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11 17:54:30

고려시대

한국사 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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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9zoipyqmm1sqk8veo5_r2_400.png 고려
역사문화인물왕사왕비창작물고려와 고대국가의 비교고려와 조선의 비교


1. 개요2. 학계의 시대 구분3. 고려 초기4. 문벌귀족5. 무신정권 초기6. 최씨 무신정권7. 무신정권 말기8. 원 간섭기9. 고려 말기10. 여담
10.1. 원 간섭기의 유전적 영향

1. 개요

고려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

2. 학계의 시대 구분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9zoipyqmm1sqk8veo5_r2_400.png 고려의 시대별 사회지배계층 구분
호족문벌귀족무신권문세족신진사대부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9zoipyqmm1sqk8veo5_r2_400.png 고려의 대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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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요전쟁 여진정벌
통주 전투귀주 대첩천리장성동북 9성 공험진 전투 길주성 전투
여몽전쟁 요동정벌
귀주성 전투 동선역 전투 처인성 전투 오녀산성 전투 요동성 전투 개경 전투 }}}}}}
파일:고려의 영토 변화.png
고려의 영토 변화를 간략하게 나타낸 지도

서양의 역사학적 분류인 고대 - 중세 - 근대의 분류에서 중세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가는 논란거리이지만, 주류 학설에서 고려 시대는 중세로 보고 있다.

북진을 표방한 탓에 요와 충돌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벌어진 전쟁에서 승리했다. 요, 송, 금과 사대 관계를 맺어도 주권 국가로서 처신해 고려만의 독자적 천하관에 따라 내부에 번국을 설정하고 외왕내제 체제를 유지했다. 이 시기는 북방 민족이 가장 강성하던 시기여서 동아시아 세계에서 전체적으로 세력 균형이 이루어지고 각 국마다 황제국 체제를 유지하면서 상대의 황제국 체제를 인정한 탓이다. 이 탓에 거란과 여진을 한족과 다르게 여기는 몇몇 중국인들은 송나라 역사를 흑역사 취급하기도 한다. 수능에선 교육 과정 개편으로 인해 근현대사 위주의 한국사교육이 이뤄진 탓에 분량이 안습이지만 공무원 시험에선 전체 문제중 20%가 고려와 관련된 문제다.

크게 고려 전기 / 문벌 귀족기 / 무신 정권기 / 몽골 침략기 / 고려 말기로 나누어진다. 각각의 시대마다 지배 계층은 호족 / 문벌 귀족 / 무신 / 권문세족 / 신진 사대부로 나누어진다. 즉, 지배 계층의 교체가 활발했던 시기였다. 따져보면 문벌 귀족은 호족 시기에 6두품 지식인 관료였고, 문벌 귀족 시기 무신 역시 문벌 귀족의 끄나풀 같은 기믹이었으며, 무신 정권 때의 권문 세족은 정권에 빌붙던 삼별초나 문신들에서 생성되었다. 신진 사대부 역시 권문 세족의 바로 밑에 있던 향리들로 고려 때의 중인과 비슷했다. 때문에 귀족적 성격역동적 성격공존하는 묘한 양상을 보인다. 이는 아래의 내용을 보면 더 자세히 알겠지만, 국가의 시스템은 관료제 체제를 지향했으나 사회는 전대의 귀족 사회 형태를 상당 부분 유지한 게 크다 하겠다.

조선처럼 모두 조, 종으로 끝나지 않고 원 간섭기 시절이 워낙 개판이라 후반부에는 '충'자 돌림 왕들과 4대의 '왕'이 등장한다. 여기서 충(忠)자 돌림은 2등 시호고, 공(恭)자 돌림은 3등 시호다. 명나라가 고려 / 조선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우왕, 창왕은 폐위된 데다가 왕씨가 아닌 역적으로 몰려 "신우", "신창"이라고 기록되었다.

그래서 명나라가 책봉한 왕들이 공민왕 - 공양왕(양위의 의미) - 태조(강헌왕) - 공정왕(조선 정종) - 태종(역시 한자가 다른 공정왕)이 되는 것이다. 이후 명은 랜덤한 이름을 내려준 편이고, 청나라에서는 강자 돌림, 충자 돌림 위주의 시호를 내렸다.

그래서 조선의 '태정태세문단세'처럼 잘 외우지는 않는다. 할 수는 있다. 태혜정 광경성 목현덕 정문순 선헌숙예 인의종 명신희 강고원 충열선숙혜목정 공민 우창 공양 식으로 외우는 소수의 역사 매니아도 있다. 방식의 차이겠지만 작정하고 외우려면 시대별로 구분하면 어려울 것도 없다. 태혜정광경성목현(초기) / 덕정문순선헌숙예인(중기) / 의명신희강고원(무신기) / 열선숙혜목정(원 간섭기) / 공우창공(말기). 그냥 어디에 써놓고 한번씩 중얼거리면 정치사 틀이 잡혀있는 사람은 금방 외워지는 편이다. 산토끼에 맞춰서 자르면 잘 외워진다고 전파한 모 공시 국사 강사도 있다.

