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08 14:45:23

척준경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사(高麗史)
{{{#!wiki style="margin: 0 -10px -6px; min-height: calc(1.5em + 6px); word-break: keep-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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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세가(世家)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670000,#fedc89> 1·2권 3권 4·5권
태조 · 혜종 · 정종定宗 · 광종 · 경종 성종 · 목종 현종 · 덕종
<rowcolor=#670000,#fedc89> 6권 7·8·9권 10권
정종靖宗 문종 · 순종 선종 · 헌종
<rowcolor=#670000,#fedc89> 11·12·13·14권 15·16·17·18·19·20권 21권
숙종 · 예종 인종 · 의종 · 명종 신종 · 희종 · 강종
<rowcolor=#670000,#fedc89> 22·23·24권 25·26·27권 28·29·30·31·32권
고종 원종 충렬왕
<rowcolor=#670000,#fedc89> 33·34·35권 36권 37권
충선왕 ·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 충정왕
<rowcolor=#670000,#fedc89> 38·39·40·41·42·43·44권 133·134·135·136·137권열전 45·46권
공민왕 우왕 · 창왕 공양왕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 지(志) ]
47·48·49권 「천문(天文)」 / 50·51·52권 「역(曆)」 / 53·54·55권 「오행(五行)」 / 56·57·58권 「지리(地理)」 / 59·60·61·62·63·64·65·66·67·68·69권 「예(禮)」 / 70·71권 「악(樂)」 / 72권 「여복(輿服)」 / 73·74·75권 「선거(選擧)」 / 76·77권 「백관(百官)」 / 78·79·80권 「식화(食貨)」 / 81·82·83권 「병(兵)」 / 84·85권 「형법(刑法)」
[ 표(表) ]
86·87권 「연표(年表)」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후비·종실·공주 열전(列傳)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88권 「후비1(后妃一)」
89권 「후비2(后妃二)」
90권 「종실1(宗室一)」
91권 「종실2(宗室二)」·「공주(公主)」
태조
신혜왕후 유씨 · 장화왕후 오씨 ·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 신정왕태후 황보씨 · 신성왕태후 김씨 · 정덕왕후 유씨 · 헌목대부인 평씨 · 정목부인 왕씨 · 동양원부인 유씨 · 숙목부인 · 천안부원부인 임씨 · 흥복원부인 홍씨 · 후대량원부인 이씨 · 대명주원부인 왕씨 · 광주원부인 왕씨 · 소광주원부인 왕씨 · 동산원부인 박씨 · 예화부인 왕씨 · 대서원부인 김씨 · 소서원부인 김씨 · 서전원부인 · 신주원부인 강씨 · 월화원부인 · 소황주원부인 · 성무부인 박씨 · 의성부원부인 홍씨 · 월경원부인 박씨 · 몽량원부인 박씨 · 해량원부인
태자 왕태 · 문원대왕 왕정 · 증통국사 · 대종 왕욱 · 안종 왕욱 · 왕위군 · 인애군 · 원장태자 · 조이군 · 수명태자 · 효목태자 왕의 · 효은태자 · 원녕태자 · 효성태자 왕림주 · 효지태자 · 태자 왕직 · 광주원군 · 효제태자 · 효명태자 · 법등군 · 자리군 · 의성부원대군 · 안정숙의공주 · 흥방궁주 · 대목왕후 · 문혜왕후 · 선의왕후 · (정덕왕후 소생 공주) · 순안왕대비 · (흥복원부인 소생 공주) · (성무부인 소생 공주)
{{{#!wiki style="margin: -16px -11px" 혜종 정종 광종
의화왕후 임씨 · 후광주원부인 왕씨 · 청주원부인 김씨 · 궁인 애이주 문공왕후 박씨 · 문성왕후 박씨 · 청주남원부인 김씨 대목왕후 황보씨 · 경화궁부인 임씨
흥화궁군 · 태자 왕제 · 경화궁부인 · 정헌공주 · 명혜부인 경춘원군 · (문성왕후 소생 공주) 효화태자 · 천추전부인 · 보화궁부인 · 문덕왕후
경종 성종 목종
헌숙왕후 김씨 · 헌의왕후 유씨 · 헌애왕태후 황보씨 · 헌정왕후 황보씨 · 대명궁부인 유씨 문덕왕후 유씨 · 문화왕후 김씨 · 연창궁부인 최씨 선정왕후 유씨 · 궁인 김씨
- 원정왕후 · 원화왕후 - }}}
현종
원정왕후 김씨 · 원화왕후 최씨 · 원성태후 김씨 · 원혜태후 김씨 · 원용왕후 유씨 · 원목왕후 서씨 · 원평왕후 김씨 · 원순숙비 김씨 · 원질귀비 왕씨 · 귀비 유씨 · 궁인 한씨 · 궁인 이씨 · 궁인 박씨
평양공 왕기 · 검교태사 왕충 · 효정공주 · 천수전주 · 인평왕후 · 경숙공주 · 효사왕후 · 효경공주 · 경성왕후 · 아지
덕종 정종
경성왕후 김씨 · 경목현비 왕씨 · 효사왕후 김씨 · 이씨 · 유씨 용신왕후 한씨 · 용의왕후 한씨 · 용목왕후 이씨 · 용절덕비 김씨 · 연창궁주 노씨
상회공주 · (유씨 소생 공주) 애상군 왕방 · 낙랑후 왕경 · 개성후 왕개 · 도애공주
문종
인평왕후 김씨 · 인예순덕태후 이씨 · 인경현비 이씨 · 인절현비 이씨 · 인목덕비 김씨
대각국사 왕후 · 상안공 왕수 · 도생승통 왕탱 · 금관후 왕비 · 변한후 왕음 · 낙랑후 왕침 · 총혜수좌 왕경 · 조선공 왕도 · 부여후 왕수 · 진한후 왕유 · 적경궁주 · 보령궁주
순종 선종
정의왕후 왕씨 · 선희왕후 김씨 · 장경궁주 이씨 정신현비 이씨 · 사숙태후 이씨 · 원신궁주 이씨
- 한산후 왕윤 · 경화왕후 · (사숙태후 소생 공주) · 수안택주
숙종 예종
명의태후 유씨 경화왕후 이씨 · 문경태후 이씨 · 문정왕후 왕씨 · 숙비 최씨
상당후 왕필 · 원명국사 징엄 · 대방공 왕보 · 대원공 왕효 · 제안후 왕서 · 통의후 왕교 · 대령궁주 · 흥수궁주 · 안수궁주 · 복령궁주 승덕공주 · 흥경공주
{{{#!wiki style="margin: -16px -11px" 인종 의종 명종
폐비 이씨 · 폐비 이씨 · 공예태후 임씨 · 선평왕후 김씨 장경왕후 김씨 · 장선왕후 최씨 광정태후 김씨
대령후 왕경 · 원경국사 충희 · 승경궁주 · 덕녕궁주 · 창락궁주 · 영화궁주 효령태자 왕기 · 경덕궁주 · 안정궁주 · 화순궁주 왕선사 · 왕홍기 · 왕홍추 · 왕홍규 · 왕홍균 · 왕홍각 · 왕홍이 · 연희궁주 · 수안궁주 }}}
신종 희종
선정태후 김씨 성평왕후 임씨
양양공 왕서 · 효회공주 · 경녕궁주 창원공 왕지 · 시령후 왕위 · 경원공 왕조 · 대선사 경지 · 충명국사 각응 · 안혜태후 · 영창공주 · 덕창궁주 · 가순궁주 · 정희궁주
{{{#!wiki style="margin: -16px -11px" 강종 고종 원종
사평왕후 이씨 · 원덕태후 유씨 안혜태후 유씨 순경태후 김씨 · 경창궁주 유씨
수령궁주 안경공 왕창 · 수흥궁주 시양후 왕이 · 순안공 왕종 · 경안궁주 · 함녕궁주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제국대장공주 · 정신부주 · 숙창원비 김씨 계국대장공주 · 의비 · 정비 · 순화원비 홍씨 · 조비 · 순비 허씨 복국장공주 · 조국장공주 · 경화공주 · 명덕태후 홍씨 · 수비 권씨
강양공 왕자 · 소군 왕서 · 정녕원비 · 명순원비 세자 왕감 · 덕흥군 용산원자
충혜왕 공민왕 공양왕
덕녕공주 · 희비 윤씨 · 화비 홍씨 · 은천옹주 임씨 휘의노국대장공주 · 혜비 이씨 · 익비 한씨 · 정비 안씨 · 신비 염씨 순비 노씨
석기 · 장녕공주 - 세자 왕석 · 숙녕궁주 · 정신궁주 · 경화궁주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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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권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 유금필 · 최응 · 최언위 (최광윤 최행귀 최광원) · 왕유 왕자지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수경 · 왕순식 이총언 견금 윤선 흥달 선필 태평 · 공직 · 박영규
93권
서필 · 최승로 최제안 · 쌍기 · 최량 · 한언공 · 류방헌 · 김심언 · 최항 · 채충순
94권
서희 서눌 서공 · 유진 · 강감찬 · 최사위 · 황보유의 장연우 · 양규 (양대춘) · 지채문 지녹연 · 하공진 · 김은부 · 주저 · 강민첨 · 곽원 · 왕가도 · 김맹 · 류소 · 윤징고 · 위수여 · 전공지 · 이주헌 · 이주좌 · 안소광 · 조지린
95권
최충 최유선 최사제 최약 최윤의 · 이자연 이자량 이자인 이혁유 이자현 이자덕 이예 이공수 이지저 이오 이광진 · 박인량 박경인 박경백 박경산 · 황주량 · 류신 · 왕총지 · 위계정 · 소태보 왕국모 고의화 · 문정 · 정문 · 김원정 · 손관 · 최사량 · 김선석 · 임의 임원후 임극충 임극정 임부 임유 임익 임항 · 김한충
96권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97권
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98권
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이위 · 허재
99권
양원준 · 최유청 최당 최린 최선 최종준 최온 최문본 최평 최옹 · 이공승 · 신숙 · 한문준 · 문극겸 · 류공권 류택 · 조영인 · 왕세경 · 이순우 · 임민비 · 최척경 · 함유일 · 염신약 · 이지명 · 유응규 유자량 · 현덕수 · 최균 최보순 최윤개 · 김거공 · 한유한
100권
두경승 · 우학유 · 노영순 · 조위총 · 방서란 · 박제검 · 기탁성 · 홍중방 · 경대승 · 진준 · 최세보 · 박순필 · 이영진 · 백임지 · 이준창 · 최충렬 · 정세유 정숙첨 정안 · 정국검 이유성 · 정방우 · 정언진
101권
민영모 민식 · 송저 · 김광중 김체 · 안유발 · 최여해 · 최우청 · 왕규 · 차약송 기홍수 · 정극온 · 류광식 · 권경중 · 김태서 김약선 김미 · 문한경 권세후 백돈명 · 노인수 · 김의원
102권
금의 · 이규보 이익배 · 유승단 · 김인경 김승무 · 이공로 · 이인로 오세재 조통 임춘 · 조문발 · 이순목 이수 · 김창 · 송국첨 · 최자 하천단 · 채송년 채정蔡楨 · 손변 · 권수평 · 이순효 장순량 ·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 이장용
<rowcolor=#670000,#fedc89> 103권 104권
조충 조변 · 김취려 김문연 김변 · 이적 · 채정蔡靖 · 박서 송문주 · 김경손 김혼 · 최춘명 · 김희제 · 이자성 · 김윤후 · 김응덕 김방경 김구용 김제안 김흔 김순 김영돈 김영후 김사형 박구 · 한희유 · 나유 나익희 · 원충갑 · 김주정 김심 김종연 김석견
