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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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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亞夫
(? ~ 기원전 143년)
1. 개요2. 생애
2.1. 허부(許負)가 관상을 봐주다2.2. 황제에게 큰 인상을 주다2.3. 오초칠국의 난
2.3.1. 조조의 죽음2.3.2. 주아부의 대활약
2.4. 주아부의 실각2.5. 죽음
3. 평가4. 여담

1. 개요

전한명장이자 정치가로, 초한지로 알려진 강무후(剛武侯) 주발(周勃)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더 공이 큰지 아들이 더 공이 큰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미묘. 한문제흉노의 공격을 막고 총애를 받아 한경제 시절에도 오초칠국의 난을 제압하는 등 공을 세웠으나, 특유의 강직한 성격 때문에 한경제와 사이가 나빠져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2. 생애

2.1. 허부(許負)가 관상을 봐주다

위표이 망조를 보이게 되자 위나라의 왕이 된 자신의 형인 위구를 따르다가 장한에게 위나라가 멸망당하고 위구가 죽자 항우를 따랐다. 초한대전 중엔 유방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가 유방이 불리하자 다시 항우에게 붙었고, 유방이 사로잡고 목숨은 살려주자 위표를 믿지못한 주가(周苛)에게 죽고 만다. 위표의 첩이던 박희는 노예로 전락해서 강제로 베를 짜는 곳에 끌려가 일을 했다.

여자 좋아하는 유방은 박희를 데려다가 부인으로 삼았는데, 여기서 나온 아이가 유항이었고, 이 유항이 바로 한문제다. 그런데 일전에 허부라는 유명한 관상가는 박희를 보고 눈이 동그랗게 떠져 "이 사람은 천자를 낳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예언이 이루어진 셈.

주아부는 어렸을 때부터 지모가 빼어나고 병서 읽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허부는 주아부의 관상을 봐주게 되었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 “당신은 3년 후 후(侯)가 되고 후가 된 지 8년 후에는 대장과 승상이 되어 나라의 대권을 장악하며 그 존귀함이 뭇 신하들 중 으뜸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후 9년 후에는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이에 주아부는 "아니, 선생님. 제 형님이 후작을 이어받았으니 형님이 돌아가시더라도 형님의 아들이 후가 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제가 존귀하게 된다면 왜 굶어죽는단 말입니까?"

그렇게 주아부는 대수롭지 않게 그저 웃어넘겼지만 허부는 주아부의 입을 가리키면서 "얼굴에 줄이 입까지 내려왔으니, 굶어죽을 상이요."하고 말했다. 그런데...

2.2. 황제에게 큰 인상을 주다

한문제 2년(기원전 162년), 주아부는 정말로 조후(條侯)에 임명되었다. 주아부의 형인 주승지(周勝之)가 죄를 짓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조정에선 주발의 아들 중에 누가 좋을까 의논이 있었지만 주아부가 추천되었다고 한다.

전한유방흉노묵특에게 백등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부터, 한과 흉노 서로의 다툼은 피할 수 없었다. 한무제의 시기전까지는 커다란 규모의 다툼은 벌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산발적인 싸움은 계속 이어졌다. 한문제는 쓸데없는 다툼으로 나라의 힘을 소모하지 않기 위해 전쟁을 해도 물리치는 것은 허용하되 적을 쫓아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기원전 158년, 흉노는 대규모로 한나라를 공격했고, 이에 문제도 별 수 없이 세 명의 장군에게 대군을 맡겨 보냈는데 종정(宗正) 유예(劉禮)[1]를 패상으로, 축자후(祝茲侯) 서여(徐厲)를 극문으로, 그리고 하내(河內)태수로 있던 주아부는 세류(細柳)로 군대를 파견하여 적을 막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문제는 열심히 하고 있는 장수들이 생각나서 직접 일선으로 가 장정들을 위로하려고 했다. 군인들 : 안 돼! 오지 마! 그리하여 패상과 극문에 먼저 들렀는데, 황제가 탄 수레가 곧장 성문으로 들어갔지만 누구 하나 막지 않았고 모든 장수와 제장들이 달려와 예를 표했다. 사실 어찌보면 융통성 있는 처세술로, 그렇게 한문제는 주아부가 있는 세류로 마지막 여정을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세류에서 발생했다.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세류로 먼저 출발한 황제의 선발대가 세류에 도착하니, 세류의 관리와 병사들은 모두 갑옷과 무기로 완전 무장하고 활에 화살을 메겨 겨누고 있었다. 선발대가 "폐하가 곧 도착하시니 성문을 열어놓으라."고 말하였으나, 세류의 경비병은 "장군이 말하는데 군대에서는 장군 말만 듣고 폐하 말도 듣지 말라던데?" 하고 무시했던 것. 선발대는 전전긍긍했지만 경비병은 요지부동이었고, 급기야 황제의 마차가 도착했음에도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에 문제가 군사권을 나타내는 부절을 사신에게 들려보내고 군사들을 위문하겠다는 조서를 쓰는 정식적인 절차를 걸치니 그제서야 성문이 열렸다.

