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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행주 대첩 幸州 大捷 | ||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 1593년 (선조 26년) 3월 14일 (음력 2월 12일) | |
장소 | 조선, 행주산성 (現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 |
원인 | 일본, 조선의 한양탈환 저지 도모(圖謀). | |
교전국 | <rowcolor=black> 조선 (수세) 승 | 일본 (공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권율 (전라도 순찰사) 최철견 (전라도 도사) 선거이 (전라도 병사) 조경 (전라도 조방장) 고성후 (익산군수) 신경희 (고산현감) 권순[1] 처영 정걸[2] 김천일 | 지휘관 우키타 히데이에 (8군)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6군) 고니시 유키나가 (1군) 구로다 나가마사 (3군) 모리 히데모토 모리 히데카네 킷카와 히로이에 안코쿠지 에케이 호소카와 다다오키 이시다 미츠나리 오타니 요시츠구 시마 사콘 소 요시토시 마시타 나가모리 마에노 나가야스 가토 미츠야스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스에츠구 모토야스 요시미 모토요리[3] 나카야 젠시로[4] † 토자키 히코에몬[5] † 아카시 요에몬 † 요시카와 히로이에 아사노 나가마사 |
병력 | 조선군: 3,000명 | 일본군: 30,000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조선의 대승 | |
영향 | * 일본 최고 지휘관 포함 지휘부 다수 사상 * 일본군의 한양 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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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산도 대첩, 진주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이다.1593년 음력 2월 12일 하루 동안 벌어졌다.
조선 육군의 3대첩으로 꼽히는 이치 전투와 마찬가지로 권율 장군이 총지휘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에서 "누구 때문에 우리가 전쟁에서 진 것이냐?"라는 식의 책임 공방이 벌어졌는데, 여기서도 행주대첩에서 패배한 장수들이 원흉으로 지목되었을 정도로 임진왜란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친 전투이다.
행주대첩 민족 기록화 (행주산성 대첩기념관 소장) |
2. 배경
명나라군이 내려오면서 일본군은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한 부대까지 일제히 남하를 시작했다. 평양을 잃고 한양에 집결한 일본군은 함경도에서 오고 있는 가토 기요마사를 위해서라도 더이상 후퇴를 할 수 없었고, 급하게 남하하는 명군과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벽제관에서 격돌하였다. 그러나 전투결과 일본군의 대승으로 명군의 남하는 멈추었고 도리어 일본군의 사기가 오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상한 조선군은 행주에 주둔하고 있던 권율의 부대를 포함해 양천의 전라도소모사 변이중, 금천에 전라병사 선거이, 양주에 경기방어사 고언백[6], 파주에 부총병 사대수, 순변사 이빈, 그리고 통진에 충청감사 허욱 등 이들 휘하의 다수의 조선군 소속 군단들이 전개되어 한양을 압박 포위하고 있었다.이윽고 명군과의 전투에 승리한 일본군도 한양의 서북방 전방인 행주성에 조선군이 집결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독성산성 전투 이후 명나라군과 한양 합동작전을 위해 행주성에 주둔중인 전라도 순찰사 권율 휘하의 조선군 3천이었다.[7]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음력 1월 27일)에 이어 보름 만에 이 권율부대에게 재차 호전적 반응을 보이며 10배에 이르는 3만 대군을 모아 공격에 나선다(음력 2월 12일).
행주산성은 백제 시대 축성된 곳으로 내성인 석성과 외성인 토성이 있으며 밖으로 목책을 2중으로 두르고 있었다. 또한 한양 탈환을 위해 천자총통과 같은 각종 화포 그리고 화차(변이중 화차)[8] 등을 배치하여 적을 대비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석성은 없었다고 봤으나 2017년에 석성 일부가 발견되었고 2019년 조사결과 산 정상부에 450m 길이의 석성이 축성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여기 있던 조선군은 고작 약 3천(2880명)이었는데, 김천일[9]과 승병장 처영의 의병을 포함한 것이다.
반면 일본군의 총대장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였으며, 2군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리장을 받아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도 이 전투에 참가했다. 3만의 대군세를 7개 부대로 나눠 차례로 공격해 왔었는데 1군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2군을 이시다 미츠나리, 3군을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지휘하였다.