고려의 경우 태혜정광경성목현이나 예인의명 정도까지는 도움이 되는데, 덕정문순선헌숙까지는 워낙 잘나가던 탓에 새로 한 일이 없어서 별 도움이 안되며, 명종 이후부터는 그냥 개판이고, 충자 붙은 왕들은 이미 연대순 개념이 파괴된다. 충렬왕부터 충선왕, 충숙왕과 충혜왕처럼 재위했다 내려오고 복위한 경우도 있으니... 충렬 - 충선 - 충렬 - 충선 - 충숙 - 충혜 - 충숙 - 충혜로 요약된다. 그래서 별 도움이 안되고, 공민왕 이후는 하다보면 그냥 외워지는 식이다.

3. 고려 초기

후삼국통일전쟁 주요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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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신라·고려백제고려백제고려백제고려고려백제백제고려고려백제고려백제고려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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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6B3C4D4-B01B-4A41-9A06-732F68CB63BC.jpg 파일:북진_정책.jpg
후삼국시대의 영토 후삼국통일 직후
북진 이후의 영토
10세기 초반, 후기 신라(통일신라)가 중앙 귀족들의 왕위 다툼 속에 지방호족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자 지방 군벌들이 난립하는 후삼국시대가 벌어진다. 918년, 송악(지금의 개성특급시)의 대호족(옛 고구려 - 패강진 지역인 패서호족) 출신인 왕건이 자신의 군주였던 태봉(후고구려)의 궁예를 제거하고 세운 것이 시초. 국호가 고려인 건 당연히 고구려 계승의식을 나타냄과 동시에, 궁예의 고려(후고구려)라는 이름으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왕건은 견훤후백제와 악전고투를 거듭한 끝에 신라의 항복을 받고(935년) 왕위 다툼으로 어지러워진(이때 견훤이 고려로 망명) 후백제 및 군벌들을 누르며(936년) 다시 삼한을 재통일했다.

초창기에는 호족 연합 정권이라는 한계 때문인지 왕권이 불안정했고, 이는 2대 혜종, 3대 정종의 몰락과 요절을 초래했다. 이에 4대 광종5대 10국 시대의 혼란하던 중원이나 발해 등지에서 온 귀화인(쌍기 등)들을 적극 등용하고 중국식 중앙 집권화 관제(과거 제도)를 도입하며 고려를 이전 신라보단 한층 발전된 중앙 집권화 관료제 국가로 변모시켜 간다. 신라 하대의 첫 임금인 원성왕독서삼품과를 도입하기 했으나 하급 관리에만 제한이 되었다는 한계가 있었다는 점에서 광종의 과거제 도입은 그 의미가 크다. 이렇듯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들의 세력을 꺾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독자적 연호를 쓰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후 북송과 수교(960년)하면서 칭제건원을 폐기한다.
파일:220px-강동6주.png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획득한 강동6주


북방에서 발흥한 몽골계 유목민 거란의 1차 침입에서는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강동6주를 얻는다.(993년)

이후 중앙 내부의 권력 다툼과 혼란이 생긴다. 호족들의 발언권 강화와 천추태후, 김치양 등의 전횡, 강조의 정변과 왕위 교체 등이 연달아 발생하였다.

그리고 발해를 멸하고 새로이 등장한 거란족이 건국한 요나라와의 전쟁까지 겁쳐 다소 혼란기를 거친다. 요가 연운 16주를 넘어 본격적으로 중원을 노리기 전에 뒷통수 정리를 한답시고 고려를 세 차례에 걸쳐 침공했다가 매번 패배한 여요전쟁이다. 2차 침입 때는 수도 개경이 함락 당해서 현종이 나주로 피난했다.

다행히 요는 유목 민족 특유의 폭발적인 초기 성장 동력을 가지고있던 시기는 아니었다. 제대로 고려를 침략한 2차전쟁 당시의 요 황제 역시 요성종이다. 성종 Vs 성종 성종이란 묘호는 나라의 체제가 정비되고 안정된 시기에 붙여진다. 고려는 이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당시의 군사적 최강대국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결과, 요의 연호를 쓰는 선에서 타협하여 실질적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있었던 대표적 전투가 그 유명한 귀주대첩.
대 거란전쟁에서 승리한 고려로 인해, 아시아의 세계 질서는 재편된다. 거란을 제압한 고려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만주 지역의 철리국이 사신을 보내 고려에 귀부하기를 원하는 표를 올렸다. 연이어 탐라국이 곡물을 바치고, 흑수말갈의 추장이 찾아왔다. 고려는 주변 소국을 거느린 나라로 성장해 갔다. 고려는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송나라와 교류를 하고, 거란과도 교류를 하는 독자적인 세력이 된 것이다. 송나라를 대국으로 생각하던 고려의 태도도 달라졌다. 대등한 위치에서 발언권을 행사하려 했다.
2009년 11월 21일 역사스페셜 中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거듭되는 전쟁으로 무신의 힘이 증가하면서 고려 최초의 무신란인 김훈, 최질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사건들은 무신한테 권력을 주면 안 된다는 인식을 왕과 문신들에게 강하게 심어줬고, 이 일 이후로 군사권(지휘권)을 문신에게 일임시키게 되었다. 그래서 서희나 강감찬도 문신이다.

