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부흥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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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민 지도자 大乞乞仲象 | 대걸걸중상 | |
작위 | 진국공(震國公)[1] |
존호 | 대사리(大舍利)(?) |
성씨 | 대(大) |
휘 | 중상(仲象) |
부모 | 아버지 걸곤우(?) |
아들 | 대조영(大祚榮), 대야발(大野勃) |
생몰연도 | 629? ~ 697? (향년 6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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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의 아버지. 《신당서》에는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 《오대사》에는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으로 되어 있다. '걸걸'이 성인지 그냥 칭호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일단 중상은 따로 떼어내 지칭하기도 했으므로 이름으로 보이며 이는 웬만해선 2글자로 이름을 짓던 당대의 방식과도 통한다.[2] 사리의 경우 대사리(大舍利) 걸걸중상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노태돈 교수에 따르면 이는 북방 종족에서 수령, 또는 족장의 뜻으로 사용된 용어라고 한다.[3]한국 협계 태씨, 영순 태씨, 밀양 대씨의 시조다.
기록상 '고구려의 별종'으로, 요서 영주에 거주하다가 이진충의 난이 일어나자 말갈의 추장인 걸사비우와 함께 동만주로 이주했고, 측천무후에 의해 진국공으로 책봉되었으나 이내 병으로 죽었다.[4] 이 측천무후 시절의 주나라에 귀순한 거란족 항장인 이해고를 보내어 걸걸중상측을 공격하자 그의 아들 대조영이 걸걸중상의 병사로 지도자를 잃은 고구려인 집단과 걸사비우의 전사로 지도자를 잃은 말갈인 집단을 아울러 이해고를 물리치고 발해를 건국한다.
2. 생애
《구당서》에는 이 사람의 활동이 죄다 대조영의 것으로 처리되어 있어 등장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신당서》와 《오대사》의 기록을 토대로 대조영의 초기 활동을 걸걸중상의 것으로 보게 된다.영주는 요서 지방에 위치해 있었는데 당나라에서 정책적으로 설치한 기미주로써 그 치소는 유성(柳城), 즉 오늘날의 랴오닝성 차오양시(朝陽, 조양)이었고, 거란족, 해족, 말갈족 등의 여러 이민족들을 일부러 모아놨기 때문에 고구려가 멸망한 뒤 이주당한 고구려 유민들이 많이 있던 곳이었다. 당나라에서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성공한 인물인 이정기나 왕사례도 영주 출신이었다. 대신 고선지는 일찌감치 서쪽 내륙으로 이주당한 쪽이었다. 당시 영주도독으로 있었던 조문홰(趙文翽)가 각 부족 수령들의 권위를 무시하자 결국 696년 거란족 지도자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켜 조문홰를 살해하고 무상가한(無上可汗)을 자칭했다. 걸걸중상은 이러한 혼란을 틈타 말갈의 추장인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와 말갈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나 무주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들은 곧 요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에 자리잡았으며, 오루하(奧婁河)를 경계로 수비를 굳혔다.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오루하(奧屢河)란 곳은 지금의 액돈산(額敦山)에서 두 강이 나와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가는데, 그 위도는 영주의 동쪽 2,000리로 조사되며, 중상이 나라를 세운 처음에 본디 백산의 동쪽에 웅거하였고 그 아들 조영은 잠시 달아났다 돌아왔으니, 백산의 동쪽에서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라고 하였고, 《만주원류고》는 "오루하(奧屢河)는 마땅히 아로하(阿嚕河)이니, 수원은 길림 안반화탁봉(安班和托峯)에서 나와서 하나는 서남으로 흘러 합달하(哈達河)에 들어가고, 하나는 흘러 개원에 이르러 청하(淸河)에 들어간다."
