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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호 | 묘청(妙淸) 정심(淨心) | |
고려 관작 | 법계 | 삼중대통(三重大統)[1] |
직위 | 지누각원사(知漏刻院事)[2] | |
연호 | 천개(天開) | |
활동지 | 서경 | |
생몰년 | ? ~ 11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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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시대의 승려. 일반적으로는 묘청(妙淸)이라는 법명이 유명하지만, 뒷날에 법명을 정심(淨心)으로 고쳤다.2. 생애
2.1. 서경 천도 운동[3]
서경 전투는 곧 낭·불 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 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었으니, 이 전쟁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 신채호, 조선사 연구초에서 발췌.[4]
- 신채호, 조선사 연구초에서 발췌.[4]
서경 출신으로 인종 때 왕실 고문 자리까지 올랐다. 이때는 북방의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기세를 이어 송나라까지 강남으로 쫓아버리면서 새로이 중원의 패권을 잠식하는 시기였는데 묘청은 강성한 금나라에 맞서 대항하자는 명분으로 개경은 지덕이 쇠하였으므로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묘청은 대외적 명분 외에도, 개경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김부식 일파를 몰아내려는 의도도 있었던 듯하다. 이 때문에 묘청이 살아있는 동안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은 매번 충돌했다.
묘청은 인종이 천도에 동의하게 하려고 이런저런 준비를 많이 했다. 묘청이 주청하여 1129년에 대화궁(大華宮)이 완공되자 인종과 함께 보러 갔다. 묘청은 그때 김부식과 이런저런 논쟁을 벌이다가 저 산을 보라고 했다. 거기에는 별이 매우 낮게 떠 있었는데 묘청은 저걸 보고 남극성이라며 상서로운 징조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냥 높이 매달아 놓은 등불이었다.[5]
위와 같은 꾀가 들통나자 인종은 서서히 서경 천도에 회의감을 느낀다. 한때는 솔깃해서 서경에 자주 행차하고 임원역(林原驛) 근처에 대화궁을 지었지만, 그 대화궁조차 무사하지 못했다. 벼락이 떨어진 일도 있었는데, 김부식은 “그토록 좋은 곳이라면 무엇 때문에 벼락이 떨어지냐?”라며 까댔다.[6] 유학자로서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 김부식이 이런 말을 했으니 서경 길지설을 비꼬는 의미이다.
급기야 묘청은 1132년에 무리수를 둔다. 기록에 따르면 대동강 근처에 기름을 넣은 떡을 준비하고 인종을 대동강 가로 모시고 나오면서 대동강에 도착할 때에 맞춰 사람들로 하여금 기름떡을 대동강의 적절한 위치에 던져 가라앉혔다고 한다. 떡에서 새어 나온 기름이 물에 떠 햇살을 받고 반짝이자 묘청은 인종에게 '대동강에 잠든 용이 침을 토해 대동강 물에 상서로운 기운이 깃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서기가 비치니 서경은 천기가 가득한 땅이라고 허위 광고를 한 것이다. 반대 세력이 의심하여 강물을 살짝 떠보니 기름기가 느껴져, 잠수부를 동원해 자맥질하게 해보니 떡이 발견되어 들통났다.
고려사를 보면 뭔가 어리버리한 인상도 준다. 서경 중흥사에 큰 화재가 났는데 누군가가 묘청에게 "네가 임금께 서경에 행차하시기를 청한 건 재앙을 진정시키기 위함인데 왜 이런 재난이 발생한 것이냐?"이라고 묻자 묘청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못하다가 한참 뒤 주먹을 쥐고 얼굴을 들고 "만약 주상께서 개경에 계셨으면 재난이 이보다 컸을텐데 다행히 서경에 오셔서 재앙이 밖에서 일어났으니 주상의 몸이 편안했던 것이다!"라고 말했고 묘청을 믿는 사람들은 함께 "이런데 어찌 믿지 않겠는가?"라고 호응했다.