105권
류경 류승 류돈 류만수 · 허공 허종 허관 허금 허부 허유 · 홍자번 홍승서 홍영통 · 정가신 · 안향 안우기 안목 · 설공검 · 유천우 · 조인규 조서 조연 조덕유 조린 조연수 조위
106권
백문절 백이정 · 박항 · 곽예 · 주열 · 이주 이행검 · 장일 · 김구 · 이승휴 이연종 · 김훤 김개물 · 정해 정오 정포 정공권 · 조간 · 심양 · 추적 이인정 채우 · 김유성 곽린 · 윤해 윤택 · 이영 · 엄수안 · 안전 · 최수황 · 박유 · 홍규 홍융
<rowcolor=#670000,#fedc89> 107권 108권
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 권단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권고) 권화 권근 · 민지 민상정 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 김지숙 김인연 · 정선 · 이혼 · 최성지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109권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rowcolor=#670000,#fedc89> 110권 111권
최유엄 · 김태현 김광재 ·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 왕후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 이능간 염제신 · 이암 이강 · 홍언박 홍사우 류연 · 류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 조돈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112권
이공수 · 류숙 류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 설손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113권
안우 김득배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114권
윤환 · 이성서 · 이수산 이념 · 이승로 · 황상 · 지용수 · 나세 · 김선치 · 전이도 · 구영검 · 오인택 · 김보 · 변광수 · 정지상 · 임군보 · 나흥유 · 목인길 · 김유 · 양백연 · 지용기 · 하을지 · 우인열 · 문달한 · 김주 · 최운해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115권 116권 117권
이색 · 우현보 · 이숭인 심덕부 · 이림 · 왕강 · 박위 · 이두란 · 남은 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rowcolor=#670000,#fedc89> 118권 119권 120권
조준 정도전 윤소종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
121권
<rowcolor=#670000,#fedc89> 「양리(良吏)」 「충의(忠義)」
유석 · 왕해 · 김지석 · 최석 · 정운경 홍관 · 고보준 · 정의 · 문대 · 조효립 · 정문감
<rowcolor=#670000,#fedc89> 「효우(孝友)」 「열녀(烈女)」
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122권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방기(方技)」 「환자(宦者)」 「혹리(酷吏)」
김위제 · 이녕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송길유 · 심우경 }}}
123권 「폐행1(嬖幸一)」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124권 「폐행2(嬖幸二)」
윤수 윤길보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125권 「간신1(姦臣一)」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126권 「간신2(姦臣二)」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127권 「반역1(叛逆一)」 128권 「반역2(叛逆二)」 129권 「반역3(叛逆三)」
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정지상) 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석린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
<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131권 「반역5(叛逆五)」
한순 다지 · 홍복원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132권 「반역6(叛逆六)」
신돈
133·134·135·136·137권
신우(우왕) (신창(창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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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평장사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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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 고려 초기
(918~981)
<colcolor=#373a3c,#ddd> [내의성] 평장사
조맹 최언위
문벌귀족기
(981~1170)
[내사문하성] 평장사
최승로 서희 최량 왕융 한인경 유방헌 위수여 진적 유진 최사위 최사위 김심언 진적 이예균 왕동영 최항 최항 강감찬 강감찬 유방 장영 최항 채충순 유방 이공 이공 서눌 서눌 왕가도 류소 이단 이단 이단 황보유의 이단 류소 황보유의 박충숙 유징필 황주량 황주량 최충 최제안 황보영 이작충 최충 황보영 김영기 김원충 김원충 이자연 이자연 왕총지 김정준 박성걸 김정준 김원정
[중서문하성] 평장사
김원정 최유선 임종일 김의진 왕무숭 이정 문정 김약진 이정공 최석 이정공 김양감 최석 김양감 류홍 왕석 김행겸 류홍 최사제 정유산 이안 소태보 소태보 이자위 김상기 류석 김상기 임개 최사추 김선석 황영 최사추 위계정 김선석 임간 임간 이오 이오 위계정 오수증 최홍사 최홍사 이오 윤관 김경용 임의 임의 김경용 오연총 허경 오연총 이위 임간 허경 이자겸 김연 이자겸 김연 조중장 강증 김연 오수증 조중장 김준 임유문 김준 한안인 이자량 김고 임유문 최홍재 김약온 김약온 척준경 척준경 이수 이수 박승중 척준경 김부일 김향 최홍재 최사전 김향 문공인 최자성 최자성 김부식 이준양 임원애 최유 임원준 이자덕 최유 이중 이중 최진 최진 한유충 왕충 임원숙 이인실 이인실 고조기 김영관 최유청 문공원 유필 최관 유필 김영석 최자영 최윤의 이지무 양원준 최함 최유청 박순충 김영부 이지무 최유칭 김영윤 허홍재 허홍재
무신정권
(1170~1270)
임극충 서공 임규 양숙 정중부 윤인첨 윤인첨 한취 이광진 기탁성 민영모 송유인 최충렬 이공승 문극겸 한문준 최세보 이의민 박순필 이혁유 임민비 두경승 이광정 조영인 기홍수 임유 최당 최당 우술유 기홍수 이문충 최선 임유 기홍수 김준 차약송 최충헌 최충헌 김봉모 노효돈 이극서 조충 류광식 이연수 김의원 최보돈 최보순 왕규 김취려 최홍윤 금의 이규보 이자성 채송년 최린 기윤숙 김창 최자 김태서 류소 최자 김기손 송순 김기손 김기손 이세재 김기손 이세재 이장용 김순 최온 김지대 류경
원 간섭기
(1270~1356)
류경 김전 채정 김방경 김방경 원부 장길 유천우 황보기
[첨의부] 첨의찬성사
유천우 류경 원부 박항 송송례 홍자번 홍자번 한강 한강 조인규 인후 강수형 박구 신사전 홍문계 김련 정가신 강수사 송분
[도첨의사사] 도첨의찬성사
인후 정가신 인후 김혼 차신 송분 한희유 정인경 최유엄 한희유 김지숙 최유엄 임익 이덕손 최수황 류비 김혼 차신 채모 김부윤 김혼 안향 최유엄 류비 오윤부 이지저 민훤 정해 왕유소 설영임 조윤통 류비 이혼 김흔 최충소
[도첨의사사] 도첨의중호
이혼 김심 김문연
[도첨의사사] 도첨의찬성사
인후 김심 류청신 이진 류청신 배정 박의 권부 이호 권단 홍선 설영임 설경성 민종유 정지연 최비일 오형 권한공 최성지 김사원 이설 김이용 김이 조연수 오잠 오잠 박허중 오잠 박허중 조련 허유전 박전지 윤보 이호 민종유 송영 권준 김이 한악 임중연 전영보 원충 정방길 강융 임중연 전영보 임자송 원충 전언 채홍철 임중연 조적 채하중 민상정 조위 안문개 홍빈 김인연 정천기 오계유 강윤성 윤환 김륜 권겸 박충좌 유방세 김영후 강윤성 전사의 손수경 안축 윤계종 이군해 류돈 이군해 윤신계 손홍량 윤안숙 염제신 허백 윤신계 이곡 류탁 김인호 조일신 조익청 전윤장 윤시우 김자 류탁 정을보 조유 홍언박 김승택 홍언박 류탁 이공수 강윤충 원호 기륜 강순룡 박새안불화 홍언박 윤환 김경직 김인호 김보 최천택 박수년 허백 황석기 강윤충 권적
여말선초
(1356~1392)
[중서문하성] 평장사
류탁 허백 황석기 김용 황석기 김용 전보문 김일봉 김승택 이승경 정자후 이겸
[중서문하성] 평장정사
안우 이공수* 김용* 경천흥* 류탁* 정세운* 정세운* 이방실
[도첨의부] 도첨의찬성사
유인우 김용 이공수 경천흥 황상 이성서 송경 안우경 최영 이인복 이구수 이인복 송경 안우경 최영 이구수 김보 이춘부 이인임 권적 이성서 윤택 안우상 우제
[문하부] 문하찬성사
한방신 황상 안우경 최영 강인유 안사기 목인길 지용기 정몽주 지용기 정몽주 배극렴 설장수 조준 권중화 조준 류만수 권중화 윤호 성석린
* 평장정사를 평장사로 약칭한 듯함.
고려의 재신(문하시중 · 평장사 · 참지정사 · 정당문학 · 지문하성사)}}}}}}}}}
<colbgcolor=black><colcolor=white> 고려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척준경
拓俊京
출생 미상[1][2][3]
고려 황해도 곡산
사망 1144년 음력 2월
고려 개경
최종 직위 <colcolor=#000,#fff>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4]
본관 곡산(谷山)[5]
이름 척준경(拓俊京) / 탁준경(卓俊卿)[6]
아내 제안군대부인(齊安郡大夫人) 황씨(黃氏)
아들 척순(拓純)[7]
아버지 척위공(拓謂恭)[8]
동생 척준신(拓俊臣)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척준경
1. 개요2. 역임 관작3. 생애
3.1. 초기 생애3.2. 대 여진(女眞) 전쟁기의 활약
3.2.1. 제1차 여진 정벌3.2.2. 제2차 여진 정벌
3.2.2.1. 석성 전투3.2.2.2. 가한목 전투3.2.2.3. 영주성 전투3.2.2.4. 공험진 전투3.2.2.5. 웅주성 전투(1차)3.2.2.6. 길주 전투3.2.2.7. 기동대를 이끌고 여진을 토멸
3.3. 말년
4. 평가5. 기타6. 대중매체7. 관련 문서