3. 전개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군은 화차,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화기를 이용하여 총탄과 화살, 돌 파편 등을 쏘아 날리며 방어를 펼쳤다. 그리고 조선군에겐 다행히도 일본군 수뇌부의 상황 판단은 매우 늦었고 게릴라나 제파 전술은커녕 변변한 공성 장비도 없이 무조건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일본 1군은 궤멸, 2군은 큰 피해를 입고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3군의 구로다 나가마사는 약간 머리를 굴려 누각을 짓고 총병과 궁병을 올려 총포와 활을 쏘아가며 공격하는 전통적인 공성 전술을 펼쳤다. 그러나 구로다가 간과한 게 있었는데, 조선 육군은 조선 수군이 사용하는 천자총통을[10] 보유하고 있었고[11] 포 사격으로 누각을 보병째로 손쉽게 파괴했다.[12]
1군, 2군, 3군이 모두 조선군에 타격을 주기는커녕 되려 털려서 돌아오자 슬슬 열이 뻗혔는지 총대장이었던 4군의 우키타 히데이에가 직접 진격하였다. 이 공세에 바깥쪽 목책이 뚫리면서 조선군은 내책까지 후퇴했고 자칫 방어선이 붕괴할 수도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 오고 만다. 그래서 조선군은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가 있는 중군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화력을 집중시켰다. 당시 행주성 주둔 조선군은 총통, 그리고 승자총통 다수를 신기전 틀에 고정시킨 변이중화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아마 비격진천뢰와 박격포인 완구 또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 화려하게 장식돼서 표적으로 안성맞춤인 우키다의 깃발 부근에 집중해 갈겨버린 것. 이 화포 공격으로 총사령관 우키타와 2군 지휘관 이시다 미츠나리가 부상을 입으면서 일본군 4진도 물러나 위기를 벗어나게 된다.[13]
4군이 박살난 뒤,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가 지휘하는 5군은 화공 전술을 택해 내책에 불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조선군은 화공을 예상하고는 미리 물을 준비해 두었고 5군의 화공은 간단히 파해되었다. 조선군은 방어로 그치지 않고 되려 반격을 가해 5군을 후퇴시키고 킷카와에게 부상을 입히는 성과까지 거뒀다.
일본군 6군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와 고바야카와 히데카네(小早川秀包, 毛利秀包)가[14] 지휘하는 군세였는데 서쪽의 비교적 완만한 비탈면을 올라와 공격하였다. 하지만 성벽을 지키고 있던 승병들이 느닷없이 석회(혹은 재) 주머니를 터뜨려 뿌려대는 바람에 6군은 일시적 실명과 호흡곤란을 겪으며 무력화된 후 오히려 출격한 조선군에게 격퇴되었다.[15]
그러나 위기는 조선군이 아침부터의 싸움에 지치기 시작한 이때부터였다. 이후 6군에 이어 들어온 노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16]의 7군이 승병들이 지키던 서(북) 쪽을 뚫고 성 내부로 들어오면서 승장 처영과 권율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일본군은 가히 인해전술이라 할만한 물량으로 조선군을 몰아붙였고, 일본군이 장기로 삼는 백병전이었지만 조선군도 필사적으로 싸운 터라 이 전투에서는 쉽게 밀리지 않았다. 이때 권율은 구리 가마솥을 머리에 쓰고 지휘하다가 지친 병사에게 쓰고 있던 솥을 벗어 물을 따라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쯤, 조선군 앞쪽 진에서는 화살이 모두 다 소모되어 투석으로 맞서 싸웠는데 여기서 민간인들, 특히 부녀자들이 돌을 날라 도왔다는 야사가 전해지기도 한다. 또 권율이 과로로 잠깐 쓰러지자, 동생 권율과 외모가 비슷했던 형 권순이 대신 지휘했다는 야사도 있다.
