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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한성부판윤 장의공(莊毅公) 조경 趙儆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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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db9e00> 출생 | 1541년 |
남양도호부 매곡면 (現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원리) | |
사망 | 1609년 5월 2일 (향년 67~8세) |
본관 | 풍양 조씨[1] |
자 | 사척(士惕) |
시호 | 장의(莊毅) |
가족 관계 | 부 - 조안국(趙安國) 모 - 권세임(權世任)의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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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무관.2. 생애
풍양 조씨의 집성촌인 매곡면에서 병마절도사 조안국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3년 41세의 늦은 나이로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 비변사 낭청, 제주목사를 지냈다. 1591년 강계부사로 재직하던 시절 유배와있던 정철에게 잘 대해줬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우방어사로 임명되었고 금산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지만 부상을 입고 패배했다. 겨울 수원부사로 발령받아 독산산성에서 고립되어 있던 권율의 부대를 구원했다. 권율은 그를 중군장으로 임명하고 조방장으로 변경되었다. 명군과 협공하기 위해 한성 인근에 진을 칠만한 곳을 물색하던 도중 행주인근을 발견하고 부대를 행주로 이동시켰다.
이에 일본군도 행주산성에 조선군이 자리잡았음을 확인하고 우키타 히데이에가 총대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해 들어갔다. 조경은 도원수 권율과 함께 병사들을 독려하고 각종 화포, 궁시를 활용해 공격을 물리쳤다. 이후 파상공세가 거세지며 성 내부에 일본군이 진입하자 화살도 떨어져 백병전에 돌입했으며 투석으로 대응했으나 점점 밀리고 있었다.
그런데 충청 수사 정걸이 이끄는 배가 도착했고 화살 2만발을 공수해 다시 궁시로 진입한 일본군을 밀어붙였다. 거기에 조운선을 일본군이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으로 착각해 퇴각하며 전투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 공으로 가선대부에 봉해졌지만 이이첨 등에게 탄핵을 당할 뻔했다. 낙상지의 기효신서를 받아들였으며 포도대장, 훈련도감당상을 거쳐 훈련대장이 되었다. 이후 함경북병사, 훈련원도정, 한성부판윤을 거쳐 1599년 충청병사, 회령부사를 역임했다.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책봉되었고 풍양군의 호칭을 받았다. 1609년 사망했다.
[1] 참판공파. 들목 조씨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