1. 개요

고려 시대의 무관.[9]

국사 시간에 비중이 그다지 높게 언급되지는 않는데, 현대에는 척씨가 없어 이름을 한번 보면 잘 잊히지 않는 편이다.[10] 한국사에서 인지도 높은 명장들은 대부분 직접 나서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최고 사령관의 위치에서 활동하였고, 일신의 무력보다는 전략 · 전술로 유명한데 척준경은 반대로 일신의 무력이 워낙 두드러져 당대 고려에서 가장 뛰어난 야전지휘관이자 소방수였다는 점이 묻혀버릴 정도다. 반역자로 축출되어 굳이 윤색해줄 동기가 없고, 가문도 척준경 생전에 이미 영락해서 그 전공의 신빙성이 꽤나 높다.[11] 역덕들 사이에선 소드마스터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하지만 정치나 세상을 파악하는 식견은 어두운 편이었고 권신되기를 꿈꾸던 이자겸에게 영입되어 함께 움직이다가,[12]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세력에 가담하기까지 했다. 먼저 다가온 이자겸을 제외하면 중앙에 어떤 연줄도 없었던데다, 나중에 내부적인 갈등으로 그 이자겸과도 갈라서고 뒤늦게 임금의 편으로 돌아섰지만 타이밍이 늦어 결국 말년은 유배 생활로 마감하게 된 인물이다.

현대에는 이자겸의 반란 같은 고려 역사보다 오히려 전투에서 뛰어났다는 가십이나 일화가 더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며 '아무튼 매우 강력한 대단한 인물'로서 알려져 있지만,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본인에게 그닥 충성심이 없고 왕권을 위협했던 권신이었던데다, 반란에까지 가담한 전적이 있었으니 전투에서의 공적이 어찌했건간에 인물로서의 평이 박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에 들어서 척준경의 '재발굴'이 더욱 새롭게 느껴지고 흥미거리로 떠올려진 데에는 고려 시대의 이러한 평가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 역시 약간은 작용했다.

2. 역임 관작

<colbgcolor=black><colcolor=white> 이자겸 배신 후, 척준경의 최고 직위
공신호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
(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인종이 준 위사공신호. 신흥사의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라갔다.
향직 품계 삼중대광
(三重大匡)
1품 1등위 품계로서 최고위 품계. 향직 품계는 원래 태조가 만든 정식 품계였으나 성종이 문산계 품계를 만들면서 명예직으로 밀려났다.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
종1품 품계로서 최고위 품계. 문산계 품계는 성종이 도입한 정식 품계이다. 문관, 무관 모두 문산계의 구분을 따랐다.
검교직 검교태사(檢校太師)검교는 직위에 이름만 올리는 명예직이다.
수직 수태보(守太保)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에 수직을 붙인다. 태보는 삼사직 중 하나다.
직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 판호부사(判戶部事) 겸(兼)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 수상(首相)인 문하시중에 제배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문하시랑~평장사는 아상(亞相)이다.[13] 판호부사는 호부의 장관이다.[14] 서경유수사는 서경 분사의 최고 장관이다.
훈위 상주국(上柱國)

척준경은 정8급 무관직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무관 출신이기도 했는데, 그 후 큰 권력을 얻으면서 참지정사, 평장사까지 오른 보기 드문 출세를 한다.[15]
<colbgcolor=black><colcolor=white> 척준경 실각 후 직위
문산계 품계 조봉대부
(朝奉大夫)
원 척준경이 가지고 있던 종1품보다 한참 떨어지는 품계.
검교직 검교호부상서
(檢校戶部尙書)
검교는 직위에 이름만 걸쳤다는 의미이며 호부상서는 호부의 장관으로 판호부사의 별칭이다. 척준경이 실각 전 호부상서였던 것을 감안해 검교호부상서를 준 것으로 보인다.

조정을 압도하는 권력을 가졌으나 본인이 실각하고 이자겸과 똑같이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척준경은 이자겸 실각의 주역이었으므로 어느 정도의 대우는 받았다.[16]
<colbgcolor=black><colcolor=white> 척준경 사후 직위 회복
직위 문하시랑평장사
(門下侍郞平章事)
사후에 생전 직위가 추복되었다. 문하시랑평장사는 생전 직위인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를 약칭한 것이다.

1146년(인종 24) 2월 17일 인종의 병이 척준경의 원한 때문이라는 무당의 말에 따라 그의 관직을 추복(追復)하고 자손을 소환하여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같은 달 28일 인종은 훙서하였다.

3. 생애

3.1. 초기 생애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17] 가난한 향리[18]이자 곡산 척씨의 시조인 척위공(拓謂恭)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보다는 무술 연마를 더 좋아했는데[19] 게다가 가난한 집안에서 무술에 뜻을 두다 보니 아무래도 학문은 자연스럽게 멀리하고 무뢰배들과 친해지기 쉬웠다.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고 한동안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문종의 3남 계림후 왕희가 계림공이던 시절[20], 이때 왕희의 저택은 계림부라 하였는데[21] 척준경은 이 계림부의 종자로 들어간다.

이때의 인연으로 1095년 계림공이 어리고 몸이 약했던 조카 헌종을 제치고 보위에 올랐을 때 추밀원 별가(別駕)[22]가 되었다.

3.2. 대 여진(女眞) 전쟁기의 활약

3.2.1. 제1차 여진 정벌

1104년 2월, 여진족이 정주성에 쳐들어왔을 때 전면 패주의 위기에 몰린 총사령관 임간 휘하에서 뛰어난 용력을 발휘하며 정평과 선덕관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공을 세웠다. 이때 척준경은 품계도 없는 하급 관리인 별가(別駕) 직책에 불과했다.

척준경은 총사령관 임간(林幹)에게 직접 말 한 필과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품계도 없는 무명에 불과한 소졸이 사령관에게 바로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매우 시건방진 행동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임간은 척준경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기회를 잡은 척준경은 적장 2명을 전사시키고 여진족 추격대를 뿌리치면서 고려군이 전면 패주하는 상황을 막아냈다.
아군이 패배하자 척준경은 임간에게 부탁해 무기와 갑옷 입힌 말을 얻은 다음 적진으로 돌진해 적장 한 명의 목을 베고 아군 포로 두 명을 되찾았다. 그런 뒤 교위(校尉) 준민(俊旻)·덕린(德麟)과 함께 활을 쏘아 각각 한 명씩을 거꾸러뜨리자 적들이 약간 물러났다. 척준경이 퇴각하는데 적 1백 기(騎)가 추격해 오자 또다시 대상(大相) 인점(仁占)과 함께 적장 두 명을 사살했다. 적들이 전진하지 못하는 틈을 타 아군은 무사히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이 공으로 천우위(千牛衛) 녹사참군사(錄事參軍事) 벼슬을 받았다.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척준경

그런데 이때 뭔가 잘못되었는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옥에 갇혀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왜 투옥되었는지는 역사서에 나와 있지 않지만 유추해 보면 품계도 없는 하급 관리가 건방지게 총사령관에게 요구한 게 높으신 분들의 눈에 거슬려서 괘씸죄를 적용했다거나 공을 세운 것에 우쭐하다가 사고를 쳤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척준경의 공을 시기하여 엉뚱한 죄를 뒤집어씌워서 투옥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때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줬던 사람이 바로 윤관이다. 곤경에 빠진 것을 구해준 인연으로 윤관을 따라 여진 정벌에 참가했고 인간으로는 보기 힘든 엄청난 무공을 세우게 된다.

이때의 전공으로 천우위(千牛衛) 소속 녹사참군사(錄事參軍事)가 된다. 천우위는 궁중 숙위와 국가 행사에서 의장대 역할을 하던 부대[23], 녹사는 정8품의 문신 관직, 참군사는 휘하에 병력을 두지 않은 임시군인이다. 척준경은 여전히 말단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벼슬아치가 되었다고 볼 순 있었다.

3.2.2. 제2차 여진 정벌

고려의 별무반 행영 군단
대원수(大元帥)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 윤관
부원수(副元帥)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 오연총
판관(判官)
병마판관(兵馬判官) 최홍정 병마판관(兵馬判官) 황군상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부필
기타 지휘관
녹사(錄事) 척준경 권지승선(權知承宣) 왕자지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
병과
신기군(神騎軍) 신보군(神步軍) 항마군(降魔軍)
도탕군(跳盪軍) 사궁군(射弓軍) 경궁군(梗弓軍)
정노군(精弩軍) 강노군(剛弩軍) 대각군(大角軍)
철수군(鐵水軍) 발화군(發火軍) 석투군(石投軍)
도합 170,000 명

별무반 대원수 윤관과 친해진 척준경은 천우위에서 중군(中軍) 소속 녹사로 보직을 바꾸어 참전했다.[24]
3.2.2.1. 석성 전투
윤관이 이끄는 17만 명의 별무반은 진격하던 도중 함흥 인근의 성에 도달했는데 이곳에 있던 여진족이 성에 틀어박혀 거세게 농성을 벌였다. 이 때 윤관은 여진족 족장들을 함정에 빠뜨려가며 마비시킨다.[25]