그렇게 한문제는 말을 타고 성문으로 들어왔는데, 갑자기 병사가 달려오더니 "군영에서는 말을 타고 달리지 못합니다." 라고 말하자 문제는 까라면 까야지 시키는대로 말고삐를 느슨하게 하고 천천히 말을 몰았다. 황제가 본영에 도착하자 주아부와 휘하의 장수들은 전부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무릎을 꿇지 않은채 절하면서 말했다. "몸에 군장을 차렸을때는 절하지 못하는 법이니, 양해해주십시오."

문제는 이렇게 황제 체면에 험한 꼴을 보았지만 오히려 사람들을 시켜 "황제는 주아부를 공경한다"고 외치게 하고는 떠났다. 그러자 주위에선 "그 건방진 놈 코렁탕을 먹어야 하는것이 아냐?" 하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문제는 대수롭잖게 반응했다. "아, 그쯤해야 장수라고 할 수 있지. 패상과 극문을 보게. 그게 어디 군대라든가? 그놈들은 적군이 쳐들어오면 포로가 될 놈들이야. 하지만 주아부가 있는데 어떤 자들이 나를 해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군율이 엄정한 군대를 이르는 세류영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이후 흉노 사태가 진정되었는지 한달 뒤에 세 군영을 모두 철수시키면서, 한 문제는 주아부를 중위(中尉)[2]로 임명했다. 그리고 훗날 문제는 죽을때 아들 경제에게 "위급한 일이 있으면, 주아부에게 자문을 구하라." 라고까지 말하였다. 이에 경제는 주아부를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았다.

2.3. 오초칠국의 난

한나라는 여러 제후왕들이 커다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한경제조조(鼂錯)[3]를 등용해서 개혁을 통해 제후왕들의 세력을 꺾으려 하였다. 이에 가장 큰 불만을 가진게 오왕(吳王) 유비(劉濞)였다. 유비는 유방의 친형인 유중(劉仲)의 아들로 20세 나이에 유방을 따라 공을 세워 오나라 왕으로 봉해졌고, 봉지는 무려 3군(郡) 53성(城)에 다다렀다. 거기에 그 후로 40년간 꾸준히 세력을 키워 막강한 힘을 자랑하였다. 거기에 구리 광산을 개발해 동전을 주조하고 염전을 개간해 소금을 생산했고, 백성들에게 토지세를 부과하지 않아도 재정이 넉넉할 정도로 풍족했다. 또 다른 나라에서 오나라로 망명하는 사람이 있으면 조건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주었다.

더군다나 유비는 당시 황실에서도 최고의 웃어른이었고 거기에 비하면 경제는 하룻강아지 수준이나 다를바가 없었다. 더구나 유비가 경제에게 바득바득 이를 가는 것은 굳이 조조 때문은 아니었는데, 경제는 태자 시절 유비의 아들과 바둑을 두다 불리해지자 한 수만 물러 달라고 떼를 부렸다. 하지만 유비의 아들이 이걸 거절하며 다투게 되자 화가 나서 바둑판을 던졌는데, 정통으로 머리에 맞아 사망하였다. 유비의 입장에선 돌아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

조조는 지나칠 정도로 완강하게 제후왕들을 몰아부치는 정책을 썼고, 이에 모든 제후왕들은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이때 유비는 이들을 부추겨 동지를 모았는데, 마침 조정에서 회계(會稽)와 예장(豫章) 두 군을 삭감한다는 전달이 왔다. 유비는 이것을 기회로 조정에서 온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교서, 교동, 치천, 제남, 초, 조나라가 가담하여 7개의 나라가 들고 일어섰는데, 가장 강한 것이 오나라와 초나라였기에 이것을 오초7국의 난이라 부른다.

2.3.1. 조조의 죽음

반란이 일어나자 경제는 조조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자 조조는 "폐하는 군대를 이끌고, 나는 장안에 남아서 도와주겠음."이라고 말하였다. 이를 테면 유방과 소하의 역할을 하자는 것인데, 경제는 전쟁 한번 안 해본 사람이었다. 거기에 조조 역시 백성들과 신하들로부터 두루두루 인망이 좋은 소하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에 이 의견은 간단하게 기각되었다.

