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37:01

문익점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사(高麗史)
{{{#!wiki style="margin: 0 -10px -6px; min-height: calc(1.5em + 6px); word-break: keep-all"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세가(世家)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670000,#fedc89> 1·2권 3권 4·5권
태조 · 혜종 · 정종定宗 · 광종 · 경종 성종 · 목종 현종 · 덕종
<rowcolor=#670000,#fedc89> 6권 7·8·9권 10권
정종靖宗 문종 · 순종 선종 · 헌종
<rowcolor=#670000,#fedc89> 11·12·13·14권 15·16·17·18·19·20권 21권
숙종 · 예종 인종 · 의종 · 명종 신종 · 희종 · 강종
<rowcolor=#670000,#fedc89> 22·23·24권 25·26·27권 28·29·30·31·32권
고종 원종 충렬왕
<rowcolor=#670000,#fedc89> 33·34·35권 36권 37권
충선왕 ·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 충정왕
<rowcolor=#670000,#fedc89> 38·39·40·41·42·43·44권 133·134·135·136·137권열전 45·46권
공민왕 우왕 · 창왕 공양왕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 지(志) ]
47·48·49권 「천문(天文)」 / 50·51·52권 「역(曆)」 / 53·54·55권 「오행(五行)」 / 56·57·58권 「지리(地理)」 / 59·60·61·62·63·64·65·66·67·68·69권 「예(禮)」 / 70·71권 「악(樂)」 / 72권 「여복(輿服)」 / 73·74·75권 「선거(選擧)」 / 76·77권 「백관(百官)」 / 78·79·80권 「식화(食貨)」 / 81·82·83권 「병(兵)」 / 84·85권 「형법(刑法)」
[ 표(表) ]
86·87권 「연표(年表)」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후비·종실·공주 열전(列傳)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88권 「후비1(后妃一)」
89권 「후비2(后妃二)」
90권 「종실1(宗室一)」
91권 「종실2(宗室二)」·「공주(公主)」
태조
신혜왕후 유씨 · 장화왕후 오씨 ·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 신정왕태후 황보씨 · 신성왕태후 김씨 · 정덕왕후 유씨 · 헌목대부인 평씨 · 정목부인 왕씨 · 동양원부인 유씨 · 숙목부인 · 천안부원부인 임씨 · 흥복원부인 홍씨 · 후대량원부인 이씨 · 대명주원부인 왕씨 · 광주원부인 왕씨 · 소광주원부인 왕씨 · 동산원부인 박씨 · 예화부인 왕씨 · 대서원부인 김씨 · 소서원부인 김씨 · 서전원부인 · 신주원부인 강씨 · 월화원부인 · 소황주원부인 · 성무부인 박씨 · 의성부원부인 홍씨 · 월경원부인 박씨 · 몽량원부인 박씨 · 해량원부인
태자 왕태 · 문원대왕 왕정 · 증통국사 · 대종 왕욱 · 안종 왕욱 · 왕위군 · 인애군 · 원장태자 · 조이군 · 수명태자 · 효목태자 왕의 · 효은태자 · 원녕태자 · 효성태자 왕림주 · 효지태자 · 태자 왕직 · 광주원군 · 효제태자 · 효명태자 · 법등군 · 자리군 · 의성부원대군 · 안정숙의공주 · 흥방궁주 · 대목왕후 · 문혜왕후 · 선의왕후 · (정덕왕후 소생 공주) · 순안왕대비 · (흥복원부인 소생 공주) · (성무부인 소생 공주)
{{{#!wiki style="margin: -16px -11px" 혜종 정종 광종
의화왕후 임씨 · 후광주원부인 왕씨 · 청주원부인 김씨 · 궁인 애이주 문공왕후 박씨 · 문성왕후 박씨 · 청주남원부인 김씨 대목왕후 황보씨 · 경화궁부인 임씨
흥화궁군 · 태자 왕제 · 경화궁부인 · 정헌공주 · 명혜부인 경춘원군 · (문성왕후 소생 공주) 효화태자 · 천추전부인 · 보화궁부인 · 문덕왕후
경종 성종 목종
헌숙왕후 김씨 · 헌의왕후 유씨 · 헌애왕태후 황보씨 · 헌정왕후 황보씨 · 대명궁부인 유씨 문덕왕후 유씨 · 문화왕후 김씨 · 연창궁부인 최씨 선정왕후 유씨 · 궁인 김씨
- 원정왕후 · 원화왕후 - }}}
현종
원정왕후 김씨 · 원화왕후 최씨 · 원성태후 김씨 · 원혜태후 김씨 · 원용왕후 유씨 · 원목왕후 서씨 · 원평왕후 김씨 · 원순숙비 김씨 · 원질귀비 왕씨 · 귀비 유씨 · 궁인 한씨 · 궁인 이씨 · 궁인 박씨
평양공 왕기 · 검교태사 왕충 · 효정공주 · 천수전주 · 인평왕후 · 경숙공주 · 효사왕후 · 효경공주 · 경성왕후 · 아지
덕종 정종
경성왕후 김씨 · 경목현비 왕씨 · 효사왕후 김씨 · 이씨 · 유씨 용신왕후 한씨 · 용의왕후 한씨 · 용목왕후 이씨 · 용절덕비 김씨 · 연창궁주 노씨
상회공주 · (유씨 소생 공주) 애상군 왕방 · 낙랑후 왕경 · 개성후 왕개 · 도애공주
문종
인평왕후 김씨 · 인예순덕태후 이씨 · 인경현비 이씨 · 인절현비 이씨 · 인목덕비 김씨
대각국사 왕후 · 상안공 왕수 · 도생승통 왕탱 · 금관후 왕비 · 변한후 왕음 · 낙랑후 왕침 · 총혜수좌 왕경 · 조선공 왕도 · 부여후 왕수 · 진한후 왕유 · 적경궁주 · 보령궁주
순종 선종
정의왕후 왕씨 · 선희왕후 김씨 · 장경궁주 이씨 정신현비 이씨 · 사숙태후 이씨 · 원신궁주 이씨
- 한산후 왕윤 · 경화왕후 · (사숙태후 소생 공주) · 수안택주
숙종 예종
명의태후 유씨 경화왕후 이씨 · 문경태후 이씨 · 문정왕후 왕씨 · 숙비 최씨
상당후 왕필 · 원명국사 징엄 · 대방공 왕보 · 대원공 왕효 · 제안후 왕서 · 통의후 왕교 · 대령궁주 · 흥수궁주 · 안수궁주 · 복령궁주 승덕공주 · 흥경공주
{{{#!wiki style="margin: -16px -11px" 인종 의종 명종
폐비 이씨 · 폐비 이씨 · 공예태후 임씨 · 선평왕후 김씨 장경왕후 김씨 · 장선왕후 최씨 광정태후 김씨
대령후 왕경 · 원경국사 충희 · 승경궁주 · 덕녕궁주 · 창락궁주 · 영화궁주 효령태자 왕기 · 경덕궁주 · 안정궁주 · 화순궁주 왕선사 · 왕홍기 · 왕홍추 · 왕홍규 · 왕홍균 · 왕홍각 · 왕홍이 · 연희궁주 · 수안궁주 }}}
신종 희종
선정태후 김씨 성평왕후 임씨
양양공 왕서 · 효회공주 · 경녕궁주 창원공 왕지 · 시령후 왕위 · 경원공 왕조 · 대선사 경지 · 충명국사 각응 · 안혜태후 · 영창공주 · 덕창궁주 · 가순궁주 · 정희궁주
{{{#!wiki style="margin: -16px -11px" 강종 고종 원종
사평왕후 이씨 · 원덕태후 유씨 안혜태후 유씨 순경태후 김씨 · 경창궁주 유씨
