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충주(忠州). 공민왕 때 삼사우윤에 이르고, 우왕 때 예의판서가 되었으며, 밀직부사(密直副使)·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승진해 수성분의공신(輸誠奮義功臣)의 호를 받았다.
1378년(우왕 4) 전라도도순문사가 되어 장흥부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1381년에 지밀직사사로서 전라도원수(全羅道元帥)가 되어 사근내역(沙斤乃驛)에서 패퇴해 파직되었다.
이듬해양광·전라도·경상도 조전원수(楊廣全羅慶尙道助戰元帥)로 기용되었고, 원수 이을진(李乙珍)과 함께 반남현(潘南縣)에서 왜구를 격퇴하였다. 1384년에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전라도도원수가 되었고, 이어 전라도도순문사로 다시 나가 왜를 쳤다.
1388년에는 요동(遼東)정벌에 안주도부원수로 참가했다가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의 편을 들어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9년(공양왕 1)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중흥공신녹권(中興功臣錄券)을 받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그 뒤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냈으나 이·초(彛初)의 옥에 연루된 김종연(金宗衍)의 당인으로 지적되어 탄핵을 받아 삼척에 유배되었다. 당시의 대사헌 김사형(金士衡) 등이 지용기의 죄를 덜어 고신과 공신녹권만 거두자고 하였다. 그러나 낭사(郎舍) 진의귀(陳義貴)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매 1백을 쳐서 삼척에 귀양보냈으며, 가산은 적몰(籍沒)하였다. 1391년 처의 재종 왕익부(王益富)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죽었다.
비록 역모와 관련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기는 했으나 지용기의 행동은 전장에서는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의 용맹에 비교되었으며,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과 같은 자질을 소유한 자로 평가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