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9:07:53

1. 개요2. 법적인 죄3. 윤리적인 죄
3.1. 죄의식의 제거
4. 종교적인 죄
4.1. 기독교에서의 죄
4.1.1. 두가지 계명4.1.2. 원죄4.1.3. 칠죄종4.1.4. 죄로부터의 구원
4.2. 불교에서의 죄
5. 기타

1. 개요

죄()는 규범이나 윤리에 어긋나거나 반하는 행위나 그와 같은 잘못을 말한다. 범죄와는 좀 다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법률 ·도덕 ·종교 등에 있어, 국가나 사회 ·교단(敎團)과 같은 집단이 규범(規範)으로서 인정하는 법칙에 어긋나고 그것의 결과로서, 규범을 위반한 사람에게 벌을 가하게 되는 행위나 태도의 일반적 명칭. 과거에는 당시에 보기에 그릇된 행동들을 죄로 보기도 했다.

비슷한 말이자 순우리말인 허물이 있으나 허물은 잘못이나 실수하는 포함하는 포괄적인 말이다.

2. 법적인 죄

crime

국민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규범인 법률, 그 중 광의의 형법에 저촉되는 행위가 있고, 그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받으면 그 행위는 범죄가 된다. 관습법이나 조리 역시 광의의 형법의 법원이 되므로 범죄와 사전적 의미의 죄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범죄 관련 정보 문서로.

3. 윤리적인 죄

3.1. 죄의식의 제거

벌을 받고 죄를 보상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자기가 나쁘다는 의식이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의례(儀禮)를 치름으로써 죄를 제거한다거나, 산 제물을 바쳐서 속죄한다거나, 벌을 받음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덜고 새로이 태어난다거나, 이상과 현실의 분열에 의한 고뇌를 신불(神佛)에 의해 구제받는다거나 또는 이상과 현실의 긴장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아를 통일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해 죄의식을 제거하려고 한다.

4. 종교적인 죄

a sin

4.1. 기독교에서의 죄

그러나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벌써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우러나온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행위는 모두 다 죄가 됩니다.
로마서 14장 23절(공동번역)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식과는 다르게 매우 폭넓다. 범사에 하느님을 인정하는 굳건한 믿음에 서지 않고 한 모든 행위는 엄밀히 말해서 숨쉬는 것까지 죄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불신자들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더라도 그런 행동을 할 때에 하느님 앞에 겸손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조차 죄로 보며, 사람마다 양심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양심은 죄의 척도가 결코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기독교 신자의 경우에도, 아무리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믿음이 흔들려서 그것이 마음 속에서 하느님보다 비중이 커진다면 그것은 죄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죄의 결과는 언제나 사망과 저주이며, 죄는 또 다른 죄를 낳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죄를 심어준다.[1] 또한 인간은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성령 충만한 상태일지라도 가만히 있으면 자연히 죄가 올라온다. 회개와 자기부인 없이도 술술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죄이다. 죄를 짓는 것은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간음한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 같이 인간은 때때로 자신이 죄 지은 것을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2]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은혜 없이는 선한 것이 눈꼽만큼도 나올 것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또한 성경은 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속에 죄를 더욱 품도록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3] 다시 말해 죄에 대한 분별력이 날카로운 사람일수록, 은혜가 소멸됐을 때 그 사람은 남들보다 더욱 죄를 많이 짓는 교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고 하느님 앞에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더욱 큰 은혜를 받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죄에 대한 분별력을 올바르게 사용하여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또한 죄에 민감한 것이 상당한 스트레스를 유발하여 일상생활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민감성을 포기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4]

오랫동안 목욕을 한다고 해서 밖에서도 저절로 깨끗함이 유지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정해진 기도 시간 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음으로써 죄로부터 스스로 깨끗하게 해야만 영적으로 하수구보다 더러운 세상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세 죄로 잔뜩 더럽혀져 일상의 삶을 죄 가운데에 행하게 되므로 삶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 강도처럼 운 좋게 죽기 직전에 회개해서 구원 받는 사람도 있겠지만, 세상 속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100%+그 은혜를 의지하려는 인간의 노력 100%로 된다고 할 수 있다.

4.1.1. 두가지 계명[5]

첫째되는 계명은 하느님사랑 그리고 둘째로 이웃사랑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성경적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곧, 죄가 된다고 보여지며 어떤 인간도 이것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한다.[6][7] 동시에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의 속성을 뜻한다.

4.1.2. 원죄

original sin. 아담과 하와(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으로 빙의한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형성된 죄를 말한다. 이는 에덴동산 이후 역사부터 현재 흘러가는 역사까지 유전되어 결국 인간은 태어나면서 죄인이라는 신분으로 태어난 것이다.[8] 아우구스티노가 주장한 이래 가톨릭 및 대다수 개신교 종파 내에서 주류적 교설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는 개념이다.

죄의식을 중요시하는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근원적으로 아담과 하와의 원죄(原罪)를 물려 받아 마음이 순수함을 잃고 결함을 지니게 됐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죄로부터 구제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한다.