수령궁주 안경공 왕창 · 수흥궁주 시양후 왕이 · 순안공 왕종 · 경안궁주 · 함녕궁주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제국대장공주 · 정신부주 · 숙창원비 김씨 계국대장공주 · 의비 · 정비 · 순화원비 홍씨 · 조비 · 순비 허씨 복국장공주 · 조국장공주 · 경화공주 · 명덕태후 홍씨 · 수비 권씨
강양공 왕자 · 소군 왕서 · 정녕원비 · 명순원비 세자 왕감 · 덕흥군 용산원자
충혜왕 공민왕 공양왕
덕녕공주 · 희비 윤씨 · 화비 홍씨 · 은천옹주 임씨 휘의노국대장공주 · 혜비 이씨 · 익비 한씨 · 정비 안씨 · 신비 염씨 순비 노씨
석기 · 장녕공주 - 세자 왕석 · 숙녕궁주 · 정신궁주 · 경화궁주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열전(列傳)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92권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 유금필 · 최응 · 최언위 (최광윤 최행귀 최광원) · 왕유 왕자지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수경 · 왕순식 이총언 견금 윤선 흥달 선필 태평 · 공직 · 박영규
93권
서필 · 최승로 최제안 · 쌍기 · 최량 · 한언공 · 류방헌 · 김심언 · 최항 · 채충순
94권
서희 서눌 서공 · 유진 · 강감찬 · 최사위 · 황보유의 장연우 · 양규 (양대춘) · 지채문 지녹연 · 하공진 · 김은부 · 주저 · 강민첨 · 곽원 · 왕가도 · 김맹 · 류소 · 윤징고 · 위수여 · 전공지 · 이주헌 · 이주좌 · 안소광 · 조지린
95권
최충 최유선 최사제 최약 최윤의 · 이자연 이자량 이자인 이혁유 이자현 이자덕 이예 이공수 이지저 이오 이광진 · 박인량 박경인 박경백 박경산 · 황주량 · 류신 · 왕총지 · 위계정 · 소태보 왕국모 고의화 · 문정 · 정문 · 김원정 · 손관 · 최사량 · 김선석 · 임의 임원후 임극충 임극정 임부 임유 임익 임항 · 김한충
96권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97권
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98권
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이위 · 허재
99권
양원준 · 최유청 최당 최린 최선 최종준 최온 최문본 최평 최옹 · 이공승 · 신숙 · 한문준 · 문극겸 · 류공권 류택 · 조영인 · 왕세경 · 이순우 · 임민비 · 최척경 · 함유일 · 염신약 · 이지명 · 유응규 유자량 · 현덕수 · 최균 최보순 최윤개 · 김거공 · 한유한
100권
두경승 · 우학유 · 노영순 · 조위총 · 방서란 · 박제검 · 기탁성 · 홍중방 · 경대승 · 진준 · 최세보 · 박순필 · 이영진 · 백임지 · 이준창 · 최충렬 · 정세유 정숙첨 정안 · 정국검 이유성 · 정방우 · 정언진
101권
민영모 민식 · 송저 · 김광중 김체 · 안유발 · 최여해 · 최우청 · 왕규 · 차약송 기홍수 · 정극온 · 류광식 · 권경중 · 김태서 김약선 김미 · 문한경 권세후 백돈명 · 노인수 · 김의원
102권
금의 · 이규보 이익배 · 유승단 · 김인경 김승무 · 이공로 · 이인로 오세재 조통 임춘 · 조문발 · 이순목 이수 · 김창 · 송국첨 · 최자 하천단 · 채송년 채정蔡楨 · 손변 · 권수평 · 이순효 장순량 ·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 이장용
<rowcolor=#670000,#fedc89> 103권 104권
조충 조변 · 김취려 김문연 김변 · 이적 · 채정蔡靖 · 박서 송문주 · 김경손 김혼 · 최춘명 · 김희제 · 이자성 · 김윤후 · 김응덕 김방경 김구용 김제안 김흔 김순 김영돈 김영후 김사형 박구 · 한희유 · 나유 나익희 · 원충갑 · 김주정 김심 김종연 김석견
105권
류경 류승 류돈 류만수 · 허공 허종 허관 허금 허부 허유 · 홍자번 홍승서 홍영통 · 정가신 · 안향 안우기 안목 · 설공검 · 유천우 · 조인규 조서 조연 조덕유 조린 조연수 조위
106권
백문절 백이정 · 박항 · 곽예 · 주열 · 이주 이행검 · 장일 · 김구 · 이승휴 이연종 · 김훤 김개물 · 정해 정오 정포 정공권 · 조간 · 심양 · 추적 이인정 채우 · 김유성 곽린 · 윤해 윤택 · 이영 · 엄수안 · 안전 · 최수황 · 박유 · 홍규 홍융
<rowcolor=#670000,#fedc89> 107권 108권
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 권단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권고) 권화 권근 · 민지 민상정 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 김지숙 김인연 · 정선 · 이혼 · 최성지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109권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rowcolor=#670000,#fedc89> 110권 111권
최유엄 · 김태현 김광재 ·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 왕후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 이능간 염제신 · 이암 이강 · 홍언박 홍사우 류연 · 류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 조돈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112권
이공수 · 류숙 류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 설손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113권
안우 김득배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114권
윤환 · 이성서 · 이수산 이념 · 이승로 · 황상 · 지용수 · 나세 · 김선치 · 전이도 · 구영검 · 오인택 · 김보 · 변광수 · 정지상 · 임군보 · 나흥유 · 목인길 · 김유 · 양백연 · 지용기 · 하을지 · 우인열 · 문달한 · 김주 · 최운해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115권 116권 117권
이색 · 우현보 · 이숭인 심덕부 · 이림 · 왕강 · 박위 · 이두란 · 남은 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rowcolor=#670000,#fedc89> 118권 119권 120권
