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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6D592><colcolor=#3F6864> 고려 혜종의 제2부인 후광주원부인 | 後廣州院夫人 | |
생몰년 | 미상 |
성씨 | 광주 왕씨[廣州] |
부모 | 부친 - 대광 왕규(大匡 王規) |
부군 | 태조 |
형제 | 3녀 중 3녀 언니 - 광주원부인 언니 - 소광주원부인 |
자녀 | 없음 |
직위 | 부인(夫人) |
작호 |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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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2대 국왕 혜종의 제2부인. 광주(廣州)의 호족 대광 왕규의 딸이다.[2]2. 생애
대광 왕규는 원래 경기도 광주출신으로 본래의 성은 함씨(咸氏)였다. 그러다가 태조 대에 국가에 크게 공헌한 대가로 사성 왕씨(王氏)성을 하사받은 것으로 보인다. 태조는 고려를 세운 뒤 호족세력(豪族勢力)을 통합하는 방법의 하나로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대상은 자신의 즉위를 도와준 무장세력, 학문적 능력을 가진 문사층, 귀부해 온 지방 호족 및 신라 왕족과 같은 광범한 세력이었다.그런데 왕규는 학문적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인물인 듯하다. 937년(태조 20) 중국의 후진(後晉)에 사신으로 가서 석경당(石敬瑭)의 등극을 축하하였기 때문이다. 태조가 죽을 무렵에는 곁을 지키는 등 태조의 측근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조가 승하하고 혜종이 즉위하자 왕규는 자신의 외손자이며 태조의 제16부인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 소생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위에 추대하기 위하여 혜종을 시해하고자 하였다.
부군 혜종이 죽은 뒤에는 태조의 왕위계승 다툼에 휘말려 죽음을 당하였다. 그 와중에서 왕규의 일당 3백여 명이 같이 죽임을 당하였는데, 왕규의 딸인 후광주원부인이 무사하였을지는 의문이다. 살아 있었다고 하더라도 반역자의 딸은 왕실에서 축출되는 예가 많으므로 왕비의 자리에서 밀려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혜종과의 사이에서 슬하에 소생은 없다. 작호는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이다.[3]
3. 가족관계
- 친정
- 아버지 : 왕규(王規)
- 배우자 / 남편
- 남편 : 혜종 왕무(王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