6대 성종과 8대 현종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유교와 불교를 혼합한 중앙 집권 시스템이 안정화 되고 요나라와의 전쟁도 종결되었다. 이후 고려는 16대 예종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전성기를 누리게 되며, 그 중에서도 11대 문종 시기를 고려의 국력이 가장 정점이었던 시기로 보고 있다. 동북아에서의 세력 균형으로 상대적 국력으로는 거의 고구려 전성기 이후와 현대 한국 이전의 최고를 자랑했다고도 볼 수 있다.

4. 문벌귀족

전성기를 거쳐가며 고려 건국 초 가장 위협이 됐던 요나라가 내리막을 걷자, 천리장성 너머 성장하던 여진족이 새로운 위험 요소로 떠올랐다. 이에 고려 16대 예종은 국경 안정과 농토의 추가적 확보 등을 위해 윤관에게 여진 정벌을 명하였고 소드마스터 척준경 등의 활약과 더불어 동북 9성을 확보하게 되었으나(1107년) 여진의 강력한 저항으로 결국 다음 해 돌려주게 되었다.

그러나 여진 정벌 직후 흩어진 부족들이 완안아골타 아래 통합된 여진은 금나라를 세운다(1115년). 금은 북송과 연합 작전을 벌여 요를 멸망시킨 뒤 다시 북송의 수도 카이펑을 공략하고 황제와 태자를 비롯한 다수의 포로롤 잡아갔다(1126년의 정강의 변). 고려는 그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같은 해 군신 관계를 맺으며 국가의 위신이 이전보다 떨어지게 되었으나, 두 나라의 관계는 외교로서 정리가 됐기에 전쟁은 없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재산이나 명예를 훼손하고 싶지 않아 군신 관계를 받아들인 것이다.

한편, 고려의 중앙 정치는 전성기를 거치며 과거제로 중앙 권력에 진출한 관료들이 공음전, 음서, 사학 등을 기반으로 자신의 가문을 귀족화하는 문벌 귀족의 시대가 갖춰지면서 모순이 쌓이기 시작한다. 문종 때 임금의 장인이었던 외척 이자연을 시작으로 경원 이씨(인천 이씨)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한 것. 이렇게 보면 문벌 귀족 사회는 건국 130년 ~ 150년만에 첫 출연한 셈이지만, 문종 이후로 숙종, 예종 등 왕권이 강한 왕들이 많았으며, 숙종은 경원 이씨를 물리치고 왕위를 얻었고, 예종은 경원 이씨와의 결혼을 강행할 만큼 권세가 강했다. 결국 이 50년 ~ 70년의 태평성세를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문벌 귀족 사회의 폐해, 정점이라 할만한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이 건국 200여년 즈음인 인종 때다.

17대 인종 때인 이자겸의 난과 함께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이 폭발되었다. 이는 기존의 문벌 귀족과 새로이 귀족 가문이 되고자 하는 신진 관료들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인종 때 벌어진 이자겸의 난, 서경천도운동, 그리고 18대 의종 대의 정치 상황은 모두 이런 갈등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러나 이자겸의 난 등의 혼란상에도 불구하고 대내외적으로 큰 문제는 없었기에 인종 대와 그 이후 의종 대의 사회는 표면적으로 50년간 다시 안정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문벌 귀족의 집권기 동안엔 송나라를 본딴 문신 편애 및 무신에 대한 차별이 심화되어 갔다. 아예 원조 문신 국가인 북송은 이 정책으로 나라가 유목민의 조공 셔틀이 되었다. 그런데 송나라의 국방력 약화는 문치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전 시대 절도사의 발호를 반면교사 삼아 내부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서만 짜인, 잘못된 군제의 탓이 컸다. 고려는 우선 국초부터 과거에 무과가 없었으며(예종 때 잠깐 실시되고 폐지), 무신은 승진에 제한이 있어서 높은 관직을 얻으려면 문신의 품계를 받아야했으며 전쟁에서 지휘권도 문신에게 있었다. 물론 이는 호족과 군벌의 성장을 막기 위한 조치였고, 강감찬, 윤관 등 유능한 문관 지휘관도 많았지만 문벌 귀족 시대가 계속 지속되면서 중앙 정치의 혼란과 함께 문관, 무관을 포함한 관료들 집단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이 자라난다.