조준 정도전 윤소종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
121권
<rowcolor=#670000,#fedc89> 「양리(良吏)」 「충의(忠義)」
유석 · 왕해 · 김지석 · 최석 · 정운경 홍관 · 고보준 · 정의 · 문대 · 조효립 · 정문감
<rowcolor=#670000,#fedc89> 「효우(孝友)」 「열녀(烈女)」
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122권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방기(方技)」 「환자(宦者)」 「혹리(酷吏)」
김위제 · 이녕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송길유 · 심우경 }}}
123권 「폐행1(嬖幸一)」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124권 「폐행2(嬖幸二)」
윤수 윤길보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125권 「간신1(姦臣一)」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126권 「간신2(姦臣二)」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127권 「반역1(叛逆一)」 128권 「반역2(叛逆二)」 129권 「반역3(叛逆三)」
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정지상) 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석린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
<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131권 「반역5(叛逆五)」
한순 다지 · 홍복원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132권 「반역6(叛逆六)」
신돈
133·134·135·136·137권
신우(우왕) (신창(창왕)) }}}}}}}}}}}}
문익점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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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파일:문화부 심볼.svg이달의 문화인물
(1990-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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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7월
김정희
8월
장영실
9월
김소월
10월
세종대왕
11월
김홍도
12월
신재효
1991년
1월
나운규
2월
정철
3월
한용운
4월
김정호
5월
방정환
6월
정약용
7월
문익점
8월
안익태
9월
허준
10월
주시경
11월
윤선도
12월
이해랑
1992년
1월
이황
2월
정선
3월
박지원
4월
우장춘
5월
신사임당
6월
류성룡
7월
일연
8월
홍난파
9월
고유섭
10월
이윤재
11월
안창호
12월
윤동주
1993년
1월
이이
2월
이인문
3월
장보고
4월
이천
5월
윤극영
6월
원효
7월
지석영
8월
안중근
9월
박연
10월
최현배
11월
장지연
12월
윤백남
1994년
1월
우륵
2월
황희
3월
김유정
4월
홍대용
5월
강소천
6월
이상백
7월
안견
8월
박은식
9월
박승희
10월
이희승
11월
정도전
12월
신채호
1995년
1월
강세황
2월
조식
3월
월터 정
4월
최무선
5월
이원수
6월
김병로
7월
이육사
8월
김구
9월
채동선
10월
김윤경
11월
이수광
12월
곽재우
1996년
1월
김만중
2월
최치원
3월
이순지
4월
서재필
5월
김명국
6월
유일한
7월
도선
8월
심훈
9월
왕산악
10월
정인승
11월
전형필
12월
이제마
1997년
1월
송석하
2월
성현
3월
최윤덕
4월
이중환
5월
초의 (의순)
6월
한호
7월
이세보
8월
박제가
9월
박진
10월
장지영
11월
왕인
12월
송진우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FFF 20%, #FFF 80%, #ECECEC); color: #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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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개벽에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10개 부문별 위인의 선정자 및 차점자 명단이다.
<rowcolor=#ffffff> 사상 정치 군사 문학 미술
이황 이이 이순신 최치원 솔거
- 을파소 을지문덕 박지원 담징
<rowcolor=#ffffff> 종교 과학 산업 교육 사회개선
최제우 서경덕 문익점 최충 유길준
원효 정약용 흘간(屹干) - -
※ 응답수 100명 미만의 차점자는 공개하지 않음.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등장인물 및 단체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단군
동명성왕 온조왕
이사부 백결선생 의자왕 계백
김관창 김유신 문무왕 원효
혜초 장보고 고왕 강감찬
서희 정중부 최무선 죽림고회
김부식 지눌 의천 이종무
정몽주 문익점 최충 일연
최영 황희 맹사성 장영실
신숙주 한명회 이이 이황
신사임당 곽재우 조헌 김시민
이순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사육신 생육신 논개 권율
홍길동 임꺽정 삼학사 박문수
한석봉 김홍도 김병연 김정호
영조 정조 정약용 전봉준
황진이 홍경래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윤동주 지석영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이상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충선공(忠宣公)
문익점
文益漸
파일:IE002193971_STD.jpg
출생 1329년 2월 8일 (충숙왕 16)
경상도 진주목 강성군
(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1]
사망 1398년 6월 13일 (태조 7) (향년 69세)
경상도 진주목 강성군
본관 남평 문씨[2]
시호 충선(忠宣)
일신(日新)
삼우당(三憂堂)
종교 불교유교(성리학)
부모 부친 - 문숙선(文淑宣)
자녀 장남 - 문중용(文中庸)
차남 - 문중성(文中誠)
삼남 - 문중실(文中實)
사남 - 문중진(文中晋)
오남 - 문중계(文中啓)

