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2 22:22:26

을지문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Eulji_Mun-deok.jpg 파일:external/kookbang.dema.mil.kr/35561.jpg 파일:을지문덕석상1보존급제746호_정면.jpg
대한제국 교과서 수록 삽화 현행 을지문덕 표준영정. 김기창 作. 평안남도 안주시 등방산동 안주성에 위치한 을지문덕 석상 1847년(헌종 13년)
주군 영양왕(嬰陽王)
직위 대신(大臣)[1]
출신지 고구려 평양[2]
을지(乙支)
이름 문덕(文德)
생몰연도 ? ~ ?
사당 청천사(淸川祠)[3]
삼국사기 제44권 열전 제4 을지문덕

1. 개요2. 출신에 대하여
2.1. 정체에 대한 논란2.2. 이름에 대한 논란
3. 고구려-수 전쟁에서의 활약
3.1. 전투 분석
4. 전후의 삶5. 평가
5.1. 김부식의 평가5.2. 신채호의 평가5.3. 안창호의 평가
6. 그 외에7.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1. 개요

후세 사람들이 만약 그의 머리털 하나만큼만 닮더라도 그 나라의 독립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한두 마디의 말만 잘 거두어 간직하더라도 그 나라의 역사를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니, 을지문덕이란 사람은 우리 대동국(大東國) 4천년 역사에서 유일한 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 세계 각국에도 그 짝이 드물도다.
신채호
고구려 영양왕 대에 활약했던 전쟁영웅으로 고구려-수 전쟁 당시에 고구려를 침략해온 수양제로부터 고구려를 지켜낸 불세출의 명장으로 유명하다.

당시 수나라는 최강대국이었는데,[4] 이런 수나라가 1차엔 30만명, 2차 침공 당시에는 전투병만 113만 명, 보급 및 기타 병과를 포함하면 300만 명 가까이 되는,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초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해[5] 고구려를 침략했다.[6][7] 한마디로 이것은 수와 고구려 두나라의 자존심이 걸린 문명대전이었는데, 을지문덕은 이런 거대한 회전(會戰, pitched battle)에서 대승을 거둬 고구려는 물론 그 남쪽의 한반도 국가들을 벼랑 끝에서 구하는 전쟁영웅이 된다. 그 후 오랜 전란을 끝내고 통일한 거대한 수제국은 서서히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다.

참고로 중국에서도 굴욕적인 역사로 아는듯하다. 조선 초기에 명나라 사신 축맹이 조선의 집정대신인 조준에게 오만방자하게 굴자, 조준은 수많은 중원 젊은이가 고구려에서 물고기밥으로 사라졌다며 살수대첩을 얘기하는 칠언절구로 비꼬었는데, 축맹이 불쾌한듯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조준의 시가 수록된 세종실록 지리지

그 시의 내용은 "살수가 출렁출렁 푸른 하늘에 잠겼는데, 수병(隋兵) 백만이 고기가 되었구나. 지금도 아직 어초부(漁樵夫)의 이야기로 남아 있으나, 한갓 나그네의 웃음거리도 되지 못하네.[8]"였는데 하필이면 청천강을 내려다보는 정자에서 이런 시를 읊었으니 명나라 사신이 굴욕으로 느꼈을 것이다.[9]

2. 출신에 대하여

조선시대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을지문덕을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의 인물이라고 기록하였다. 즉, 이 기록이 맞다면 을지문덕은 평양 출생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현 행정구역으로는 대한민국 이북 5도 기준 평안남도 강서군 적송면[10] 석삼리, 북한 행정구역상 증산군 석다리에 해당된다.

을지문덕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사기에서는 을지문덕의 출생지와 가문의 계보 등이 불확실해서 알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서>에 기록될만큼 전쟁 영웅인 을지문덕의 선대 계보 및 이후 행적이 기록에 없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나 고대 한국의 남은 기록은 왕조차 기록이 뜸할 정도로 실로 부족한 실정이다. 알다시피 고구려의 역사서는 현존하는 것이 없다. 그러니 불가피하게 중국의 사서를 검토해 봐야 하는데, 중국의 역사가들이 일부러 을지문덕이란 인물을 배제시킨 것은 아닐테고, 또한 수양제가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거든 잡아두라는 밀지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양제는 이미 을지문덕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을지문덕에 대한 중국의 기록이 이처럼 간략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중국인 입장에서 굳이 중국의 기록에 자신들을 물리친 을지문덕에 대해 기술할 이유도 없었고, 이민족의 영웅에 대해 자세히 기록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11] 하여튼 을지문덕의 생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탓에 그의 출생에 대해 자세히 알기는 힘들다. 이는 대단히 아쉬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

1979년 고고학자 김원룡 교수는 전해종 박사 화갑기념논총에서 을지문덕의 가계가 이주민 계통의 귀화 가문일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약간의 파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에 따르면 먼저 을지문덕의 성씨인 을지(乙支)가 선비(鮮卑) 귀족의 성씨 가운데 하나인 울지(尉遲)와 음가가 비슷한데서 그가 귀화인이거나 귀화인의 자손일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는데, 울지씨는 본래 선비족 탁발부(탁발선비)와 함께 북위를 건설하는데 공헌한 울지부의 성씨이다. 실제로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 울지 성씨를 가진 이들의 활약은 작지 않았다. 이 시대를 다룬 중국 사서에 울지씨는 울지강(尉遲鋼)과 울지형(尉遲逈), 울지경덕 등 여럿이 보이는데, 을지문덕의 집안인 울지씨 가문은 580년에 수문제 양견이 찬탈을 꾀할 당시에 울지씨 출신의 울지형이 이를 막다가 죽자 화를 피하기 위해 고구려로 망명해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원룡은 을지와 울지의 발음이 비슷한 점, 자치통감 고이 8권의 주석에 을지문덕을 '울지문덕(尉支文德)'이라고도 표기하기도 한다고 했던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12]

다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으며, 고구려의 귀족 가문이었던 을(乙)씨에 고대 한국어에서 존칭사로 쓰이는 지(支)를 붙여 을지문덕의 이름이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한다. 몇몇 야사에서는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국상이었던 을파소의 후손이라고 적혀있기도 하다. [13] 그 외에도 을지문덕의 후손인 목천 돈씨의 가보에 의하면 원래 을씨였다가 을지문덕 전후로 을지씨로 바꾸었다한다. 이후로 을지씨를 계속 쓰던 후손들이 고려시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때 의병으로 공을 세워 평양 근처 돈산 일대를 식읍으로 받았고 돈씨로 성을 바꿨다. 이처럼 을지문덕의 출자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양한 편이다.