5. 무신정권 초기

이런 문무 차별은 이에 따른 18대 의종 대에 향락에 빠진 왕과 전통적 무인 차별 그리고 문신 귀족들에 대한 무신들의 분노 속에 무신정변(1170년, 고려 건국 252년째)을 초래한다. 물론 무신의 정변 자체는 대단히 우발적이었으며, 의종의 집권 초기 무신 우대 정책이 도리어 무신의 난의 힘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점에서 왕실과 귀족 대립 사이 자연스레 무사들이 신분으로 부상한 일본의 막부와는 다르다. 이후 고려 왕은 실권은 없는 상정성만 있는 허수아비 존재로 전락하고, 실권은 무신 실권자들이 장악하는 무신정권이 열린다. 허나 무신들이라고 뭐 문신들하고 딱히 다를 바는 없어서, 그냥 지배 세력 이름에서 ㄴ 받침 하나 빠진 격이었고문시??, 무엇보다 '힘이 제일'이라 쿠데타 가능성이 높아져 나라꼴은 더더욱 막장이 되어 갔다.

초기엔 무신 정변을 일으킨 정중부이의방, 이고 3인방이 권력을 나눠 장악했으나, 다음해 이고가 역성을 일으키려 하자 이의방이 이고를 척살하고 이의방이 우세한 상황에서 정중부와 함께 권력을 장악한다. 그는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보내는 등 본격적으로 권력에 대한 탐욕을 드러냈으나 3년 뒤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정중부가 권력을 홀로 쥐어잡게 된다. 고려의 삼두정치??

그러나 5년 뒤 청년 장군 경대승이 정변을 일으켜 정중부와 정균 등을 제거하며 권력을 틀어쥔다. 경대승은 특이하게도 무인 실권자들이 죄다 고려사 반역 열전에 실린 데 비해 유일하게 거기에 실리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는 그가 근왕적이었고, 또한 청렴하여 측근들의 부패를 단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무신 협의체인 중방을 닫고 자신의 사병도방을 활성화시키면서 무신 정권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경대승이 4년만에 젊은 나이로 병사하자, 정중부의 잔당으로 살아남아 경주로 낙향했던 이의민이 실권을 잡게 된다. 이의민은 동경 (지금의 경주시)의 천출 출신으로 무신 정변에 직접 가담했으며, 당시 폐위되어 거제도에 유배가 있던 의종을 직접 시해까지 한 인물. 이의민은 무려 13년동안 집권했는데 십팔자위왕설을 믿고 왕위에 대한 야심을 품었으며 경상도 지역에서 일어난 김사미 · 효심의 난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등 권력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다. 그의 아들들 역시 권세를 믿고 오만해져 남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고 인사권을 통한 전횡을 부리는 등 만행을 저지른다. 그러나 거병한 최충헌 형제로 인해 미타산에서 이의민은 살해 당하고, 그의 아들들을 포함한 일가는 멸족 당하고 만다.

6. 최씨 무신정권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최충헌은 경대승이 취했던 권력 정책을 계승했다. 즉, 중방을 더욱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사조직인 '교정도감'을 새로이 권력 기구로 만들고 도방을 부활시켜 사병을 기르는 등 이전 무인들보다 더욱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이런 안정된 권력은 최씨 세습 정권으로 이어진다. 이전 집권자들이 당시의 고려 왕 명종과 함께 공존을 했다면 최충헌에겐 그런 건 없었다. 최충헌 시대 25년간 왕은 무려 5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2명은 최충헌이 폐위한 것(명종, 희종)이었고, 거꾸로 두명(신종, 강종)은 옹립했다. 그는 독재 체제를 구축한 이후 권력을 자신의 아들 최우 (혹은 최이)에게 물려줬으나 때마침 몽골 제국이 고려로 쳐들어 오면서 더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건국 313년 만이었다.

한편 그러면서도 반란과 민중 봉기가 중점적으로 폭발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계속되는 수탈로 인한 민생고와 자연재해에 백성들의 생활은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벌 귀족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그동안의 울분을 푼다는 듯 더욱더 착취와 폭정을 일삼게 되었고 이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러던 중 1173년에 문신 김보당이 의종 복위를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으며, 이듬해에는 서경 유수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반기를 들며 반란을 일으킨다. 그의 반란에 절령 이북의 40여개 성이 호응하는 등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반란은 민중들에게도 번져나가 특별 행정 구역이었던 향, 부곡, 소에 대한 차별 철폐를 내세우며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 형제가 그리고 최충헌의 사노 출신으로 신분 해방을 꿈꾸던 만적의 난 등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 속 옛 삼국의 땅에서 삼국 부흥을 기지로 내세우며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서경에서는 최광수가 고구려 부흥을 명분으로 거사했고 1193년에는 경상도의 운문과 초전 지방에서 김사미와 효심이 각자의 세력을 이끌고 결탁, 거대한 규모의 신라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심지어 여몽 전쟁 도중에는 담양 지역에서 백제 부흥을 명분으로 이연년 형제가 난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삼국 부흥 운동은 당시 고려 조정과 무신 정권에 대한 반발심과 착취, 폭정 속 처참한 생활을 이어가던 농민들의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나 그때까지도 삼국 분립 의식이 각 지역에 남아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계속된 민란은 결국 무신 집권기 고려의 혼란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 이 부분은 여몽전쟁 문서를 함께 참고하십시오.