1. 개요2. 생애3. 목화씨 반입 설화와 진위 4. 문익점 통념의 형성
4.1. 도입부4.2. 고려로 돌아오다4.3. 목화 산업 관련 루머
5. 기타6. 대중매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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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말선초의 유학자, 정치인, 관료. 하지만 학자보다는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사람'으로 더 유명하다. 그의 시대는 바야흐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려던 시점이었는데 목화의 보급으로 조선의 의복 문화는 물론 상거래 관행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2. 생애

원 간섭기 와중인 1329년(충숙왕 16년) 경상도 진주목 강성군(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서 아버지 문숙선(文淑宣)과 어머니 함안 조씨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곡(李穀)의 제자가 되어 이색 등과 함께 공부했고 1360년(공민왕 9년) 경덕재생(經德齋生)으로서 경자방(庚子榜) 문과에 응시하였는데 이 때 병과 4위로 급제하면서 벼슬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여몽전쟁 이후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고려는 공민왕 연간 원나라가 쇠약해지자 위해 반원 자주 정책을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 대륙 본토에서 원나라를 몰아내고 한족 부흥을 내세운 홍건적이 원나라뿐 아니라 고려 영토까지 침범해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가는 사태까지 발생하자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한때는 원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그런데 원나라는 고려가 반원 자주 정책을 시작했던 것에 불만이 있었고 원나라 말을 안 듣는 공민왕 대신 덕흥군을 새로운 고려의 왕으로 옹립해버렸다. 결국 이 문제 때문에 문익점과 그 일행들이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고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에 반발한 원나라 조정[3]에서 충선왕의 손자인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임명해서 군사를 주어 고려로 보냈다.[4][5]