한편 조선시대 후기의 문인 홍양호은 자신의 저서인 해동명장전에서 을지문덕이 평양 석다산(石多山)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고 한다. 다만 홍양호가 해동명장전을 쓴 시기는 삼국사기가 편찬된 지 한참 후인 조선 후기였으며, 참고한 자료가 쓰여있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아무래도 평양 일대에 전해지던 을지문덕에 대한 전설을 옮겨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서는 명나라 장일규가 찬(撰)한 요산당외기(堯山堂外紀)에 을지문덕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면서, 고구려의 대신(大臣)이라고 확언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본기에도 을지문덕을 고구려의 대신(大臣)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대신이란 관직명은 아니다. 신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왕은 오색 무늬의 옷을 입고 흰 비단(白羅)으로 관(冠)을 만들며 가죽띠에는 모두 금테를 둘렀다. 대신(大臣)은 푸른 비단관(靑羅冠)을 쓰고, 그 다음은 진홍색 비단관(絳羅冠)을 썼다.”라고 하였다. 이 것을 보면 고구려 후기 귀족 계급의 관모는 소골(蘇骨)에서 발전한 관모로서, 왕(王)과 대신(大臣) 그리고 신(臣) 등 계급 간의 구별을 좀 더 명확히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을지문덕의 관직은 자세하지 않으나, 그가 대신이라 했으니 고위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평안도 일대에서 구전돼 온 야사로 을지문덕의 이름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을지문덕의 아버지가 을지문덕이 태어났을 즈음 명망 높은 도인에게 아이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 지를 물었는데, 그 이름을 '문덕'이라고 지으라 하자 그 아버지가 '제 미천한 아들에게 어찌 문덕 선관[14]님의 이름을 붙인단 말씀입니까'라며 거절했고, 이에 도인이 '이 아이는 훗날 고구려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아이이니 반드시 아이의 이름을 문덕이라 하되, 자라면 무예를 가르치라'고 말해, 아버지는 결국 도인의 뜻에 따라 아이의 이름을 문덕이라 지었는데 정말로 고구려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다는 것. 그러나 이는 전형적인 '후대 각색'의 형태를 띈 야사이고, 을지문덕에 관한 자료는 여수전쟁 이외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여 신빙성은 0에 수렴한다.

2.1. 정체에 대한 논란

을지문덕은 그 엄청난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출생과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전무하여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15] 한마디로 어느날 갑자기 수나라와의 전쟁에 나타나 수군을 끔살시키고 종전 뒤에는 다시 종적을 감춘 것이다.

국내에는 을지문덕에 대한 독자적인 전기조차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있긴 하지만 《수서》의 우중문 우문술전과 《자치통감》의 관련 내용을 조합하여 만든 것에 불과하다. 도대체 누구였을까?[16]

그래도 귀족연립정권 체제 내에서 한 나라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이자 외교 협상권을 갖출 정도였으면, 당시 귀족 내부에서도 최고위 직책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수양제가 수하 장수들에게 을지문덕을 반드시 사로잡으라고 밀명을 내린 걸 보면 외국에서도 그 이름이 잘 알려졌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문제는 왜 이 정도의 인물에 대해 생몰년도는커녕 당대 인물들을 언급할 때 대부분 적시하는 출생지마저 기록이 없냐는 점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을지문덕이 전쟁 당시 높은 벼슬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문이 정말 한미했거나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곳이었다는 이라는 설이 제기되어 상당수 연구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는 위의 타국, 타민족 출신이라는 설과 일부 통하는 점이 있다. 대귀족 가문들이 언제나 득세하고 관직을 차지하던 당대 고구려에서 관리가 출신 '부(部)'를 표기하지 않는 것도, 생몰년도도 기록되지 않은 것도 집안 배경이 워낙 없었던 탓이라는 것. 집안 대대로 높은 관직에 있었으며, 그 출신과 연고지에 대해 상당 부분 추적이 가능한 연개소문과는 비교되는 부분이다.[17][18]

그렇다면 이런 인물이 어떻게 귀족이 아니면 대접 못받는 세상에서 그 정도의 지위에 올랐는가? 이에 대해서는 평원왕대부터 고구려 왕들이 추진한 신진세력 등용 정책 덕분이었다는 추측이 있다. 그러한 정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자 수혜자가 바로 온달.[19] 그러나 이 설 또한 확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기록이 없는 걸 어쩌리.

목천 돈씨(頓氏)의 돈씨가보에서는 고구려의 명문가인 을씨(乙氏)가 을지문덕의 대에 와서 을지로 성이 바뀌었다가 묘청의 난 때 을지수(乙支遂).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 삼형제가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돈산백(頓山伯)에 봉해지고 돈뫼(頓山)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그곳에 정착해살면서 돈씨를 성씨로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해당 인물에 대한 다른 기록이 없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돈씨의 연원이 다르게 기록되어있으며 족보에만 나오는 가문의 연원은 부풀려지는 경우가 흔하기에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본다. 단재 신채호는 이 족보 기록과 일본인 사학자 시라토리 쿠라키치의 "퉁구스어로 사자(使者)를 '일치'라고 한다"는 지적을 근거로 을지문덕의 '을지'는 관직명이고 고구려 때의 관직인 울절(鬱切)이나 삼한의 읍차(邑借)와 서로 통하는 것으로 주장했다.