몽골은 고려에 칩입한 거란의 잔당을 함께 물리친 강동성 전투 이후 고려에 큰 은혜를 베풀었다는 듯 만행을 일삼았고 고려는 불만이 가득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국경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국교는 단절되었고 결국 몽골이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다. 이에 최우를 필두로 하는 최씨 정권은 몽골과의 전면전은 어렵다고 보았으나, 문신들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화친책도 거부하고 입도 정책을 구사한다. 이는 강화도(강도)에 짱박혀 수전에 극도로 취약한 몽골군이 제풀에 물러가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최우는 스스로도 뛰어난 명필이자 문사로 문신들을 중용하면서 성공적으로 고려의 체제에 안착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중용이지 이럴 땐 그런거 없었다. 최우는 입도 정책을 반대한다면 심복 장군들도 여럿 목을 날려버렸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본토 침략이 가시화된 3차칩임 이후 육지의 민중들은 전란의 참화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초기에는 처인성 전투 등으로 소규모 몽골군이 쉽게 물러갔지만, 금나라가 멸망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몽골이 파병하는 군대의 규모가 증가하였고, 이 병력이 충주 이남으로 진격하면서 백성들은 진짜 지옥을 맛보게 된다. 그 와중에도 무신 정권과 그 사병 삼별초는 몽골군에 제대로 항거하지도 않았고 조운으로 세금만 걷을 뿐이었다.

각지에선 민중들을 중심으로 전장에 내몰린 힘없는 장수들과 승려, 천민들이 합심하여 죽기 살기로 몽골군에 저항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토호를 주축으로 고려를 배반하고 몽골에 붙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서경(평양 - 동녕부) 주변과 동북면(쌍성 총관부)이 그렇게 넘어가면서 고려의 강역은 사실상 철령, 자비령 이남의 통일 신라 영역 정도로 내려앉았다. 무신 정변이 터진 이후 60년의 무신 정권도 그랬지만, 40년 가까운 대몽 항쟁 동안 고려라는 왕조 국가는 정말로 없는 거라 다름없었다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결국 오랜 전란을 버티기 힘들게 되자 최항 - 최의를 거쳐 최씨 정권이 몰락했다.

7. 무신정권 말기

뒤이어 마지막 집권자 임유무마저 살해당하고 무신 정권이 무너지자 고려 왕실과 조정은 몽골에 항복해버렸다. 이 직후 일어난 삼별초의 마지막 항쟁지였던 제주탐라총관부로 원에 넘어갔다가 돌아왔다. 삼별초는 자주 정신의 발로라는 측면도 분명하지만 무신 정권의 핵심이었던 친위 세력 최후의 발악에 가까웠다는 한계가 있었다.

고려는 국체를 보존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당시 국왕이던 원종의 적절한 외교 정책(거래)과 오랜 저항의 결과였다. 특히 원종이 태자 시절 입조하여 직접 교섭한 원나라의 창시자 쿠빌라이 칸(세조)은 세조구제(世祖舊制)안에 '불개토풍(不改土風)', 즉 고려의 풍습과 제도를 바꾸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외왕내제는 끝났다. 고려는 이후 몽골의 부마국이 되면서 몽골 문화가 점점 퍼져갔고 (몽골풍) 고려의 풍습도 몽골에 전달되었다 (고려양). 공물에 시달리고 원정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카다안의 침입 같은 사건도 있었다. 그래도 전쟁 자체가 종식된 건 다행이었다.

8. 원 간섭기

원나라의 간섭과 함께 원 황제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충성 충(忠)자로 시작하는 왕들의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1] 반원 자주 정책을 펼쳤다는 공민왕도 왕비는 원의 노국대장공주[2]였다.