그리고 인종이 서경으로 행차하다가 금암역(金巖驛)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폭풍우가 불어서 행차가 길을 잃어 늪에 빠지기도 하고 나무나 돌부리에 부딪혔으며 그날 밤에는 진눈깨비까지 내리고 추워지는 바람에 말과 낙타의 피해가 컸다. 이를 본 묘청은 '내가 이 날에 바람과 비가 있을 줄 알고 비와 바람의 신에게 주상께서 길에 있으니 비바람을 일으키지 말라고 했더니 이미 승낙해 놓고 이처럼 약속을 어기니[7] 실로 가증스럽다!'라며 하늘을 탓했다고 한다.
2.2. 묘청의 난과 최후
1135년에 서경으로 천도를 추진하면서 대위국을 선포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반란을 일으킨 지 17일 만에 조광에 암살당했다.자세한 내용은 묘청의 난 문서 참고하십시오.
3. 평가
단재 신채호가 매우 높게 산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이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신채호는 묘청이 주도한 북벌론을 자주적이라며 높게 평가하면서도 묘청에 대해서는 그리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신채호는 북벌론의 주요 인물인 윤언이와 정지상을 높게 평가했고 둘 중에서도 서경 천도를 지지한 정지상이 아닌 반대쪽이었던 윤언이[8]를 더더욱 높게 평가하였다. 묘청에 대한 신채호의 평가는 실제로는 혹평이었는데 조선사 연구초에서 광망(狂妄)[9]하다는 표현을 하였다. 즉 그가 섣불리 난을 일으켰다가 윤언이, 정지상 등 자주 정신을 지향하는 인물들이 제거당하게 만들었고 이게 조선 사대주의의 원인이 되었다고 평한 것이다.
현대 사학자들의 평가는 정지상의 광대, 요승에 가깝다. 서경파 인물인 정지상이 서경 천도를 밀어붙이기 위해서 성인의 이미지를 덧붙여 내세운 얼굴마담에 불과했을 뿐이라는 것.[10] 묘청의 난 자체가 묘청의 이름만을 빌렸을 뿐 사실상 서경의 난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묘청은 난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거되었으며 그럼에도 서경 반란군은 와해되지 않고 해를 넘겨 지속되었음이 이를 방증한다. 반란 자체가 묘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묘청의 사망과 함께 난이 쉽게 끝났을 것이다. 물론 묘청 본인도 자신이 광대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리야 없었겠지만 서경 천도의 가능성만 믿고서 밀어붙였는데 결국 인종이 천도를 거부하자 분노한 나머지 폭주해버린 것이라는 견해다. 다른 서경파 인물들은 묘청이 폭주할 줄은 몰랐던 모양인데 개경에 그대로 남아있었던데다가 누구보다도 묘청의 목을 쳐야 한다고 앞장서서 진언했다. 서경천도운동 당시 찬성파는 한 일파가 아니었고 한 풀 꺾였던 서경 세력, 친왕 세력, 신흥 관료 등이 기득권층인 개경의 문벌귀족과 대립한다는 하나의 목적으로만 뭉쳤던 잡탕이었다. 서경 세력 내의 과격파인 묘청이 폭주를 했으니 다른 분파들은 저런 또라이랑 엮여서 사형당하기 싫었던만큼 묘청과의 관계성을 부정하고자 애썼던 것이었다.[11] 사실 인종도 주동자만 주살[12]하고 나머지는 살려주라고 일렀기 때문에 이들에게 희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김부식 등 개경파 인물들에게 선참후계(先斬後啓)[13] 식으로 처단당했다.
4. 기타
- 북한의 역사 교육 과정에서는 한국에 비해서 매우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 김부식과 개경 귀족들에게 사대주의 프레임을 씌우고 서경 세력에게 자주적이고 주체적이라는 프레임을 가져다 붙이는 식. 북한 수도인 평양시로 천도를 주장했기에 더욱 강조한다.
- 일부 위인전 등에서도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묘청의 난 자체를 신채호의 북벌론에 대한 평가를 기반으로 자주민족의 자주심을 키우기 위한 움직임으로 미화될 때가 종종 있는 편이다. 다만 그만큼 선정에 대한 논란은 있다.
- <고려사절요>에는 역사에 부상하기 이전의 경력에 대해 "묘청은 서경승(西京僧)[14]이다." 라고만 설명하고 다른 기록이 없어서, 외모, 출신, 본명, 인종을 만나기 전의 행적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고려사>에 "천문관원(日者) 백수한이 묘청을 스승이라 불렀다.", "묘청은 음양가의 비술을 들먹이며 뭇 사람을 현혹했다" 하는 등의 묘사를 봐서는 도참, 예언 등의 활동을 한 승려로 추측된다.