그리하여 다른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당시 대장군인 두영은 원앙(袁盎)에게 괜찮은 생각이 있는 것 같아 원앙을 추천했다. 원앙은 조조 놈이 죽어야 난이 진정될 것이라고 해서 조조는 처형당했고, 원앙은 사신으로 오나라에 가서 유비를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유비의 야심은 수십 년이 된 것이었으니, 그깟 조조의 목숨 하나로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원앙은 죽을 뻔하다가 목숨만 건져서 간신히 살아돌아왔다.

2.3.2. 주아부의 대활약

이때 주아부는 태위(太尉) 벼슬에 있었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적을 토벌하러 떠났는데 도중에 낙양에서 극맹(劇孟)[4]을 부하로 삼게 되었다. 극맹을 얻은 것이 기쁜 주아부는 "반란군들이 이미 그대를 포섭한 줄 알았다. 이제 나는 적국 하나를 얻은 것과 같다." 라며 좋아하였다.

회양에 도착한 주아부는 아버지 주발의 문객인 등도위(鄧都尉)[5]를 만나 계책을 구했다. 등도위는 이렇게 말했다.

"오나라 군대는 정예병이니 직접 싸우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장군께서는 군대를 이끌고 동쪽의 창읍(昌邑)으로 가십시오. 그곳에서 보루를 높게 쌓고 버티면서 양나라에 일을 다 맡기십시오. 오나라 군은 분명 정예부대를 총동원해서 양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장군께서는 그 기회에 회사구(淮泗口)를 공격해 오나라의 보급선을 끊어버리면 됩니다. 적은 지칠대로 지쳤을 테니, 온전하고 강한 군대로 일거에 무너뜨리면 됩니다."[6]

주아부는 군대를 끌고 패서에 이르렀다. 조섭(趙涉)이라는 사람이 주아부의 수레를 막고 나서면서 갑자기 말하였다.

"장군께서 동으로 오와 초를 주멸하는데, 승리하면 종묘가 편안해지나, 이기지 못하면 천하가 위태로워질 것이니, 능히 신의 말을 쓸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주아부는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수레에서 내려와 계책을 물었다. 조섭은 말했다.

"오왕 유비는 부유한 데다 죽기를 각오한 용맹한 군사를 모은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태위께서 오신다는 것을 들었으니 필시 효관과 민지의 막히고 좁은 곳 사이에 매복을 두었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어찌 여기서부터 조금 서쪽으로 가십시오. 그러한 다음 남전(藍田)으로 내달리고, 무관(武關)을 나와 낙양(雒陽)에 이르시면 그 사이는 늦어도 불과 하루이틀 차이밖에 되지 않는데, 바로 무고(武庫)로 들어가시어 북을 쳐서 울리십시오. 제후들이 이를 듣고는, 장군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다고 여길 겁니다.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다른 길로 해서 급작스레 그들 앞에 서야 합니다"

주아부는 그 계책을 따랐다. 낙양에 도착해서 효관과 민지 사이를 수색하니 예상대로 복병이 있었다.[7]

유비는 초왕과 함께 회수를 건너 극벽(棘壁)을 공격했고, 양나라 군대는 이를 막기 위해 나섰지만 대패하였다. 그리하여 주아부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주아부는 창읍에 틀어박힌 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양나라 왕은 대노해서 직접 사신을 보내 경제에게 따지기도 했지만 주아부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대신에 경기병들을 파견해서 적의 후방에 파견하여 보급로를 박살내었다. 그 사이에 악으로 깡으로 버틴 양나라는 적의 공세를 어찌어찌 막을 수 있었다.

양군이 저렇게 버티자 반란군은 주아부를 공격했지만 주아부는 전혀 대응을 하지 않았다. 보급로가 끊기고 지친 반란군은 서로 다투면서 큰 소란을 피우는데도 주아부는 태연하게 누워서 때를 기다렸고, 내분까지 일어난 반란군은 별 수 없이 퇴각하였는데 주아부는 이 틈을 노려 적을 공격, 초왕 유무를 자살시키는 데 성공한다.

