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의 무신으로 그는 미천한 가문 출신이었기에 글을 몰랐으며 의종 때 금군에 속했다가 대정(隊正)이 되었다.
이후 유시의 변에 휘말리게 되는데 유시의 변이란 1167년에 발생한 사건으로 놀고 먹기를 매우 좋아하던 고려의 황제 의종은 신하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노는 걸 좋아했는데, 이런 외유 중에 김돈중의 실수로 무신 한 사람의 말과 그의 말이 부딪히면서 그 무신의 화살통에 있던 화살이 튕겨나갔는데, 하필 의종 앞에 꽂히는 일이 벌어진다. 의종은 저격수의 암살미수인 걸로 오해한 채 사색이 되어 범인을 찾았고, 일이 눈덩이처럼 커져버린 걸 안 김돈중이 자기 산답시고 무신 여럿을 희생양으로 삼아 결국 무신 몇몇이 유배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무신들과 김돈중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고[1] 이때 최세보는 잘못한것도 없음에도 금군 대정 이라는 이유로 여기에 휘말려 경상남도 남해군으로 유배갔다가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옛 직책을 회복한 채 복귀하였다.
이후 이전부터 쌓여왔던 무신들의 불만과 더불어 의종의 행태 그리고 한뢰의 행동 때문에 폭발한 정중부가 일으킨 무신정변으로 의종이 폐위되고 명종이 즉위하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올랐으며 1183년 이의민이 정권을 잡자 이후 1184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판병부사(判兵部事), 상장군(上將軍) 등을 지냈다.
1186년에는 동수국사(同修國史)에 임명되었는데 어떤 자가 중방(重房)에다가, “수국사(修國史) 문극겸(文克謙)이 의종이 시해되었던 사건을 두고, ‘왕을 죽인 것은 천하의 큰 죄악이다.’라고 거침없이 썼습니다. 이제부터는 무관으로 이 직을 겸하게 하여 제멋대로 기록하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건의했다. 문극겸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몰래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전래의 제도를 고치기가 싫었으나 무신들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결국 최세보를 동수국사(同修國事)로 임명했다. 최세보는 함부로 사실을 고쳐 역사를 왜곡했기 때문에 『의종실록(毅宗實錄)』에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탈락되거나 생략되어 버렸다고 한다.
문극겸이 언젠가 쇄사당(曬史堂)에서 최세보더러, “유관(儒官: 문신)으로 상장군이 된 것은 내가 처음이요, 무관으로서 동수국사가 된 것은 당신이 처음이다.”라는 농담을 하면서 함께 낄낄거렸다. 당시 최련(崔連)·김부(金富)도 장군으로서 함께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니, 무인으로 문관을 겸임하는 행태가 세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명종 19년 최세보가 문극겸을 대신하여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는데, 성품이 탐욕스럽고 비루해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마음대로 벼슬을 올리거나 내려 거만의 재산을 모았다.
한편 추밀원부사 조원정이 탐욕스러운 성미를 고위직에 오른 뒤에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이의민 집권기인 1187년에 중서문하성의 공해전 조세를 횡령하려고 시도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황실의 신임을 받는 문극겸, 두경승 등과 힘을모아 그를 탄핵하였고 조원정은 탄핵 당한후 문극겸 등을 모두 주살하려다 실패해 처형되었다.
그 후 곧 특진수태사(特進守大師)로 올랐다가 명종 23인 1193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그의 가문의 최후는 비참했는데, 아들인 최비가 궁녀와 사통하는 대형 사고를 저지르는 바람에 최충헌의 손에 가문이 멸족을 당했다.
여담으로 무신정변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게 아니고 정변 직후 복직되어 무관직을 수행한 덕분인지 <반역 열전>이 아닌 <제신 열전>에 이름을 올렸다.
[1] 여담으로 이때 누명을 씌운 군대가 군주의 호위군인 순검군과 견룡군이었는데, 이들이 나중에 무신정변의 시초가 되는 보현원 사건의 핵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