때문에 외국에서는 몽골 제국의 지도를 그릴 때 고려를 포함시켜서 그린다.사실 고려가 점령이 된 건 아니여서 포함시키면 안되지만 킵차크 한국에 점령되거나 공물을 바쳤던 러시아 공국들과 같은 취급이다. 앞서 나왔듯이 원나라 간섭의 단적인 예가 첫 충자 돌림 왕인 충렬왕 때인 두차례의 걸친 쿠빌라이의 일본 원정공녀, 그리고 외왕내제 폐지다.
이름 뿐이었던 고려 왕실은 황제국의 부마로서 예전의 왕권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다. 심지어 충선왕 때는 원나라의 황위 계승 분쟁에 한몫을 거들어 상실된 영토와 요동 지역을 포괄한 심양왕 (후에 더 높아진 심왕)을 받아서 고려 왕 겸 심양 왕으로 두배의 강역을 다스리던 시절도 있었다. 탐라 총관부와 동녕부 같은 다른 지역은 이미 충렬왕 때인 1290년에 돌려받았다. 한편 심양왕은 충선왕의 관직으로, 이후 고려 왕에게 세습되지 않고 조카 연안군 왕고에게 세습되었으며 5년간의 (명목적) 영광에 그쳤다. 그러나 다루가치나 정동행성 이문소 등 원의 간섭은 계속되었다. 정동행성은 원래 일본 정벌용 임시 기관이었으며 차츰 원나라의 고려 통감부가 되었다.

당시 고려 국왕은 부마국의 반 독립적 왕이지만 사실은 원 제국의 서열 n위 황족이기도 했다. 이 왕들은 고려사 최고의 막장 왕들이 된다. 충선왕은 개혁을 하려다가 실패하고, 후에 권세를 얻은 뒤에는 고려에 돌아오지 않고 원의 수도 연경에서 학문과 수도 생활에만 몰두했으며, 양위를 받아 뒤를 이은 충숙왕도 좀 나았지만 비슷한 템포를 겪다가 결국 역시 양위, 그의 아들 충혜왕은 아예 향음에 빠져 몽골 공주까지 겁탈한 막장 왕이 되어 몽골 사신에게 잡혀가고 아버지 충숙왕이 다시 왕좌를 차지하였다가 사망한 이후에 복위했다가 다시 폐위당했다. 결국 이 시대 왕들의 모순, 즉 권력은 상대적으로 강해졌지만 정작 고려 내에서 그 권한을 이용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밉보이면 폐위되었다가 빌고 빌어 복위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 점이 이 왕들의 막장화를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원나라를 등에 업고 날뛰는 권문세족(부원배)의 횡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졌다.

9. 고려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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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엽 공민왕 때의 영토[3] 공민왕이 수복한 동북면 (쌍성총관부)

충혜왕의 사후, 충혜왕의 어린 아들인 충목왕충정왕이 뒤를 이었으나 둘다 얼마 안 가 요절했으며, 홍건적의 난 등의 반란 크리가 터지며 원 제국은 70년만에 몰락의 조짐을 보였다. 뒤를이어 1351년 왕위에 오른 공민왕(충혜왕의 동복 아우)은 무너져가는 원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반원 정책을 펼쳤다. 고려는 다시 부흥하는 듯 보였다.

공민왕은 대표적 권문세가였던 기씨 일족을 숙청하고 몽골풍의 양식과 변발을 금지시켰으며, 정동행성(특히 이문소)를 폐지한 뒤 군대를 동원해 쌍성총관부를 점령하여 옛 강역을 회복했다(병신정변, 1356). 심지어 일시적이나마 요동을 공격하는 모습에서 정점에 달한 모습을 보인다. 이성계압록강오녀산성 (졸본)은 물론 요동의 중심부인 요양을 점령한 적이 있으나 군량 부족과 나하추의 게릴라전 때문에 결국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퇴각한 사례. 이 사실 덕분에 위화도 회군에 대한 떡밥이 더욱 풍부해진다.

그러나 중원의 혼란 속에 일어난 한족의 농민 반란군인 홍건적이 수도 개경까지 쳐들어와 공민왕이 안동까지 몽진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큐슈왜구가 삼남 지방은 물론 서해도 (황해도), 수도인 개경 부근과 지금의 함경도까지 터는 안습한 위기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후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돈 숙청 이후 초심을 잃고 혼군이 되어 횡음에 빠졌고, 결국 시해까지 당하면서 고려 왕조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다만 공민왕의 말년 행보에 대해선 조선 왕조의 개국 당위성을 위한 왜곡이 어느 정도 들어간 게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영화 쌍화점에서 주진모의 모태가 된 왕이 바로 공민왕으로, 실제로 '자제위'라는 미소년 부대를 만들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대신 영화엔 모티브만 주었을 뿐, 공민왕의 실제 모습이 아니다.