4.1.3. 칠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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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 죄로부터의 구원

기독교의 구원론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에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그러나 인간은 (惡)의 유혹과 협박 앞에 죄를 짓지 않고 살 재간이 없다.[9] 또한 모든 죄는 강한 중독성이 있어서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완벽히 끊어낼 수 없고, 인간의 양심만으로는 어떤 것이 죄인지 완벽히 판단을 내리는 것도 불가능하다.[10] 그리고 인간은 그렇게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이다. 이를 회복하는건 인간 자력으론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신의 구원이 필수적이다.
야훼여,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그러나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시편 130편 3-4절 (공동번역 성경)

벗어날 수 없는 죄와 그에 따른 인간의 책임 사이의 긴장 관계가 오직 신의 "은혜"에 의해서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죄에 대한 정통적(正統的) 사상이다. 여기 "은혜"의 자리에 다른 어떤 것(특정한 행위라든지 삼위일체 하느님을 제외한 인물)이 들어가면, 이단의 교리가 된다.

4.2. 불교에서의 죄

불교 교리의 근본은,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변화하지 않는 것을 기대하는 데서 괴로움이 생기기 때문에, 계율과 선정(禪定)과 지혜에 바탕을 둔 올바른 생활을 실천함으로써 괴로움이 없는 열반(涅槃)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아집(我執)에 사로잡혀 법(法:dharma)에 어긋나는 일이 죄이기 때문에 자력(自力)에 의해 해탈의 길로 나갈 것을 불교는 역설한다. 한편 대승 불교 중 일부 분파에서는 업(業:karma)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벗어날 수 없는 죄 많은 인간은 불타 및 보살 등에 대한 타력적(他力的) 신앙에 의해서만 구제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5. 기타

문학 작품이나 드라마에서, 혹은 나이가 좀 있으신 어르신들이 '벌받는다'고 해야할 것을 죄받는다고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 아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죄받다, 죄주다, 죄입다가 각각 벌받다, 벌주다, 벌받는다는 뜻의 표준어로 수록되어 있다. 현재는 죄(罪)와 벌(罰)을 구분해서 쓰지만 원래 罪(죄)라는 한자 자체에 징벌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한문 고전을 읽다보면 罪(죄)를 벌하다로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有過不, 無功受賞, 雖亡不亦可乎?
잘못이 있는데 벌하지 않고, 공적이 없는데 상을 받는다면 비록 망해도 또한 그럴 만하지 않겠습니까?
- 한비자

판타지 소설가 이영도는 자신의 작품 피를 마시는 새에서 죄에 대해 독특한 해석을 제시했으며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1]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그것에 대해 나쁘지 않게 생각해도 죄고, 그것을 보고 그 죄를 지은 사람을 정죄해도 죄이다. 다른 사람의 죄에 물들거나 반발심에서 나오는 죄에 물들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죄에 노출되었을 때에 가만히 있으면 자동으로 죄에 물들게 된다.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죄를 분별은 하되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믿음으로 성령을 따를 때에 가능하다. 예를 들어 기독교 교리상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한 무신론자가 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인간적인 관점에서 친절하고 재미있는 사람일 경우 믿음에서 나오지 않는 모든 것은 죄라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여 그 사람에게 인간적인 정이 들 수 있다. 그러다보면 그 사람이 지옥에 가야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올라오게 되고 그 결과 성경을 왜곡해서 믿거나 하느님을 원망하게 되는 죄를 짓게 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과는 애초에 말도 섞지 않고 차가운 태도를 취하는 것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어긋나기에 일종의 죄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친절하게 행하되 죄를 분별하면서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2] 그들의 최후는 멸망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 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필립비서 3장 19절)[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로마서 7:7-8)[4] 영적인 감각이 무뎌지면 다른 아브라함계 종교들처럼 하느님을 찾는 것 자체는 가능하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려는 마음은 사라지게 된다.[5] 마르코 복음서 12장.[6] 참고로 십계명보다 이 두가지 계명이 앞서는 것은 예수가 한 말로 기록되어졌기 때문.[7] 예수는 유대인들이 매일 암송하는 신명기 6:4-9에 해당하는 쉐마의 앞부분을 인용하여 말했다. 또한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은 하느님 사랑, 두 번째 돌판은 이웃사랑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예수는 독자적인 해석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유대 사회의 통념과 구약의 율법에 기초하여 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한다.[8] 이를 이해할수 있는 방법으로 여겨지는 것은 갓난아이가 태어나면 아무리 귀여울지라도 마음속에는 성인으로 성장할때 지을 죄들이 꽉 들어있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저절로 나온다고 한다. 더 쉬운 대표적인 예로 아이가 성장해서 어린이가 되면 대부분 욕심뗑깡질을 많이 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9] 원죄의 결과로 모든 사람은 죄를 향한 경향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10] 죄는 잠시 만족감을 주는 듯 하다가 묘한 불만족감을 생성해내어 하나님 그 자체가 아닌 무언가를 더 갈망하게 만든다는 특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