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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임진왜란 조선 육군의 주요 승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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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 신각 | 곽재우* | 권율 | 김면* | |
전투 | 청주 전투 (1592. 8. 1.) | 북관 대첩 (1592. 9. 16. ~ ) | 진주 대첩 (1592. 10. 6.) | 행주 대첩 (1593. 2. 12.) | |
주장 | 영규* | 정문부* | 김시민 | 권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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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유령 전투 蟹踰嶺 戰鬪 | ||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 1592년 (선조 25년) 6월 25일 (1592년 음력 5월 16일) | |
장소 | 조선 경기도 양주 해유령 | |
원인 | 탄금대 전투 이후, 왜군의 북진 | |
교전국 | <rowcolor=black> 조선 (수세) 승 | 일본 (공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신각 이양원 이혼 이시언 | 지휘관 지휘관 불명 (가토 기요마사?)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일본군: 70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군 전멸 |
결과 | 조선의 승리[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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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음력 5월 16일에 해유령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이자, 조선 육군의 첫 승전이다.[2]2. 배경
4월 28일 신립이 탄금대에서 참패하면서 왜군의 한양 진군을 저지할 수단이 사라졌다. 한양에 남은 군사는 4천 5백(실록)에서 7천(징비록)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정예들이 모두 신립 휘하로 차출되어 갔다 전사해 질적으로나 사기로보다 도저히 제대로 된 방어전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에 조정은 4월 30일 새벽 파천을 단행했고 도원수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 유도대장 이양원을 남겨 한강 방어선을 담당케 했다. 왜군과 수적, 질적 차이가 너무 심하고 제대로 지휘권을 행사할 입장도 되지 못해[3] 방어가 어렵다 여긴 김명원은 군을 물리려 했는데 사기가 심각하게 저하되어 있던 병사들은 지휘부가 퇴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마자 붕괴했다.조정은 5월 3일 개성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며 김명원에게 임진강에 방어선을 치고 적을 막게 했다. 하지만 임진강에 도착한 김명원은 자신과 합류해야할 부원수가 보이지 않음을 알아챈다[4].
3. 진행
김명원과 합류하지 않은 신각은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양주의 산 속으로 들어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전열을 정비하다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이 이끄는 군사들과 합류해 반격을 기도했다.5월 16일 신각은 한양에서 나와 흩어져서 민가를 노략질하던 소수의 왜군을 복병으로 격파, 60여 명을 죽였다. 개전 이래 최초의 육전 승리였다. 이때 신각은 백마를 타고 있었는데, 죽인 왜군들의 피가 말에 묻어 백마가 붉게 변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으니 편제상 당연히 합류해야할 도원수와 따로 움직이면서도 신각, 이혼, 이양원 중 누구도 장계를 올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일이 상주, 탄금대에서 연패하는 와중에도 장계를 꾸준히 올렸다는걸 고려하면 명백히 이들의 실책이었다. 기재사초에서는 김명원이 이미 양주에 있는 이양원과 신각의 소재와 병력을 파악했으며 힘을 합쳐 한강을 수복하겠다는 장계를 보낸 것으로 보고를 정정한 바 있다. 굳이 신각을 변호하자면, 전시의 혼란 탓에 미처 장계를 올릴 여유가 없었거나 혹은 장계를 분명 보내긴 했는데 전령이 중간에 사고가 발생해서 늦어졌을 가능성은 있다.
4. 결과
장계 한장 없이 어디서 뭘 하는지 알 길이 없는 부원수를 두고 김명원은 여태껏 많은 장수들이 그랬듯 적전도주한 것으로 판단하여 신각이 이양원을 따른다는 핑계로 도망갔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이 보고를 받은 비변사는 우의정 유홍이 주도하여 신각의 참형을 건의했고, 선조는 허락한다. 신각이 어디 군수나 병사도 아니고 부원수라는 걸 감안하면 성급한 감이 없잖은 결정이었는데 개전 직후 온건한 성향인 류성룡이 탄핵당하고 강경파 신료들이 득세한 영향으로 보인다. 게다가 당시 전황은 지극히 불리한 상황이었고 이 탓에 '일단 누구라도 걸리면 엄벌을 내려서 일벌백계를 내릴 필요가 있다.'라는 여론이 대세였다.그런데 신각을 참하라는 명을 받은 선전관이 떠난 후 승전보가 도착했다. 조정에서는 급히 사람을 보내 사형 집행을 멈추려 했지만 도착했을 땐 이미 신각의 목이 떨어진 다음이었다. 억울하게 죽은데다 90살 노모까지 봉양하고 있어 신각의 죽음을 들은 사람치고 원통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본디 유순한 성격으로 남을 모함하거나 해코지하는 일이 없었던 김명원은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멀쩡한 장군을 죽게 만든 것에 책임을 느꼈는지 정유년 선조가 작정하고 이순신을 쳐내려 했을 때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았고 이순신의 구명과 재기용에 힘썼다.
신각과 함께 참전한 이양원과 이혼도 끝이 좋지 못했다. 이양원은 선조가 요동으로 파천했다는 오보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아서 식음을 전폐하다 사망했고 이혼은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를 공격할 때 왜군에 협력한 백성들에게 살해당했다.
5. 창작물에서
징비록(드라마) 18화에서 등장한다. 양주에 주둔하던 신각이 척후를 통해 일본군이 왔다는 보고를 듣자 매복하기로 하였고 풀숲에서 선조의 다음 도피처를 살피러 척후를 나간 소규모의 가토군 소속 일본군이 지나는 곳을 매복했다가 신각이 일본군 전방에 나서는 것을 시작으로 병사들이 좌우에서 나와 일본군을 덮쳐서 모두 몰살시킨다. 영상 보기이 문서의 2015년부터의 저작자는 이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1] 조선 육군의 첫 승리. 군 전체의 첫 승리는 5월 7일 이순신의 옥포 해전.[2] 사실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은 기강 전투이지만 의병들의 비정규전이었기 때문에 조선군 자체의 최초 승전은 옥포 해전, 육지에서의 최초 승전은 해유령 전투로 분류하는 듯하다.[3] 이양원은 전직 우의정인데 김명원은 이때까지 판서직을 역임한 게 다였으니 명령 계통이 제대로 발휘될 리가 없었다.[4] 일단 기재사초 하에 있는 '임진일록 1(壬辰日錄一)에 의하면 12일에 이양원이 이일, 신각 이하 장수 10여명과 군사 5천여명과 함께 대탄에 주둔하여 진격을 도모하고 있다고 김명원이 아뢴 것을 보아 전투 이전에 연락이 한번 닿았던 걸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