절됨과 더불어 이순신 함대의 4차 출동에는 조선과 일본을 이어주는 일본의 본진 부산까지 습격당한다. 이렇게 일본군이 해상 요격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명나라의 남하와 더불어 일본의 임진왜란의 큰 패인이 된다. 애초 계획이었던 육군과 수군이 같이 진격한다는 수륙병진전략이 깨진 것이다.

또한 한산도에서 크게 승리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의병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해안가에서 거주하던 백성들은 해상의병이 되어 이순신과 함께 싸우거나 지형과 바닷물의 흐름을 알려주어 전략을 짤 때 큰 도움이 되었다.[6]

또한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 전투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에 당도했을 때 우리 진영에 이런 글을 보내왔다.
"우리 수군 10만명이 곧 서해로 도착할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7]
원래 적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해 서쪽을 공략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제싸움[8]에서 패하면서 한 팔이 꺾였기 때문에 비록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성을 점령하였을지라도 군세가 외로워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전라도와 충청도,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까지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기에 군량을 조달하고 명령을 전달하여 중흥을 이룩하였다. 뿐만 아니라 요동과 천진등지에 왜적의 손길이 닿지 않아 명나라 군사들이 육로로 와서 구원하여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모두 이 싸움의 공이다.

한편 전후 논공 행상을 위해 비변사가 선조에게 포상을 논의했는데,
비변사가 한산도 대첩에서의 승리에 대한 상을 논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전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 때의 일입니다. 싸움에 임해서는 수종(首從)이 있고 공에는 대소가 있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차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적을 벤 것으로써 대략을 논하면, 힘을 다하여 혈전했음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1등에 참여된 이는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 현령(縣令) 기효근(奇孝謹)은 특별히 당상(堂上)에 올리고, 현감(縣監) 김준계(金遵階)는 3품으로 승서(陞敍)하고, 주부(主簿) 원전(元㙉)은 5품으로 승서하고, 우치적(禹致績) 등 4인은 6품으로 승서하고, 이효가(李孝可) 등 13인은 공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소서. 만호(萬戶) 한백록(韓百祿)은 전후 공이 가장 많은데 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아니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니, 또한 당상(堂上)으로 추증하소서. 배지인(陪持人) 박치공(朴致恭)은 3급(級)을 베고 왜적 한 명을 사로잡았으니 6품으로 승서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에 의하여 조처해야 한다. 원균에게는 가자(加資)를 하지 않는가?”
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
“원균은 이미 높은 가자를 받았고 지금 이 전첩(戰捷)의 공은 이순신이 으뜸이므로 원균에게는 가자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선조 29권, 25년(1592년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24일(신해) 2번째 기사
선조의 노답 원균빠심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5. 기타

와카자카 야스하루가 영지 규모 및 동원 전력(1500명)으로 큰 규모의 함대를 운용하는 것은 과장이라는 논란이 존재한다.

다이묘들은 영지규모 1만석당 250~ 500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실제 와키자카 3만석 규모의 영주로서 일본 사료에서 조선에 출병한 병력은 약 1500명 정도이며, 이는 이전에 참전했던 오다와라 포위전 등에서도 엇 비슷한 병력을 동원하기 때문에, 와키자카가 갑자기 큰 규모의 수군을 이끌고 나타날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베시마 가문의 문서에 따르면 와키자카의 부대는 선봉대가 조선에 상륙한 이후로 우키다 히데이에의 진영에 소속한다는 기록이 있고 해전 당시 격파한 적선에서 노역하는 조선인 포로들을 구했다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조선인 포로들과 와키자카 본인과 우키다 히데이에의 수군세력, 그리고 머릿수에 포함되지 않은 세토 내해 동부해적세력들, 용인등 내륙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 인부들이 포함된 숫자일 가능성이 있다

확실한 것은 와키자카가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등이 같이 출전한 안골포 해전보다도 많은 함대를 이끌고 한산도 근해에 나타났다는 것을 보면 상당한 전력을 가진 규모를 가진 함대가 출전했다는 것은 사실인것으로 보이며 이는 이전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마주한 일본 수군의 규모중 제일 컸다.