이때 윤관은 시일이 지체될 경우 여진족의 대응 체계가 굳건해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척준경을 불러 장군 이관진의 지원 아래 성을 함락시키라는 지시를 내린다. 척준경은 "죄를 지어서 죽을 몸이었던 저를 살려주신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칼과 방패를 들고 성벽 위로 올라가 추장 여럿을 죽이는 기염을 토했다. 이걸 보고 사기가 오른 이관진 휘하 고려군은 기세를 올려 성을 함락시켰다.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 차림에 방패를 잡고 적진 속으로 돌입해 추장 여러 명을 쳐서 죽였다. 이 틈을 타 윤관의 휘하 군사와 좌군이 합세해 결사적으로 싸워 적을 대파하니 적은 절벽에서 투신해 자결하기도 했으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섬멸되었다.
『고려사』 권96, 열전9 윤관
3.2.2.2. 가한목 전투
이후 병목 지형을 믿고 깊숙히 들어왔던 윤관은 우회로를 통해 침투한 여진 대부대의 기습을 받고 소수의 부하들만 거느린 채 포위된다. 부사령관 오연총이 화살에 맞고 윤관도 위기에 빠졌을 때 척준경이 결사대 10명을 이끌고 윤관의 활로를 뚫으려 하자 낭장(郞將) 계급으로 함께 전투 중이던 동생 척준신(拓俊臣)이 자살행위라면서 뜯어말리지만[26] 척준경은 "나는 한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늙으신 아버님을 부탁하마!" 하며 돌격한다. 이렇게 척준경이 윤관을 구출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이유는 윤관이 먼저 자신을 알아주고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척준경이 여진군 10여 명을 해치우며 결사적으로 시간을 버는 동안, 최홍정과 이관진이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해 윤관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척준경 역시 털끝 하나 안 다치고 무사히 생환했을 뿐만 아니라 물러가는 여진족을 추격해 36명의 머리를 베었다. 날이 저물자 영주성으로 돌아온 윤관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앞으로 너를 자식처럼 생각할 테니 너 역시 나를 아버지처럼 보라!' 라면서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3.2.2.3. 영주성 전투
이후 윤관은 패잔병을 수습해 영주성으로 물러났는데 며칠 뒤 여진의 명장 알새가 군사 20,000여 명을 이끌고 영주성을 공격해 왔다. 고려군은 한차례 큰 패전으로 기세가 꺾인 데다 병력과 군량이 모두 부족했다. 윤관 등 다른 모든 장수들은 적이 많고 아군은 적으니 농성을 하면서 버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척준경은 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적병은 계속해서 늘어날 것인데 성 안의 식량은 얼마 남지 않았고 외부에서 구원도 오지 않는데 어떻게 농성을 하는가?라며 홀로 반대했다. 그리고 전투에 나서길 자청했다. 결사대를 이끌고 성을 나선 척준경은 여진군을 몰아내고 19개의 수급을 취했다. 척준경이 피리를 불며 개선하자 윤관 등 성 안에 있던 장수들이 누대에서 내려와 척준경의 손을 잡고 절을 하며 맞이했다고 한다.

이때까지의 전공으로 합문지후(閤門祗候)[27]가 되었다.
3.2.2.4. 공험진 전투
2번이나 척준경 덕분에 구사일생한 윤관은 갈라전 각지에 넓게 분산된 병력을 한곳에 모아서 대응하기 위해 영주로 각 지역의 고려군을 소집했다. 권지승선 왕자지(王字之)는 윤관의 명령에 따라 공험진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영주로 향하다가 사현(史現)이 이끄는 여진군에게 기습을 당했다. 갑작스런 기습이라 고려군은 크게 패하고 왕자지는 타고 있던 말까지 잃어버려 걸어야 했다. 급보를 들은 척준경은 구원에 나섰다. 척준경의 구원군이 도착하자 사현의 군대는 일거에 패해 도망쳤고 척준경은 말을 잃은 왕자지를 위해 철갑마 한 필을 노획해 선물해 주었다.
3.2.2.5. 웅주성 전투(1차)
동년 2월 알새는 수만에 달하는 대병을 동원하여 고려 주력군이 집결한 영주성 대신 최홍정이 지키는 웅주성을 공격했다. 최홍정이 이끄는 고려군은 여진군이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을 때 성문을 열고 일시에 공격하는 방법으로 80여 명의 적병을 살상 또는 포로로 하고, 병거 50여 량과 중거 200여 량, 군마 40필 등을 노획하는 등 한차례 대승을 거두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여진군의 포위는 더욱 견고해졌다. 최홍정은 성 안에 있던 척준경에게 "당신이 포위를 뚫고 외부로 나가 구원군을 이끌고 오지 않는다면 성 안의 사졸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라며 도움을 요청했고, 척준경은 이내 홀로 밧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는데...
3.2.2.6. 길주 전투
척준경이 군사의 떨어진 옷을 입고 밤에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 정주(定州)로 돌아와 군사를 정돈하여 통태진(通泰鎭)[28]으로 가서,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吉州)(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에 이르러 적을 만나 교전해 대패시키니 성 안 사람들이 감격해 울었다.
『고려사』 권96, 열전9 윤관
척준경은 밤중에 해진 옷을 입고 성벽을 내려와 단신으로 포위망을 돌파한 후 고려 국경인 정주까지 내달려 병력을 집결한 뒤 그들을 이끌고 통태진·야등포·길주를 거치며 만나는 여진군을 모조리 격파한 다음, 최종적으로 웅주성 방어군과 연합해 성을 포위한 여진군을 격파하고 웅주성을 구해냈다. 이것이 1차 웅주성 전투.[29] 이 전공으로 상서성의 정6품 관직 공부원외랑에 제수되었다.
3.2.2.7. 기동대를 이끌고 여진을 토멸
이후 완안부가 유격전으로 전략을 바꿔 10개 대로 나뉘어 돌아가면서 고려군을 기습하자 척준경은 왕자지와 함께 일종의 기동 부대를 편성해 유격전을 벌이는 여진군과 교전을 벌였다. 각각 함주와 영주에서 여진의 기동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8월 무자일.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함주(咸州)(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시, 함주군)·영주(英州)(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일원)에서 여진과 싸워 33명의 목을 베었다.
9월 계해일. 행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사지령(沙至嶺)에서 여진을 공격해 27명의 목을 베고 세 명을 사로잡았다.
『고려사』 권12, 세가12 예종1
9성 원정 후반부는 종심이 얇고 기병대를 동원한 측면타격에 극히 취약한 함흥~경흥 회랑이 수시로 끊어지며 전체적으로 답답한 진행이 이어졌는데 척준경과 왕자지는 기동타격대를 이끌고 이때마다 급한 불 끄는 역할을 도맡았다.

3.3. 말년

뛰어난 활약을 보이자 하급 무관 신세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승진하면서 1117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서북면병마부사가 되었고, 곧바로 지어사대사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1119년에는 동북면병마사가 되었고, 1122년에는 위위경(衛尉卿)[30], 직문하성(直門下省)[31] 직위에 오른다. 아마도 1117년부터 얻은 직책들을 보면 대부분 고위 문관직인데 애초에 척준경이 문관으로 벼슬 생활을 처음 시작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벼슬을 고위 문관으로 꾸준히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이자겸을 따라 대금사대를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척준경이 대금사대를 반대했다는 뜻이 아니라 대금사대는 조정의 공론이지 이자겸 일파의 독단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백관 회의를 통해 의논하는 과정을 거쳤고 김부식을 비롯한 조정 중신 다수가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사신을 보내 강화하는 것이 좋을지, 군대를 양성하여 변란에 대비하는 것이 좋을지 태묘에 신탁을 묻는 절차까지 거쳤다.[32] 잘못된 인식이 횡행한 것은 고려시대 문벌의 정치 행태와 이자겸이란 인물에 대한 연구가 과거에 부족했던 탓인데 이자겸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독재권력을 가진 권신이 아니었다.

이자겸의 출세는 선대 이자연의 출세 과정을 완벽하게 답습한다. 이자연은 신라 왕통을 이은 경주 김씨 가문의 일원이자 현종의 장인인 김인위의 사위였고, 처삼촌이 피난했다 돌아가는 현종을 극진해 대접해 딸 셋을 시집보낸 김은부였다. 이자연이나 인주 이씨가 잘나간 게 아니라 인주 이씨가 속해있는 경주 김씨와 안산 김씨의 위세가 대단한 것이었다.

이자겸 본인은 예종대에 벼락 출세했는데 그 원인은 고려 중기 문벌의 대표. 임금이 먼저 자신에게 절하지 않아도 된다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권세를 지닌 해주 최씨 가문의 수장 최사추가 그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양측적 친족관계로 촘촘하게 이어진 고려의 문벌 사회에선 사위장인 집안에 들어가 살며 장인 가문의 후광을 입는 게 일반적인 일이었으니 최사추제 가문이나 딸에게 거스르지 못 할 한미한 집안의 사내 하나를 키워줬을 뿐이다. 일례로 예종이 이자겸의 딸을 후비로 삼고 예종 4년에 태자를 출산하자 즉시 왕비로 책봉과 최사추에 대한 봉작을 마친 반면 왕비의 아버지인 이자겸은 10년 더 지나 예종 16년에야 봉작을 받았다. 예종이 이자겸을 빠르게 올려준 것도 인주 이씨가 아니라 해주 최씨를 중심으로 한 문벌 네트워크의 조율자 겸 메신저로서 즉위 당시 13세에 불과했던 인종과 문벌 가문 사이를 중재하며 성인이 될 때까지 보필하라는 뜻이지 그의 권세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이자겸 본인은 자꾸 딴 생각을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메신저 역할을 넘는 권세를 노렸는데 정작 그 자신은 비루한 그가 의지할 유일한 구석이 척준경이었다. 이자겸은 병부에서 척준경을 밀어주며 그와 연대를 강화하려 했다. 인종 2년 이자겸이 판병부사가 되고 인종 4년 2월 척준경의 아우 척준신이 병부상서가 되었으며 동년 4월 척준경이 판병부사가 되었다. 특히 별다른 공적도 없고 지위도 낮았던 척준신의 벼락 병부상서 임명은 강한 논란과 질시를 불러왔음에도 강행했다.

물론 그럼에도 병권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데는 실패해서[33] 인종의 측근인 최사전이 "이자겸이 발호하는 까닭은 단지 척준경을 믿기 때문이다. 만약 척준경을 얻으면 병권이 내속할 것이니 이자겸은 다만 고립된 한 사람일 따름이다."[34]라고 단언할 정도로 취약한 기반이었다.

그러면 왜 척준경은 이런 취약한 인사와 사돈을 맺고 밀착했느냐는 의문이 생기는데 이는 그의 가문을 봐야 한다. 양측적 친족관계를 기반으로 조선시대보다 훨씬 오밀조밀하게 이어진 고려 문벌 사회는 21세기 한국인도 이해하기 쉽지 않아서 이자겸을 무소불위의 권신으로 오해하는데 척준경은 그런 복잡한 문벌 가문들의 질서와 완전히 동떨어진 하급 향리 가문 태생의 무장이었다.

