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9 16:27:07

절이도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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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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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일본군 대규모 상륙), 일본군 진격 시기
1592년 <colcolor=#f0ad73,white>
음력
4월
부산진 전투[日] · 다대포진성 전투[日] · 동래성 전투[日] · 김해성 전투[日] · 경상도 방어선 · 상주 전투[日] · 충주 탄금대 전투[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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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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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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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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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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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朝]
12월
길주성 전투[朝] · 독성산성 전투[朝]
조명연합군 진격 시기
1593년
1월
제4차 평양성 전투[朝明] · 수원 전투[朝] · 성주성 전투[朝] · 벽제관 전투[日]
2월
웅포 해전[朝] · 죽주 전투/상주 전투[朝] · 행주 대첩[朝] · 노원평 전투[朝]
전선 고착화 및 국지전 시기, 정유재란 (일본군 대규모 재상륙)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日]
1594년
3월
제2차 당항포 해전[朝]
7월
거제도 진공작전[朝]
1597년
2월
부산 진공작전[朝]
3월
기문포 해전[朝]
6월
가덕도 해전[朝]
7월
칠천량 해전[日]
일본군 진격 시기
1597년
8월
고령 전투[朝] · 남원 전투[日] · 황석산성 전투[日] · 어란포 해전[朝]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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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병진책, 조명연합군 진격 시기
1597년
11월
제2차 석주관 전투[日]
12월
제2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朝明] · 제1차 울산성 전투[日]
1598년
7월
절이도 해전[朝明]
9월
사천성 전투[日] · 제2차 울산성 전투[朝明] · 왜교성 전투[日]
11월
노량 해전[朝明] · 남해왜성 소탕전[朝明]
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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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도 해전
折爾島 海戰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1598년 (선조 31년) 8월 20일
(1598년 음력 7월 19일)
장소

조선 전라도 흥양현 금산면 신촌리
교전국 <rowcolor=black> 조선-명 연합
(수세)
일본
(공세)
주요 인물
조선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이순신 (충무공)
파일:조선 어기.svg 이순신 (무의공)
파일:조선 어기.svg 송여종
파일:조선 어기.svg 배흥립
파일:조선 어기.svg 우치적
파일:조선 어기.svg 이언량
파일:조선 어기.svg 이청일
파일:조선 어기.svg 방덕룡
파일:조선 어기.svg 류형
파일:조선 어기.svg 고득장
파일:조선 어기.svg 손문욱
파일:조선 어기.svg 이영남
파일:조선 어기.svg 나대용
파일:조선 어기.svg 송희립
파일:조선 어기.svg 황세득
지휘관

파일:토도 가몬.svg 도도 다카도라
파일:가토 요시아키 가몬.svg 가토 요시아키
명 지휘관

파일:명나라 국기.png 진린
파일:명나라 국기.png 등자룡
병력 조선 전선: 170척
- 판옥선: 85척[1]
- 협선: 85척
일본 전선: 100여 척
피해 사상자: 30여 명전선 50여 척 침몰[2]
결과 조명연합군의 승리[3]
영향 고흥반도까지 제해권 확보
1. 개요2. 상세3. 미디어

[clearfix]

1. 개요

折爾島海戰

명량 해전 이후 함대 재건을 어느 정도 진행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의 일본 수군과 정면으로 교전한 전투. 절이도는 현대의 전남 고흥군 거금도 지역이다.

2. 상세

1598년 8월 20일(음력 7월 19일) 도도 다카토라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일본 수군은 당시 조선 수군 통제영이 있던 고금도에 대한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사전 정찰로 조선 수군은 적의 기습 시도를 파악하였고, 거금도-녹도 인근에 함대를 배치, 일본 함대에 대한 역공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전선 50여 척을 격침시켰다.

특이하게도 이 전투는 이순신이 집필한 난중일기에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조선왕조실록 등 다른 사료에는 제대로 기록되어 있는 전투이며, 실록에서는 왜선 50여 척을 분멸하고 수급 71개를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해당 부분을 다룬 난중일기 초고가 보관상의 문제로 망실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수군이 결성된 이후의 첫 전투이나, 당시 명 수군의 지휘관인 진린은 전투에 대한 의욕이 낮아서 함대를 출동시키지 않고 조선 수군 함대만을 출격시킨 채 전황을 관망하였다.[4]

진린은 자신의 전공이 없어 애꿎은 부하들에게 역정을 내었으나, 이순신이 수급 40급을 나눠준다. 그리고 진린은 조선 수군이 조정에 보고할 때 26급만 베었다고 기록하게 하였다. 그러나 진린의 전공을 보고 받은 명나라는 '진린이 그럴 리가 없는데'라며 조선 조정에 사실이냐고 물어보는데, 이에 이순신이 장계를 두통 작성, 한통은 진린의 전공을 기록한 장계(즉, 거짓말), 한통은 사실을 기록한 장계를 올려 무사히 마무리 짓는다.[5]

3. 미디어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99화에서 짤막하게 나왔으며, 해전이 끝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도 다카토라에게 할복을 명령하자 도도가 전쟁을 끝내라며 거세게 항의하는 장면이 나오고, 도요토미가 홧김에 도도를 베려 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힘으로 뜯어말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도요토미의 신하들 대다수가 도쿠가와에게 붙고, 도요토미가 사망하는 장면이 뒤따른다.


[1] 하지만 노량 해전에서 투입된 판옥선이 최대 60척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 수치는 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즉 실제로는 60척 정도를 투입하고, 나머지 25척 정도는 협선일 가능성이 높다. (즉 판옥선 60척, 협선 110척)[2] 조선 수군에 대한 기습을 시도한 것에서 알수 있듯 최소 세키부네급 이상의 전투선일 것이다.[3] 다만 후술된 바와 같이 명나라군은 사실상 방관했다.[4] 당시 이순신이 명나라 수군을 배후 지원세력으로 업고서 명량대첩의 전훈을 되살리면서, 원균의 하극상에 의해 실패한 장문포·영등포해전의 쓰라림을 생각할 때, 결코 허술하게 대처하지 않았을 것이다.##[5] 이순신이 단순히 전투만 잘하는 용장만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자신의 전공을 내어줌으로써 첫째로는 진린의 마음을 얻고, 둘째로는 자신만 믿고 따라와 주면 전공은 알아서 주겠다는 믿음을 심어줌으로써 전투 작전에 대한 주도권을 거머쥘수 있으며 셋째로는 진린의 기세를 크게 꺾을 수 있었다. 명 수군 없이 조선군 단독으로도 얼마든지 승리할수 있음을 보여준 것도 있고 결정적으로 명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증거가 자신의 손에 있으니까. 이처럼 이순신은 단순히 전승만 거머쥔 명장이 아니라 사람을 꿰뚫어보고 그에 대처하는 능력 또한 독보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