2.2. 이름에 대한 논란

이름인 을지문덕에서 성으로 여겨지는 을지(乙支)는 논란이 좀 있다. 乙(을)은 고대어에서 '이리'라고 읽혔으며 '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20] 그리고 支(지)는 관직명인 대막리지(大莫離支),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21], 막하라수지(莫何邏繡支)[22]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일종의 존칭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23] 그러므로 을지는 '대단하신 분'이라는 존칭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다. 지(支)를 '이공순신(李公舜臣)'공(公)과 비슷하게 쓰인 것으로 보고 성을 을(乙)씨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몇몇 야사에서는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재상이었던 을파소의 후손이라고 적기도 한다.[24]

支(지)의 발음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그 자음이 c 혹은 ch로서 당시의 자음에는 없던 발음이라 ㄱ, ㅅ, ㄷ 등으로 한국에 전래되었다. 그래서 을지의 원래 발음은 '이리기' 혹은 '이리시'로 읽혔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의 왕"을 쿠다라노코니키시(くだらのこにきし)라 불렀는데, 이 중 코니키시라는 말이 건길지(鞬吉支)의 당대 발음인 것으로 추정되어 백제에서는 접미어 "지"가 시로 읽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백제의 곤지(昆支)의 경우 코니키로 훈하고 있어 지(支)가 시로 읽혔다고 확정할 순 없다.[25] 신라, 가야 지도자층의 호칭인 간지(干支)의 이표기로 한기(旱岐)가 있으므로 支(지)는 기로 읽혔다고 볼 수 있다.

3. 고구려-수 전쟁에서의 활약

삼국사기에서 그와 관련된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은 제2차 여수전쟁 당시다. 고구려의 총 지휘관으로써 맹 활약하며 수나라군을 대파, 고구려를 승리로 이끈다.

고수전쟁 당시 을지문덕의 활약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살수대첩 항목 참고.

3.1. 전투 분석

우중문이나 우문술이나 크게 눈에 띌만한 전략, 전술적 오류를 저지른 적은 없다.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요동-압록 방어선을 일시에 돌파하여 평양에 육박하여 수군에게서 보급을 받고, 평양을 공격하려는 전략을 짰고, 일단 수의 별동대는 전투없이 성공적으로 요동-압록 방어선을 돌파했다.[26] 일단 평양 인근까지 육박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위풍당당하게 고구려군을 물리치면서(라고 생각하면서) 도착해보니, 보급을 맡았던 그놈의 수군이 쫄딱 망해버린 것이다. 별동대가 도착하길 기다렸으면 되는데, 무리하게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말아먹은 내호아의 과오가 더 크긴 하다.

물론 살수대첩의 의미는 내호아의 수군 격퇴시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 30만 별동대 자체만 해도 당시 을지문덕의 군대가 상대하기는 버거운 군세였다. 그래서 만약 별동대가 파견되기 이전에 내호아의 수군이 격멸당했다면, 이는 보급이 끊긴 적군을 끌어들여 섬멸하려는 유인작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내호아의 수군 패배 시점이 별동대 파견 이후의 시점이라거나 혹은 수군이 잔존해 있었다면,[27] 고구려군이 잦은 교전을 펼친 것은 수군과 별동대가 접선하여 군량 보급이 이뤄지기 전에 수나라 군대의 전진을 지연시켜 되돌려보내려는 의도였다고 평가될 수 있다.

어찌되었건 수군과 별동대가 접선하기 전 수의 수군은 물러났고, 별동대는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고립되었다가 후퇴하게 된다. 고구려군은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치며 별동대를 괴롭혔고, 결국 지금의 청천강 일대인 살수에 다다르자 고구려군은 전력을 다해서 총공격을 가하였다. 강을 건너느라 수군이 반으로 나뉘었던 시점에서 고구려군이 맹공을 가했고, 수의 군대도 이를 예견하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후위를 맡아 방진을 치고 저항하였지만 지친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군의 맹공에 얼마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후위의 붕괴에 동요한 30만 대군이 연쇄적으로 우르르 무너졌다. 설세웅은 고구려군에게 포위되었다가 간신히 탈출하고, 왕인공이 일시적으로 고구려군을 격퇴했지만, 제대로 부대를 추스려오지는 못했고 30만 5,000명 중 압록강에 다다른 병사는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나마 살아남은 2,700명도 건제를 유지하고 철수한 것이 아니라, 하루만에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도망쳐 왔다는 사서의 기록을 볼때 갑옷이고 창검이고 다 팽개치고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도망친 오합지졸 패장병 수준. 특히 수나라의 제8군은 전사한 지휘관 신세웅을 포함하여 모두 궤멸했다.

4. 전후의 삶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기록이 부재한 관계로 여수전쟁 이후에 을지문덕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 이전의 사서들이 그렇듯이 고구려의 사서들이나 기록물들이 이후의 전란에 의해 평양성과 국내성 일대가 황폐화 되면서 대부분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신라에 상당수 고구려인들이 유입되었고 고구려의 후신을 자처한 발해에서도 당연히 영웅으로 여겼을만큼 구전으로 전해져내려오는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해놓은 역사기록들이 있었을테지만 이마저도 후삼국시대와 여요전쟁 등의 전란을 거치면서 상당수의 역사자료가 소실되어버렸고 결국 을지문덕에 대한 구체적인 삶의 궤적에 대해서 영영 알수 없게 되었다. 삼국사기가 편찬 되었을 당시에 이미 당대의 기록들이 부실해서 고구려 후기의 경우에는 중국측 사서를 빌려써서 조공기록이 많이 나오는 부분이 적지 않은데 이러한 상황이다보니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 부실할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을지문덕의 출생과 마찬가지로, 수나라와의 전쟁 이후로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여당전쟁 당시의 대단한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안시성주와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자 을지문덕은 신라설인귀거란으로 망명했다는 설화는 있다. 물론 설화는 설화일 뿐이다. 애초에 댓구가 되는 설인귀부터 강주 용문 사람으로 원래 오리지널 중국인으로 당나라에 그냥 임관한 것이므로 망명하고 말고할 문제가 아니었으니, 을지문덕 역시 이야기가 안 맞다. 무엇보다 을지문덕 정도 되는 인물이 진짜로 신라건 당이건 망명을 한다면 그건 무조건 기록된다. 다만 남아있는 기록 자체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라.