설사 알고 있었어도 답이 없는 것이 전쟁이 끝나고 조정에서 물러난 윤관이 얼마 안 되어 사망하는 바람에 유일하게 잡고 있던 인맥마저 끊어져서 갈데가 없었다. 낙동강 오리알 되게 생긴 처지에 먼저 친한척하며 다가오는 이자겸과 손잡을 수 밖에.

믿고 따를 수 있었던 상관인 윤관과 오연총이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최홍정과 이관진 등 함께 활약한 장군 상당수가 잊혀져 간 가운데 척준경은 이자겸 일파가 되어 조정에 안착하며 그의 출신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고위 관직을 넘볼 수 있게 된다. 1123년에 이부상서와 참지정사를 겸하게 되었고, 1124년에는 개부의동삼사 검교사도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이자겸 일파로 분류되어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의 난 때 동생과 아들이 화를 입는다. 또 본인은 인종의 중재를 무산시키고 궁궐을 방화한다. 궁궐에 쳐들어간 후 불이 될만한 땔감 등을 모아서 궁성 동문 동화문(東華門)의 행랑에다 놓고 불을 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궁성에 불을 지른 척준경이 백여기를 이끌고 수춘궁 춘덕문(春德門)에 이르렀을때 내시 이숙신(李叔晨)이 문을 열고 들어오게 하였다. 이는 함정으로 척준경이 들어서자 전(前) 금위별감(禁衛別將) 이작(李作)과 장군 송행충(宋幸忠)이 칼을 빼어들고 기습한다. 척준경은 물러나 문 밖으로 나오는 이들을 죽이라는 지시를 내린다.

고려사 이자겸 열전에 상세하게 기록된 반란 기록을 보면 척준경 빼면 군부에 믿을만한 기반이 부족한 이자겸은 소수의 숙위병과 아들을 통해 동원한 승병 300여명을 동원했고, 인종 측도 소수의 근위 병력만 갖춘 채 궁을 요새삼아 대치했다. 전근대 사서는 교전에 동원된 병력을 생략하고 지휘관만 기록하는 경우가 왕왕 있음을 감안하면[35] 위의 기습 시도도 내시를 시켜 내응하는 것처럼 하고는 수는 적으나 정예도가 높은 근위병들을 동원해 선두에 들어오는 척준경을 노렸다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2월 신유일. 내시지후(內侍祗候) 김찬(金粲, ? ~ 1135), 내시녹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鱗, ? ~ 1126)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 상장군(上將軍) 최탁(崔卓, ? ~ 1126) ·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 ~ 1126), 장군(將軍) 고석(高碩, ? ~ 1126) 등과 함께 이자겸과 척준경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도리어 이자겸과 척준경이 군사를 동원해 궁궐로 침범해 왔다.

임술일. 들이 궁궐을 불태웠다.

계해일. 이자겸과 척준경이 왕을 협박해 남궁(南宮)으로 옮기게 한 다음, 안보린·최탁·권수·고석과 숙위하던 좌복야 홍관(洪灌, ? ~ 1126) 등 17명을 죽였다. 이 외에도 죽은 군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고려사』 권15, 세가15 인종1

결과적으로 인종의 지시를 받고 척준신과 척순을 죽인 군부 인사들은 거의 다 살해당했다. 인종 세력이 먼저 동생과 아들을 죽였으니 척준경의 행동이 이치에 맞지 않냐고 할 수도 있는데 인종 쪽도 국정을 농단하는 권신과 그 일파를 친다는 명분이 있었으니 이자겸 일파로 분류되던 척준경이 억울하다고 볼 수는 없다. 문하시랑평장사 판병부사(判兵部事)의 직위까지 올라간 척준경은 이자겸과 함께 최고의 권세를 누리며 누구도 손대지 못하는 인물이 된다.
백관들은 근처의 사관(寺館)으로 옮겨 임시로 붙어있으면서 수만 채울 뿐이었고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세는 더욱 강성해져 그들이 하는 짓을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였다.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이자겸

그러나 가만히 있을 인종이 아니었다.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를 이간질시켰고 이자겸과 사이가 벌어진 틈에 지다방사(知茶房事) 최사전과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향(金珦, ? ~ 1135)이 척준경을 타이르고 이자겸의 난 이전에 낙향했을 때부터 자신을 신임해준 인종의 개입으로 척준경은 왕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게 된다. 난을 성공시킨 지 3개월 후인 1126년(인종 4년) 5월 사병들을 이끌고 궁궐로 침입하려던 이자겸의 계획을 사전에 알게 된 인종이 척준경을 시켜 잡아 오게 했고 결국 이자겸은 모든 것을 잃고 유배를 떠나게 된다.

척준경은 이 변란을 막고 이자겸을 제압한 공으로 검교태사(檢校太師) 수태보(守太保)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의 직위에 오르게 된다. 이자겸을 몰락시키며 자신이 고려 최고의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1127년(인종 5년) 3월 정지상, 김안 등이 척준경의 죄를 물어 그를 탄핵하기 시작하였고 인종도 내심 척준경을 견제했는지 끝내 전라남도 신안의 엄타도로 유배를 보냈다. 아이러니한 것은 최고 권력자가 되었음에도 왕의 명령에 순순히 따라 유배길에 올랐다는 것. 모종의 이유로 군권을 빼앗겼거나 홀로 인종에게 직접 반기를 드는 행동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척준경의 정치적인 삶을 보면 주체적으로 뭔가를 도모한다기보다는 어떤 리더의 지도하에 움직임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36]

척준경의 유배는 길게 보면 묘청서경천도운동무신정권과도 이어진다고도 볼 여지도 어느 정도는 있다. 전자의 경우 서경 천도론의 중심 인물이었던 정지상이 척준경을 탄핵한 공로로 정계의 중심 인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여진 정벌 등의 전공으로 세력을 이루었던 무신들은 여진 정벌 이후 문신들의 견제로 이미 정계에서 밀려난 상황에서 남은 이들은 최고 전쟁 영웅 척준경에 동조하거나 그에 반대하여 대립하다가 많이 숙청당해서 한동안 무신들의 권력 공백 상태가 이어졌기에 후자의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게도 척준경이 밟아가던 승진 코스가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이 대체로 승진코스로 삼았던 문관직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척준경이 후대 무신들에게 끼친 영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당장 이고와 이의방은 정권을 잡자마자 위위경이 되었고, 게다가 이의방은 전중감에 좌승선까지 했고 딸을 황실에 시집보냈으며, 정중부는 참지정사와 중서시랑평장사와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다. 물론 정중부는 혼자 집권한 이후에는 사실상 올라갈 직책이 없었기에 자신이 문하시중을 찍지만 애초에 이 문하시중도 척준경이 사양했다.[37] 그 이후에도 이의민은 형부상서, 공부상서, 수사공, 좌복야,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를 했고 최충헌은 좌승선, 지예부사, 지어사대사, 태자첨사, 지주사, 이부상서, 병부상서, 지이부사, 추밀원사, 어사대부, 수태부, 참지정사, 판어사대사, 수태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 태자태사 등을 했다. 물론 이의민, 최충헌도 문하시중에 오른다. 그 외에 한 때 이의민과 연립정권을 구성했던 조원정도 공부상서, 추밀원부사까지 했고 이의민과 연립정권을 구성했던 두경승 역시 공부상서, 호부상서, 추밀원부사, 수태위, 참지정사, 판이부사, 수국사, 평장사, 문하시중을 했다.[38]

그래도 유배형에 처해진 이듬해에 인종이 그래도 본인을 구한 것을 생각해 그를 고향 곡주(谷州)로 옮겨주었고 이후에는 처자식들에게 척준경이 가지고 있던 직전(職田)을 돌려주라는 명을 하게 된다. 심지어 1144년(인종 22년)에는 신하로서의 충절은 잃었지만 또한 사직을 지킨 공로가 있으니 검교호부상서(檢校戶部尙書)의 벼슬을 주라는 황명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척준경은 이 결정이 내려진 지 불과 수십 일 만에 등창으로 인해 사망했다.

4. 평가

척준경은 고려를 넘어 한국사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맹장이다. 하급 남반 관리 출신으로 숙종 명효왕 대에 무관이 됐고 예종 시기 여진 정벌에 참여해 크게 활약했다. 고려 초기의 유금필양규, 후기의 김경손, 원충갑, 김방경 그리고 말기의 최영, 이성계와 함께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무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여진 정벌기 내내 독보적인 전공을 쌓았다.

특이한 점은 척준경은 본인의 용맹을 앞세워 불리한 전황을 뒤집은 사례가 무척 많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현대 매체에선 무력적인 측면에서 주목을 받을 때가 많다. 개인의 용맹을 내세워 전황을 바꾼 사례가 척준경 이외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39] 척준경은 확실히 그 빈도가 높은 편에 속하며 양상도 다양하여 돋보이는 면이 있다.[40] 물론 전황을 장수 개인의 용맹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일반적인 상황은 아닌 만큼 이러한 기록이 없거나 적다고 해서 장수로서 딱히 저평가 받을 부분은 아니지만, 적어도 척준경에게는 이러한 상황이 유독 자주 찾아왔고, 그때마다 본인의 능력을 증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특출난 용맹 때문에 가려지는 경향이 있지만, 척준경은 야전 지휘관으로서도 확실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총사령관 직급에서 전역을 이끈 경험은 없기에 그런 방면으로는 평가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자신의 역할이었던 야전 부대 지휘관으로선 탁월한 모습을 보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척준경은 전략예비대로서 윤관 등 지휘부가 실책을 저지를 때마다 자신의 용맹으로 수습함은 물론이고 금제국 건국을 앞둔 최전성기 여진군을 야전에서 격퇴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데뷔전인 정주성 전투부터가 패퇴하는 아군 후방에서 일부 병력을 재빨리 수습하고 반격해 아군이 와해되는 사태를 저지한 다음 적의 역습 시도까지 성공적으로 차단한 전투고, 영주성에선 윤관을 비롯한 제장들 모두가 적의 규모에 압도되어 농성에 매달릴 때 홀로 농성시 닥칠 리스크를 정확히 파악한 다음 공세적 방어를 주장해 직접 성공시켰으며, 웅주성 구원전에선 단기로 성을 빠져나가 국경까지 내달려 새로 인솔한 부대로 통태진·야등포·길주 사이의 여진군을 모두 격파해가며 성을 구원했다. 전황이 지지부진해진 원정 후반에는 여진의 유격 전술에 맞서는 기동타격대장으로 전공을 쌓았다. 척준경의 전술적 역량은 당시 고려군 내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할 수 있다.