이에 원나라 조정에 있던 사신들은 덕흥군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와 공민왕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로 나뉘었다. 1차 사신단은 기황후와 원나라 황실에 설득되어서 덕흥군 지지파로 임시 조정까지 꾸리고 앉아있었고 2차 사신단에 대해서 포섭이 이뤄졌는데 이들이 갈렸다. 이 중 대부분은 1차 사신단에 합류하였으나 공민왕을 지지했던 홍순, 이자송, 황대두, 김유는 돌아왔고 이공수는 붙잡혀 있으면서도 협력을 거부하면서 결국 덕흥군파의 움직임을 고려 조정에 알려서 공민왕이 이를 대처하는데 최대 공로를 세웠다. 그러니 이공수를 제외한 나머지 잔류 2차 사신 일행은 원래부터 자리잡고 있던 1차 사신 일행과 엮여 덕흥군파가 되었는데 잔류했던 문익점 역시 덕흥군파였다.[6] 원나라가 보낸 덕흥군의 군대는 고려에 진입하다 압록강 근교에서 최영이성계에게 패배했고 결국 원나라는 이들에 대한 송환 결정을 내린다. 어쩔 수 없이 고려로 돌아온 후 문익점은 파직되어서 시골로 내려가게 된다. 문익점은 운이 좋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문익점의 행동은 역모죄로 몰아서 여지없이 극형에 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사형이나 유배가 아닌 파직으로 끝났기 때문이다.진짜 이 때 죽었다면 목화 설화는 없었다.

파직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딱히 할 것도 없으니 목화 재배를 시작해 목화의 개량과 보급에 있어 일대 혁신을 가져와 민간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했다.[7] 결국 1375년(우왕 1년) 조정으로 돌아와서 관직에 올랐는데 어디까지나 목화 보급 공로 덕분이었다. 이후 다시 문익점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온건파 사대부와 함께 하느냐, 급진파 사대부와 함께 하느냐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문익점은 정몽주 등 온건파 사대부와 입장을 같이 했는데[8] 결국 급진파 사대부가 정권을 잡아 이들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문익점은 이후 조선에서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조선 건국에 반대해 초야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조선 조정에서는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관직, 강성군(江城君) 봉호, 시호로 충선(忠宣)을 더해주고 후손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3. 목화씨 반입 설화와 진위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붓두껍[9] 속에 목화씨를 몇 알을 숨겨 가지고 왔다는 일화로 매우 유명하다. 원나라로부터 자주 독립을 꾀하는 공민왕을 옹호하다가 원나라 황제의 미움을 사서 귀양을 갔고, 그곳에서 목화를 발견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건 밀수를 했고, 온갖 고초 속에서 밀반입에 성공하여 백성을 등따시고 배부르게 사는데 공헌한 인물이라는 것이 흔히 알려진 이야기다. [10]

그런데 이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우선 이 이야기는 기초적으로 원나라목화씨를 금수물품으로 지정했다는 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실제로 원나라가 금수품목으로 지정한 품목은 무기나 화약국방에 있어 매우 중대하거나 희소성이 높은 품목일 뿐, 남쪽에 널리고 널린 게 목화인 만큼 희소성 없는 품목을 금수품목으로 지정했을지가 의문이다. 면화가 화기나 화약의 심지를 만드는 데 쓰이기 때문에 군수품으로 간주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11] 설사 금지품목이었다 해도 당시 원나라의 상황을 보면 전혀 금수가 지켜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고, 문익점은 다년생의 강남산이 아니라 1년생의 화북산 목화를 가져왔다는 게 주 내용.

게다가 2010년에 백제 위덕왕 시기 건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충남 부여군 능산리의 절 유적에서 목화에서 뽑은 면사(綿絲)로 짠 직물(면직물)이 발견되어, 문익점이 고려에 처음으로 목화를 들여옴으로서 면직물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통념을 반박했다. 사실 예전부터 학계는 물증만 없다 뿐이지 중국에 그 흔한 목화가 고려시대 말에서야 들어왔을 리가 없고 이미 삼국시대부터 썼을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그동안 삼국시대 면직물 증거를 찾는데 눈에 혈안이 되어있었는데 그게 발견된 것. 호두도 비슷한 야사가 있었지만[12] 신라 민정문서광주 신창동 유적에 이미 고려 이전부터 호두와 호두나무가 있었음이 밝혀진 것처럼, 이런 식으로 언제 뭐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야사는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