현재로서는 연개소문의 쿠데타 이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그나마 높이 평가된다.

간혹 드라마나 소설에서 연개소문과 을지문덕이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역사적 증거가 없는 허구이다. 다만 개연성이 완전 없지는 않은데 고구려 연씨가문은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와 그의 아버지 연자유가 2대 연속 막리지를 역임한 명문가이자 권신가문이기 때문이다. 승전한 총사령관이었으니 그들과 만나지 않았을 리 없으며 그리고 시기상 을지문덕은 연개소문의 아버지 세대이니 개연성은 충분하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보니 알수있는게 없을뿐이다.

5. 평가

을지문덕은 누가 보아도 패색(敗色)이 짙은 전쟁[28]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었다. 불세출의 전쟁영웅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내지 못할 일이다. 이래도 잘 감이 안 온다면, 현대 한국미국의 침공을 받았을 때, 한국의 어느 장군이 미군 중에서도 최정예로서 선별된 미군들을 맞아 싸워서는, 그저 막아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예 전멸시켰다고 생각해 보라. 당시 수나라가 고구려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가지는 위상은 현대 미국급이었고, 동 시대 다른 지역의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국력[29]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당시 수나라 주변의 다른 세력들은 수나라 앞에 무너져 내린 상황이었다. 이 나라가 괜히 천자를 운운하는 천조국이었던 게 아니다. 그리고 을지문덕 장군은 그런 나라의 군대를 말 그대로 전멸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건 뭐라 의심할 여지도 없이 몇 번이고 찬탄 받아도 부족함이 없는 엄청난 업적이다. 강감찬 장군, 이순신 장군과 비교해도 딱히 부족함이 없다.

실제로 을지문덕은 수나라군에게 항복하겠다면서 혈혈단신 적진에 들어가 정찰을 하고 나오는 간떨리는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나오는 강심장인데다가, 뛰어난 지략을 발휘해 적을 무찌를 줄도 알았다. 거기에다가 여수장우중문시를 지어서 수나라 군을 농락할 정도의 문장력도 지니고 있었으니, 희대의 먼치킨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종합하면, 적을 기만하고 조롱하는 고도의 심리전, 적의 수가 많음에도 확실히 이길 수 있을 때라고 판단하고 과감하게 야전을 거는 판단력, 보급이 전쟁승패의 본질임을 파악한 정확한 진단, 목숨걸고 적의 정보를 직접 캐내려고 하는 용감함 등 고려의 강감찬,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적 기록이 너무 부족한 것이 아쉬울 따름. 세계전쟁사에서 한국이 세계에 자랑할수있는 s급클래스의 명장이다.[30]

그래서 훨씬 후대인 조선시대 숙종도 숙종 33년(1707) 을지문덕에게 청천(淸川)이라는 호를 내리고 사우(祠宇)에 향사(享祠)하도록 지시하였다. 호를 받고 사우에 향사된 것은 이순신, 최윤덕, 이원익, 김덕함 등과 함께였으나 조선 이전의 시대의 인물은 을지문덕이 유일하다.

5.1. 김부식의 평가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도 을지문덕 열전에서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낸 을지문덕을 칭송하면서 엄청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김유신 다음 열전이 바로 을지문덕의 열전이다.[31]
을지문덕은 자질이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있었고, 아울러 문장을 짓고 해석할 수 있었다.

양제가 요동의 전쟁에서 동원한 군대의 규모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대단했다. 고구려는 한쪽 지역의 작은 나라였지만, 이를 막아냈다. 스스로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그 수나라 군대를 거의 섬멸하였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경전에서는“군자(君子)가 있지 않으면, 그 어찌 나라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또한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기록의 부재로 인해, 을지문덕과 관련된 기록을 수서에서 그대로 옮겨왔으나 어떻게든 을지문덕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고자 포장했음을 알수가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김유신 부분을 다루면서, (신라가 별다른 변고 없이 무탈하게 이어졌고 그 후손들도 각지에 번창했을) 김유신은 글 아는 사대부들은 물론이거니와 풀 베는 꼬맹이나 가축 치는 목동도 다 아는데 을지문덕이나 장보고는 애초에 중국 사서에 남아 있지 않았으면 유명세는 고사하고 오늘날 그런 사람 존재했다는 흔적도 없었을것 이라고 평했습니다. 즉 현대는 고사하고, 지금으로부터 무려 900년전인 고려시대 시점에서도 을지문덕에 대한 남아있는 기록은 국내에 아예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보면, 없는 기록 가지고 최대한 '지략 있었다' '글도 잘 썼다' '용맹했다' 등등 추임새를 넣으면서 추켜세워주려고 김부식이 소위 말하는 "피나는 똥꼬쇼" 하는 게 오히려 눈에 땀이 찰 지경입니다. 다른 기록은 쥐뿔도 없는데 있는 내용만으로 최대한 좋은 언급을 더 붙여주려고 애를 쓰다보니...
관련 글[32]

