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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 1차: 924년 (태조 6년) 7월 2차: 925년 (태조 7년) 10월 | |
장소 | 신라 조물성 (現 경상북도에 위치[1][2]) | |
원인 | 후백제의 조물군 침공과 고려의 응대. | |
교전국 | 고려-신라 연합 (수세) | <rowcolor=black> 후백제 (공세) |
주요 인물 | 지휘관 왕건 (고려 태조) 유금필 박수경 황보제공 이능필 왕충 은녕 애선 (대상(大相)) † 경애왕 (신라 국왕) | 지휘관 견훤 (후백제 국왕) 견양검 수미강 길환 (일모산성주) † 형적 † |
병력 | 연합군: 10,000명~15,000명 (기병) | 후백제군: 3,000명~15,000명 (기병) |
피해 | 포로: 2,000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무승부 - 후백제의 근소한 우위 | |
영향 | 고려와 후백제 상호간 인질 교환 - 견훤, '상보' 호칭 왕건으로부터 획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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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삼국시대의 전투.920년 견훤의 3차 대야성 침공 이후 관계가 냉랭해져가던 고려와 후백제가 처음으로 직접 충돌한 전투(1차)이자, 동시에 왕건이 고려의 왕으로서 처음으로 친정에 나선 전투(2차)이기도 하다.
2. 배경
918년 6월에 태봉의 왕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각종 반란과 호족들의 이탈을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었다.[3]그러던 와중 견훤은 918년 8월에 즉위 축하 사절을 보내고[4] 920년에는 지리산 대나무 화살과 공작 부채를 선물하는 등 건국 초기인 왕건의 고려에 우호적 태도를 보이다가 동년 10월에 다시 대야성을 공격, 첫 시도였던 901년으로부터 무려 19년이 지난 920년에 결국 대야성을 손아귀에 넣는다.[5]
또한 견훤은 대야성 함락에 만족하지 않고 신라의 수도 서라벌 최근거리에 위치한 진례까지 진군했는데, 이에 당연지사 위기감을 느낀 당시 신라의 경명왕은 결국 고려의 왕건에게 아찬 김율을 보내 구원을 청하고, 이에 왕건이 응해 원병을 파견했다.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으나 고려는 병력을 움직여 후백제의 북진을 차단하며 국경의 긴장을 높였고, 신라와 연대하여 창원, 김해지역 진출을 시도하는 후백제의 동진을 저지하였다. 견훤이 공세 종말점에 이른 것인지 자국 수비 강화를 택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일단 고려군의 군사행동 이후 진격을 멈춘 것은 사실이기에 경북지역의 호족들은 왕건에게 호의를 보이며 귀부하기 시작했다.
922년 안동과 청송 일대의 호족으로 하지현[6] 출신 원봉과 진보현[7]의 호족 홍술이 고려에 귀부하였다. 명지성[8]의 성달과 경산부[9]의 양문 등도 연이어 고려에 복속하였다. 안동과 청송, 성주 등 상주 일대의 호족들이 고려에 투항하자 상주를 기점삼아 동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해가던 견훤은 점차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3. 제1차 조물성 전투
후백제는 왕건이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건국한 이후 동요하던 충청지역 호족들을 흡수하며 금강 이북의 10여 주현을 차지하는 등 남부 충청지역의 주도권을 선점했지만, 경상지역에서는 연이은 호족들의 고려 귀부와 고려-신라 동맹으로 인해 전선이 고착되어 조물성을 공격함으로써 전세를 반전시키려고 하였다.924년(태조 7) 7월, 견훤이 먼저 아들 수미강(須彌康)[10][11] 과 견양검을 보내 조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제1차 조물성전투). 이에 왕건은 장군 애선과 왕충을 보내 구원하도록 했는데, 애선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군민이 굳게 지켜 후백제군이 물러갔다.
4. 제2차 조물성 전투
925년 10월, 이번엔 고려 태조가 유금필을 보내 충북의 연산진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재개되었다. 연산진[12]은 청주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중간 길목이며, 후백제의 최일선 요충지였다. 유금필은 연산진 장군 길환을 죽이고 성을 함락했으며 이어 임존성[13]까지 함락시켜 후백제군은 장군 형적을 포함 수백 여명이 전사하고, 2천 여명의 군사가 포로가 되는 참패를 당하였다.견훤은 무너진 전세를 만회하고, 친고려노선을 견지하는 경상지역의 호족을 제압하기 위해 직접 조물성으로 출정했다(제2차 조물성 전투). 견훤이 기병 3,000명[14]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왕건은 황보제공의 상군 · 왕충의 중군 · 박수경과 은녕의 하군의 3군으로 나누어 싸웠는데, 상군과 중군은 패하였으나 박수경이 지휘하던 하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 공으로 박수경은 후에 원보로 승진하였다.