여진 정벌에서 걸출한 전공을 세운 척준경은 높은 관직에 올랐고 이후에는 외척 이자겸에게 포섭되어 사돈 관계를 맺고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척준경은 전장에서와는 달리 정계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고 이는 결국 초라한 결말로 이어졌다.

척준경에겐 권세는 있었으나 뚜렷한 정치적 목적이나 계획이라고 할 부분이 없었다. 이자겸과 사돈을 맺고 권세를 부려 친인척에게 높은 관직을 제수하는 등 청렴함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한편으론 정치판에서 은퇴를 결심하고 낙향한 적도 있는 등 확고하게 권력에 목적을 두지도 않았다.[41]

게다가 성격 역시 전형적인 무부(武夫)에 가까워 정계에는 맞지 않았다. 척준경은 정치적 식견을 가지고 신중하게 행동하기보다는 감정적인 면이 강했다. 예를 들어 아들과 동생을 잃자 이에 분노해 충동적으로 궁궐을 불태우는 죄를 저지르고,[42] 이후에는 이를 내심 후회하다가 시종들 간의 말다툼 때문에 대노하여 이자겸과 틀어지는 등 척준경은 신중하게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척준경은 이자겸과 인종 사이에서 휘둘리다가 유배를 끝으로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다. 척준경은 전장에선 충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용맹함과 괜찮은 전술적 판단력도 갖춘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정계와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뒤늦게 근왕파로 전향한 덕에 이자겸과는 달리 고향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었고, 그 자손들도 당장 화를 피할 수 있었던건 다행인 일이다. 후일 인종은 죄가 중하지만 공도 기록할 만하다며 척준경의 자손에게 직전(職田)을 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윤관의 밑에서 세운 공적과 이자겸의 밑에서 차지하고 있던 권력을 곱씹어 보면 허무한 최후가 아닐 수 없다.

이리보면 척준경의 인생은 재산도, 가문도, 인맥도 없는 한미한 지방 출신이 가진 재주만으로 중앙에 진출해 영달을 꿈꾸다 갈팡질팡 끝에 좌절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윤관, 이자겸, 인종 모두 그의 손을 잡아주었으나 한 명은 뭘 해주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고 다른 둘은 이용만 했다. 문과 무라는 차이는 있으나 권력자의 개가 되어 가문의 한계를 넘었다는 점에서 뒷날의 이규보와 유사하며[43] 이의방, 이고, 정중부, 이의민, 조원정, 김준 등 무인 출신으로서 문벌에 균열을 내고 정상을 넘본 이들의 선배격.

5. 기타

깨는 한자(漢字)로 임(荏)이요, 임(荏)은 임(任) 자와 음이 같으니, 임(任) 자 성을 가진 후비를 맞을 징조요, 그 수가 다섯이란 것은 다섯 아들을 둘 상서입니다. 황(黃)은 황(皇)과 음이 같으니 임금의 황(皇)과 같은 뜻이고, 규(葵)란 것은 바로 규(揆)와 음이 같으니 도(道)로 다스린다는 의미의 규(揆)와 같고, 황규(黃葵)란 것은 임금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릴 상서요, 그 수가 셋이 된 것은 다섯 아들 가운데 세 아들이 임금이 될 징조입니다.
고려사절요》, 1126년 6월 미상(음) 이자겸의 두 딸을 내치고 임원애의 딸을 왕비로 삼는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왕비 자리에서만 내쳤을 뿐 대우는 후하게 해줬다. 그도 그럴게 두 딸 중 한 명은 별반 기록이 없지만 다른 딸은 시종일관 인종의 편을 들며 인종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줬기 때문이다.
  • 젊어서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아 보려고도 했으나 배움이 없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지 못했는데 행정 업무 외에도 나름 지식이 있었던 건지 인종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하루는 인종이 깨 5되와 황규(黃葵)[44] 3되를 얻은 꿈을 꾸고 이를 척준경에게 말했다. 이자겸의 두 딸이 폐비된 후 인종이 후비(后妃)[45]로 맞은 여인은 공예태후 임씨였으며 그녀가 낳은 다섯 아들 가운데 의종, 명종, 신종이 왕이 되었다. 고려는 형이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으면 동생이 뒤를 잇는게 자연스러웠다. 태조의 아들 중 3명이 모두 왕위에 올랐고,[46] 현종의 아들 중에서도 3명이 왕이 되었으며[47] 문종의 아들 중에서도 마찬가지로 3명이 왕이 되었다.[48] 단, 꿈 이야기 중 후비의 경우에는 척준경이 단순한 꿈풀이를 해준 수준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그녀의 친정인 장흥 임씨 가문은 상당한 명문가였으며 일찍이 이자겸과 충돌한 가문이었다. 임씨의 아버지인 임원후는 이자겸과 대립하다가 밀려서 개성부사로 좌천된 적도 있었다. 이자겸을 척준경의 손으로 축출한 뒤 이러한 배경을 가진 공예태후를 왕비로 들이고 그 과정에서 척준경의 꿈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달리 해석하면 척준경이 임씨를 왕비로 들이는 데 어떤 식으로든 관여를 했음을 암시하는 증거일 수도 있다.
  • 성격은 전형적인 무인상으로 다혈질에 의리 있는 사나이로 보이는데 자신을 인정해 준 윤관을 목숨 걸고 구출한 일화, 전투 중에 을 잃은 친구 왕자지를 위해 직접 여진족을 추격해 말을 가져다준 일화, 자기 화를 이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이자겸의 아들들에게 역정을 낸 일화 등에서 이런 성격을 알 수 있다. 한때 이런 성격 탓에 정치판을 버리고 낙향하려 하기도 했으나 인종이 직접 사람을 보내 그를 달래가며 복귀시키기도 했다. 이때가 아직 이자겸이 권세를 부리던 시절이었다는 점, 이후에 그에게 보낸 배려 등을 생각한다면 인종도 그를 꽤나 아꼈던 듯하다.
  • 동생 척준신 역시 무관으로 종사하며 형과 함께 여진 정벌에 참여해 공을 세웠고 형의 후광을 등에 업고 병부상서까지 올랐으나 이자겸의 난 직전에 인종의 친위 세력들에게 살해당했다. 아들 척순은 내시[49]로 근무하다가 척준신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고려의 척준경, 사묘아리, 한세충. 만인지적용장 3명이 동시기를 살다 갔으며 시기상 척준경과 사묘아리, 한세충과 사묘아리가 전장에서 부딪혔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부딪혔다는 기록은 없지만 워낙 시기가 절묘하다 보니 이를 소재로 한 패러디물이 역덕후들 사이에서 자주 나온다.
  • 윤관과의 관계나 이후의 무신 최고직에 오르는 모습이 촉한의 마지막 사령관 강유와 비슷한데 척준경과 강유 모두 유능한 상관 밑에서 공을 세웠고 그 상관이 죽자 무신 최고직에 오르는 모습도 비슷하다. 다만 척준경은 권신이 되어 반역 열전에 올랐지만 강유는 유선을 보필하며 30년 동안 북벌을 이끌고 자신의 모든 것을 촉한을 위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심지어 강유는 죽어서도 촉에서는 충신으로 추앙받았는지 사후 약 30년 뒤 그 지역에 성한이 건국되는데 당시 촉의 유민들은 아직까지도 제갈량을 그리워하며 강유가 촉한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다만 강유는 원래 위나라 사람이었기에 위나라 입장에서 보면 강유는 배신자다.
  • 개인 무력과 전공들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뛰어나지만, 권력욕이 매우 크고, 이자겸에 포섭되어 고려 황실에 반역을 했으며, 이자겸을 몰아내고 권력을 쥔 이후 정사를 농단하는 전횡을 저지른 인물로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전혀 다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척준경 당시에 살았던 고려의 매우 강직한 관리였던 김자의는 척준경이 재상이 된 후 탄핵을 받아 남쪽으로 귀양을 간 것을 슬퍼해서 이를 시로 읊었다.
‘용과 호랑이 같은 웅대한 모습, 철석같은 마음, 장차 충의로써 임금을 도우려 하였네. 다만 새를 다 잡으면 활은 창고로 들어갈 뿐이니, 한신(韓信)이 유방(劉邦)을 배신한 것은 아니라네.’[50]
김자의는 이 시에서 척준경이 죄없이 인종에 의해 토사구팽 식의 억울한 처벌을 받았다고 말했으며, 그의 시가 고려 무신정권기의 대표적인 문인 명사 중 한 사람인 이인로의 '파한집'에 실려 고려의 지식인들이 척준경이 죄가 없이 인종에 의해 억울하게 토사구팽을 당했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었다.[51]
또 당시 고려의 민중들도 김자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사료가 고려사 세가
인종 24년(1146) 병인년 • 2월 병진일의 기사가 있다.
고려사 세가 인종 24년(1146) 병인년 • 2월

병진일. 무당들이, 척준경(拓俊京)의 원혼(怨魂)이 저주를 내렸다고 말하므로 척준경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추복(追復)하고 그 자손을 불러다가 벼슬을 주었다.[52]
그가 정말로 반역자에 간신인지, 아니면 죄없이 인종에 의해 억울하게 토사구팽을 당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6. 대중매체

창작물에서 척준경을 주인공으로 잘 다루지 않는 이유를 창작자의 기준에서 추측한다면 의외로 분명해지는데, 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의외로 척준경은 주인공으로 내세우기 힘든 인물 유형이다. 잡고 휘두르는 주인에 따라 인물이 달라졌다고 평가될 만큼 척준경의 생애는 본인이 무언가를 선택해서 밀어붙인 삶이 아니었는데, 상관이 누구냐에 따라서 척준경은 구국의 명장도, 간신을 지키는 맹견도 되었다.

