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에 있던 신라의 성. 고대에는 낙동강을 대군이 건널 수 있는 중요한 도하지점이어서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후백제의 싸움이 여러 번 벌어졌던 곳이며, 한반도에서도 손꼽히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2. 구조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전형적인 배산임수지의 형태다.
대략 지금의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읍내 지역에 해당한다. 이 주변의 지리를 살펴보면, 일단 아래쪽은 낙동강의 지류치고는 제법 큰 강인 황강이 사방을 두른 채 흐르고 있어서 강을 건너 상륙하는 것을 철저히 막아낸다면 반도에 가까운 지형이라 볼 수 있다. 북쪽과 서쪽은 산이 가로막고 있어 백제, 후백제가 육로로 쳐들어올 수 있는 길은 서북쪽과 동북쪽 2곳 뿐이다. 그런데 둘 다 산줄기 사이의 좁은 길이라 각 잡고 방어하면 뚫기가 어렵고, 그 산은 가장자리가 강에 깎여서 비탈이 바위절벽이다. 그렇다고 황강을 건너서 상륙하기는 적의 방해가 있으면 당연히 힘들고, 황강 위로 배를 띄워서 수군으로 공격하려고 해도 황강 서쪽(즉 백제 쪽)은 강폭이 좁고 얕아서 뗏목 수준이 아니면 군함을 띄우기 어려운 편이다. 반면 강 동쪽(신라 쪽)은 강폭이 넓어서 신라 본진에서 낙동강을 타고 지원군과 보급을 보내기는 쉽다. 큰강이 인접해 있어 식수 확보도 쉽고 성 근처에 평야도 꽤 있어서 평시에 몇천 명 먹여살릴 군량미도 꽤 쌓아둘 수 있고 어느 정도는 농사지어서 자체 보급이 가능하다. 백제군이 어찌 좁은 길과 외벽을 돌파해도 내성을 함락해야 하는데 그것도 만만하지가 않다. 신라군은 외성을 방어하다가 정 안 되겠으면 산성으로 들어가 최후의 저항을 할 수 있다. 덤으로 언제든 신라 지원군이 동북쪽 육로와 동쪽 수로로 달려와 백제군이 퇴각해야 할 상황이 오면 서북쪽의 좁은 출입구나 좁은 황강 서쪽 강줄기로는 한꺼번에 나갈 수 없어서 오히려 독에 갇힌 생쥐꼴이 될 수 있다. 결국 백제군은 적 지원군이 도달하기 전에 여유를 두고 대야성을 포기하고 철수해야 하므로 돌격에 신중할 수밖에 없어진다.
다만 이와 같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쳐들어오고 동쪽에서 그걸 막을 때만 유리하지 역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쳐들어가고 서쪽에서 방어하는 경우에는 방어적 이점이 떨어져서 백제가 차지한 이후나 훗날의 임진왜란 등에서는 이름을 날리지 못했다.
3. 역사
본래 가야 다라국의 영역이자 대가야의 세력권으로 이미 그 당대에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되어 왔으나, 장군 이사부에 의해 함락된 뒤로는 대가야의 중심이던 고령 대신[1] 이곳이 신라의 옛 가야 지방에 대한 지배 거점이자 대 백제전선의 주요한 방어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지리적 요충지다보니 시대를 막론하고 수 많은 전투가 일어났다. 대야성 전투 문서 참조.선덕여왕 시대에는 642년 백제 장군 윤충이 함락하여 김춘추의 딸과 사위인 김품석의 목숨을 빼앗으면서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킨 사건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김춘추의 사위이자 성주인 김품석의 부하 모척과 검일의 배반이 결정타였다. 근데, 김품석 이 작자 또한 잘한 건 없었는데 그놈의 색욕 때문에 모척과 검일의 부인을 빼앗은 탓에 배반의 단초를 제공하였기 때문. 그리고 검일은 훗날 사비성이 함락되었을 때 결국 신라군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 때문에 대야성의 방어기능을 좀 더 경주에 가까운 지금의 경산시인 압독주로 옮겼다. 이후 대야성은 백제군이 수비하고 있다가, 김유신 열전에 의하면 648년 김유신이 대야성 앞에서 백제군과 한 번 대치한 후, 김유신이 중과부적으로 퇴각하는 척 하며 백제군을 옥문곡 계곡까지 유인해 승리를 거뒀는데 이 때 신라군이 대야성을 탈환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지만 확실하진 않다. 아무튼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20여년 동안은 대야성 대신 압독주가 백제 방면 수비의 거점도시였다. 아무리 늦어도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대야성을 신라군이 다시 수복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661년에 주의 중심지를 다시 대야성으로 옮겼다.
