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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제9대 대왕 덕종 | 德宗 | |||
숙릉 전경 | |||
출생 | 1016년 6월 9일 | ||
고려 개경 개성부 연경궁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
즉위 | 1031년 6월 17일 | ||
고려 개경 정궁 중광전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
사망 | 1034년 10월 31일 (향년 18세) | ||
고려 개경 정궁 연영전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
능묘 | 숙릉(肅陵) | ||
재위기간 | 고려 연경군 | ||
1020년 5월 19일 ~ 1022년 6월 26일 (2년) | |||
고려 왕태자 | |||
1022년 6월 26일 ~ 1031년 6월 16일 (8년) | |||
고려 제9대 대왕 | |||
1031년 6월 17일 ~ 1034년 10월 31일 (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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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흠(欽) | ||
부모 | 부왕 현종 모후 원성왕후 | ||
형제자매 | 부왕 기준 6남 8녀 중 장남 모후 기준 2남 2녀 중 장남 | ||
왕후 | 경성왕후, 경목현비, 효사왕후 | ||
자녀 | 2녀 | ||
종교 | 불교 | ||
자 | 원량(元良) | ||
봉호 | 연경군(延慶君) → 왕태자(王太子) | ||
묘호 | 덕종(德宗) | ||
시호 | 광장강명선효경강대왕 (光莊剛明宣孝敬康大王)[1] | ||
절일 | 인수절(仁壽節) → 응천절(應天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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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효성스러웠고 명신들을 등용하여 조정을 잘 이끌었으며 백성들도 편안히 생활했으니 덕(德)이라는 이름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 이제현의 평.
- 이제현의 평.
"나면서부터 숙성하고 성품이 강직하며 과단성이 있었다. 장성해서는 벽돌을 밟기만 하면 깨어지니 사람들은 그의 덕이 무겁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고려사》 <덕종 세가>, 3년 9월 계묘일.
- 《고려사》 <덕종 세가>, 3년 9월 계묘일.
고려의 제9대 대왕.
묘호는 덕종(德宗), 시호는 광장강명선효경강대왕(光莊剛明宣孝敬康大王). 휘는 흠(欽). 자는 원량(元良). 현종(제8대)의 맏아들로, 부왕의 뒤를 잘 이어나갔으나 요절한 탓에 많은 업적을 쌓지는 못했다.
2. 생애
2.1. 즉위 전
봉호 | 연경군(延慶君) | 연경궁(延慶宮)의 가신 |
훈위 | 상주국 | 가장 높은 훈위 |
공신호 | 숭인광효보운공신 | |
문산계 품계 | 개부의동삼사 | 종 1품 품계로 가장 높은 품계 |
수직 | 수사도 | 수직은 자신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을 때 붙힌다. |
겸교직 | 검교태사 | 검교는 직위에 이름만 올렸다는 뜻으로 명예직이다. |
직위 | 내사령 | 내사령은 내사성[2]의 명목상 장관[3]으로 명예직이며 실권은 없다. |
1016년 5월 2일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현종과 원성왕후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군이었던 부왕을 빼닮았는지 어린 시절부터 결단력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1020년에 연경군(延慶君)에 봉해졌고, 1022년에 태자에 책봉된 후 1031년에 부왕 현종이 붕어하자 중광전[4]에서 즉위했다. 그는 아버지가 붕어하자 방에서 하루종일 울며 슬퍼했다.[5] 아버지가 붕어하자 16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선정을 펼쳤다.