어쨌든 공민왕의 치세를 기반으로 하여 향리 계급에서 비롯된 신진 사대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원명 교체기로 외적이 침입이 끊이지 않은 혼란 속에 신흥 무인(최영, 이성계) 세력들이 성장한다. 원명 교체기의 혼란 속에 일어난 원나라와의 전쟁, 홍건적의 침입,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은 탄탄한 사병을 가진 이들이 성장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최영과 이성계는 공민왕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공민왕 시대의 권신 이인임의 지원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우왕 대에 이인임을 비롯한 권문세가 일당들을 숙청하고 어느 정도 국가 체제를 재정비하고 본격적으로 요동 정벌을 실현하려는 듯하였으나 당시는 고려 멸망 4년 전이었다.

황산 대첩 등으로 고려의 최고 영웅으로 떠올랐던 이성계가 (지금까지 역사 속의 가장 큰 떡밥이 되는) 위화도 회군을 일으킨다. 가능성이 있었다고 하는 쪽에선, 실제로도 나중에 조선 대에 들어서 태조와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다는 것과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고려와 조선의 강병이 요동으로 치고 올라오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에 근거를 둔다. 반대 측에서는 성공했다 할지언정 과연 그것이 국가가 재정비되는 시기에 도움이 되었을지는 의문을 제기한다. 새로 일어나는 명과 맞서야 했으니 당연히 엄청난 국력이 소모되었을 터라는 것. 앞서 보았듯이 고려는 압록강을 한번 넘었으나 곧바로 회군했다. 이성계는 최영을 제거, 우왕을 폐위하고 잠시 그의 아들 창왕을 옹립했다가, 그들이 요승 신돈의 자식이라는 선전으로 쫓아낸 뒤, 그 다음 공양왕을 세워 몇가지 개혁안을 수행시켰다. 그리고 이때 정몽주가 이성계를 궁지로 몰며 저항했으나 결국 이방원이 그를 선죽교에서 살해했고, 4개월 뒤(음력 7월 16일) 이성계는 "권지고려국(왕)사"로 선양 찬탈 을 받았다.

고려는 역성혁명의 반발을 우려한 이성계의 조치로 6개월간 이름만 존속되다 1393년 음력 2월 15일 명의 승인으로 조선으로 이름이 바꾸면서 고려는 475년만에 멸망했다. 보통 1392년을 조선 개국으로 보아 474년만에 멸망했다고 본다. 1403년에야 태종 이방원이 명나라로부터 고명(誥命)과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받아 왕호를 쓰기 시작했다.

무려 500년 가까운 기간동안 존속했으나 1170년 무신 정변 이후에는 이미 멸망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는데도 천운인지, 아니면 뒷감당할 수단이 있었는지 꽤 오랫동안 버텨왔다는게 놀라운 역사라 하겠다. 뒤의 조선 또한 양란 이후 200년 넘는 시간을 버티긴 했지만, 조선의 경우 중앙 집권 체제로 고려보다 안정적인 통치가 가능한데다, 양란 이후 외세의 침입 이전까지 대체적으로 고려보단 안정적이었다.