5.2. 신채호의 평가

단재의 『을지문덕전』은 “땅의 넓이는 그 십 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인구는 그 백 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고구려가 저 수나라를 대적하여 하였으니, 그 기개는 비록 장하나 그 방도는 심히 위태로웠다. 그 당시에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들려 한다’는 국외자(局外者)들의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을 텐데도, 을지공은 홀로 의연히 그러한 비판을 못 들은 척하고 적국에 대항하였으니, 과연 무엇을 믿고 그러하였던가? 말하자면, 오직 독립정신(獨立精神) 단 한가지였다”면서 을지문덕을 자주의식(自主意識)의 상징적 인물로 표현하였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후세 사람들이 만약 그의 머리털 하나만큼만 닮더라도 그 나라의 독립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한두 마디의 말만 잘 거두어 간직하더라도 그 나라의 역사를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니, 을지문덕이란 사람은 우리 대동국(大東國) 4천년 역사에서 유일한 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 세계 각국에도 그 짝이 드물도다”라고 칭송하면서,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국체(國體)를 보존할 수 없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조선왕조 시대의 사대모화사상(事大慕華思想)에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신채호에게 있어 을지문덕이란 역사인물은 민족자존(民族自存)독립정신(獨立精神)의 표상이었고,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합리화하려고 내세운 한국인들의 타율적(他律的) 종속성(從屬性) 이론을 논파하는데 롤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5.3. 안창호의 평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을지문덕전』의 서문(序文)에서 “내가 해외 각국을 여행해보니, 그 나라 영웅이 칼을 휘두른 곳에서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그를 노래하고, 그 영웅이 피를 흘린 곳에서는 수천만의 사람들이 춤을 추는데, 몸이 있는 자는 그 몸을 영웅에게 바치고, 재주가 있는 자는 그 재주를 영웅에게 바치며, 학문이 있는 자는 그 학문을 영웅에게 바쳐서 한 나라 전체가 영웅을 부르면서 같이 나아가기 때문에 영웅이 배출되어, 워싱턴 이후에도 허다(許多)한 워싱턴이 나왔고, 나폴레옹 이후에도 허다한 나폴레옹이 나왔던 것이다”고 했다. 이는 을지문덕을 본받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 그와 같은 영웅들이 많이 나와주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안창호에게 있어 을지문덕은 모든 이가 표상으로 삼아야 할 영웅의 대명사였던 것이다.

6. 그 외에

을지문덕의 위대함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을지문덕의 이름을 기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을지"란 이름이 붙은 것들은 전부 을지문덕에게서 유래했다고 보면 된다.
  • 무공훈장 중 하나인 을지무공훈장은 바로 을지문덕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
  • 대한민국 해군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2번함(DDH-972)의 함명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따 을지문덕함이라 명명되었다.
  • 서울의 번화가인 을지로의 이름 역시 을지문덕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름은 '코가네마치(황금정:黃金町)'이었는데 이 거리는 구한말 밀려들어온 청나라 화교들의 중심가였다. 덧붙여 근처의 명동(메이지쵸), 충무로(혼마치)를 중심으로는 19세기말부터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해방 이후 1946년에 구한말 중국인들의 거주지에는 중국의 기를 누르기 위해 을지로, 일본인들의 중심지에는 충무로[33]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34]
  • 대한민국과 미국 간의 합동 군사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의 이름도 마찬가지로 을지문덕이 유래이다. 또한 제12보병사단의 부대 이름도 을지문덕의 이름을 따서 을지부대라 불린다. 이렇다 보니 미군들도 을지문덕을 알고 있다고.
  • 의무경찰이나 의무소방, 사회복무요원, 전문연구요원, 산업기능요원등 비전투 전환복무, 대체복무요원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육군훈련소 25연대의 정식 호칭은 을지문덕 연대이다.

한편 살수대첩의 무대가 되었던 청천강이 자리잡은 평안남도 안주시에는 을지문덕이 수군을 유인하기 위해 일곱 명의 승려들로 하여금 거친 살수를 건너게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곱 승려들이 먼저 강을 건너자 수군들이 이를 보고는 안심하여 급히 살수를 건너다가 을지문덕의 계략에 휘말려 몰살당했다는 전설이 바로 그것이다.[35] 목숨을 걸고 수군을 살수로 유인한 승려들을 기리기 위해 그 지방 사람들이 청천강 근처에 칠불사(七佛寺)라는 절을 세우고 그 곳에 일곱 승려의 상을 세웠다고도 하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을지문덕의 조각상도 있는데 1932년에 현진건이 쓴 기행문인 단군성적순례에도 등장하며, 북한의 문화재 보존급 제746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만들어진 시기는 현진건의 기행문에 따르면 '숭정기원(崇禎紀元) 220년 을미'로 조선 헌종 13년(1847년)으로 보이며, 원래는 을지문덕의 사당에 모셔져 있었는데 사당이 없어지고 땅에 파묻혔다가 다시 파내 백상루 밑에 갖다 둔 것이라고 한다.

북한에 놀랍게도 '을지'라는 성을 쓰는 사람이 있다. 2018년 1월 6일 로동신문 기사에 국가과학원산하 기계공학연구소 실장인 '을지기호'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 사람이 한번도 아니고 같은 달에 우리민족끼리 기사에도 나오니 오타는 아닌 것 같은데오타 내면 자아비판각[36] 어떻게 을지라는 성이 존재하는지는 불명. 북한 특성상 을지문덕의 후손으로 알려진 목천 돈씨를 을지씨로 바꿔버린게 아닐까 생각된다.

7.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을지문덕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자 미상의 고소설 <홍의동자(紅衣童子)>가 있다. 조선 시대의 고소설 <흥무왕연의>[37]에는 강남 땅에 큰 별이 떨어진 것을 보고 신라에 인걸이 태어날 조짐을 예측하고, 자객을 보내 찾아내 죽이려 하지만 자객은 7년이 넘도록 김유신을 찾지 못한다. 이후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온 김춘추가 옥에 갇히자 그를 번번이 죽이려 하지만 실패한 채 끝내 숨을 거둔다.