덕종은 현종의 공인된 후계자로서 왕태자(王太子)에 봉해졌다. 덕종 이전에는 공인 후계자의 작위를 '정윤'(正胤)[6], '태자'(太子)[7], '개령군'(開寧君)[8]으로 불렀는데 덕종부터 태자로 고정되어 봉해졌고, 충렬왕이 마지막 태자가 되었다.[9]
또한 고려의 임금 중 마지막으로 궁원(宮院)에 봉해진 군(君)이다. 덕종은 아버지 현종이 대량원(大良院)에 봉해진 것처럼 연경원[10]에 봉해졌고, 덕종이 마지막 사례가 되었다. 이후의 군주들은 태자로서 임금이 되거나 옛 국가나 영지를 하사받은 제후 상태에서 즉위했다.[11]
2.2. 즉위 후
2.2.1. 대 거란 강경 외교
덕종 즉위 초인 1031년 요나라에서는 거란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었던 성종 야율융서가 붕어하고, 흥종 야율지골이 즉위했다. 요 성종의 장례식 준비 기간 동안 거란은 압록강 유역에 부교와 여러 보루를 쌓아두고 있었다. 같은 해 10월 조정에서는 이를 무너뜨리는 것과 거란과의 전쟁 때 포로가 된 고려인들의 송환을 요구했는데 거란이 이를 거부하자 당대의 중신이었던 서눌[12]과 왕가도[13]는 "이놈들이 우리 말을 쌩까니 어이없네요. 그냥 사신을 끊죠"라고 진언했다.왕이 이를 받아들여 11월에 거란으로의 사신 파견을 중단하는 한편 흥종에게 사대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전황제 성종의 연호인 '태평'(太平)을 계속 사용하는 등 강경 일변도를 유지했다. 거란 흥종이 사용한 연호는 '경복'(景福)과 '중희'(重熙)였는데 이 해의 연호는 '경복'이었다. 1032년 1월 또 다시 거란이 사신을 보냈지만 그냥 무시했다.
한편 거란에서 후궁이던 흥종의 생모가 선제 성종의 황후로부터 태후 자리를 빼앗고, 그들을 살해하는 정변이 일어나 이 여파로 1031년부터 옛 발해인 고진상, 왕광록이 투항했고, 1032년 3월 고선성, 고진성, 최운부, 이운형 등 20명에 달하는 거란의 중앙 관료 출신 귀족들이 대거 고려로 망명했으며, 4월에는 고위 관료 해가, 내을고 등 30명이 귀순했고, 6월에는 우응, 약기 등 50명이 망명했다. 덕종은 이들을 모두 받아들였고, 같은 해 거란의 군인 7명을 체포했다.
이런 긴장 관계 속에서 끝내 1033년 10월 거란군이 정주(靜州)에 침입해오자 맞서서 격퇴하기도 했다.[14] 거란이 갑자기 침입한 것은 덕종이 수축하기 시작한 고려 북계의 천리장성의 공사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당시 거란은 명군 성종의 붕어 전후로 나라가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지도층은 분열하여 국력이 심하게 기울어 가던 상태였다. 이런 거란의 재침입에 대비하여 덕종은 영인진(寧仁鎭), 삭주(朔州), 파천현(派川縣) 등 북방의 요새를 축성하여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다.
《고려사》 <왕가도 열전>에는 왕가도, 류소, 이단 등 조정의 중신들이 덕종에게 거란을 침공하자고 강하게 건의했지만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고, 덕종은 태묘에 들어가 점을 쳐보고는 결국 포기했다고 기록했다. 이미 아버지 현종 대에 흥료국을 지원하기 위해 거란을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못본 것 역시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15]
2.2.2. 외치
현종 대부터 점차 타국에 품계를 내리거나 책력의 반포, 조공 무역을 늘려가기 시작했는데 덕종 대부터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명성이 퍼졌을 정도로 강성한 국력을 자랑하게 된다. 《고려사》 <덕종 세가>의 내용 절반은 타국이 조공하러 오는 것일 정도이다.현종에게 책력을 받은 철리국(鐵利國)의 왕인 무나사(武那沙)는 약오자(若吾者) 등을 보내 준마와 담비 가죽을 조공해 무역을 지속적으로 행하였으며, 무나사는 다시 사신을 보내 고려와 외교 관계를 이어가고자 했고 덕종은 하사품을 크게 주어 화답했다. 요나라의 남부에 거주하던 해가(奚家) 민족, 발해 유민들은 계속하여 고려로 이주하였다.
울릉도의 성주(城主)는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 덕종에게 특산물을 조공했다. 북송은 무역 상인편에 여러 외교 문서를 보내 간접적으로나마 무역과 외교 관계를 이어갔다. 서여진 200여 명이 북계 천리장성을 쌓는데 도움을 주자 그들의 관작을 높여주기도 했으며, 투항한 동여진 350호의 거주지를 동번으로 정하는 등 여진의 거처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여진과 서여진의 영새대장군(寧塞大將軍), 장군(將軍) 등이 170여 명과 같이 와서 병기, 준마, 특산물을 조공했으며 장군 모이라(毛伊羅)는 현종의 선릉을 제후로서 참배했는데 다음 관작들은 전부 고려가 봉한 것이다.[16] 대상[17], 원보[18], 정보[19] 원윤[20], 정조[21], 보윤[22]은 고려의 향직 품계, 봉국대장군, 회화장군, 귀덕장군은 고려의 관작명이다.