이렇게 일생을 다른 이의 뜻에 따라 정반대의 행적을 보인 사람을 창작물의 주인공으로 삼기는 대단히 어렵다. 보통의 한국 사극처럼 주인공에게 좋은 쪽으로 해석한다면 터무니없는 미화가 될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고 고증을 살려 그대로 묘사하면 주인공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힘만 센 바보가 되어버린다. 역설적이지만 살아온 생애에서 무언가 큰 욕심을 보인 흔적이 있다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끝에 타락해 버린 악역 주인공으로 묘사해 볼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척준경은 이자겸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한 다음 최고 권력까지 쥔 상태에서 자신에 대한 탄핵이 들어오자 순순히 이를 받아들여 권력을 놓아버렸다. 현실이 이러하니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모르고 과도한 욕심을 부리다 결국 망하고 마는 인물로 묘사할 수도 없는 노릇. 척준경은 청렴결백하지는 않았어도 권력을 단번에 놓아버릴 만큼 과욕은 부리지 않았고 이자겸을 왕을 능가할 만한 권신으로 만들어줬지만 결정적인 시점에서는 아무 힘도 없던 왕의 명을 받들어 이자겸을 제거했으며 평소 군사 분야를 제외하고는 재주가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해몽 등 특정 분야에서는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보여주는 등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이런 복잡한 인물상도 척준경을 창작물의 주인공으로 쉽게 다룰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고 볼 수도 있는데 캐릭터의 성격을 결정짓기도 어렵거니와 창작자의 의견이 개입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약점은 임용한의 저서 <전쟁과 역사>를 통해 21세기에 행적이 재발굴된 인물이라 전범이 되어줄 창작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가령 여말선초후삼국시대는 90년대까지 다양한 창작물들이 나왔고 이환경이란 걸출한 작가가 정사와 야사, 창작물들을 집대성해 빚어냄으로서 어떤식으로 다루면 재밌는지 확실한 틀을 만들어줬는데 척준경은 물론 여진전쟁기 자체가 사표가 되어줄 작품이 존재하지 않는 공백의 시기다. 소설이든 만화든 이 시대와 척준경을 다룰 걸출한 창작자가 나와줘야 하는데 이게 쉽지가 않다.

다만 주인공으로서 중심 인물이 되기 애매하다는 뜻이지 역사적 행보는 뚜렷한 편이기 때문에, 시점을 옮겨 윤관이나 이자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에 조연으로 등장한다면 나름대로 눈에 띄는 감초 조연이 될 여지는 있다. 특히나 사극에서는 책상에 앉아서 하는 탁상공론보다는 전투가 더 관심을 끄는데, 딱히 무협지스러운 요소를 제거한다 하더라도 가장 빛이 날 수 있는 맹장이기 때문에 시원시원한 액션 신을 보여준다면 충분히 사극에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하다.[53]

6.1.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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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롱이의 옛날여행묘청 편의 배경 설명에 잠시 등장하는데 이자겸을 척결한 공으로 권세를 얻고 횡포를 부린 것으로 묘사된다. 그 후 정지상에게 탄핵 크리를 맞고 퇴장한다. 지상파 방송에서 척준경의 모습이 묘사된 것은 이 작품이 거의 유일하다.

6.2. 드라마

  • 드라마 〈도깨비〉의 '김신' 장군의 모티브 인물이라는 의견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6.3. 웹툰

  • 2014년 1월 30일부터 올레마켓 웹툰에서 척준경을 주인공으로 다룬 〈푸른바람 척준경〉이 연재됐다. 척준경의 친구인 왕자지도 본명 그대로 나온다. 다만 작품 내에 종종 고증 오류가 보이는데 1화에서 이자겸의 난을 조명하고 있는데 왕궁에서 치고받았다고 기록된 《고려사》의 기록과는 달리 야전으로 그려져 있는 데다 이자겸의 난 발발 당시 1126년인데 이미 1122년에 사망한 왕자지가 버젓이 살아서 척준경과 붙어다니질 않나, 뭣보다 전형적인 문관인 윤관인간흉기급 무관으로 그려진다. 극의 흐름을 위한 각색이라고 보면 되지만 그나마도 조기 완결당한 듯하다.
  • 사신소년〉에서 이경호의 25번째 사용 영혼/이신의 사용 영혼/데스애더의 코어 등 꽤 자주 등장한다. 수식어는 '검성'. 작중 등장하는 영혼들 중 가장 많은 버전으로 등장하는데 사용자 기준으로 하면 4가지[54]에 개방 단계를 기준으로하면 10가지 버전이 있다.[55]
역사고증도 상당히 뛰어난 편인데 그의 생애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석성, 가한목, 영주성 전투 때로 추정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고 이자겸의 난때 가족이 화를 입자 궁궐에 불을 지르고 처들어가는 모습도 나온다.
  • 헬로도사〉에서는 척준경의 후손이 나오지만 비형랑에 빙의되어 척준경의 신체 능력을 발휘하는 위협적인 악역으로 나온다.
  • 고란〉에서 수인들을 상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6.4. 소설

  • 2022년 1월 28일부터 카카오페이지에서 척준경의 일대기를 다룬 웹소설 <무쌍 척준경>이 연재를 시작했다. 무협 장르로 출간됐는데 대체역사물과 판타지가 혼합된 느낌이 더 강하며 읽다 보면 척준경이나 등장인물들 무력이 너무 황당무계한 수준이다. 다른 웹소설들이 그렇듯 고증이 잘되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지금껏 나온 척준경을 다룬 창작물들 중에는 거의 유일하게 척준경의 생애 전반을 다루고 있다. 판타지나 무협을 좋아하며 척준경이라는 인물에 관심이 있다면 볼 만은 하다.