조선군의 화살이 떨어지며 패색이 짙어질 때쯤 기적 같은 구원이 도착했다. 충청 수사 정걸이[17] 배 2척에 화살 수만 발을 실어 한강을 거슬러왔던 것. 게다가 양천으로 가는 수십 척의 전라도 조운선이 지나갔는데 이것이 일본군에게는 이순신이 인솔하는 조선 수군의 원군으로 보이기 충분했다. 이들이 적의 후방쯤에서 내릴 기색을 보이자 일본군도 당황[18][19] 하여 비로소 물러나기 시작했는데 이때 조선군이 이를 추격하여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이때 일본군 1백여 명 이상을 참살했다고 한다.
4. 결과
이렇게 길게 이어지던 전투는 유시(저녁 5시~7시)가 되어 어둠이 내리자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한양 방위를 위해 소수의 3천 조선군에 비해 10배가 넘는 병력을 동원할 정도로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일본군이었으나, 결국 큰 사상자를 내고 도로 후퇴하고 말았다.이 전투가 끝난 후 권율은 주위에 널려 있는 일본군의 시체들을 모아 찢어버린 후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다. 일본군에 대한 권율의 적개심이 폭발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듯.[20]
행주대첩에서 수적으로 10배 우세했음에도 패전했던 미츠나리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병력은 1.5배 우세하고 공격조건도 좋았음에도 또 참패한 뒤 참수되었다. 반면 권율은 이몽학의 난을 제압하고 전후 이순신, 원균과 함께 선무일등공신에 책봉되었고 벼슬은 한성부판윤(현재의 서울특별시장)까지 이르렀으며 사후 충장(忠莊)라는 시호까지 받아 후세에 이름을 길이 남겼다. 말 그대로 단두대 매치였던 셈이다.
5. 영향
행주 대첩의 승리를 듣고서야 평양으로 회군하던 명나라의 군대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나흘 뒤인 2월 16일 권율은 파주 산성으로 군세를 옮겨 정세를 관망하게 된다. 일본군은 파주 공격을 계획했으나 출진 중도에 되돌아갔다. 이 전투로 인해서 벽제관 등지에서의 승리로 다시 연합군에 대한 반격을 꾀하고 있던 일본군을 완전히 몰락시키게 된다. 이 전투 이후 약 2달간의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소강기간이 있었다. 이 기간에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일련의 접촉이 오고갔고 일본군 전군이 한성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산 등지로 철수하는 대신 철수하는 과정에서는 연합군이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21] 결국 4월 18일 한성에서 패퇴하며 일년만에 조명연합군이 수도인 한성을 수복했다. 후에 권율은 이 공으로 도원수가 되었다.[22]일본군은 이 패전을 뼈아프게 여긴 모양이다. 우병사 김응서[23]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신이 만나서 대화를 했을 때 행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실록
병사가 '당신들이 경성에 있을 때 대패한 곳이 있는데, 그때 왜인이 죽은 자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왜사가 '과연 경성 서쪽 20리 밖에서 접전하여 승리하지 못하였는데, 전사자가 4백여 인이나 되었다.' 하기에, 병사가 '왜 4백 명이라 말하는가? 당신들이 실어가지 못하고 길가에 버려진 자를 주워 벤 것도 오히려 4백~5백이 넘고 불에 탄 뼈도 산처럼 쌓였었는데 어찌 4백여 인일 뿐이겠느냐?' 하자, 왜사가 웃으며 '전사자가 과연 많았고 부상자도 많았다..[24] 그 당시 제장이 분을 이기지 못하여 각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며 서로 맹세하고 기필코 다시 싸워 보복하려고 근처에 있는 왜병 10여만 명을 불러 모아서 날을 택하여 거사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조선 장수가 파주(坡州)로 진을 옮겨버렸다. 파주 산성은 공략하기가 행주 산성보다 더 어려웠기 때문에 행군하다가 중도에서 되돌아왔다.' 하니, 병사가 '파주에 진치고 있는 군사도 그 수가 많지 않았는데 당신들의 10만 병력으로 무엇 때문에 중도에서 파하고 돌아갔느냐?' 하니, 왜사가 '행주는 진 밖에 암석이 간간히 있어 위에서 돌을 굴리면 바위 사이에 피신하여 혹 죽음을 면한 경우도 있었지만, 파주의 진은 돌을 피할 곳이 조금도 없어서 이것이 염려되어 결국 싸우지 못하였던 것이다. 조선 장수가 높은 봉우리에 진을 치고 돌무더기를 많이 쌓아 놓는다면 우리 군사는 가까이 다가갈 리가 만무하다.' 하였답니다.