와키자카는 이 전투에서 실로 참담한 패전을 겪었음에도 이를 모두 정직하게 기록으로 남겨서 후세에 전했다. 허세는 기본이요, 무공은 마구 부풀리고 패배는 애써 축소했던[9] 당시의 무사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인물이었고, 그 덕에 일본 측의 한산도 대첩 전후 사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다.

패전 직후 와키자카는 조선군의 추격 선단에 쫓겨서 대선을 타고 무인도에 급히 상륙했는데, 조선 수군이 바로 몰려와 그 대선을 태워버렸고 와키자카와 부하들은 졸지에 육지에서 5km나 떨어진 무인도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자 그 배의 선장이었던 마나베 사마노죠는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할복 자살해 버렸고, 와키자카는 무려 10여일 간을 미역만 뜯어먹으며 섬에 숨어서 조선 수군이 철수하기를 기다렸다. 조선 수군이 철수하자 와키자카와 부하들은 자신들이 타고 온 배의 잔해를 뜯어 얼기설기 이어서 뗏목을 타고 필사의 탈출[10]을 감행했다.

KBS 역사스페셜의 일본 측에서 바라본 이순신과 일본 측의 이순신 관련 사료들을 탐구하는 에피소드에서 와키자카 가문의 현 당주인 와키자카 겐지 씨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와키자카는 이 날의 패배를 기억하기 위해 본국에 돌아와서도 집안 사람들이 한산도 해전이 일어난 날만 되면 반드시 다른 것을 먹지 않고 미역만 먹도록 했다고 하며, 그 전통이 자신의 대까지 남아있어서 자신은 한산도 대첩 날을 '집안 사람들이 미역만 먹는 날'로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파일:1515.gif
와키자카의 영지였던 효고현 아와지에는 이 해전에서 전사한 30여명의 명복을 비는 고려진타사중공양석비(高麗陣打死衆供養石碑)가 세워져 넋을 달래고 있다

칼의 노래 1권 권말에 수록된 연보에는 마나베가 500여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무인도에 상륙했다가 나갈 곳이 없어서 할복 자살했고 병사들은 다 굶어 죽은 것으로 보인다고 되어 있다. 소설 본문에 이와 같은 서술이 있었다면 각색으로 볼 수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서술해야 할 연보에 이와 같은 서술이 있는 것은 오류다.


한산도 대첩 하루 전 병졸 황옥현이 탈영했다가 잡혔다. 이순신은 황옥현을 그 혐의로 참수했다. 부대 건재 유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처벌이었다.

6. 한산도 대첩을 묘사한 미디어 매체

임진왜란의 해전 중에서도 명량 해전, 노량 해전과 함께 매우 유명한 해전이어서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창작물에서는 높은 확률로 등장한다. 다만 이 한산도 대첩을 띄워주다 보니 이순신을 상대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도 덩달아 고평가되는 부작용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불멸의 이순신.
이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문서에 나오듯이, 한산도 대첩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선 와키자카를 실제보다 고평가하는 것이 가장 간편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창작물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조선 수군의 학익진을 보고 '이건 대체 무슨 진형이냐?'라며 놀라기도 하는데, 명백한 고증오류이다. 학익진이란 진형 자체는 육전에서는 고대부터 사용한 진형이라서 일본의 장수들도 이를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정 이런 감정을 표현한다면 '육지도 아니고 함대로 학익진을 펴다니,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라며 한탄하는 묘사가 더욱 고증에 가깝다.

6.1.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에서 옥포, 당포 해전에 이어서 다루었다. 그런데 앞의 해전의 장면을 너무 짜깁기한 느낌에 이순신의 거짓 퇴각 후 학익진을 펼치는 전략 표현이 미흡한 점이 흠이다. 더구나 이 드라마에서 원균이 용장 을 가장한 민폐 캐릭 으로 묘사되는 만큼 이순신의 전략을 따르지 않고 멋대로 출격해 정면 돌파를 시도하고 이순신이 원균이 적선에 다가가기 전에 재빨리 본래 세운 전략을 실행하는 모습으로 나와서 실제 기록과 맞지 않는 모순이 나온다. 애초에 원균은 개전 초에 전함을 자침하는 바람에 정면 대결을 하고 자시고 할 전력이 없어 그냥 이순신을 따라다니기만 했는데도...