7. 관련 문서


[1] 동료였던 왕자지가 1066년생으로 기록된 것을 볼 때 척준경은 그와 동갑내기거나 연하의 연배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아무리 높게 잡아도 1066년생보다 나이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고려의 여진 정벌 중 왕자지가 여진족에게 포위되었을 때, 척준경이 왕자지를 구원하고 여진족에게서 말까지 노획해 선물한 일화가 있는데 보통 동료나 윗사람에게나 그렇게 하지 자기보다 아랫사람에게 뭘 구해다주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일반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2] 아울러 왕자지가 정4품 시랑 벼슬에 머물 당시 척준경은 정6품 원외랑 벼슬에 머문 만큼 이 역시 척준경이 왕자지보다 나이가 많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물론 척준경이 왕자지에 비해 훨씬 한미한 가문이었기에 동년배거나 혹은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출세가 늦었을 것이라는 분석 또한 있지만, 그런 요소를 감안하더라도 척준경이 왕자지보다 나이가 많지는 않았고 최대로 잡는다 해도 동갑내기였을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3] 또한 동북9성 축조로 유명한 2차 여진정벌이 1107년부터 1109년까지 있었는데, 만약 1066년 출생설을 적용한다면 이 시기 척준경의 연령대는 40대 초반으로 인간으로서는 최상의 신체 활동량을 갖출 나이이며 여진 정벌에서의 활약상과도 맞아떨어진다.[4] 박탈되었으나 사후 추복됨. 고려사에 문하시랑평장사로 추복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생전 직위인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의 약칭이다.[5] 아버지 척위공이 곡산 척씨의 시조다.[6] 고려 말 대학자 이제현이 쓴 익재난고(益齋亂藁)의 9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4년에 국구(國舅) 이자겸(李資謙)이 평장사(平章事) 탁준경(卓俊卿) 【척준경(拓俊京)을 말한다.】(후략)[7] 1126년 2월 내시(內侍)로 있던 중 삼촌인 척준신과 함께 살해되어 궁성 밖에 유기되었다. 동년 3월 호부원외랑으로 추증되었다.[8] 아들 덕에 검교대장군 직을 받았다. 여기서 검교는 명예직을 의미한다.[9] 문산계라 문관이라고 착각하지만 척준경은 중앙 정부의 무관들이 밟는 행보를 보였다. 척준경의 행보는 전형적인 무관이다. 추밀원만 하더라도 고려 때 군기(軍機) · 왕명의 출납 · 궁중의 숙위(宿衛) 등을 수행하던 관청이었으며 별가(別駕)도 향리(鄕吏)의 후계자 중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는 이름뿐인 직위였었다. 고려에서 중앙 정부에 속한 문관과 무관은 둘 다 문산계에 속해있었으며, 무산계는 군병들 말고는 무관하고는 상관없는 지방 향리와 그 자손, 대장장이 같은 장인, 탐라 왕족 같은 이들이 받는 말만 무산계인 루트였으므로 척춘경은 무관이 맞다.[10] 이 척(拓)이란 한자를 성씨로 읽을 때는 '척'이 아니라 ''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11] 김유신 열전처럼 기전체 사서 열전은 가전 문서나 행장을 베이스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곡산 척가는 고려사가 편찬된 조선 초기에는 이미 망성이 된지 오래였다. 그전에 그의 가문에서 남긴 기록이 있었을 가능성도 희박한게 척준경은 문맹이나 실질적 문맹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의 아들과 동생은 그보다 먼저 살해당했으며 가문은 지방에서 변변히 행세도 못 하는 하급 향리 가문이었다.[12] 더 정확히 말하면 출세하고 싶으면 도리가 없었다. 지방의 낮은 향리 가문 자제인 그와 중앙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던 윤관이 실각했고 달리 손내밀어주는 거물 정치인도 없었다. 이자겸이 중앙의 명문가 무장들과 척지면서까지 척준경과 손잡은 것도 그의 권력이 인종이 성장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용인받은 시한부 권력이라 위태위태한 처지였기 때문이다. 이자겸과 손잡지 않았다면 반역 열전은 피해가는 대신 최홍정, 이관진처럼 원정 끝나자마자 역사에서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는 처지였다.[13] 문하시중과 마찬가지로 중서문하성의 관직이다. 고려 행정부 내에서 총리격인 문하시중 다음 서열로 부총리격에 해당한다. 문하시중이 공석일 때는 총리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14] 풀네임은 '판상서호부사'인데, 줄여서 판호부사라고 불렸다. 당나라의 제도로 치면 원래 중서령과 문하시중도 당태종 때 종2품으로 승격되기 전엔 정3품이었다. 당태종 당시 기준을 보면 상장군은 종2품, 대장군은 정3품, 장군은 종3품, 중랑장은 정4품으로 고려는 문신들은 올려치기를 하고 무신들은 내려치기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본인 당의 관제를 보면 정1품이 될려면 작호(爵號)중 왕(王)이 되어야 정1품이 될 수 있다. 군왕(君王)과 사왕(嗣王)은 종1품 上이고 국공(國公)은 종1품 下에 해당되며 그 밑으로 개국군공 등 6개의 작호가 더 있으며 이들은 보통 정3품보다 위에 존재한다. 즉, 종2품부턴 관료 체계가 아니라 작위 체계에 가까운 형태를 볼 수 있다.[15] 무신정권이 시작되면 정중부문하시중을 얻고 나서는 개나 소나 재신, 추밀에 오르지만 무신정권 이전까지 무관 출신 중에 중서문하성 재상에 진출한 인물은 유방, 왕국모 등 정도뿐이다.[16] 이자겸도 인종의 외조부라 사후 검교태사, 한양공에 추증되었다.[17] 황해도 다른 군들이 예성강 수계에 속하는 것과 달리 곡산군 중북부는 대동강 수계에 속한다. 정도전은 평안도를 비롯해 대동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인 서북사람들을 산림맹호(山林猛虎. '곧 산 속에 사는 사나운 호랑이와 같다')고 하였다.[18] 고려의 향리는 맨 위의 호장부터 여러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호장, 부호장 정도 되면 지방의 유력자로 상당한 권세를 가졌다. 신라 말 혼란기의 지방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하면서 향리가 되었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거의 호족이나 다름없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중앙 집권이 강화되면서 지방 세력들은 가병들도 뺏기고, 신분도 격하됐지만, 고려까지 호장(戶長)은 세력을 갖춘 지역 토호들이 임명되는 최고위직이었다. 척준경은 집안이 가난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호장급이 아닌 일선 행정 업무를 담당한 하급 향리 집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지방제는 수령이 있든 없든 현에 행정 업무를 보는 향리들이 따로 존재했기 때문이다.[19] 고려 시대는 과거에 무과가 따로 없었다. 고려의 무과는 예종 때 무학재와 함께 잠깐 생겼다가 인종 때 혁파되고 이후 공양왕 때 가서야 잠깐 생겼다가 고려가 멸망한다.[20] 후에 숙종이 되는 왕희는 1077년부터 1095년까지 계림공으로 불렸다. 척준경이 차후에 활약한 나이를 감안하면 척준경은 대략 1060년대 후반 출생이고 1080년대에 계림공 소속 종자로 들어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21] 고려에서는 3등작을 받은 왕족에게 제왕부를 봉해 관저로 삼게 해주었다.[22] 추밀원의 말단 관리로 왕명의 출납·궁중의 숙위(宿衛)·군기(軍機) 업무 등을 하는 관직[23] 핵심 전투 부대인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나 치안 부대인 금오위보다 규모와 중요성이 떨어지나 엄연히 6위의 일원이다.[24] 중군은 2군 6위처럼 특정 부대가 아니며 고려의 전시 편제인 오군 중 하나이다. 6위의 병력이 수도 혹은 북방에서 부병하다 전시에는 오군으로 편성되는 방식으로 척준경의 소속 부대는 여전히 천우위이다.[25] 여진정벌 문서를 제대로 보면 알 수 있듯 윤관의 친 고려계 여진추장족 척살은 대 전략안으로는 최악의 악수였고, 고려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정말 오랫동안 고전하게 된다.[26] "적진이 견고하니 깨뜨릴 수 없다, 헛되이 죽지 마라" 라고 하였다.[27] 조회와 의례를 맡아보던 관서인 합문(閤門) 소속의 정7품 관직이다.[28]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29] 2차 웅주성 전투 때는 임언과 최홍정이 구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공격했다 참패해 위기에 처했으나 오연총이 정예군 1만 명을 데리고 개경에서 급히 달려와 27일 만에 포위에서 벗어났다.[30] 위위시(衛尉寺)의 차관. 종3품. 위위시는 부서명으로 왕실의 의장용 비품을 관리하는 부서다.[31] 중서문하성 소속 서열 8번째 직위. 종3품.[32] 고려사 권15, 인종 4년 3월 신묘(辛卯), 을미(乙未).[33] 인종 즉위년에 병부상서였던 이영천(李英闡), 인종 원년에 판병부사였던 김지화(金至和)는 이자겸 일파와 연결 고리가 확인되지 않는다. 인종 4년 인종이 측근 세력을 동원해 이자겸 일파를 치려 했을 때도 상장군 최탁(崔卓), 상장군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장군 고석(高碩) 등 상당히 많은 군부 인사들이 가담했다. 이들은 척준신의 벼락 출세에 강한 반감을 품은 인사들이기도 했다.[34] 고려사 권 98. 최사전 열전[35] 척준경의 첫 전투인 정주성 전투만해도 밑에 정9품 지휘관인 교위 2명이 뒤따랐으니 일종의 결사대를 급조해 이끌었다 보는게 자연스럽지만 기록만 보면 그냥 셋이서 들이친 것 처럼 적혀있다.[36] 후대 무신집정들은 그 자신이 1인자를 향한 확고한 욕망을 갖고 있었고 살아남은 문관들, 왕실과 어느 정도 타협하며 정치를 했다. 가장 견고한 체제를 구축해 세습에 성공한 최충헌은 일종의 막부 체제를 구축해 따로 관부를 개설해 통치하고 희종이 친위세력을 모아 자신을 제거하려들자 역으로 폐위시키기 까지 하였다. 물론 이들 중 적잖은 수는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근위병 출신(이의방, 이고, 정중부)이거나 선대에서부터 중앙에 입지를 세워서 정치와 학문을 익힐 수 있었던(최충헌)이들이지만 이의민김준이나 조원정처럼 정말 밑바닥 천출에서 만인지상이나 고위직에 올라선 이들도 분명히 있다. 두경승처럼 명문가 출신도 있는데 두경승은 집정 중에 인망이 있고 인덕도 있고 강직한 성품에 뛰어난 능력도 있고 무신정변에 참여하지 않아서 반역열전에 기록되지 않고 제신열전에 기록되었다.[37] 무인정권 시대 때 정중부와 이의민과 최충헌은 척준경보다 더 높은 지위까지 갔으나 둘다 종래에는 관직들이 삭제되었다.[38] 다만 두경승은 경대승과 더불어 고려사 반역열전에 기록되지 않았다.[39] 예를 들어 제2차 합비성 전투에서 800명의 별동대로 10만여 명의 오군을 와해시킨 장료, 낭비성 전투에서 단신으로 성을 드나들며 적장이나 깃발을 베어온 김유신, 12명의 결사대를 이끌어 1만의 몽골군을 후퇴시킨 김경손, 8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성을 점령한 리처드 1세, 용인 전투에서 1600명의 정예병으로 남도의 조선 근왕군 5만 명 이상을 와해시킨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찾아보면 꽤 여러 사례가 존재한다.[40] 또한 척준경은 반역 열전에 실린 인물이며, 그의 가문 역시 고려사 저술 시점인 조선 초에는 이미 망성(亡姓)이 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전공이 후대에 과장됐을 가능성이 적다는 점도 나름 특이할 만한 점이다.[41] 이후 이자겸과 다퉜을 때도 낙향해서 여생을 보낼 것이라 말하기도 했으며, 이자겸을 제거한 뒤 인종이 척준경을 문하시중으로 삼으려 하자 서열을 뛰어 넘는 인사라며 스스로 거부하기도 했다.[42] 당시 기록을 보면 척준경이 이자겸에게 사람을 보내 궁궐에 불을 지를 것을 제의하여 이자겸이 주위 사람과 이에 대해 논하고 있었는데, 정작 척준경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43] 단, 이규보는 반역열전, 간신열전, 폐행열전에 수록되지 않았다.[44] 누런 아욱[45] 황제 또는 국왕의 정실과 후궁을 통틀어 일컫는 말.[46] 혜종, 정종(3대), 광종[47] 덕종, 정종(10대), 문종[48] 순종, 선종, 숙종[49] 환관이 아니라 내직관리를 의미한다. 여기서 내시란 흔히 아는 내시가 아니다.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고자인 내시(환관)는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일 때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그때 정착된 것이다. 물론 고자인 인물이 당시에 환관으로 궁에서 일하기는 했으나 조선처럼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게 아니라 사고로 그렇게 된 자만 이를 채용했다. 조선도 원칙적으로는 사고로 고자가 된 사람만 채용했지만 뽑는 인원이 고려 때보다 많다 보니 몰래 거세해서 들어온 경우가 허다했으며 걸렸을 경우 내시에서 짤렸다. 따라서 고려의 내시는 당연히 소수일 수밖에 없었다.[50] 이인로의 파한집 중권 - 상서(尙書) 김자의(金子儀)는 체구가 컸으며 뛰어난 절조도 있었다 출처: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muph_002r_0070[51] 척준경 당시, 매우 강직한 인물로 평가받은 김자의가 척준경을 무고한 충신이자 공신으로 옹호했고, 또 김자의. 그가 사실과 전혀 다르게 척준경을 무고한 충신,공신으로 옹호하는 시를 지었다면 결국 이 사실이 고려 조정에 알려져 그는 인종의 명예를 부당하게 훼손한 죄로 엄중한 처벌을 받거나 심한 경우 처형이 될 수도 있는 사안인데, 이 시를 지은 것으로 인해 김자의가 전혀 처벌을 받지 않은 점과 또 고려 무신정권기의 대표적인 문인 명사인 이인로도 김자의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척준경을 무고한 충신이자 공신으로 옹호할 정도면 척준경이 죄없이 인종에 의해 억울하게 토사구팽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52]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24080&categoryId=62161&cid=62131[53] 비슷한 인물로는 여포가 있는데 배신하는 인생으로 살아왔는데 삼국지연의에서 정사보다 무력이 더 부각되면서 책이든, 게임이든, 드라마든 멋진 무예를 뽐내며 신 스틸러 역할을 한다. 척준경도 비슷하게 그려질 수 있다.[54] 이경호(영혼, 코어), 이신(영혼), 데스애더(코어)[55] 영혼 빙의 2개, 영혼 지배 1개, 영혼 동기화 2개, 코어 개방 2개, 코어 폭주 1개, 완전코어개방 2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