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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원 鄭期遠 | |
<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db9e00> 출생 | 1559년 |
전라도 남원부(現 전라북도 남원시) | |
사망 | 1597년 (향년 38세) |
전라도 남원부 남원성(現 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 | |
자 | 사중(士重) |
호 | 현산(見山) |
시호 | 충의(忠毅) |
본관 | 동래 정씨 |
부모 | 부친 - 정상신(鄭象信) 모친 - 이경(李璟)의 딸 전주 이씨(全州 李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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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문관.2. 생애
1559년 태어났으며 1585년 24세의 나이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주서가 되었다. 이후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다가 형조좌랑으로 임명되었다. 1588년 경연기사관으로 경연에 참관했다. 1589년 호조좌랑으로 임명되었으나 형조좌랑 당시 죄인을 추궁하는 것을 태만한 건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이후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고 1592년 형조좌랑에 다시 임명되었다.그 해 임진왜란 당시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1594년 의주 행재소에 복귀한 뒤 병조좌랑에 임명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했다가 곧 정랑에 임명되었다.
이 해 가을에 안악현감에 제수되고, 이듬 해 병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장령 겸 지제교가 되었다. 이후 사간원헌납, 홍문관수찬, 시강원문학, 사간원사간, 종부시정, 승정원동부승지, 우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 고급주문사로 다시 명나라에 가서 심유경이 강화회담에 실패하고 일본군이 다시 침입해올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보고했다.
이듬해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예조참판으로 명 부총병 양원의 접반사가 되어 남원성에 갔다. 남원 전투당시 양원은 일본군이 성 가까이 근접해 정기원에게 피신을 권유했으나 거절하고, 자신의 시종에게 “도적이 이미 남원 십리 밖을 침범했으니 머지않아 포위될 것이다.”이라는 내용과 함께 “소자는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라는 비장한 편지를 아버지에게 올렸고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의관을 차려입고 북쪽을 향하여 절한 후 순절했다.
양원이 조정에 돌아가 당시의 상황을 전했고 이에예조판서를 추서되었다. 이후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사를 더했다.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녹훈되었고, 내성군으로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