한국의 프로그레시브 밴드인 시나브로국풍81 당시에 개최되었던 "젊은이 가요제"에서 을지문덕을 소재로 동명의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암시하듯이 가사 자체는 상당히 국수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분위기가 강한 편이라 지금 보면 다소 오글거린다(…). 이 곡은 가요제에서 연주상을 수상했으며, 가요제 음반에도 실렸다.

김정산의 소설 삼한지에서는 젊고 야심있는 장군으로 등장하는데, 그야말로 진정한 먼치킨이 뭔지 제대로 보여준다. 비록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략과 무력 등 모든 면에서 극중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도 최강을 달리는 엄청난 인물. 심지어 삼한지의 진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김유신도 을지문덕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

작중에서는 살수대첩에서 수군을 무찌르고 심지어 중원까지 평정할 원대한 꿈을 세우나 너무 큰 전공을 세운 나머지 영류왕에게 찍혀서 장군직에서 반강제로 쫓겨나 이후로 초야에서 살게 되었다고 묘사된다. 이후로 아직 어린 시절의 연개소문과 만나 그를 제자로 삼고 중국땅을 여행하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후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을지문덕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38]

임동주의 소설 우리나라 삼국지에서도 먼치킨으로 등장한다. 살수대첩을 예견하고 주변국과 우호를 단단히 하는등 그야말로 포스가 넘친다.

김성한의 1969년작 소설 요하에도 등장하며 침착하고 노련한 면모가 엿보인다.

KBS에서 방영했던 사극삼국기에서는 백발에 긴 수염을 늘어뜨린 선인과 같은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연개소문이 그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노환으로 사망하기 직전엔 안시성에는 철이 많이 나니 반드시 지키라는 조언을 남긴다. 배우는 원로배우 김길호.[39]

이후 사극 연개소문에서는 이정길이 맡았는데, 초반부의 수나라 파트에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고구려에 쳐들어온 수나라 군대를 박살냈다(...). 5화 부터 시작되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영양왕과 함께 출전하며 한왕 양량의 군대를 대파했으며, 영류왕이 태제자격으로 정사를 관할하기 시작하자 강이식과 함께 잠시 물러나 향후 수나라와 전쟁을 대비하였다. 막리지였던 연태조가 극에서 퇴장한 시점 즉 왜국으로 떠난 이후 재상직인 막리지를 맡게된다. 여기서도 살수대첩이 무슨 수공으로 수나라 군대를 쓸어버린 것처럼 묘사되었는데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살수대첩 당시에 수공으로 수군을 물리쳤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이후 곡사정을 돌려보내며 수나라와 화친 하려는 영류왕에게[40] 화친하지 말 것을 간언하다 그 자리에서 쓰러져 분사(忿死)하는 것으로 나온다. 영류왕에게 마지막까지 한 말을 작중 초반에서 한 "역사에 죄를 짓지 마십시오."였다. 을지문덕이 분사한 이후 요동성에서는 강이식 대장군과 양만춘,온사문등의 장군들이 슬퍼했고 강이식은 항복을 전하러가는 사신들의 얼굴도 보기 싫다고 말하였다. 곡사정을 서부 욕살 사비류가 수나라 군영으로 데리고 가 을지문덕의 죽음등을 거짓항복의 이유로 내세웠고 수양제는 그의 죽음을 듣고 강이식 처럼 보고싶은 인사였다며 안타까워 하면서도 회군할 명분을 얻게되었고 이를 끝으로 여수전쟁도 마무리 되가며 1부에서 영양왕이 승하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고구려 파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면이다.

비슷한 시기에 방영한 대조영(드라마)에서는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양만춘이 을지문덕의 후계자로 나오고, 안시성에 을지문덕의 사당이 있어서 양만춘이 을지문덕을 기리며 고민하는 묘사도 나온다. 안시성 전투 직전 양만춘은 당군을 안시성에 묶어 둘 방책을 찾는데, 그 방법은 피로 물든 옛 수나라 깃발과 여수장우중문시를 보내 도발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사신으로 보낸 대중상을 통해 '당나라 황제의 목을 연개소문에게 뺏길 생각은 없다'라는 독설까지 보냈다. 당연히 당태종은 크게 분노하고 안시성 공격을 결정한다. 다만 당태종도 무작정 분노해서 홧김에 결정한 것은 아니고 '이런 도발을 해서 내 판단력을 흐리게 할 정도면 이 양만춘이란 자는 참으로 뛰어난 자다. 이런 자를 배후에 두고 평양으로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위험하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른 결정으로 나온다. 실제 안시성 전투 당시 당군은 안시성 공격과 평양 진공을 두고 고민하였으나 안시성을 배후에 두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장손무기의 주장을 당태종이 따라서 안시성 공격을 강행한 것인데, 이를 살수 대첩 및 을지문덕과 연결해서 각색한 것이다.

김진명의 소설 살수에서는 지덕체를 모두 갖추고 있는 먼치킨으로 등장한다.[41] 결말 부분에서는 살수에서 죽은 적군들을 위해 산에 들어가 제사를 지내며 살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을지문덕의 사망년도 미상을 해결하기 위한 설정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모 비디오 대여점에서는 살수가 무협소설로 분류된다고 한다(...)

웹게임인 콜로니 오브 워에서 69레벨의 HCS 시리즈 기체중 하나로 염동기체이다. 건곤감리코어 구현이 완료된 무휼을 토대로 강화된 기체들이며 그중 이름을 따와 문덕이며 3기체중 가동률이 가장 긴편으로 대략 3시간이나된다.[42] 대신 마의 구간 후반기 기체인만큼 강력한 무장들이 있으며 공유도 가능하다.[43]

모바일 게임 크루세이더 퀘스트에서 용사 중 하나로 등장했다. 4성은 문덕, 5성은 을지 문덕, 6성은 대막리지 문덕이다. 문덕(크루세이더 퀘스트) 참고.