다만 문익점의 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본래 목화의 원산지는 인도인지라 사철 온난한 열대 기후에서 잘 자라는 관계로 한국에서는 잘 자라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문익점이 들여온 것은 동북아시아 기후에 적응한 개량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익점 이전에는 재배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고 삼국사기 색복지를 봐도 통일신라 중기 사람들의 복식으로 견직물, 삼베, 소가죽 등이 주로 나오지 면직물은 언급되지 않으므로 백제 때부터 면직물이 존재했다 쳐도 대중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재래종[13]의 수량이 극히 희소[14]했던 것으로 보이기에 그 공로가 깎인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목화 보급 100년 만에 조선 전체로 펴져나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문익점은 목화의 대중화에는 상당 부분 기여했으며,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공로다.[15]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 시대 서민은 일반적으로 흰 모시옷을 즐겨 입었음을 알 수 있는데, 겨울에는 원시 시대부터 입어 온 갖옷이나 (상류층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활발히 생산된 계(罽) 등의 모직물이나 모피로 만든 옷을 갖춰 입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무명(면포)은 베나 모시에 비해 더 부드럽고 따스해서 추위를 막는 데 효과적이었으며 모피에 비해 대량공급이 원활했고 특히 목화 솜으로 솜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었다. 개량종의 도입이 당시 한반도인의 의생활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왕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元)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緜)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盛囊以來]."
목화씨를 어디서 가져왔느냐가 관건인데, 당시 원 조정의 유배지였던 강남에서 가져왔다면 사행 중 뭔가 죄를 얻어 강남으로 유배를 가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는 얘기며, 그냥 장강 이북이라면 그냥 길거리의 흔한 목화씨를 가져온 셈이기 때문. 이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나온다.

4. 문익점 통념의 형성

이후 조선 초기의 권신 권근[16]을 비롯한 수많은 인사들이 시기를 이어가면서 살에 살을 붙여서 문익점 전설을 만들어 나갔다. 몇 줄 없는 사서 기록으로 소설을 써대던 위인전 작가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문이나 가문의 문제 등이 얽혀 있었기 때문에 문익점 스토리가 사실상 조선시대에 이미 완성된 것이다.

줄거리에 들어간 세세한 에피소드는 호탄 왕국 공주의 누에알 훔치기와, 최무선의 화약 개발을 도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완성본은 이렇게 되었다.

4.1. 도입부

고려에서 사신으로 파견된 문익점은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는 문제를 접한다.(여기까지는 사실) 공민왕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다고 주장하여 3년간 강남으로 유배를 간다.
  • 조상이 반역자라고 쓸 수는 없었기 때문에 문익점은 충신으로 변경된다. 후손들이 쓴 책 '사실본기'에서는 이 과정에 황제와 맞짱을 뜨는 장면을 추가해버린다. 정사인 고려사절요에는 자기 조상이 역적으로 되어 있으니 임팩트로 엎어버리려고 한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서장관 문익점이 원나라 황제하고 맞짱뜨면서 설전 벌이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당연히도 200% 허위. 오히려 덕흥군 파였다. 사실 조선에서 떠받드는 명나라 황제가 아니라 이미 망한 원나라의 몽골족 오랑캐 황제이므로 역사 왜곡의 부담도 훨씬 덜했을 듯.
  • 이 시기 강남은 홍건적이 득세하고 한족이 난리를 치던 상황이라서 원나라 조정의 힘이 미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덕흥군과 함께 원나라 궁궐에서 고려 조정을 꾸리고 있던 상황의 문익점이 강남으로 여행을 떠날 일 따위는 더더욱 없었다. 이런 신화는 목화는 본래 강남산이라는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권근이 처음 언급할 때는 그냥 '강남에 가서 가져왔다' 였는데, 그걸 남효온이 쓴 책에서는 강남에 유배간 것으로 고쳐버렸다.[17]

4.2. 고려로 돌아오다

그리고 유배 기간 동안 농민들이 무명옷을 입는 것을 보고 이를 가져가려고 하지만, 목화는 금수품목이었다.
  • 원나라의 금수 품목은 지도와 화약 뿐이었다. 이 2가지는 군사 필수품이기 때문에 무조건 국외 반출 금지품목이다.
때문에 붓두껍에 숨겨서 가지고 왔다.
  • 이것도 처음에는 그냥 가지고 왔다였다가 주머니, 붓대 등 여러차례 변화를 거쳤다. 그 최종본이 붓두껍. 굳이 '붓두껍'이라는 아이템이 된 것은 선비문인을 상징하는 이 문익점의 이미지에 적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 사실 '반출을 금지하는 직물의 씨앗을 몰래 가지고 나간다'는 이야기는 다른 나라에도 있는데, 이 경우 주된 소재는 비단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중국의 공주가 서역의 '호탄 왕국'에 시집을 가면서 "서역에는 비단이 나지 않으니 이대로 가면 당신이 좋아하는 비단옷을 입을 수 없다"는 왕자의 꼬드김에 넘어가 누에나방의 알을 왕관 속에 숨겨서 몰래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다. 비단은 중국에서 수출품으로써 중요하게 여겨지던 물자였으므로 실제로 금수 조치가 내려졌으며, 호탄 왕국은 서역에서 최초로 비단 생산이 시작된 나라이므로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다.기사기사 이 '왕관에 숨긴 중국 공주의 누에알'이라는 오래된 소재를 '붓두껍에 숨긴 문익점의 목화씨' 이야기에 만드는데 참조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낙향했다.
  • 이 부분도 앞서 설명한 이유로 거짓. 이것을 고려 멸망과 엮기도 하는데,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