사실인지 확실치 않지만 일본군 장수들이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어 복수를 맹세했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당시 패배를 분해 했음을 알수 있다. 결국 반격은 어불성설이고[25] 한양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결국 한양을 버리고 퇴각했다. 여러모로 행주 대첩이 정말 큰 의미가 있었다는 이야기.
실록 내용을 잘보면 고니시측 사신은 허세를 떨지만[26] 정작 행주대첩의 그 조선 장수가 통문하고자 하는 현 도원수인 권율임을 고니시 측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27]
이 전투가 일본 전국시대 최대 전투인 세키가하라 전투에 영향을 끼쳤으리란 추측도 있다. 서군의 핵심인물들 다수가 행주대첩에 참전했었는데, 이때의 패배로 인해 리더십이 상당히 깎여서 서군의 결집력이 약해졌다는 것이다.[28]
경기도 고양시에는 행주대첩 승전에서 따온 승전로가 있었고 권율 장군의 시호인 충장공에서 따온 충장로, 권율 장군의 이름을 딴 권율대로라는 도로명이 있다. 승전로는 2011년 도로명 개편에 따라 중앙로에 통합되어 사라졌다.
권율의 명성을 크게 높인 대첩이지만, 정작 권율 본인은 생전에 행주대첩보다 이치 전투를 더 높이 평가했다(이항복의 백사집 출처). 이치 전투 문서에 해당 내용이 나와 있다. 요약하면 권율 본인이 생각하기엔 오히려 이치 전투가 더 어려운 싸움이었음에도 행주전투에 비해 공이 덜 드러났다는 것이다.
6. 오해
본문 최상단 기록화의 부분도 |
행주산성은 그동안 석성이 아닌 토축산성으로 알려졌으나, 2017년에 석성의 일부가 발견되었고, 2019년 말의 발굴 결과 실제로는 삼국시대에 지어진 석축산성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한양 백성들까지 합세하여 돌로 적을 때리는 처참한 전투를 펼쳤다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전라도에서 올라온 조선군 정규군에 소수의 승병이 합세한 정규군 간의 공방전이었다. 당시 행주산성 주변에는 민가도 없었으며 워낙 급작스럽게 촉발된 전투라 야사와는 달리 일반 백성들이 전투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
행주산성은 입구가 좁아 대규모 병력이 한번에 다 들어오지도 못하며 심지어 일대가 습지로 진격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한강과 한강의 지류가 합쳐지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지형 자체가 호리병 모양의 배수진이 된다. 대략 일본군이 북방과 서방에서 돌아서 침공했고 동쪽과 남쪽이 한강으로 막혀있었다.[29]
행주치마가 행주산성에서 백성들이 돌을 모으기 위해 입은 치마라 행주치마가 되었다는 주장은 행주라는 지명에서 상상으로 나온 순전한 낭설이다. 행주 대첩이 일어나기 두 세대 전인 1517년 최세진이 쓴 '사성통해'와 1527년에 지어진 훈몽자회에 이미 행주치마란 단어가 사용된다. 그러나 고양시에선 해당 사실들을 인지하고 있으나 고치거나 알릴 의향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7. 대중 매체에서
명성에 비해 영화나 드라마로 영상화된 예가 적다. 그래서 인지도에 비해 어떻게 보면 대중들이 정확히 아는 부분보다 잘못 아는, 잘못 알려진 부분이 더 많은 대표적인 역사가 행주대첩이다.