고 되어 있다. 근래에는 발해가 건국된 동모산 부근으로 보려는 주장이 있지만, 오루하는 단순히 세력이 미치는 경계이지 반드시 중심 거점과 인접해 있으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신당서》에 따르면, 이에 측천무후는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을 각기 허국공(許國公)과 진국공(震國公)으로 책봉하고, 지금까지의 죄는 사면해준다는 말로 두 사람을 회유하였다. 하지만 걸사비우는 이를 거부하였고, 걸걸중상은 다른 기록은 없지만 역시 거부했거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어버리면서 중간에 흐지부지 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신당서》에는 걸걸중상의 반응에 대한 언급은 없고 단지
"비우가 명을 받지 않았다.(比羽不受命)"
고만 되어 있다. 걸걸중상의 사망에 대해서는 《신당서》에
"중상이 이미 죽어, 그 아들 조영이 해고의 군대를 패배시켰다.(仲象已死 其子祚榮 敗楷固兵)"
고 되어 있고, 《신오대사》에 "걸사비우가 격살되고 걸걸중상 역시 병들어 죽으니, 중상의 아들 조영이 섰다.(擊殺乞四比羽 乞乞仲象亦病卒 仲象子祚榮立)"
는 기록이 있다. 이에 측천무후는 마침내 이해고와 삭구 등에게 조서를 내려 이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 싸움에서 걸사비우는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걸걸중상의 뒤를 이은 대조영이 지도자를 잃은 말갈을 아우르면서 천문령을 넘어 추격해오는 이해고를 무찔렀다. 흔히 천문령 전투에서 무찔렀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기록상에는 천문령을 넘어서 추격해오자 무찌른 것으로 되어 있다. 때마침 중간에 있는 거란 등이 돌궐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측천무후는 더이상 대조영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이후 대조영은 계루의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을 근거지로 성력 연간(698~700) 중에 국호를 '진'이라 하여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후일의 발해이다.
3. 가족 관계
12세기 송나라 사람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는 걸걸중상의 아버지가 걸곤우로 나와있으나, 《고려도경》에만 나오는데다가 걸사비우의 오기라는 설이 있어서 아닐 가능성이 높다.
4. 의문점
대조영과 함께 어디 출신인가가 상당한 논쟁 거리가 되고 있다. 이는 발해의 역사 계승 문제와도 관계가 깊다.걸걸중상은 기록의 표현을 옮기자면 본래 고구려의 '별종'으로 당나라의 요서 영주 지방에 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구당서》에서는 걸걸중상의 언급이 일절 없고 단지 '대조영은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단순히 기록했을 뿐이며 《신당서》에서는 걸걸중상이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대조영의 아버지라는 것 외에는 직접적인 신분 언급은 없지만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며, 성은 대씨이다.'라고 기록했으며 또한 '말갈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발해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그리고 《신오대사》에서는 '고려별종 대걸걸중상'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또한 '발해는 본래 말갈이라 부르며, 고려의 별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별종'은 다르다는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고려(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다'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처럼 갈래 집단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가장 큰 의문점은 《신당서》 기록에는 분명 등장하지만, 이상하게도 같은 당나라 역사를 다룬 《구당서》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당서》에 따르면 대조영은 가족을 데리고 영주로 이주했다가 696년에 거란의 반란이 일어나자 걸사비우와 함께 동쪽으로 도주하였다. 그리고 걸사비우가 이해고와 싸우다가 죽자 잔당을 이끌고 천문령에서 이해고와 싸워 이긴 이후 발해를 세웠다. 다시 말하자면 《구당서》에서 대조영은 아버지 걸걸중상과 그 행적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 때문에 어떤 이들은 《구당서》에서 대조영과 걸걸중상이 동일인물로 간주되었으나 훗날의 《신당서》에서 다시 구별되기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하며, 애초에 대조영과 걸걸중상이 동일인물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또한 아들인 대조영은 분명 성이 '대'(大)씨인데 걸걸중상의 이름에는 '대'(大)자가 보이지 않는 다는 것도 의문점이다. 《신당서》에서도 발해 왕족은 성씨가 대씨라고 언급되었다. 걸걸중상 이름의 첫글자인 '걸걸'(乞乞)이 본래 말갈족 성씨로 대조영 역시 본래 같은 성씨였으나 훗날 성씨를 다시 지었다는 설과 이름 앞의 '걸걸'(乞乞)이 그저 일종의 존칭에 불과하다는 설도 있다. 또한 '걸걸'(乞乞)이라는 말 자체가 '크다'라는 뜻이며 즉 '대'(大)와 의미가 같으니 실상은 같은 글자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6] 혹은 《신당서》와 《오대사》의 명칭을 비교하며 '걸걸'(乞乞)이 아니라 '사리'(舍利)가 '대'(大)에 해당된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족보나 드라마 등에서는 가끔 아들 대조영과 성씨를 맞추기 위해 기록에 남아있는 이름 대신 대중상(大仲象)으로 개명하기도 하나 정식 사서에 남은 기록 중 걸걸중상의 이름을 '대중상'이라고 표기한 사례는 전혀 없다.