그러나 합천 대야성은 방어에 유리한 지역이라 중시되었던 건데 백제가 사라지면서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685년 지금의 진주시로 주치를 옮기고 주 이름도 강주가 된다. 이후로도 합천은 지역거점도시 역할을 잃어버렸고 진주는 경상남도청, 도청 서부청사 등이 자리하며 21세기 현대까지 쭉 서부 경남 지역의 중심도시로 남아있다.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에 신라의 영토가 다시 경상도 지역으로 축소되어버린 후삼국시대에는 견훤의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내며 신라가 수십 년간 버티게 해주었던 최후의 보루 겸 방패 역할을 해주었다. 의외로 견훤은 대야성에서 몇 차례 막혀서 신라 본진을 공략하지 못했을 정도. 하지만 견훤의 포기할줄 모르는 끈질긴 공세에 920년 결국 함락당하고 말았다. 이후 후백제 장수 추허조가 지키고 있었는데 927년에 고려의 김락이 함락하였고, 928년에 후백제의 관흔이 고려 장수 왕충이 이끄는 고려군을 북방으로 유인한 후 신속히 남하해 대야성을 다시 점거하는 등 주인이 계속 바뀌다 결국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 때는 합주 관할로 있었다.[2]
고려가 통일한 뒤로는 더이상 최전방 요새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 전쟁사에선 거의 등장하질 않는다. 특히 고려는 거란, 몽골, 홍건적, 왜구 등 수많은 외적의 침입을 받았고, 조선 역시 임진왜란이란 큰 전쟁을 겪었지만, 대야성에서 큰 전투가 벌어진 적은 없다. 특히 조선시대엔 이미 성이 많이 허물어져서 요새로서의 기능조차 상실했고, 지금은 정확한 위치조차 논란인 상태다.
4. 대야성 전투
자세한 내용은 대야성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5. 논란
현재 비정되어 있는 합천 읍내지역 매봉산(90m)이 아닌, 매봉산 동남쪽에 있는 기존에 대야성산(大耶城山) 이라고 불리던 황강 남쪽 산자락(대양면 정양리와 율곡면 본천리)의 신라시대 산성유적과 신라 고분군이 있는 곳이 대야성 유적이라는 주장이 주보돈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등 학계와 지역민 등으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현재의 비정된 위치가 합천군 통합탄생 100주년 행사일정에 맞춰 대야성 기념관문 신축 등의 기념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졸속으로 조사·선정된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지리 상황을 본다면 더 높은 산에 북쪽으로 황강이 흐르고 서쪽에는 천연 해자인 정양늪지, 동쪽에는 보급이 가능한 초계분지의 존재는 난공불락에 더 가까워, 주장은 사그라들기는 불가능하다.
6. 미디어
대왕의 꿈, 선덕여왕(드라마), 태조 왕건 등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의 대야성 전투를 다루는 사극에서 등장했다.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이 1, 2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견신검이 참여한 때마다 신라 노장들의 완강한 방어, 전략 때문에 실패하고, 신라의 마지막 명장 격인 김효종이 대야성주, 각간으로서 몇번씩 견훤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김효종과 지키던 노장들이 죽은 이후 3번째 전투때야 견훤이 재차 공격해 대야성 성주의 방어를 무너뜨리고 함락하는 것으로 묘사된다.[3] 선덕여왕에서도 백제군과의 싸움, 미실이 도주했을 때 등장하였다. 연개소문, 대왕의 꿈의 백제 장군 윤충이 감행한 공격으로 김춘추 사위 품석과 고타소가 희생된 대야성 전투도 그렇다.[1]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옛 백제 지역의 행정 중심지를 수도였던 부여군 대신, 백제 당시에는 위상이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던 공주시로 옮겼다. 당연히 원래 수도를 계속 중심도시로 쓰면 유민들이 결집해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2] 삼국시대엔 신라가 대야성을 잃었어도 사벌주와 한강유역을 바탕으로 어떻게든 서라벌 방어가 가능했지만 후삼국시기엔 이 영역이 모두 고려로 넘어가는 바람에 신라가 대야성을 잃음으로 신라가 동원할 야전군 자체가 소멸하였다.[3] 이 작전도 그냥 정면 돌파로 함락시킨 것이 아니고 사전에 애술과 부하들을 잠입시켜서 후방에서 교란작전을 펼친 끝에 성주를 이기고 어렵게 점령할 수 있었는데, 처음으로 전투에 참여한 어린 금강이 최필과 함께 선봉에서 직접 공성병기를 밀어 성문을 여는 활약을 펼친다. 같은 시각 신검이 능애, 능환, 박영규를 붙여 놓았음에도 벽진군에서 또 참패한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으로 차후 신검과 금강의 후백제 후계자 갈등을 암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