- 한국사 RPG - 난세의 영웅에서는 서경파의 일원으로 나오는데 개경파일원이 자기도 사대가 마음에 안들지만 묘청을 비롯한 서경파세력에 대해 현실을 모르고 이상만 주장한다고 혹평한다.
5. 같이보기
[1] 고려시대엔 승려의 품계인 '법계(法階)'가 있었다. 묘청의 법계인 '삼중대통'은 고려의 고위 법계 '삼중대사(三中大師)'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2] 누각원의 장관. 누각원은 서경 분사(分司) 정부의 부서로 개경 중앙 정부의 태사국에 해당된다. 누각원은 물시계를 관리하는 부서로 시간을 계산했다.[3] 경인년에 발생해서 경인의 난이라고도 한다.[4] 그러나 현대에는 신채호의 평가와 반대로 김부식은 고려의 자주성을 중시한 흔적도 여럿 보이고(송나라라고 마냥 잘 대해주지 않거나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황제국의 역사를 싣는 '본기'에 실었다. 이는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이 고려를 제후국의 역사에 넣는 세가에 넣는 것과 대조되는 점이다.) 반면 묘청은 실현 불가능한 말만 일삼는 허풍쟁이 수준이었다. 묘청이 아니더라도 서경파가 정말 금나라 정벌을 원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말이 안 된다. 당장에 이 시기엔 남송이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려가 금나라와 군신관계 맺는 건 금나라의 강한 국력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겁쟁이 행위가 아니었다.[5] 사실 카노푸스는 서울에서조차도 최대 남중했을 때 지평선 너머 간신히 보이는 수준으로 남산과 관악산 등에 가려 당연히 안 보인다. 한반도에서 간신히 보려면 적어도 37도선(수원-원주-삼척) 이남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남해안에서도 사실 보기 힘들다. 현대에는 고층 건물과 야간 불빛 때문에 그냥 못 본다. 심지어 조선 시대에도 제주도에서나 제대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토정 이지함은 한라산을 세 번이나 올랐다. 즉 서울보다 북쪽에 있는 평양 근처에서 그것도 산 위 하늘에서 카노푸스를 보기는 불가능하다. 개경이나 남경(현재의 서울)과 달리 평양 남쪽에는 산이 없지만 그래도 안 보이는 건 매한가지다.[6] 풍문으로는 묘청이 “벼락이 아니라 하늘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라 둘러댔다고 한다.[7] 원문에는 식언(食言)이라고 표현.[8]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데 종군해 결정적인 책략을 내는 등 서경 천도를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칭제건원(왕을 황제로 선포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쓰도록 하는 것)에는 찬성했다.[9] 狂 - 미칠 광, 妄 - 망령될 망[10] 이민족과의 전쟁이 일단락되어 북벌이 종결된데다 고려의 역사 계승 의식 자체가 고구려 계승 의식에서 신라 말부터 대두한 삼한일통 의식으로 옮겨가면서 북벌 정책에 힘입어 올라갔던 서경의 위상 자체가 바닥을 쳤고 분사 제도도 유명무실해졌는데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서경 세력이 내세운 얼굴마담이라는 설이다.[11] 물론 반역죄는 전근대 시대 어디에서나 인정하는 죽어 마땅한 최악의 죄였기 때문에 굳이 서경파가 잡탕 세력이 아니었더라도 일이 안 풀린답시고 저렇게 미쳐 돌아버린 사람과 함께하다가 처단당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잡탕이든 한 일파 세력이든 간에 웬만해선 어떻게라도 연루를 피하는 게 일반적이다. 따지고보면 타 서경파 인물들은 보수적인 개경의 기득권 세력을 물리치겠다는 목적 하나로만 묘청과 함께하다가 묘청이 폭주하게 되자 아예 묘청과의 관계를 끊어버기로 한 셈이었다.[12] 죄를 물어 죽임[13] 먼저 베고 나서 아룀[14] 서경에서 활동하는 승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