5. 창작물에서의 모습
사서에 기록된 본래 이름인 '걸걸중상'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개 대조영과 성씨를 맞춰 대씨로 등장한다.위서인 환단고기에서는 대중상으로 나와 있다. 진국장군 대중상이 서압록하를 지키고 있다가 고구려가 망하자 유민들을 이끌고 동모산으로 이동한 뒤 후고구려를 세우고 연호를 중광(重光)으로 한 뒤 고구려의 부흥에 힘쓰다가 700년 병사한다는 내용.
KBS의 사극 삼국기에서는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이라는 이름으로 등장. 배우는 이후 대조영에서 부기원 역할을 맡았던 김하균.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임혁이 분했다. 대중상(대조영)으로.[7]
한편 SBS에서 방영한 연개소문에서는 걸걸중상도 대걸걸중상도 대중상도 아닌 기록에서 전혀 안 보이는 대걸중상이란 괴상한 이름으로 등장하며(대걸을 성으로 취급해서 '대걸 장군'이라고 지칭),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인 영양왕 시기 제1차 고구려-수 전쟁 때 대모달인 을지문덕의 부장으로 묘사된다.[8] 주아부와 한문제의 고사를 따와 영양왕과 고건무가 군영을 시찰하려 할 때 을지문덕의 명이 없으니 태왕이라 할지라도 군문을 열어줄 수 없다며 퇴짜를 놓는다. 연개소문이 아직 아역으로 나올때 이미 고구려의 청년 장수로 나왔으니 적어도 나이도 연개소문보다도 나이가 10여살 위였다. 나중에 연개소문이 아역에서 이태곤으로, 이태곤에서 유동근으로 바뀐 이후 연개소문과 만났을 때 "우린 나이도 비슷하고."라는 대사를 친다. 기록에 없는 대걸중상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도 그렇고 설정 붕괴까지 있으니 이 드라마가 얼마나 개판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9] 중년 이후 대걸중상의 배역은 송금식이 맡았는데[10] 그는 훗날 정도전에서 변안열을 맡아 유동근이 맡은 이성계에게 숙청당하는 배우 개그를 보여준다.
[1] 무주에서 부른 칭호[2] 걸걸은 만주어 거거(gege)와 관련있는 존칭일 수도 있다. 고구려 및 말갈 유민들의 지도자였으니 만주어 및 여진어의 조상어인 말갈어로 존칭이 붙었다가 대조영 대부터 뜻을 한자화한 대씨를 정식으로 칭하게 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3] 출처: 고구려 발해사 연구(2020), 고구려 유민사연구-요동, 당 내지 및 돌궐 방면을 중심으로-(1980)[4] 당시 690년에 측천무후가 즉위하여 주나라가 건국되고 당나라는 일시적으로 멸망한 상태였다. 그러다 측천무후가 15년 만에 밀려나면서 다시 당나라로 복구되기에 정식 왕조로 치지 않는다.[5] 대일하가 무왕(발해)의 종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의 아들일 가능성은 여러 정황상 거의 없어서 대조영 위에 또다른 아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6] 북위의 국성인 탁발씨가 효문제의 한화정책으로 성을 중국씩 성씨인 원씨로 환원된 사례가 있으니 발해의 국성인 대씨 또한 말갈족의 성씨인 걸걸씨에서 중국•고려의 성씨인 대씨로 바뀌었을 것이라 추측되기도 한다.[7] 전작 삼국기에서는 양만춘으로 열연했다.[8] 이 설정부터가 이상하다. 제1차 고구려-수 전쟁은 598년에 시작되는데, 역사상 걸걸중상은 발해 건국(698) 직전인 697년 경에 사망한다. 따라서 그가 여수전쟁 당시에 이미 장수였다면 100년 하고도 한참 더 산 게 된다. 심지어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 당시 이미 머리와 수염이 새하얀 노인으로 등장하는데, 역사적으로는 그러고도 30년은 더 활동을 해야 하니 사실상 동명이인 급.[9] 실제 역사에서 걸걸중상은 연개소문보다 30년도 더 이후에 사망하니 1세대 아래의 인물로 묘사하는게 알맞다. 연개소문이 594년생인데 걸걸중상은 698년에 죽는다. 이때는 연개소문의 삼남 연남산조차 환갑에 가까웠을 시점이였으며 장남인 연남생은 이미 고인이였지만 생존해 있었으면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였다.[10] 야인시대에서 김후옥을 연기한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