고우영의 만화 을지문덕이 있다. 특이하게도 을지문덕의 비중은 조금밖에 안되고 달무라는 가상의 인물과 청천강에서 수군을 유인했다는 일곱 승려 전설의 승려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영걸전 시리즈의 외전작인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고대 무장으로 예정되어있는 데이터가 유출되었다. 병종은 도독.


[1] 삼국사기에서 등장. 관직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사는 그 직책이 서부 총관(西部 摠管)이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근현대의 서술이기 때문에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고 봐야 한다.[2] 조선 왕조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3] 조선 왕조의 숙종이 세움.[4] 애초에 수양제가 그렇게 해먹을 수 있는 것도 워낙 나라의 저력이 컸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였나면 훗날 당태종은 물론이고 그의 아들인 당고종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당나라는 수나라 최전성기 시절의 호구수를 뛰어넘지 못했다. 달리 말하자면, 당 고종 때까지 회복하지 못할 손실을 수양제가 해먹었다는 소리[5] 참고로 고구려가 멸망할 때 기록된 인구 숫자는 69만 7천호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남생이 당나라로 데리고 튄 10만호와 당나라가 고당전쟁 중 잡아갔다는 포로 등을 따로 계산한다면 80~90만호로 이 때 호당 인구수를 4~5명 가량으로 잡으면 대략 3~4백만, 6~7명으로 잡고 고구려의 군사 숫자인 30만을 따로 계산한다면 5~6백만 가량이 된다.[6] 2차 페르시아 전쟁(헤로도토스가 500만을 주장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러시아 침공 당시 동원한 65만 등 이와 비슷한 수준의 병력 동원이 없진 않으나 극히 드물었다. 적벽대전도 100만에 가깝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건 소설삼국지연의에서 나온 말이고 실제론 그보다 훨씬 적었다.[7] 다만 기록과 사료상으로 100만대군이 동원된 것이 확실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부터로 보고 있다. 당시엔 철도와 자동차의 존재로 운송이 쉬웠던 데다가 병력과 관련된 기록들이 상세히 남아있는 최초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8] 원문은 薩水湯湯漾碧虛, 隋兵百萬化爲魚。 至今留得漁樵話, 不滿征夫一笑餘。[9] 당태종고구려를 침공할 때, 요택에 버려진 수나라 장병들의 해골을 모아 제사를 지내고 당나라 군사들이 울었다는 기록으로 보아도 중국인들에겐 자신들의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낸 흑역사였을 것이다.[10] 구한말까지 평양부 적석면과 적연면이었다가 1906년 증산군에 편입됐고, 1914년 다시 증산군이 강서군에 병합되면서 두 면이 병합돼 강서군 적송면이 됐다.[11] 이런 주장은 삼국사기에서도 김부식이 수차례 이야기 한다. 진삼국사표에는 (중국의 역사서들은) 중국의 일만을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히 하여 갖추어 싣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기록했고, "주필산 전투의 결과를 다루며 고구려가 패하긴 했으나 당나라의 피해도 무척이나 컷다는 주장과 함께 『신ㆍ구당서』나 사마공(司馬公)의 『자치통감』에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나라의 체면 때문에 말하기를 꺼린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사관의 평을 실으며 중국측의 기록 축소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12] 한편 야사와 평안도 지방 구전에 의하면 을지문덕이 전통적인 고구려 귀족이었고 을파소의 후손이라고도 하여 결론을 내기가 더 복잡하다. 당대 사서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의 역사 현실상 '그 지역에서만' 대대로 내려오는 구전을 무시하긴 힘들고 실제 유물로 맞아떨어진 사례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13] 만약 정말 을파소의 후손이고 을씨였다면 존칭사인 지를 붙였다는 식으로 이어질수는 있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다.[14] 당시 고구려에 '문덕이라는 이름의 신화적인 선인'의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졌고, 자신의 아이에게 그런 존재의 이름을 함부로 붙일 수 없다는 것이 거절의 이유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야기 내에서의 설정일뿐, 실제로 고구려에서 문덕 선관에 대한 전설이나 민간신앙이 존재했는지는 학문적으로 전혀 확인된 바 없다.[15] 출생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해동명장전에서 그의 출생지가 평양이라고 기록하였지만 이는 모두 한참 후대인 조선 시대의 기록이라 신빙성이 거의 없다.[16] 이 때문에 선비족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나왔다. 선비족의 성 중에서 '을지'와 발음이 비슷한 '울지(尉遲, '위'지가 아니다!)'가 있으며,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당태종이 가장 신임하던 장수(당태종의 쿠데타인 '현무문의 변'에서 선봉을 맡았다)의 이름이 울지덕(尉遲敬德)으로 을지문덕과 유사하니 친척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그럴지도 모른다 정도의 가설이며, 이름의 유사성 이외에 특별한 근거는 없다.[17] 다만 연개소문 또한 고조부 이상으로 올라가면 그리 대단한 가문이 아닌, 어떤 의미에서는 신진 세력이었다는 추정도 있다.[18] 그리고 연개소문의 경우 아들인 연남생이 당나라로 투항해 당나라에서 죽었기에 뤄양 근처에 묻히면서 묘비에 자세한 가계도를 적어 놓아 연개소문의 자세한 가계도를 알 수 있었다. 평생 고구려인으로 살았던 을지문덕과는 다른 편.[19] 즉 어디 듣보잡(...)인 '바보 온달'이 공주와 결혼하고 실력으로써 전쟁에 나가 공을 세워 출세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물론 온달 또한 설화와는 달리 실제로는 귀족이었다고도 해서 단정할 수 없다. 덧붙이자면 온달의 출신성분이 낮았다고 보는 견해에서도 그가 생판 평민은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20] 현대 한국어의 '으리으리'하다 등의 표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21] 한자로는 태대형(太大兄).