전과에 대한 자세한 사료는 없으나 당시 정황으로 볼 때 고려군은 조물성 사수에는 겨우 성공했지만 3군 중 2군이 막심한 피해를 입어 견훤의 다음 공세에 맞서기 어려웠고, 또 그러한 고려의 상황과는 반대로 후백제군은 야전에서는 승리했지만 조물성을 점거하지는 못한 채, 충청도 전역에서 유금필에게 패하며 거점을 잃게 될 위기에 처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양측은 화의를 진행하게 된다.
화의의 결과로 왕건은 사촌 왕신을, 견훤은 외조카 진호를 서로 인질로 교환하고, 왕건이 견훤을 상보(尙父)라 우대하는 것으로 되었다.[15][16] 이때 견훤은 "오늘부터는 영원히 기쁘게 화친할 것이며 만약 맹약을 어기면 신이 죽음을 내릴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5. 결과
신라의 경애왕은 이 소식을 듣고 왕건에게 사절을 보내 반대의사를 표명하였고, 왕건은 이에 동의하긴 했지만 화의를 없었던 일로 돌릴수는 없었다. 고려-후백제 양국의 화의는 후백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체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조물성 전투 이후 후백제는 승리한 기세를 몰아 거창, 성주, 고령, 구미 등 인근 지역을 일거에 점령했다. 화의로 인해 왕건은 견훤의 신라 진격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고 덕분에 후백제는 조물성 이남부터 합천 대야성에 이르는 경상도 서부지역의 영토선을 구축했다. 신라의 경애왕이 고려와 후백제의 화친을 비판하고 나선 것은 경상 지역에 대한 후백제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신라에 큰 위협이 될 것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화의를 했음해도 고려-후백제 양측의 긴장은 심해진다.
그러다 이듬해 926년 4월, 인질로 고려에 있던 진호가 급사하게 되고, 진호의 죽음을 전해들은 견훤이 왕신을 죽이면서 화의는 곧 끝나버린다. 한편, 수도 서라벌 근처로 점점 세력을 확대해가는 후백제군에 위기의식을 느낀 신라는 외교적, 군사적으로 더욱 고려에 의지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927년, 왕건은 조물성에서의 열위를 만회하기 위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매우 공격적인 자세로 돌변해 용주성[17], 운주성[18], 근암성[19] 공격을 시작으로 후백제를 포위해나가기 시작한다. 신라 경애왕 역시 이에 호응해 왕건의 공세에 신라군을 파견해 돕는데, 이를 고깝게 본 견훤이 신라의 친고려 박씨 왕실을 타도하기 위해 서라벌로 출정하면서 결국 공산 전투를 초래하게 된다.
6. 대중매체
태조 왕건 141화 ~ 144화에서 1차 조물성 전투를 다뤘으며 고려의 태자 무와 백제의 태자 신검, 양검, 용검, 금강의 대리전으로 치러졌으며 도중 고려 태자 무가 백제의 계략에 빠져 부장과 무술 사부였던 장수장이 전사한다. 치열한 공방전 사이 백제군은 고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조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며 사이에 금강이 분전했으나 눈을 다쳐 물러서고 고려의 지원군 때문에 마지막 공격을 시도한 백제군은 퇴각한다.145화 ~ 150화 1년 후 서로의 왕이 나오는 2차 조물성 전투가 다뤄지는데 괴질이 발병했단 설정으로 두 나라 군대 모두가 초반에 많은 병사들이 대비를 못해 병사로 고전했으며 백제군 의원 훈겸이 견훤의 조상이라는 도인의 도움을 받은 덕택에 지렁이를 원료로 한 약을 구해 백제군, 괴질에 걸렸던 금강의 목숨은 그래도 보전되며 백제군은 겨우 군을 추스린다. 고전하던 고려군은 처방책을 찾지 못하여 태평도 얼마 안 가 병사하며 최응, 복지겸도 결국 괴질에 걸렸기에 조물성을 더 지키지 못할 상황에 최승우와 최응의 협상으로 왕건이 견훤을 상보로 모시고 왕신, 진호를 인질로 교환한 것과 약을 건네받은 것으로 화친하고 전쟁을 마무리 짓는다.
백제 내부에서는 화친 자리에서 오는 왕건을 죽이고 고려를 끝내버리자는 의견도 있었으나[20], 그렇게 될 경우 통일해봤자 백성과 호족의 신의를 잃어 소용이 없다고 판단한 견훤이 호통을 치며 그 의견을 묵살하고 최승우도 동참했다. 애초에 작은 조물성 하나 얻자고 시작한 게 아니라 체면과 명예가 더 중요했던 2차 전투였고[21], 화친 자리에서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견훤에 대한 호족과 백성들의 신뢰와 인심이 좌우되는 시점이었기때문에 견훤은 왕건 일행을 포용한 것이다. 그렇게 화친의 자리는 무탈히 지나가며 나머지 백제군은 신라로 계속 진격.
왕식렴이 최응에게 건네받은 극약을 가져온 유금필, 박술희의 부탁을 처음엔 거절하다 마음을 다잡아 눈물을 머금고 진호를 독살한 시기까지 양 전선은 소강 상태를 유지하였다.