2.2.3. 내치
한편 덕종은 고려 역사상 처음으로 국자감시를 시행하여 폭넓은 인재 등용의 체계의 기반을 마련했다. 국자감시는 국자감에서 실시한 예부시의 예비 시험인데, 이게 왜 중요하냐면 이 시험을 시행하면서 처음으로 중앙의 국자감생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선발된 인재들에게도 응시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재 등용의 폭이 한층 넓어진 셈이다.또한 덕종 3년 전시과를 개정하고 선왕 현종 때부터 복원하기 시작한 《7대 실록》의 완성을 보는 등의 크고 작은 치적들을 남겼다.
2.3. 붕어
짐(朕)의 병이 낫질 않으니 이미 대점(大漸)[23]에 이르렀다. 마땅히 사랑하는 동생 평양군(平壤君) 형(亨)으로 하여금 보위(寶位)를 잇게 하라.
- 《고려사》 <덕종 세가>에 기록된 덕종의 고명(顧命).[24]
- 《고려사》 <덕종 세가>에 기록된 덕종의 고명(顧命).[24]
어린 나이에 현종의 뒤를 이어 태평성대를 잘 이끌어 나갔지만 불행하게도 몸이 병약했다. 그 때문인지 재위 3년만인 1034년 9월 병석에 누웠고, 왕위를 동생 평양군 왕형에게 물려준 뒤 만 19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이 탓인지 치적은 준수한 데 비해 인지도는 낮은 편에 속한다. 덕종의 능은 오랜 세월의 풍파를 거쳐 유실된 상태였으나 2016년 해선리 1릉을 발굴해 '숙릉'으로 발표했다.
숙릉 발굴 초기 모습 |
숙릉 최근 모습 |
덕종에 대해 고려 말의 유학자 이제현은 아들로서 아버지의 제사를 잘 모셨고 왕으로서 여러 인재를 등용시켰으니 '덕'(德) 자에 어울리는 임금이라고 호평을 내렸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등극하여 거란 차단, 여진 복속, 국가 시험 시작 등 무거운 임무를 3년 동안 잘 해냈으니 고려 입장에서 덕종이 등극한 것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현은 평론에 민간 설화를 소개했는데 덕종 대에 위봉문(威鳳門)[25]에서 봉황이 날아다녔다고 한다. 헌데 까마귀 떼가 따라와 울어대자 봉황은 귀찮아서 날아갔고, 이후부터 고려 사람들은 상서로운 봉황을 쫓아냈다고 까마귀를 싫어해 보일 때마다 활로 쏘아대니 덕종의 치세 동안 개성에는 까마귀가 없었다고 한다.
3. 가족관계
부인이 다섯인데 이 중 둘이 이복여동생이다. 고려 왕조 근친혼의 대표적인 사례다.- 제1비: 경성왕후 김씨 - 현종의 딸
- 제2비: 경목현비 왕씨 - 왕가도의 딸
- 제3비: 효사왕후 김씨 - 현종의 딸
- 후궁: 이씨
부여군(夫餘郡) 사람으로 공부시랑(工部侍郞) 이품언(李禀焉)의 딸이다. 정종의 제3비 용목왕후와 자매이며 존호는 실전되었다. - 후궁: 유씨
충주(忠州) 사람으로 검교소감(檢校少監) 유총거(劉寵居)의 딸이다. 존호는 실전되었다.
4. 태묘 악장
고려 성종(제6대)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제16대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9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예종 대 덕종 왕흠의 찬가 제목은 <엄안>(嚴安)이다. 네 글자 운구이다.
당신의 덕은 천생(天生)이니, 용감함이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당신의 위엄은 뇌정(雷霆)과 같으니, 인방(隣邦)[26]을 떨게하고 놀라게 합니다.
국강(國疆)[27]을 넓히시니, 길고 길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변방의 오랑캐는 빈 땅을 뺏길까 늘 지키고 있습니다.
진덕(震德)[28]이 잠저를 떠나니, 용이 하늘을 날라다닙니다.
당신의 위엄은 요방(遼邦)까지 흔드니 용감함을 드러내면 아무도 앞에 서지 못합니다.
문화가 다른 자들이 소문을 듣고 내정(來庭)하여 조공합니다.