1985년 방영된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29회 후반부에서 다루었다. 전투배경부터가 약간 오류가 있는 게, 식량난에 시달리던 왜군이 행주산성의 군량을 얻기 위해서 행주산성을 공격한다는 황당한 설정이다. 그리고 제작 여건 탓인지 등장인물들의 발언이나 해설에서는 분명 버려진 토성에서의 전투라고 하는데, 정작 화면에는 석성으로 묘사하는 오류를 냈다. 더불어 행주치마 속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 전투에 나서는걸로 묘사된다. 장점으로는 승자총통,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대완구, 비격진천뢰와 문종총통화차, 문종신기전화차 등 각종 무기들이 등장하며 이런 무기가 나올 때마다 자막으로 이름을 표기하였다. 21세기에 나온 사극들도 조선시대 무기체계를 이렇게 다양하게 다룬 작품은 없다. 실제로는 임진왜란때에 쓰인 기록이 없는 투석기까지 등장하며, 보병 개인무기로 횟가루를 주머니에 넣어서 왜군에게 집어던지기도 한다. 왜군들도 공성탑을 만들어서 공격하기도 하고 조선군이 총통으로 공성탑을 파괴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본래 왜군 측 총사령관이었어야 할 우키타 히데이에가 등장하지 않는 바람에 고작 1군 대장에 불과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7군까지 몽땅 지휘하는 걸로 나온다. 다만 왜장들이 부상당한 기록 자체는 참고했는지 중간에 권율이 쏜 화살에 이름 모를 왜장 하나가 나가 떨어지는 장면이 묘사되기도 했다.
뷁하라는 블로거가 놀라운 고증의 만화를 그린 바 있다.(링크만 허용)[30]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포가튼에서 추가 시나리오에 Siege of Haengju라는 제목으로 행주 대첩을 다룬 시나리오가 포함되어 있다. 몰려오는 일본 보병을 포격탑과 성 등으로 방어해야 하는 시나리오. 다만 이 게임이 본래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모드팩이었는데, 모드팩 버전에만 포함되어 있고, 정식 발매된 스팀 HD 판에서는 이 시나리오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 주의.
임진록1에서 조선군 6번째 임무가 행주대첩이다. 한강을 끼고 있어 보급품을 실은 수송선이 들어오긴 하는데, 길목 중간중간에 왜군이 있어 처리하지 않으면 보급은 꿈도 못 꾼다.
임진록 2의 조선 6번째 임무도 행주대첩이다. 이번에는 사명대사가 3시 방향의 화계사로 가서 기우제에 쓰일 부적을 얻고, 기우제를 지내서 아직 덜 자란 감자를 완전히 자라게하는 동시에 강물을 불어나게 해서 지원군의 수로를 열어야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19세기에나 대중화된 작물인 감자를 전쟁이 한창일 때부터 기르고 있다는 고증 오류가 있다.[31] 무엇보다도 사명대사가 거기서 대체 왜 나오는지가 문제이긴 하나 일단 승병장 처영 대신 나온 것으로 보인다.
7.1.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
1992년에 방영한 KBS의 4부작 다큐멘터리인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에서는 집중적으로 다루었다.권율이 행주 산성에 진을 쳤으나 병력이 너무 모자라서 인근 주민들까지 깡그리 그러모아 어떻게든 진지를 구축했다. 때마침 예전에 이순신이 권율에게 쓰라고 함포 다수를 건네준 게 있었다. 행주 산성은 성이라기보다는 언덕에 더 가까웠고 성벽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목책을 세워 성벽을 대신했다.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병졸 하나가 슬슬 눈치를 보더니 도망치려 한다. 이걸 권율이 적발했고 권율의 지시에 따라 종사관 하나가 그 포졸을 베었다.
드라마가 아닌 다큐이다 보니 조선 왕조 오백년보다 정사의 기록을 충실히 반영해 토성에 목책을 치고 방어하는 모습이 정확히 고증되었으며 행주 치마를 두른 민간인은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았다. 심지어 권율이 투구에 물을 담아 병사들에게 나눠주는 모습까지 나오고 우키타 히데이에가 승자총통에 맞고 나뒹구는 모습까지 나오는 등 전투 상황을 충실히 고증해 내었다.
7.2. 징비록
징비록에서 32회 중반에 다루어졌다.
이천리를 통해 류성룡의 전갈을 받은 권율은 류성룡의 요청에 따라 수원의 독성 산성에서 한양과 가까운 행주 산성으로 군대를 이동시켜 명군의 공격에 맞추어 협공을 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류성룡의 예상과 달리 명나라 군은 독단적으로 움직이려는 조선군에 불쾌감을 표시하며 혼 좀 나보라며 한성 탈환에 소극적으로 나선다. 그 사이, 일본군은 벽제관의 승전에 자신만만해졌고 우키타는 다시 한번 저력을 과시하기 위해 행주 산성을 쓸어버리기로 결정하며 자신을 포함한 고니시와 이시다 등 3만의 일본군을 이끌고 행주 산성으로 향한다.