[1] 조물성(曹物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경북 안동 일대, 구미 금오산성(金烏山城), 김천시 조마면, 의성 등으로 추측되나 『고려사(高麗史)』태조세가(太祖世家)에 “죽령(竹嶺)의 길이 막혀 왕충(王忠) 등에게 명해 조물성에 가서 정탐하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죽령에 가까운 경북 북부지역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대체로 안동과 상주 사이인 것으로 추정.[2] 여담으로 후삼국시대 이후로는 사서에 조물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924, 925년에는 조물군이라 했고 928년에는 조물성이라 했는데, 그 뒤 이름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3] 고려 건국 일주일 후 궁예의 총신으로 추정되는 종간, 은부를 척살했고, 복지겸이 환선길 형제의 반란을 탐지하여 이를 진압했다. 또한 웅주를 지배하고 있던 이흔암이 철원으로 올라오자 그가 반란을 획책했고 + 웅주의 방어를 소홀히 하여 후백제에 웅주 일대가 넘어가게 했다는 구실로 처형해버린다. 한편 조정에서 몇몇 불순분자들이 임춘길 등 청주 인사들을 중심으로 반란을 획책한 사실이 드러나자 곧 처형했는데 이중 한 사람인 경종은 매곡성주 공직의 처남이었고 공직은 이에 왕건에게 앙심을 품고 매곡성을 통째로 들어 후백제로 귀순한다. 또한 청주 현지에서도 진선 형제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여간 난맥상이 아니었다. 거기다 명주의 순식이 이탈,[22] 강원 지역의 영향력도 상실한 가운데 추가적인 이탈을 막고 내부 결속을 다지는 것이 급선무였다.[4] 이 시점에 웅주와 운주가 후백제 쪽으로 배반해버려 청주를 제외한 지금의 충청도 일대가 날아가버렸기 때문에 고려와 후백제의 충돌은 이때 이미 예견된 상황이었다.[5] 이때 신라가 자위(自衛)도 어려워질 정도로 군사력이 악화된 것으로 추측된다.[6] 현 경북 안동시 풍천면[7] 현 경북 청송군 진보면[8] 현 경기 포천시 군내면. 그러나 경북 지역에 있었을것이라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9] 현 경북 성주군 성주읍[10] 이 수미강이라는 사람은 1차 조물성 전투 기사 외에는 사서에 등장하지 않아 정체에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박한설 교수는 논문 <후백제 금강에 관하여>에서 당시 유행하던 선종의 일파인 수미산문의 이름에도 나오는 불교 용어 수미산의 의미를 '신산(神山)'이라 하여 그 정체를 견신검으로 보았다. 반면 이도학 교수는 "연개소문 = 연개금 = 이리가수미"라는 예시를 근거로 '수미'라는 단어는 '금(金)'으로 풀이될수 있다고 하여 수미강을 견금강으로 보았다. 현재 학계에서나 대중적으로나 전자의 설이 더 우세하고 널리 퍼져있으나 후자의 가능성도 적지 않다.[11] 한편 수미강이 사서에 견훤의 둘째아들 양검보다 먼저 적혀있으므로 그 정체가 양검의 형제들 중 유일하게 위인 신검이었을것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으나, 사서 편찬자가 수미강이 장남 신검이라고 명확하게 인지를 하여 차남 양검보다 먼저 적었다면 애시당초 수미강이라는 괴상한 이름으로 적지는 않았을것이라는 모순점이 있다. 즉 찬자도 수미강이 누군지 모른채 그냥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12] 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13] 현 충남 예산군 대흥면[14] 기록에는 기병 3천만을 언급하기에 보병 및 수송병력을 더한다면 3~5배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15] 이 화의에 대해『삼국사기』견훤전에는 견훤의 군사가 우세해 태조가 요청한 것이라 했고, 반면에『고려사』태조세가에는 견훤이 화의를 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고려사』유금필전을 인용한『고려사절요』에는 유금필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합세해 병세를 떨치니 견훤이 두려워해 화의를 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재미있는 점은 고려시대에 쓰여진『삼국사기』는 견훤 우세설을,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사』와『고려사절요』는 왕건 우세설을 주장한다는 것이다.[16] 이러한 견해 차이는『고려사』와『고려사절요』의 편찬자나 그 저본이 되었던 사료에서 태조의 위신을 고려하여 후백제가 먼저 화의를 제안한 것으로 왜곡하여 서술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조물성 전투의 전세는 후백제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기에 태조 왕건이 사촌동생 왕신을 인질로 보내며 견훤을 상보로 높여 부르면서 화의를 청했고, 견훤은 그에 답례하기 위해 진호를 파견한 것으로 생각된다.[17] 현 경북 예천군 용궁면[18] 현 충남 홍성군[19] 현 경북 문경 산북면[20] 능환, 종훈, 신검 등이 주장한 의견.[21] 이찬 능환이 이 점에 대해 언급하고 견훤도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