[22] 한자로는 대모달(大模達).[23] 이름 끝에 존칭접미사를 붙이는 것은 백제, 신라의 기록에도 자주 나온다. 주로 支(지)나 知(지)로 음차되어 있다. 물론 당시에도 '지'라고 읽혔을 가능성은 낮다.[24] 동시대에 을(乙)씨가 있긴 있었다. 또, 동시대까지는 아니지만 같은 고구려의 잘 알려진 국상 을파소도 있고... 이 분은 삼국사기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乙이라는 성이 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25] 곤지는 곤지(昆支 ; 코니(무)키) 군군(軍君 ; 코니키시) 곤지군(昆支君 ; 코니키시) 곤지왕자(琨支王子 ; 코니키세시무)로 사서에 나타나 있다.[26] 기록에 따르면 갑자기 대군이 우르르 모든 중요 연결로로 일시에 몰려나오니까 본래 한 루트로만 수군이 오면 측면을 치려고 했던 고구려군이 각자 현 위치에 고착되어버렸다고...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이 쓴 전법하고 똑같다.[27] 내호아의 부관 주아상이 어떻게든 수군을 추스르긴 했다.[28] 다만 전근대에는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못해서, 아무리 초강대국이라도 병참보급의 한계선을 길게 유지할 수 없었다. 전세계를 제패했던, 심지어 보급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유목제국이었던 몽골제국도 유럽침공시 보급문제로 더 이상 신성로마제국으로 치고 들어갈 수 없었다.(물론 여기까지 간 것도 대단하고, 주력병력은 대부분 대중국전선에 투입되긴 했지만) 심지어 교통수단이 발달한 현대에서도 보급문제로 패퇴한 강대국들이 많았고, 미국이나 소련정도 되는 초강대국이어야 보급한계라는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다. 후대에 당나라가 보급한계선을 극복하기위해 중-소규모 원정으로 수도없이 고구려를 침략, 소모전으로 갔는데도 여전히 고구려는 굳건히 버티고 있었고, 고구려가 내분으로 분열된 틈을 탄 뒤에나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애초에 보급한계선이 존재하는데 무리하게 병력을 많이 일으킨 시점에서 수나라의 패배가 예견되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고구려의 패색이 짙은 전쟁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을지문덕이 대단한건 변함이 없다. 그냥 물러가게 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회전에서 적군의 야전병력을 싸그리 전멸시켰으니...[29] 국력의 요소 중 하나인 인구만 봐도 수문제때의 인구를 다시 복구한 시기가 100년 뒤의 '개원의 치'라 불리는 당 현종때였다.[30] 이게 어느정도인가 하면 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방어를 해낸 사람이 역사상최강의 명장이라고 평가받는 나폴레옹을 이긴 아서웰즐리와 오스만의 메메드2세를 고전시킨 스칸데르베그 이두사람의 거의 상위호환격이라고 생각하면 쉽다.[31] 참고로 분량 차이는 세 권의 분량을 독식하고 있는 김유신 열전에 비해 너무 소략한데, 편찬 당시 이미 고구려의 기록은 거의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김부식 또한 삼국사기의 사론으로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張保皐)의 의롭고 용맹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흔적이 없어져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의 경우에는 열전이 3권이나 되어서 굉장히 편파 아니냐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실상은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도 그 이름을 안다는 김유신과 관련된 기록이 부족해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이 허무맹랑한 기록들이 가득 담긴 김유신 가문의 행록을 추리고 추려서 만든 책이다.[32] 참고로 해당 글을 쓴 유저는 나무위키의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나 카다안의 침입등 고퀄리티 역사 항목을 만든 유저다.[33] 당연히 충무공 이순신을 따서 지은 이름이며, 공교롭게도 바로 근처 건천동이 이순신의 출생지다.[34] 참고로 일제시대 이후 화교들의 거류지는 현재의 소공동과 북창동 일대로, 옛 중국대사관과 현재 중화요릿집이 많이 남아 있는 그 동네부터 플라자호텔까지의 부분이다. 현재의 플라자호텔은 3공 당시 화교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화교에게 사기(?)를 치는 박통의 위엄 화교 상인들로부터 헐값에 부지를 인수해서 지어진 건물이며, 일제강점기에는 중국인들의 세를 누르기 위해(경성부(시청)에서 군사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차이나타운의 한가운데를 뚝 잘라 길을 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한국은행 옆 소공로이며, 당시에는 하세가와쵸라고 불렀다.[35]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관촉사 은진미륵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 여기서는 수나라군이 거란족으로 바뀌었고 승려도 일곱 명이 아니라 한 명이라는 것이 다른 정도.[36] 현재 합법적으로 우리민족끼리에 접속할수는 없지만, 구글에 대충 검색어를 입력하면 텍스트 몇 줄 정도는 볼 수 있다.[37] 제목에서 보듯 김유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다.[38]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 너무 적은지라 작가가 고충한 흔적이 꽤 보인다.[39] 1983년에 방송한 KBS 드라마 개국에서는 이제현 역으로 나왔다. 역시 같은 시기를 다루고 있는 드라마 추동궁마마에는 최영 역으로 나오셨다. 2017년 2월 6일 향년 83세로 타계.[40] 영양왕이 중병에 걸려 영류왕이 태제 자격으로 정사를 맡고 있었다. 영양왕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영류왕이 태제로 책봉되었던 것.[41] 덤으로 여기서 사실상의 라이벌인 양광은 황제가 되기 전에는 그야말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순박한 이미지로 나왔다. 다만 어머니 문헌황후가 죽은 뒤로는 실제역사랑 비슷하게 묘사.[42] 김유신장군 모티브인 유신과 계백장군 모티브인 계백에 비하면 운행시간은 그나마 양심적인 기체[43] 3기 전부 슬롯이 3개고 식별이 HCS로 공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