6.2.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

원균이 부산포에서 배에 불을 지르고 추하게 도망친 뒤 바로 이순신에게 찾아가 이순신의 등 뒤에 숨었다. 시종일관 이순신 혼자만의 지휘와 능력으로 승리를 한 전투로 묘사되었는데 원균은 사실상의 구경꾼이나 다름없었다. 학익진도 이순신 혼자의 전체 통제 하에 전라 좌수영의 병력과 경상 우수영의 병력이 움직여 왜군을 격파했으며 원균의 그 경상 우수사 직함이 이 전투에서는 사실상 바지사장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6.3. 불멸의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 한산도 해전 예고1, KBS

불멸의 이순신 한산도 해전 예고2, KBS
학익진(鶴翼陣)
유인하여 섬멸하라
어둠을 수정하고
햇살을 이끄는 일
피 흐르는 투쟁의 중심
내 안에서 칼이 울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73회 후반 ~ 74회에서 나왔으며 임진왜란의 전투 장면 중 가장 훌륭한 묘사로 꼽힌다. 소규모 함대를 내보내 일본군을 유인하는 장면과 일자진으로 가장한 뒤 거짓 후퇴하는 장면, 연합 수군의 쌍학익진 구성, 화려한 궤도를 그리며 날아드는 포탄 등을 CG로 잘 표현했으며 이순신 역의 김명민와키자카 야스하루 역의 김명수, 장평 역을 맡은 조재완의 열연 또한 각각 인상적이다.

다만 몇 가지 고증 오류를 꼽아 보면 먼저 와키자카가 조선군 함대의 배후를 기습하도록 함대를 따로 편성했는데, 정면도 측면도 아니고 배후를 공격했음을 CG로도 보여주는데다 판옥선이 일본군 함선보다 속도가 느리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군 함대가 사방에서 공격받아 학익진을 펼 수가 없다.[11] 게다가 72회 끄트머리의 예고편과 74화에서 전투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이른바 세계 4대 해전 운운한 것도 아쉬우며, 학익진을 '이순신만의 창의적인 진형' 이라고 소개하지만 학익진은 본래 육지에서 사용하던 비교적 보편적인 포위진형이었고, 더구나 일본군도 이미 이 전법을 알고 있었다. 굳이 일본사까지 갈 것도 없이 이 작품 내의 와키자카도 '학익진은 아군의 수가 적군에 비해 많을 때 쓰는 진형이거늘, 고작 20척으로, 70여척의 내 함대를 감싸겠단 말이야?!' 라던가 '학익진의 생명은 측면이거늘, 측면을 비워두고 학익진을 폈다 하겠는가?!' 라며 조선군 함대의 진형을 알아차리는 장면이 있으므로, '학익진을 육지가 아닌 바다에서 친 것은 창의적인 발상이었다', '최초로 육상전 진형을 해상에서 구현해냈다.' 라는 식으로 소개하는 것이 적절했을 것으로 보인다. 극 흐름상 그런뜻으로 얘기한 것 같긴한데 나레이션 설명을 줄여서 그런듯.

매복해 있던 조선 수군이 갑자기 등장하며 학익진을 형성하는 모습과 이렇게 형성된 쌍학익진에서 사방으로 화포가 날아가는 CG는 그야말로 장관을 보여주며, 때를 맞춰 돌격하는 거북선 역시 백미이다. 또 한산대첩을 이순신과 휘하 장수들뿐만 아니라 노를 젓는 격군등 일반 백성들의 공까지 함께 조명하고 있다.

6.4. 명량

2014년 7월에 개봉한 영화 명량의 프리퀄 격으로 바로 다음에 제작 예정인 영화의 배경이 바로 이 한산도 대첩이 될 예정이다. 가제는 한산 : 용의 출현.

명량의 에필로그에서 아주 짤막하게 표현된다. 안개가 낀 견내량에서 거북선이 천천히 접근하고, 왜군이 '저건 대체 뭐지?'라고 의아하게 여긴다. 이후 거북선의 용머리가 나와서 화포를 쏘는 것으로 끝.

6.5. 징비록

징비록(드라마)에서 23화에 등장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재탕한 장면은 한 컷 나왔으며 대부분은 새로 찍은 장면들이 나왔다. 특히 지도상에서 학익진을 구현하면서 보여주는 전투씬은 문명 5의 전투를 연상하게 한다. 유인 과정은 생략되었지만 정황상 조총의 사정거리까지 오도록 유인하여 방심시킨 후, 함수를 돌렸다.