사실상 성의 기능을 상실한 행주 산성에 주둔하며 목책으로 보완하는 등 전투 준비를 하는 동시에 명군의 공격을 기다리던 권율은 일본군의 이동 소식을 듣고 급히 군사들을 잠에서 깨우고는 주먹밥을 직접 나눠주며 전투 태세를 갖추게 한다.
다음 날, 행주 산성에 도착한 일본군은 인해 전술로 속전속결하기로 함락시키기로 하며 고니시군을 먼저 보낸다. 그러나 고니시군은 기세 좋게 돌격했다가 목책에서 비격진천뢰로 환영을 받고 화차와 궁수로 강력하게 저항하는 조선군에 막혀 후퇴한다. 이후 몇번의 공격을 더하나 역시 실패한다. 한편, 류성룡은 행주 산성에 대한 지원을 위해 경기 수사 이빈에게 한강을 통하여 화살을 지원하도록 한다. 그러나 출발하기 전 이덕형을 통해 행주 산성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실책에 대한 자괴감에 빠져 자신이 직접 행주 산성을 지원하려 하다 이천리와 신명철에게 저지당하고 이덕형의 명으로 이빈은 급히 행주 산성으로 향한다. 그 사이, 행주 산성에서 조선군은 화살과 포탄을 모두 소진해버린다. 산성을 살피던 권율은 부상병들과 아녀자들이 행주 치마로 돌들을 날라오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하며 남은 군량을 모두 풀어 백성들과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도록 한다.
한편, 우키타는 번번히 산성 공략이 실패하자 분개하며 한성이 무방비란 것을 명군이 알게 되었을 것이라며 모든 군대를 동원하여 총공세를 하려한다. 군사들과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며 최후의 일전을 대비하는 권율에게 마침 경기 수사 이빈[32]이 도착하여 화살을 전해준다. 드디어 일본군의 총공격이 시작되고 수적 우세로 일본군은 첫 번째 목책을 뚫어버리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곧 일본군은 백성들과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에 주춤하고 지휘를 하던 우키타는 그를 발견한 권율의 명을 받은 조선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변이중 화차에서 발사된 승자총통의 탄환을 맞는 부상을 입는다. 결국 일본군은 분을 삼키며 철수를 하며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난다.
작은 스케일, 대승을 한 것 같지 않은 분위기와 더불어 이빈의 지원 시기와 일본군의 총공격의 불일치와 행주 치마 속설과 민간인 참전,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일본군 진영 장수 등의 오류를 일으켰지만 전장 묘사에서 구릉 위에 목책을 설치한 것과 사극에서 보기 힘든 화차와 변이중 화차[33]의 활약을 찍어 전투의 분위기를 냈다. 자세한 것은 징비록(드라마)/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문서 참고.
아무튼,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조선왕조 500년 이후 30년 만에 행주 대첩을 다룬 드라마란 점에서 나름의 의의를 가진다.