이에 변강(邊疆)[29]을 넓히시니 세세토록 복을 받으시오서.
당신의 위엄은 뇌정(雷霆)과 같으니, 인방(隣邦)[26]을 떨게하고 놀라게 합니다.
국강(國疆)[27]을 넓히시니, 길고 길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변방의 오랑캐는 빈 땅을 뺏길까 늘 지키고 있습니다.
진덕(震德)[28]이 잠저를 떠나니, 용이 하늘을 날라다닙니다.
당신의 위엄은 요방(遼邦)까지 흔드니 용감함을 드러내면 아무도 앞에 서지 못합니다.
문화가 다른 자들이 소문을 듣고 내정(來庭)하여 조공합니다.
이에 변강(邊疆)[29]을 넓히시니 세세토록 복을 받으시오서.
예종 대에 덕종은 상당히 용맹한 군주로 받아들여진 듯 하다. 찬가의 내용을 보면 이웃나라는 두려워하며 조공한다고 하며 심지어 당시 상국으로 대우하던 요나라까지 겁쟁이 오랑캐로 취급해 덕종의 위엄을 드러내려고 한다.
5. 대중매체
- <박시백의 고려사>에서는 아버지 현종이 40살의 일기로 죽자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 위에 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버지 현종을 닮아서인지 성실해서 신하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다가 장인어른인 왕가도가 거란에게 우리의 요구를 보내어 거절하면 관계를 끊어야한다고 말한다. 거란이 이를 거절하자 고려 조정은 거란 사신을 되돌려 보내고 천리장성을 쌓아서 거란의 반감을 샀다. 그리고 재위 기간에 국자감시도 열어서 관리를 등용하는 정책을 폈지만 건강이 좋지않아서 19살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등장종료. 여담으로 병으로 요절한 덕종을 책에선 건강한 모습으로 그렸는데 이유는 벽돌을 밟으면 깨져있다고 나와서 그렇다고 작가가 말했다.
[1] 《고려사》 <덕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2] 고려 최상위 정부기관으로 조직명은 내의성 → 내사성 → 중서문하성 순으로 바뀌었다.[3] 실권을 가진 실제 장관은 문하시중이다.[4] 重光殿, 고려 본궐에서 가장 크게 활용된 편전.[5] 《고려사》 원문 기록: '태자가 즉위하여 익실(翼室)에 거처하면서 조석으로 애림(哀臨)하였다.'[6] 혜종, 경종, 성종.[7] 혜종, 경종.[8] 제7대 목종. 선왕인 성종의 '개령군' 봉호를 물려받는 방식으로 후계자에 공인됐다.[9] 원 간섭기부터는 '왕세자'(王世子)에 봉해졌다.[10] 당시에는 '원'이었다. 동생 정종이 태어나고 나서 '궁'으로 승격된 것.[11] 원 간섭기 이전까지.[12] 서희의 아들.[13] 개경 나성의 건축자. 원명은 이자림. 김훈•최질의 난의 진압자였다.[14] 《고려사》 <류소 열전>[15] 현종 원문대왕의 신하 곽원의 출정이다. 곽원은 압록강 이북을 차지하자며 군대를 끌고 갔지만 역사에 기록될만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16] 덕종의 치세 동안 동여진의 정보(正甫), 보윤(甫尹), 정조(正朝), 원보(元甫), 원윤(元尹), 봉국대장군(奉國大將軍), 회화장군(懷化將軍) 등과 서여진의 대상(大相),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 귀덕장군(歸德將軍) 등이 총 620여 명을 이끌고 수 차례 입조(入朝)하였고, 덕종은 품계를 올려주며 직접 조공을 받았다.[17] 4품 1등위.[18] 4품 2등위.[19] 5품.[20] 6품 1등위.[21] 7품 1등위.[22] 8품.[23] 죽음의 때.[24] 《고려사》 원문엔 '유조'(遺詔)가 아닌 '고명'이라고 기록했다.[25] 본궐의 제 2정전 천덕전으로 가는 길에 세워져있던 문이다. 3번째 대문이며 이중루로 위에 위봉루(威鳳樓)가 있어 매우 화려했다고 한다. 왕건이 직접 세운 문이다.[26] 인접한 나라.[27] 나라의 영토, 경계.[28] 모두를 떨게 만드는 덕성.[29] 나라의 주변 영토,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