퇴각하나 싶었더니 페이크다 이 왜놈들아, 양 섬에 숨겨놓은 함대들로 학익진을 펼쳐서 포위했다. 학익진을 펴는 조선 수군을 보면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이게 무슨 진형이냐?"면서 멘붕. 그 뒤에 부장이 "계속 진격하면 아이고 맙소사 이제 우리 모두 죽었어 저 진형에 포위당할 것 같습니다"라며 퇴각하자 하자 와키자카는 친히 칼을 빼들고 "죽고싶으냐"란 말과 동시에 "전열을 갖추라" 지시했고 이에 이순신포격으로 응수한다.

결과는 한 척 한 척 쌈싸먹혀 깔끔하게 지워졌고, 결국 함대가 박살나는 것을 벙찐 채 지켜보다가 부하의 간언으로 후퇴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순신은 곱게 놓아준 전용 샌드백과는 달리 이번에는 추격을 명하여 완전히 섬멸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24화에서 전후가 나왔는데, 히데요시는 빡쳐서 내관을 직접 베어버렸고, 섬에 표류하여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채 부하들과 있는 와키자카의 참상은 그야말로 일본군 망했어요 수준. 미역 먹방만 나왔으면 완벽했다. 근데 거북선이 안 나왔잖아(...).

덤으로 옥포 해전에 이어서 징비록의 오프닝 ost가 풀버전으로 나왔다.

6.6. 임진왜란 1592

제2화에서 등장한다. 사천 해전 편처럼 근거리 직접 사격으로 묘사한 것 외에는 다른 작품들과 비슷한 편. 그런데 전투 묘사에서 문제가 많다. 실제 한산도 해전 당시 조선 수군의 피해는 위에 나온 것처럼 매우 미미했다. 그런데 이기남이 탄 귀선이 집중 사격을 당해서 이기남 등이 쓰러지는 등 거북선이 거의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질 정도로 큰 피해를 입는다. 또한 첫 포격 당시의 거리는 겨우 50보이고 180도 선회 후 2차 포격을 가하기 직전 왜군이 도선을 시도할 정도로 접근을 허용한다. 조선 수군은 전쟁 초기부터 꾸준히 도선 백병전을 시도했고 김완이 적장의 수급을 취하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쪽 고증이 더 낫다.

7. 둘러보기

이순신의 전투 목록
율포 해전
(1592년 6월 7일)
한산도 대첩
(1592년 7월 8일)
안골포 해전
(1592년 7월 10일)


[1] 할복[2] 재해권 확보는 정확하게는 안골포 해전 이후임에도 한산도 대첩이 평가받는 이유는 이때에 교전한 와키자카의 병력이 일본 수군 주력인 까닭이다. 안골포해전은 한산도대첩 직후 벌어진 해전으로 이순신의 3차 출동 중 두번째 전투이다. 3차 출동의 승전을 알리는 이순신의 견내량파왜병장엔 한산대첩과 같이 안골포의 승리 역시 같이 포함되어 있다.[3] 한산도 대첩의 승리를 보고하는 이순신의 장계 역시 견내량파왜병장이다.[4] 물론 명량 해전 때의 울돌목처럼 가공할 수준의 조류는 아니지만 조선 수군에게 불리한 건 사실이었다.[5] 이순신의 장계에 따르면 조선 측에서는 수병 '열 명'이 부상당하고 셋이 전사했다.[6] 이 해상의병들은 나중에 명량해전때도 이순신과 함께하였는데, 이순신이 육지로 올라가라고 명령하는데도 따르지 않고 판옥선 뒤에 배를 대어 배가 많아보이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7] 쉽게 말해 '지원군이 도착하면 의주까지 점령할텐데, 이제 선조 니가 갈 데가 어디 있겠냐' 라고 비아냥댄 것이다.[8] 한산도 대첩을 말한다.[9] 모범적인 무사라고 알려진 가토 같은 인물도 공을 부풀리거나 거짓 보고를 하다가 걸리기도 했다.[10] 물살이 어지럽고 빠른 한산도 근방의 해역에서 너덜거리는 뗏목을 타고 5km나 저어 갔다는 얘기다![11] 더군다나 이후 몇 번 나오는 CG에서는 매복 함대 자체가 증발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