여담으로 오프닝 풀버젼이 세 번째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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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 신각 | 곽재우* | 권율 | 김면* | |
전투 | 청주 전투 (1592. 8. 1.) | 북관 대첩 (1592. 9. 16. ~ ) | 진주 대첩 (1592. 10. 6.) | 행주 대첩 (1593. 2. 12.) | |
주장 | 영규* | 정문부* | 김시민 | 권율 | |
* 의병장 | }}}}}}}}}}}}}}} |
[1] 권율의 형으로 백의종군중이었다.[2] 당시 수군으로 화살을 보급한 주체가 경기 수사인 '이빈'이라는 기록이 혼재하지만 기록상의 오류로 판단된다. 정걸은 또한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을 개발한 사람이기도 하다.[3] 모리씨 가신.[4] 요시미씨 가신.[5] 요시미씨 가신.[6] 고언백은 이후 노원평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킨 뒤 조선이 한성을 수복하는 데 기여한다.[7] #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원래 권율 휘하에 있던 군사는 4천이였다. 권율은 이들을 두 부대로 나눠 2천3백명은 자신이 직접 이끌고 행주성에 진을 쳤으며 나머지는 선거이가 이끌게 했다.[8] 변이중 화차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공식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고, 다만 변이중 문중에서 펴낸 문집의 묘비명과 화차 설계도, 이정구의 문집에 실린 묘비명, 17세기 중반에 쓰인 재조번방지 등이 있다. 자료가 아주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정할 정도로 신뢰성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변이중 문집에 실린 화차 설계도를 보면 화차 1대에 승자총통 40자루를 실었다. 또한 실제로 복원을 해본 결과, 전술적 가치 역시 뛰어났다.[9]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대장으로 싸우다 죽는다.[10] 이 화포의 출처는 권율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이순신이 왜군을 상대로 효과적이었다고 자기가 쓰던 것을 권율에게 양도해준 것이다.[11] 사실 이상한 건 아니었던 게, 이순신은 당시 조선 육군에게 화약과 화포를 공급하기까지 할 정도로 육군에 비해 여유가 있었다. 화약의 재료인 염초를 똥으로 제조 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내고 그것을 사용해 화약을 배치해낸 것이 이순신의 수군이다. 덕분에 이순신 휘하의 수군의 화약 보유량은 7년간 조선 육군이 쓴 양보다 많았다고 한다.[12] 함선 격침용으로 쓰는 함포를 사용했으니 수성용 무기로서의 파괴력은 물론이거니와 인명 살상력도 무시무시했다.[13] 이때 우키타 히데이에는 포탄 직격이라도 당했는지 거의 사망 직전의 치명상을 입었는데 일본군 병사들이 업고 도망쳐서 간신히 살았다.[14] 여담으로 모리 히데모토는 호이다 모토키요의 아들로 사촌인 모리 테루모토의 양자가 됐으며, 코바야카와 히데카네는 모리 모토나리의 막내아들로 형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되었다. 이후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환심을 사기 위해 히데카네를 폐적하고 히데요시의 조카인 키노시타 히데토시(이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로 개명)를 양자로 들이게 된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히데카네는 코바야카와 가문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처지에 있었는데,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배신을 때리며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자 원래 성씨인 모리 씨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이름이 두 개인 이유.[15] 석회나 재의 주성분은 수분과 격렬하게 반응하며 초강염기를 만들어내므로 주로 안구와 호흡기에 강렬한 고통을 유발한다.[16] 이치 전투에서 권율과 한번 싸운 바 있다.[17] 경기 수사 이빈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선조수정실록에만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직책이 경기 수사가 아니라 상황상 불가능한 전라 수사라고 기록된 경우도 있어 기록이 다소 혼란스러운 인물이다. 정걸은 이전의 기록인 선조실록에서 행주대첩 참전 당사자인 고산현감 신경희가 충청 수사 정걸이 화살을 보급해 주었다고 언급했다는 기록과 함께 이후 선조실록의 기록에서도 일관되게 나오기 때문에 현재는 정걸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18] 당시 이순신이면 일본군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왜군의 거물급 장수들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도 이순신 한마디 들으면 트라우마적으로 반응했다 한다. 