유비는 동월(東越)까지 도망갔지만 한의 회유에 넘어간 동월에서 그를 속인 후 살해했다. 결과적으로 오초 7국의 반란은 불과 석 달 만에 모두 격파되었다. 주아부는 5년뒤 승상이 되어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렇지만 양왕은 이 과정 때문에 주아부에게 극심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2.4. 주아부의 실각

양효왕 유무는 문제의 아내인 효문황후의 둘째 아들로 40여개 성의 주인이었으며 온갖 보물을 다 가진 호화로운 궁에서 생활하는 세력가였다. 주아부는 그런 사람에게 밉보인 것인데 과연 양왕은 틈만 나면 궁전으로 와 주아부의 험담을 했다. 물론 그때마다 주아부를 싫어하는 효문황후가 합세한 것은 물론이었다. 양효왕은 자객을 사서 원앙 같은 조정 대신을 노린 청부살인도 하는 사람이니만큼 양효왕의 원한을 산 것만으로도 인생 편히 살기는 그른 것 같지만, 이때의 양효왕은 황태제 자리를 노리고 있었고 효문황후 역시 양효왕을 밀어주고 있었기에 자기 아들 중에서 태자를 세우려는 경제와는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양효왕의 험담이 안 먹혔냐면, 그거랑은 상관없이 주아부는 황제인 경제에게도 미움을 받고 있었다. 태자를 폐위하는 문제에 주아부가 크게 반대를 하며 황제와 다툰 것 때문에 미운털이 박힌 것.

경제 10년인 BC 147년, 효문황후는 며느리의 오빠 왕신(王信)이라는 인물을 후작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주아부가 극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한 고조 유방이 말하길 "유씨가 아닌 사람은 왕이 될 수 없고 공로를 세운 것이 아니면 후작을 얻을 수 없다." 했는데 공로를 세운 것이 없는 왕신이 어찌 후작이 되느냐는 것이었다.[8] 이미 미움을 받는 상황에서 확실하게 도장을 찍으니, 이제는 트집을 잡힐 일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흉노에서 항복한 사람들을 후작으로 삼는 문제가 나오자, 주아부는 이에 또다시 반대하였다. 항복한 사람들은 배신자들인데, 배신자들을 후작으로 삼으면 무엇을 다른 사람들에게 본으로 보이냐는 것이다. 매번 반대만 해대는 주아부에게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황제는 나중에가면 전혀 그의 의견을 듣지 않았고, 주아부는 주아부대로 화가 나 병이 났다고 하며 사직해버렸다. 경제는 그 즉시 사직을 받아들여 주아부를 실각시키고 어사대부 유사를 승상으로 삼았다.

2.5.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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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주아부를 미워했지만 그래도 워낙 공이 큰 신하라 한번 마음을 떠보기로 하였다. 주아부를 불러 궁궐에서 크게 식사를 벌이면서 일부러 주아부에게는 큰 고기를 주었지만 젓가락을 주지 않았다. 주아부는 황제가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 화를 가라앉히면서 젓가락을 가져오려고 하였다. 그러자 경제는 말했다.

"이렇게 큰 고기도 자네에겐 부족하다는 것인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주아부는 모자를 벗고 사죄하고 그 자리를 떠났는데 문제는 씩씩거리며 떠나고 말았으며 이를 황제가 보고 만것이다. 주아부의 씩씩거리는 뒷 모습을 본 경제는 화가 나서 옆사람에게 말했다.

"저 불만스러운 모습 좀 보게나. 너무 강직하니 내가 죽고 난 뒤, 어린 황제의 신하가 될 만하지는 못하구나." 이름은 아부인데 아부할 줄을 모른다

이렇게 주아부는 황제한테 미운털이 제대로 박혀 사실상 숙청될 운명이 되었다. 남은건 꼬투리뿐인데,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만다. 아들이 부친을 위해 공관(工官)[9]과 상방(尙方)[10]에서 500개의 순장용 갑옷과 방패를 주문했다. 당시에는 많은 순장품을 무덤에 넣는 관례가 있었는데 주아부가 나이도 많고 하니 아들이 부친을 위해 준비한 것이라서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11]

헌데 아들이 어리석게도 돈을 제대로 인부에게 주지 않았고, 인부들은 화가 나서 이 사실을 모두 경제에게 일러바쳤다. 감히 규율을 어기고 황실의 물건을 구입했다는 죄목으로 경제는 주아부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모두 가두고 혹리(酷吏)들을 보내 심문하게 했다.

자존심 강한 주아부로서는 이런 일에 연루됐다는 것부터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형리들이 묻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경제는 주아부의 자백이 없더라도 일을 처리시키기 위해 정위(廷尉)[12]에게 일을 맡기었다. 정위부에서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었냐고 묻자 참다 못한 주아부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가 산 무기들은 전부 순장용 물건인데, 어찌 반역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나온 형리들의 말. 억지스러워 보이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한나라 사람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기기도 한다.

