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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유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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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군 좌독기_White.svg 임진왜란 조선 육군의 주요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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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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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유령 전투
蟹踰嶺戰鬪
시기 1592년 6월 25일 (음력 5월 16일)
장소
조선 경기도 양주 해유령
원인 탄금대 전투 이후, 왜군의 북진.
교전국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지휘관 신각
이양원
이혼
이시언
지휘관 불명[1]
병력 병력 규모 불명 약 70 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전멸
결과 조선군의 첫 육전 승리.[2]

1. 개요2. 배경3. 진행4. 결과5. 창작물에서6. 여담

[clearfix]

1. 개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음력 5월 16일에 해유령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이자, 조선 육군의 첫 승전이다.[3]

2. 배경

4월 28일 신립이 탄금대에서 참패하면서 왜군의 한양 진군을 저지할 수단이 사라졌다. 한양에 남은 군사는 4천 5백(실록)에서 7천(징비록)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정예들이 모두 신립 휘하로 차출되어 갔다 전사해 질적으로나 사기로보다 도저히 제대로 된 방어전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에 조정은 4월 30일 새벽 파천을 단행했고 도원수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 유도대장 이양원을 남겨 한강 방어선을 담당케 했다. 왜군과 수적, 질적 차이가 너무 심하고 제대로 지휘권을 행사할 입장도 되지 못해[4] 방어가 어렵다 여긴 김명원은 군을 물리려 했는데 사기가 심각하게 저하되어 있던 병사들은 지휘부가 퇴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마자 붕괴했다.

조정은 5월 3일 개성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며 김명원에게 임진강에 방어선을 치고 적을 막게 했다. 하지만 임진강에 도착한 김명원은 자신과 합류해야할 부원수가 보이지 않음을 알아챈다.

3. 진행

김명원과 합류하지 않은 신각은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양주의 산 속으로 들어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전열을 정비하다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이 이끄는 군사들과 합류해 반격을 기도했다.

5월 16일 신각은 한양에서 나와 흩어져서 민가를 노략질하던 소수의 왜군을 복병으로 격파, 60여 명을 죽였다. 개전 이래 최초의 육전 승리였다. 이때 신각은 백마를 타고 있었는데, 죽인 왜군들의 피가 말에 묻어 백마가 붉게 변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으니 편제상 당연히 합류해야할 도원수와 따로 움직이면서도 신각, 이혼, 이양원 중 누구도 장계를 올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일이 상주, 탄금대에서 연패하는 와중에도 장계를 꾸준히 올렸다는걸 고려하면 명백히 이들의 실책이었다. 기재사초에서는 김명원이 이미 양주에 있는 이양원과 신각의 소재와 병력을 파악했으며 힘을 합쳐 한강을 수복하겠다는 장계를 보낸 것으로 보고를 정정한 바 있다. 굳이 신각을 변호하자면, 전시의 혼란 탓에 미처 장계를 올릴 여유가 없었거나 혹은 장계를 분명 보내긴 했는데 전령이 중간에 사고가 발생해서 늦어졌을 가능성은 있다.

4. 결과

장계 한장 없이 어디서 뭘 하는지 알 길이 없는 부원수를 두고 김명원은 여태껏 많은 장수들이 그랬듯 적전도주한 것으로 판단하여 신각이 이양원을 따른다는 핑계로 도망갔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이 보고를 받은 비변사는 우의정 유홍이 주도하여 신각의 참형을 건의했고, 선조는 허락한다. 신각이 어디 군수나 병사도 아니고 부원수라는 걸 감안하면 성급한 감이 없잖은 결정이었는데 개전 직후 온건한 성향인 류성룡이 탄핵당하고 강경파 신료들이 득세한 영향으로 보인다. 게다가 당시 전황은 지극히 불리한 상황이었고 이 탓에 '일단 누구라도 걸리면 엄벌을 내려서 일벌백계를 내릴 필요가 있다.'라는 여론이 대세였다.

그런데 신각을 참하라는 명을 받은 선전관이 떠난 후 승전보가 도착했다. 조정에서는 급히 사람을 보내 사형 집행을 멈추려 했지만 도착했을 땐 이미 신각의 목이 떨어진 다음이었다. 억울하게 죽은데다 90살 노모까지 봉양하고 있어 신각의 죽음을 들은 사람치고 원통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본디 유순한 성격으로 남을 모함하거나 해코지하는 일이 없었던 김명원은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멀쩡한 장군을 죽게 만든 것에 책임을 느꼈는지 정유년 선조가 작정하고 이순신을 쳐내려 했을 때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았고 이순신의 구명과 재기용에 힘썼다.

5. 창작물에서

징비록(드라마) 18화에서 등장한다. 양주에 주둔하던 신각이 척후를 통해 일본군이 왔다는 보고를 듣자 매복하기로 하였고 풀숲에서 선조의 다음 도피처를 살피러 척후를 나간 소규모의 가토군 소속 일본군이 지나는 곳을 매복했다가 신각이 일본군 전방에 나서는 것을 시작으로 병사들이 좌우에서 나와 일본군을 덮쳐서 모두 몰살시킨다. 영상 보기

6. 여담

해유령 전투가 임진왜란 중 조선 육군과 수군을 통틀어 최초 승리라는 주장이 있다. 일종의 해프닝에 불과한 주장이나 이 문서에 너무 오래 기재되어 있었기에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위에 기재된 바와 같이 5월 16일의 해유령 전투는 5월 7일의 옥포 해전보다는 명백하게 나중에 일어난 전투임이 명백하므로, 전체 조선군의 최초 승리는 옥포 해전이 맞다. 이 설은 위 5월 16일이라는 날짜에 불구하고, 신각이 참수된 날이 임진년 음력 5월 1일(선조 수정 실록)이므로 전투는 그 이전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그 논거로 들고 있다. 그런데 선조실록 25년 5월 18일 기사를 보면 비변사가 부원수 신각을 명령불복종으로 군법에 회부할 것을 청한 것이 5월 18일이므로, 신각은 최소한 5월 18일 이전까지는 생존해 있었다. 선조수정실록에서 기사 거의 대부분의 날짜가 1일로 맞춰져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1일이라는 날짜를 그대로 맹신함으로써 착각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인식이 퍼지는 데에는 임진왜란을 대중에 소개하는 서적들의 영향도 큰데, 대개 서적들은 전쟁의 전개를 직관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일단 선조가 의주까지 파천하는 것을 설명한 다음에야 이순신 이야기를 꺼낸다.[5] 그런데 신각의 참수는 선조의 파천 과정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부분이라 먼저 언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문서의 2015년부터의 저작자는 이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이었다는 말도 있다.[2] 조선군 전체의 첫 승리는 5월 7일 이순신옥포 해전이다.[3] 사실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은 기강 전투이지만 의병들의 비정규전이었기 때문에 조선군 자체의 최초 승전은 옥포 해전, 육지에서의 최초 승전은 해유령 전투로 분류하는 듯하다.[4] 이양원은 전직 우의정인데 김명원은 이때까지 판서직을 역임한 게 다였으니 명령 계통이 제대로 발휘될 리가 없었다.[5] 고니시 유키나가 이하 제1군이 평양성에서 군량문제로 진격을 중단하기 전까지는 이순신의 승전이 전쟁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