이순신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수군 또한 베테랑 전사로 거듭나 있는 데다 연전 연승의 군대이다 보니 성 안에 합류하는 것 만으로도 조선군에겐 사기를, 적에게는 위압감을 느끼기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당시 조선수군은 움직이는 배 위에서 포격은 물론 사격과 근접전투도 하는 최정예 부대였다.[19] 거기다 여러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판옥선은 화포를 대량으로 운용하는 함선이며 이후 벌어질 왜교성 전투를 보면 알 수 있듯 이순신은 필요하면 성에다 포를 쏘아 공성전도 했다. 가뜩이나 위로는 산성에서 공격받고 있는데 판옥선의 화포가 닿는곳이면 아래에서 포격도 날아올 수 있으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20] 근데 사실 권율 한 명이 아니라 그 당시 조선 민중들의 생각이 이랬을 것이다. 예전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부모 자식이나 부부끼리 잡아먹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해서 사람까지 잡아먹는 상황이 되었다. 이 외에도 임진왜란에는 싸움에서 이기고 일본군 시체를 전부 태워버린다. 뭐, 적군의 시체를 하나하나 예를 갖춰서 매장해줄 만큼 예쁘게 봐줬을 리도 만무하거니와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을 가능성도 크다. 역병을 방지할 목적일지도 모르고.[21] 이러한 합의가 이루어졌음에도 조선군은 단독으로 패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요격을 시도하였으며 일본군은 진주성을 공격해 혈전을 벌여 자신도 괴멸적인 심각한 피해를 입어가며 1차 진주성에서의 참패에 대한 복수를 하는 등 서로간에 이 합의를 지키지 아니하였다.[22] 이때 도원수가 되었기에 권율은 훗날 나라망신을 시킨 원균을 잡아다가 곤장을 때릴 수 있었다.[23] 4차 평양성 전투에 참여했고 강화협상 기간에 일본인 포로, 항왜들을 통솔하곤 하였다. 이순신이 누명을 쓰게 만든 원인인 이중간첩 요시라도 김응서가 매수한 인물이다. 이렇듯 일본인과 잘통해서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를 만났다면 고니시 쪽은 김응서가 자주 접촉 하였다. 이후 사르후 전투에 참전하여 포로가 되었는데 후금의 정황을 조선에 몰래 보내려한 것을 강홍립이 고발하여 처형된다.[24] 재미있게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측 자료를 모아 발간한 일본 전사 조선역에서는 이보다 더 적은 200명 외 다수가 사상했다고 기록한다.#[25] 그 와중에 파주산성으로 떠나지만 않았다면 10만 명을 모아서 공격했을 거라고 허세도 떤다. 실제로는 10만은 황당한 과장이고(애시당초 1차 침공시 왜군 병사 수가 15만도 안됐다. 1년간 소모되었으니 당연히 10만은 어불성설.) 한양 주둔군의 병력도 태반이 부상병이었다. 당장 한성 인근 양주, 파주, 양천, 금천 등이 죄다 조선군에게 장악되어 있었고 3군이 기껏 확보했던 청주성마저 조선군에게 수복되어 한성의 일본군은 영남대로를 통한 육로보급으로 간신히 연명하던 상황이었는데 이조차도 경상도 일대를 중심으로 한 조선군 및 의병의 준동으로 위태로웠다.[26] 윤두수의 주도로 벌어진 장문포 해전에 대해 김응서가 떠보듯이 물어보자 고작 2백명만 남은 성 하나 점령하지 못했다고 비꼰다. 하지만 이후 한국과 일본 기록들을 보면 당시 조선은 장문포의 병력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27] 전쟁당시 일본 기록에 조선측 지휘관의 이름이 적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오히려 일본에 이순신, 권율의 이름이 퍼지게 된 것은 전쟁 이후 징비록의 복제본이 일본에 퍼지면서 부터이다. 그전에는 김시민의 이름을 몰라 모쿠소 호간이 되거나 한극함의 직책인 절도사가 세루토스가 되어 정문부의 역할을 대신하는 등 적의 지휘체계 부터 조선의 지명까지 잘못이해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반대로 조, 명은 일본군 지휘관 이름을 어느정도 파악하여 적는데 이는 포로 심문도 있지만 고니시가 의주에 있는 선조를 도발할 때 지휘관 이름들을 손수 작성하였기 때문이다.[28] 특히 여기서 같이 지휘했던 이시다 미츠나리도 병법의 기본을 모르는 사람으로 낙인 찍혔고 결국에는 나중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쓴맛을 보았다.[29] [30] 이글루스 서비스 종료로 아카이브 대체[31] 게임 내내 쌀과 감자가 곡물로 환산되는데, 벼는 비가 내려도 다시 자라지 않지만 감자는 캐고 나서 비가 두 번 내리면 완전히 복구된다. 아예 이것을 위한 치트키도 있으며, 싱글플레이에서만 가능.[32] 위에서 말한것처럼 정걸이라는 기록과 혼재했으나 이빈이라는 설이 우세하여 이빈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33] 특히 변이중 화차의는 사극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던 병기라 꼽힐 수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화차의 모습은 흔히 아는 문종 화차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