4.3. 목화 산업 관련 루머

목화씨를 심은 것이 문익점의 밭에서는 전멸하고 장인 정천익의 밭에서 겨우 겨우 몇 포기 살려내었다.
  • 이 부분은 사실 확인이 안된다. 이후 과정도 당연히 마찬가지. 이와 관련된 것은 모조리 소설로 일관된 관련 글들에서 퍼져나간 이야기들로 이런 것들은 역사서에 남지 않는다. 문익점이 버려둔 목화를 정천익이 길렀다며 진짜 위인은 정천익이라고 정씨 후손들이 클레임을 거는 경우도 많았다고. 다만 해당 내용이 아주 근거없는 찌라시는 아닌데 이게 무려 조선왕조실록 문익점 졸기에 남아있는 내용이다.[18]
하지만 면에서 씨앗을 제거하여 실을 뽑는 기술이 없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중국 승려가 목화를 보고 반가워하는 것을 보고, 문익점과 정천익이 국가 기밀이라고 알려줄 수 없다는 승려를 어르고 달래서 결국 씨아와 물레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 방직 기술이 국가 기밀이라는 서술은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목화에서 씨를 빼내고 나머지 원면으로 실 뽑는다는 게 고난도의 기술일지는 몰라도 국가 기밀일 수는 없다. 이게 사실이면 원나라에서 길쌈하던 여자들은 모조리 국가 기밀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고, 중국에서 농경 발전을 위해 만들어 유통시켰던 농서들은 목화 가공 관련 정보도 실려 있는 경우가 많으니 원나라는 1급 기밀 정보를 민생을 위해 기밀해제한 나라가 된다.
  • 이 부분은 최무선화약 개발 일화를 참조한 것이 아닌가 싶으며 재탕이라는 느낌이 너무 강하다. 화약은 분명히 금수품이었다.
  • 조선왕조실록에도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단지 잘 대접해준 후 물어봤다고만 되어있다. 즉 적어도 씨아와 물레를 만드는 기술이 중국에서 배워온건 맞지만 그게 금지되었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랬다면 졸기에도 그렇게 남아야 했을테니.
이후 이걸 문익점의 후손들이 개량했는데, 특히 목화씨에서 실을 뽑아내는 방적기를 만든 사람이 문익점의 아들 문래라서 물레라고 하고, 실로 천을 짜는 방직기를 개량한 것이 문래의 동생 문영이라서 솜으로 짠 옷감을 무명이라고 한다.
  • 민간어원이다. 물레의 원형은 김해시에서 출토된 가야 토기까지 올라가고, 문익점의 후손들이 손을 댄 것은 씨아 정도였다. 무명은 목면(木綿)을 중국어로 발음한 무몐을 음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문익점의 아들들은 중자 돌림으로 중용, 중성, 중실, 중진, 중계 5명[19]이다.

5. 기타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에 목화 시배지와 문익점 선생 생가라는 유적이 있다. 다만 이상하게도 문익점을 모신 사당인 문익점부조묘는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다. 이는 문씨 본가가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기 때문이라 그런것이다.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의 '문래동(文來洞)'은 '문익점이 왔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 또는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文萊)의 이름에서 따 왔다는 속설도 있다. 그러나 문래동의 유래는 옛날 이 일대가 모래가 많은 곳이라서 '모랫말'이라 부르던 걸 음차한 것이라는 게 정설이며 문익점과 관련된 설은 비슷한 발음에서 유추,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 문익점의 후손은 조선 왕실과 약간 이어지는 편이다. 문익점의 딸은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인 완풍대군 이원계와 결혼하였고, 그 아들이 태종 이방원 편에 선 완령군 이백온이다. 또한 문익점의 8대조인 문극겸이 이성계의 6대조인 이린의 장인으로 윗대로 올라가면 문극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공통점도 있긴 했다.

6. 대중매체

  • 바람따라 물따라 - 문익점편 #
  • 천재교육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우등생 논술에서 연재되었던 만화 어디서 나타났나 논리맨의 주인공인 문철수가 문익점의 후손이라는 설정이었다. 문익점 본인도 언급되는데 논리귀신과 함께 세상의 오류귀신들을 봉인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봉인된 귀신들이 문철수의 실수로 다시 세상에 풀려나게 되고 이에 다시 나타난 논리귀신의 도움으로 다시 오류 귀신들을 봉인해 나가는 것이 만화의 주 스토리