10. 여담

10.1. 원 간섭기의 유전적 영향

일단 Y 염색체의 경우에는 이것은 DNA 유전자 염색체의 한 종류이며 DNA 염색체 총칭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DNA 유전자의 경우 기본적으로 몽골인과 만주족 그리고 북아시아 인종들과 가깝다.[4] [5] 하지만 Y 염색체의 경우는 DNA 염색체 중에 부계에서만 보이는 염색체로 고대에 인류가 아프리카에서부터 동남아를 거쳐서 동아시아로 이동한 것을 시간 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DNA와는 다르게 부계 유전을 보여주는 Y염색체 하플로그룹의 경우는 다른 연구 결과를 보여준다. 한국인의 경우는 Y염색체 하플로그룹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O2b그룹(약 40%)인데 이는 만주족일본인에게서는 보이지만[6] 중국 한족이나 몽골인 등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룹이다. 중국인의 경우에는 O2가 가장 많으며 C3와 C3c, C3b도 많이 보인다.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C 그룹이 먼저 아프리카에서 출발하여 동남아를 거쳐 동북아로 북상하며 O3의 경우에는 C3 그룹보다 시간이 꽤 지난 다음에 아프리카에서 동남아를 거쳐 동북아로 북상하는 Y 염색체이다. 즉 아프리카에서 동남아시아를 거쳐서 C3 그룹이 먼저 동북아로 북상하고 그 후에 O3가 아프리카에서 동남아를 거쳐서 동북아로 북상한 것이다. O3 그룹은 만주족에게서도 약 40%, 몽골인과 일본인에게도 20% 정도 보인다. 반면, 몽골인의 경우는 C3그룹과 C3c그룹이 각각 30%, O3그룹이 20% 정도 보이고 있다. 이 중 C3그룹은 한국인에겐 15% 정도밖에 보이지 않고 C3c그룹은 아예 없다. 시베리아에서 외부 접촉이 적은 C3c그룹은 북퉁구스 계통인 에벤키 족에게서 60% 이상 보일 정도다. 즉 결론은 이것을 보면 DNA 자체는 기본적으로 한국인과 몽골인이 가깝지만 몇 만년 전부터 먼저 동남아시아에서 동북아로 북상한 C3라는 인류가 시간이 많이 지난 중세와 현대의 몽골인에 많이 남았다는 것이며 한국에 C3가 적다는 점은 한국인이 기본적으로는 다른 인종보다 몽골인과 유전적으로 가깝지만 몽골에 C3의 비율이 많아지는 중세 원나라 때 한국으로 이동한 몽골인은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몽골인의 경우는 어떨까 몽골인은 C3그룹과 C3c그룹이 각각 30%, O3그룹이 20% 정도 보이고 있다.C3는 크게 C3e와 non-C3e로 나뉘는데 C3e는 소수이지만 한국 베트남 일본 중국 등 동남아를 포함하여 여러 아시아 국가에 나타나는데 non-C3e는 대부분의 몽골인에 나타난다. 튀르크계인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퉁그스 민족의 50%정도가 non-C3e로 나타난다.몽골인은 91%가 non-C3e샘플로 즉 C3b+C3c에 속하는데 한국인은 C3b+C3c(non-C3e즉 칭기스칸 유전자)가 1%도 나타나지 않는다.즉 한국인과 몽골인은 DNA는 비슷하지만 C3가 많아진 중세 몽골에서는 한반도에 건너간 사람들이 적다는 것이다.몽골 간섭기때 몽골 유전자가 많이 섞였을꺼라고 추측하나 생각해보면 간섭기인 1세기는 짧은 시간이며 고려에 귀화한 외국인도 장씨등 위구르계 두세명이다.즉 고려의 몽고 항쟁30년의 치열한 다툼과 전쟁이 효과가 있던것. 만약 고려가 항쟁못하고 한낱 지방 행성이 됬다면 달라졌을 과학 결과일지도 모른다.또한 몽고 간섭기는 혹독했고 충선왕때부터 공민왕 우왕까지 몇몇 왕이 몽골 공주와 결혼을 했지만 그 자손들이 다시 원나라에 가서 몽골 공주와 결혼하거나 심양왕 등이 됬기때문에 몽골 유전자가 적게 나올수도 있고 이성계가 왕씨는 모두 죽여서 그럴수도 있다. 그리고 몽골인의 주류 non-C3e(C3b+C3c)유전자가 급격히 줄어드는 경계는 만주이다.만주(중국 동부)가 non-C3e유전자의 남하를 막았다고 볼수있다.그래서 한국과 일본에 몽골 주류 유전자가 1%도 안나타나는 이유라고 한다.#

또한 최근 여러가지 연구로 보면 한국인이 고려 시대 때 몽골인과 피가 많이 섞였는지 아니면 한반도 토착 계통 그대로인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데 최근 Y-haplo subgorup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C2-M217에서 하위 그룹이며 몽골에 높은 빈도로 나타나는 칭기스칸 모달이라고 명칭할수 있는 C2b-L1373(C2b,C2c previously C3b C3c)는 대한민국이나 일본에 전혀 나타나지 않고 0.00784%만 발견되어 몽골 제국 때의 몽골 민족이 한반도나 일본 열도에 남하하지 않았다는 것이 발견되었다.만약 침략등으로 남하하였다 하더라도 0.000784%의 극 소수이며 죽거나 도태되어 사라졌다고 할수 있다.한국인에게서 4%~12% 일본인에게서 2%~8%로 정도 나타나는 C2-M217은 하위 그룹이 C2e-z1338이며 이것은 동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가까운 남중국 해안가등에 나타나는 하플로그룹이라서 몽골에서 왔다고 할수 없다.#



[1] 여기서 몽골에 항복한 원종은 첫 왕이어서인지 그대로 종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공민왕이 이 왕들에게 새 시호를 바치지만, 부터는 그런 거 없었다.[2]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당시 고려의 끝없는 저항과 전쟁으로 점령은 포기하고 원나라와 강화를 맽고 원나라는 고려를 부마국으로서 달래거나 정치적 간섭을 심히 하였다.고려 간섭기 때 조선 총독부라고 볼 수 있는 쌍성 총관부의 총관도 사실 고려 초기 때 벼슬을 했던 고려인 조지수의 아들이 싸우다 항복하여 쌍성 총관부의 총관이 되고 고려인인 이성계가 다루가치가 되듯 국가가 사라진 일제 강점기와는 다르게 고려 간섭기라 한다.[3] 동북면(쌍성총관부)을 수복한 이후의 강역이다. 위키백과에는 1374년의 고려 영토라고 기재되어 있다.[4] https://dailymedi.com/detail.php?number=642386&thread=22r03[5]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376612.html[6] 참고로 일본인의 주류 하플로그룹은 O2b와 D그룹인데 D그룹은 한국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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