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1 14:15:24

남해왜성 소탕전

임진왜란정유재란 전투 목록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임진왜란
음력
4월
부산진 전투[日] · 다대포진성 전투[日] · 동래성 전투[日] · 김해성 전투[日] · 경상도 방어선 · 상주 전투[日] · 충주 탄금대 전투[日] · 여주 전투[朝]
5월
한강 전투[日] · 기강 전투[朝] · 제1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朝] · 옥포 해전[朝] ·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朝] · 해유령 전투[朝] · 임진강 전투[日] · 정암진 전투[朝] · 사천 해전[朝]
6월
당포 해전[朝] · 제1차 당항포 해전[朝] · 용인 전투[日] · 무계 전투[朝] · 율포 해전[朝] · 여주 전투[朝] · 제1차 평양성 전투[日]
7월
웅치 전투[日] · 안덕원 전투[朝] · 전주성 전투[朝] · 이치 전투[朝] · 한산도 대첩[朝] · 제1차 금산 전투[日] · 안골포 해전[朝] · 우척현 전투[朝] · 제2차 평양성 전투[日] · 삭녕 전투[日] · 해정창 전투[日] · 영천성 전투[朝] · 지례 전투[朝]
8월
제3차 평양성 전투[日] · 청주 전투[朝] · 제1차 경주 전투[日] · 제2차 금산 전투[日] · 영원산성 전투[日] · 장림포 해전[朝]
9월
부산포 해전[朝] · 연안성 전투[朝] · 제2차 경주 전투[朝] · 북관대첩[朝] · 노현 전투[日] · 창원성 전투[日]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朝]
12월
독성산성 전투[朝]
1593년
1월
제4차 평양성 전투[朝][明] · 수원 전투[朝] · 성주성 전투[朝] · 벽제관 전투[日]
2월
웅포 해전[朝] · 죽주 전투/상주 전투[朝] · 행주대첩[朝] · 노원평 전투[朝]
강화협상 · 휴전기 제2차 진주성 전투[日] · 송유진의 난 · 제2차 당항포 해전[朝] · 장문포 해전[朝] · 이몽학의 난 · 기문포 해전[朝]
정유재란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日]
8월
고령 전투[朝] · 남원 전투[日] · 황석산성 전투[日] · 어란포 해전[朝]
9월
벽파진 해전[朝] · 직산 전투[明] · 명량 해전[朝] · 석주관 전투[日]
12월
사로병진책 · 제2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朝][明] · 울산성 전투[日]
1598년
7월
절이도 해전[朝][明]
9월
사천성 전투[日] · 제2차 울산성 전투[日] · 왜교성 전투[日]
11월
노량 해전[朝][明] · 남해왜성 소탕전[朝][明]
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

남해왜성 소탕전
시기 1598년 12월 18일 ~ 21일
(음력 11월 21일 ~ 24일)
장소 조선 경상도 남해 일대
원인 남해안 지역의 일본군 잔적(殘賊) 소탕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파일:400px-Left-facing_dragon_pattern_on_Wanli_Emperor's_imperial_robe.svg.png
명나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도요토미 정권
지휘관 조선
무의공 이순신
조효열
송희립
김완
우치적
나대용
이완
손문욱
명나라
진린
유정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1,000 명 이상
결과 남해안의 일본군 소탕, 임진왜란 종전.

1. 개요2. 상세

1. 개요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로 노량해전 이후 전개된 소탕 작전이다.

2. 상세

노량 해전의 패배 소식을 들은 소 요시토시가 병사를 이끌고 남해도를 떠났으며, 시마즈군의 부장인 카바야마 히사다카(樺山久高),키이레 타다츠구(喜入忠続)는 노량에서 패배하자 도주해 데리자와 카몬효에이, 데리자와 세이로쿠, 데리자와 세이이치 등을 비롯한 50여 인과 함께 남해도에 상륙했다.

그들은 요시토시가 버리고 간 성에서 숨어있다가 뗏목을 만들어 타고 창선도로 향했으며, 조선, 명나라 연합군은 남해도에서 요시토시 휘하의 일본군 1천여 명을 죽였다. 조선, 명 연합군은 일본군이 버리고 간 배를 모두 불태우고 포구를 봉쇄했으며, 진린이 11월 21일 낮에 성을 수색했지만 적의 배는 텅 비었고 성 위에 불빛이 있었지만 곧 꺼졌다고 하며, 새벽녘에 적들이 밤 사이에 뒷산으로 도망쳤고 일본군은 수만 석이 되는 곡식, 총포, 화약, 소, 말 등의 가축을 놓고 갔다고 한다.

진린은 수급을 얻기 위해 급급하면서도 방옥을 불태우게 해 3천여 석의 양곡이 소실되었으며, 유정도 24일에 도착해 일본군이 남긴 수급을 찾는 것에 몰두하다가 조선 사람 중에 일본군에게 잡혔다가 산 속으로 들어가 숨어있던 사람들을 찾아내 모조리 목을 베면서 고니시가 보낸 적의 인질 6명의 목도 베었다. 또한 진린이 남해도에서 불을 질러 일본군 뿐만 아니라 남해에 사는 조선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손문욱이 이 상황을 보고해 진린이 중지했다.

한편 시마즈 요시히로는 카바야마 히사다카 등을 구하기 위해 가신인 고다이 토모야스(五代友泰)를 파견한다. 고다이는 조그만 배를 타고 남해도로 건너가, 카바야마를 만난 후 함께 선흥도로 탈출한 뒤 다시 일본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