7. 관련 문서



[1] #[2] 10세. 충선공파의 파조이다.[3] 조정이라기보다는 당시 원나라 황실의 주축이었던 기황후의 불만이었다. 공민왕은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부원배인 기철 등을 제거하는데 문제는 이들이 기황후의 일가였다는 점이다. 기황후는 자기 친정을 박살낸 것에 불만을 품고 공민왕을 적대한 것. 사실 원나라 입장에서는 당장 홍건적 처리가 더 큰 국가적 문제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기황후의 이런 행동은 그야말로 답이 없다.[4] 중국 왕조와 한반도 왕조가 대립할 때 중국 말을 잘 듣는 인사를 명목상의 왕으로 책봉해보내서 내분이 일어나도록 유도하는 사례는 이전에도 종종 있었다. 나당전쟁 당시 문무왕 대신 김인문신라 왕으로 책봉해 보낸 것이 그 예이다.[5] 아무래도 문익점의 흑역사라 그런지 조선왕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는 이 부분을 얼버무리고 있다. 대충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다' 정도로만 되어있고 그 이외에는 기록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고려사에서는 덕흥군에게 붙었다는 사실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6] <고려사절요>에는 덕흥군 쪽으로 분류된 자들 중 김첨수, 유인우, 강육연, 황순, 안복종, 기숙윤과 함께 문익점의 이름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데 공민왕과 고려의 입장에서는 역적이다.[7]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미년에서 10년도 채 되지 않아 온나라로 퍼졌다고 하는데 그만큼 목화의 유용성이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물론 문익점과 정천익이 주변 사람들에게도 재배를 권했다는 것을 보면 두 사람도 확산에 부채질했을 것이다.[8] 이는 문익점이 목은 이색의 문하였던 것이 크게 작용했는데 이 선택은 생전에는 몰라도 사후에는 크게 이롭게 작용했다. 이 온건파 사대부가 후일의 사림파가 되고 결국 사림파가 조선 중기 이후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문익점은 그야말로 폭넓은 인맥을 사후에나마 갖추게 되었고 이는 문익점 신화의 완성에 크게 공헌했다.[9] '붓촉에 끼워 두는 뚜껑'[10] 1988년 쌍방울에서 만든 서역기행이라는 내의 광고에서도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문익점(한인수 분)이 목화씨를 들여오는 장면이 나온다.# 서역기행은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수입한 순면 제품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한 브랜드명이다.사진 참조[11] 일본전국시대조총이 빠른 속도로 보급된 것도 조선을 통해 들어온 면화가 심지를 만드는 데 요긴하게 쓰였기 때문이다.[12] 고려 충렬왕 16년(1290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간 유청신이 묘목과 열매를 처음 가져왔다고 알려져 있었다.[13] 상명대학교 박선희 교수는 이를 초면(草綿)이라고 하는 아프리카 종으로 본다. 위의 링크 참조.[14] 일부 상류층의 기호를 위한 것으로 '추정'[15] 자동차의 대량생산을 성공시켜 자동차의 대중화에 크게 공헌한 헨리 포드의 명성이 자동차라는 물건을 최초로 발명한 니콜라-조제프 퀴뇨나 내연기관 자동차를 최초로 발명한 카를 벤츠같은 사람들에 비해 전혀 뒤쳐지지 않는것을 생각해보면 된다.[16] 왜 권근이 언급되느냐 하면, 권근과 문익점은 목은 이색의 제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문익점이 온건파 사대부와 길을 같이했지만, 이처럼 조선 초기 세력 사이에도 인맥이 분명히 존재했다.[17] 생육신 중 한명인 그 남효온이 맞다. 다만 사육신에 대한 전기 소설인 '육신전'도 그렇고, 남효온도 같은 생육신인 김시습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달인이었다. 남효온이 문익점을 띄워준 것은 앞서 언급한 온건파 사대부의 계보 때문이다.[18]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緜)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갑진년에 진주(晉州)에 도착하여 그 씨 반으로써 본고을 사람 전객 영(典客令)으로 치사(致仕)한 정천익(鄭天益)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정천익(天益)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향리(鄕里)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문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19] 고려사에는 5명으로 나오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문익점의 졸기에는 자식은 셋이라고 하면서 중용, 중실, 중계만 실어놨다. 아마 그 사이에 중성과 중진은 사망한 듯. 당시 문익점이 70살에 가깝게 장수 해서 그럴 수도 있다. 다만 족보상에 다섯 아들의 후손인 종파가 모두 있다.[20] 이건 4개나 걸려 있다. 두문동 72현(두문불출), 한식의 유래인 불지르기 설화의 재활용, 황희의 출신 성향, 청백리 황희.[21] 문씨의 96%나 된다. 그마저도 나머지 4%는 남평 문씨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 다른 지역에서 집성촌을 이루면서 형성된 것이라(계파가 다른 감천 문씨, 정선 문씨도 있지만 다 합쳐서 1000명 겨우 넘는 정도이다.) 실질적으로 문씨는 전원이 먼 친척 관계에 있다.[22] 남평 문씨 문중에서는 종파를 10파로 분류하는데 그 중 문익점계가 아닌 파는 5파이다. 문익점의 형 문익겸을 파조로 하는 충혜공파, 7대조 문극겸의 손자 문착에서 갈라진 남제공파 및 문익점의 9촌 숙부 문구를 파조로 하는 감천군파, 6대조 문후식의 동생 문유필의 후손에서 갈라진 충익공파와 판도판서공파이다.[23] 문익점의 후손인 파는 헌납공파, 순질공파, 의안공파, 시중공파, 성숙공파이다. 이 파들을 충선공파(문익점의 시호)로 묶어서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