"그럼 죽은 후에라도 반란하려는 것이 아니냐?"(...)

주아부는 말 그대로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5일 만에 사망하고 봉국이 끊어졌다. 허부의 예언은 이렇게 실현되었다.

3. 평가

사마천은 “주아부는 용병에 엄격하고 무게가 있으며 견실하고 인내함은 사마양저를 능가하지만 애석하게도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고 더 이상 배우지 않았다. 비록 절조는 엄격히 지켰으나 공손하지 못하여 마침내 곤궁한 결과가 있게 되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아버지인 주발도 공에 비해 어정쩡한 최후를 맞게 된 것과 겹쳐보이는 인물.

사실 한신 이후 전한 최고의 장군 중 하나라 불릴 법 하고 엄밀히 따지면 본인의 잘못이 없었으나 전제 정치하에서 신하가 황제에게 바른 말도 꼬장꼬장하게 하다 역린으로 화를 불렀던 사례는 무궁무진했기에 조금만 더 유들유들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 인물이다. 어찌보면 한경제는 주아부를 자신의 할아버지인 한고제 시대에 있었던 한신처럼, 능력은 있는데 싸가지 없는 신하로 보지 않았을까. 특히나 한고제는 괴팍하고 욕설을 퍼부어댔어도 내로남불 없이 자신에게 폭언 수준의 직언을 하는 신하를 뒤끝없이 웃어넘겼지만, 꼬장꼬장하고 다혈질인 한경제는 주아부의 태도가 진짜 마음에 안 드는 것을 넘어 위험분자로 보았을 것이다.

오초칠국의 난을 제압한 명장이기도 하지만, 후대엔 세류영에서의 일 때문에 두고두고 언급되기도 하는 인물. 전쟁터의 장수들이 "전쟁터에서는 황제의 말보다도 대장의 말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주아부를 말하는데 왕들이 "웃기고 있네." 식으로 나온다면 "한문제대인배인데 너는 뭐니?" 되어버리기 때문에... 하지만 당면에서 뭐라 하지 못해도 황제의 미움을 받기 딱 좋은 상황인데, 황제 입장에서 체면 문제는 둘째치고 군대라는 무력 집단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사실은 정권의 안정에도 위협이 되는 요소이기 때문에다. 일례로 청나라의 옹정제연갱요의 군영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고, 연갱요는 훗날 구실이 잡혀서 숙청당한다.

조조서황의 군이 질서 정연한 것을 보고 "주아부의 품격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이런 평가를 보면 알겠지만 군기가 정연하고 엄격한 장수들에게 주로 비유되는 것이 주아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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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드라마 미인심계에서는 하성명이 주아부의 역할을 맡았는데, 주발과는 전혀 생판 남남으로 나온다. 또한 경제가 죽고난 후에도 살아있는 좀비스러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1] 고제의 동생 초원왕의 삼남이니 문제와 사촌간. 오초칠국의 난 후 난에 가담한 조카 초왕 유무를 대신해 초왕이 된다.[2] 때부터 있던 벼슬로, 수도를 순찰하는 임무를 맡은 벼슬. 후에 집금오라는 이름으로 바뀌는데, 후한의 세조 광무제인 유수의 본래 꿈이 집금오였다고 한다.[3] 삼국시대의 조조(曹操)가 아니다![4] 사기 유협열전에 나오는 인물로 당대에 유명한 협객이었다고 한다.[5]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직위인 도위를 붙여 등도위라고도 하고, 기록에 따라서는 그냥 등공(鄧公)이라고도 한다.[6] 이 부분은 《사기》의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에서는 등도자의 계책을 받은 것으로 되어있는데, 《한서》 <주아부전>에서는 주아부가 직접 한경제에게 이러한 계책을 내놓은 것으로 나온다. 한서에 주석을 단 안사고(顔師古)는 "두 가지 설이 다른데, 어느것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썼다.[7] 《한서》 <주아부전>[8] 조조가 위왕에 오를 때 문제가 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9] 일상적인 그릇과 무기를 제작하는 곳이다.[10] 황실에서 쓰는 병기 및 그릇을 제조하는 곳이다.[11] 실제로 20세기 말에 주아부의 아버지인 주발의 묘로 추정되는 묘가 발굴되었을때 제후왕만 쓸 수 있는, 옥 조각을 은실로 엮어 갑옷처럼 만든 수의인 은루옥의가 나왔다.[12] 진나라 때부터 있던 형벌을 맡아보던 벼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