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05 20:49:38

보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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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국
위치 금마저
국호 보덕국(報德國)[1]
국가원수 왕(王)
국성 고(高)
존속 기간 674년 - 683년(9년)
성립 이전 고구려[2]
신라의 국왕 책봉
멸망 이후 신라

1. 개요2. 역사
2.1. 신라의 제후분봉2.2. 결혼과 답례2.3. 일본과의 외교2.4. 보덕국왕을 서라벌로 오게하다.2.5. 이후와 몰락
3. 왕사

1. 개요

일종의 신라위성국가 또는 고구려계 유민들로 이뤄진 괴뢰 국가.

문무왕이 신라에 항복한 옛 고구려 왕족 안승을 내세워서 옛 백제 땅에 세운 국가다. 완전히 이름만 있던 수준의 단체는 아니고 일본 등에 고려의 이름으로 사신을 주고받기도 하고 옛 고구려와 동일한 5부와 관등 체계를 갖추며 신라와는 외국의 예로 국서를 주고받는 형식을 갖추는 등 의외로 국가의 형태는 꽤 갖추었던 모양이지만 신문왕 시대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어 멸망한다.

문무왕 10년, 서기 670년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복속시키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던 당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였다. 신라는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고 고구려 유민 세력을 흡수하고자 했는데, 이런 와중에 보장왕의 서자, 혹은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의 아들[3] 안승이 신라에 투항한다. 안승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옛 고구려 땅 한성(漢城)[4]에서 검모잠에 의해 고구려왕으로 추대되어 부흥운동을 하다가 실패한 후 신라로 남하했다. 안승은 이미 신라로 남하하기 전부터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할만큼 혈통적 정당성이 확실히 있는 거물 왕족이었고, 신라 측은 많은 고구려인들이 따르는 그를 받아주면서 정통성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대부분은 고구려계였지만 원래 고구려의 민족구성이 그렇듯 말갈족도 따라서 일부 귀순해 소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근거로 일본서기에는 677년 11월 신라 사신 김청평이 7명의 숙신 사람을 데리고 일본에 갔다온 기록이 나오는데, 시기와 정세상 고구려 치하에 있다가 멸망 후 고구려인들을 따라서 신라로 귀순한 보덕국 소속인 것으로 보이며, 삼국사기 무관지에 따르면 683년에는 말갈인으로만 구성된 부대인 흑금서당(黑衿誓幢)을 만들기도 했다.

2. 역사

이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신문왕조에서 발췌해온 자료들이다.
6월,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사람인 대형 모잠(牟岑)이 유민들을 모아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였다. 그들은 신라로 향하던 중에 서해의 사야도(史冶島)[5]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다. 소형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 슬프게 고하였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공평한 도리이니 오직 대국(大國)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왕은 도의를 잃어 멸망당하였으니, 지금 저희들은 우리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받들어 군주로 삼았습니다. 바라옵건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六月 高句麗水臨城人牟岑大兄 收合殘民 自窮牟城 至浿江南 殺唐官人及僧法安等 向新羅行 至西海史冶島 見高句麗大臣淵淨土之子安勝 迎致漢城中奉以爲君 遣小兄多式等 哀告曰 "興滅國 繼絶世天下之公義也. 惟大國是望, 我國先王以失道見滅今臣等得國貴族安勝 奉以爲君 願作藩屛

문무왕은 그들을 금마저(전북 익산)에 살게하고 안승을 왕으로 봉했다. 고구려와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금마저에 터를 잡게 한 것은 금마저가 백제 무왕미륵사를 세우고 그곳에 묻히는 등 옛 백제의 주요한 지지 기반이었으므로 신라에 대한 저항감이 심했고,[6] 이를 신라인이 아닌 제3자인 고구려인의 손으로 억누르려는 이이제이를 하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2.1. 신라의 제후분봉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서기 670년)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봉의 명을 내린다. 그대의 태조 중모왕(太祖 中牟王)[7]은 북쪽 산에 덕을 쌓고 남쪽 바다에 공을 세워, 위풍이 청구(靑丘)[8]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玄菟)[9]를 덮었다. 자손이 대대로 이어지고, 본류와 지류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개척한 땅이 천리요, 역사가 8백 년이나 되었다. 남건(男建)과 남산(南産) 형제에 이르러 집안에서 화가 일어나고 골육간에 틈이 생겨 집안과 나라가 멸망하고 종묘사직이 사라졌으며, 백성들은 동요하여 마음을 둘 곳이 없게 되었다. 그대는 산과 들에서 위기와 곤란을 피해 다니다가 홀몸으로 이웃나라에 투신하였으니, 떠돌아다닐 때의 괴로움은 그 자취가 진문공(晉文公)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킴은 그 사적이 위후(衛侯)와 같다고 하겠다.
무릇 백성에게는 주인이 없으면 안 되며, 하늘은 반드시 운명을 돌보아 주시는 것이다. 선왕의 정당한 후계자로는 오직 그대가 있을 뿐이니, 제사를 주재할 사람이 공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보내 책명을 전하여 그대를 고구려왕으로 삼으니, 그대는 마땅히 유민들을 어루만져 모아들이고 옛 왕업을 이어 일으켜, 영원토록 이웃나라로써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며 공경하고 공경할지어다. 아울러 멥쌀 2천 섬과 갑옷을 갖춘 말 한 필, 비단 다섯 필과 명주와 가는 실로 짠 베 각 10필, 목화 15칭(稱)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받으라.”
遣沙飡須彌山, 封安勝爲高句麗王. 其冊曰: "維咸享元年歲次庚午秋八月一日辛丑 新羅王致命高句麗嗣子安勝 公太祖中牟王 積德北山 立功南海威風振於靑丘 仁敎被於玄菟 子孫相繼 本支不絶 開地千里 年將八百 至於建産兄弟 禍起蕭墻釁成骨肉 家國破亡 宗社湮滅 生人波蕩 無所託心 公避危難於山野 投單身於隣國 流離辛苦 迹同晉文 更興亡國 事等衛侯 夫百姓不可以無主皇天必有以眷命 先王正嗣 唯公而已 主於祭祀非公而誰 謹遣使一吉飡金須彌山等 就披策命公爲高句麗王 公宜撫集遺民 紹興舊緖 永爲隣國 事同昆弟, 敬哉敬哉. 兼送粳米二千石, 甲具馬一匹, 綾五匹, 絹細布各十匹, 綿十五稱. 王其領之."

이후 안승은 문무왕 14년, 서기 674년에 보덕왕으로 봉해진다.
9월, 의안법사(義安法師)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고 안승(安勝)을 보덕왕(報德王)에 책봉하였다.
九月 命義安法師爲大書省 封安勝爲報德王

신라는 비록 군주를 왕이라고 불렀지만 사실상 아래인 안승을 왕이라고 봉했던 것처럼, 왕 위의 왕으로서 황제처럼 군림하기도 했다. 그 외에 신라의 번국과 같은 나라로 탐라국, 우산국 등이 있었는데, 이런 섬나라들에 비해 보덕국은 훨씬 괴뢰국가의 성격이 강했다.

보덕국은 사료마다 그 국명과 국왕의 칭호가 다르게 나온다. 하지만 신라의 괴뢰국에 불과했기에 큰 의미는 없다. 또한 보덕국은 신라와 별개로 자국만의 관직과 지위를 가질 수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등장하는 관직에는 대장군, 소형, 태대형 등 고구려계 관직이 많이 보인다.

정부 수립 이후, 백제 부흥군 토벌에 동원되었다가 나당전쟁 종결 후 안승은 문무왕의 조카와 결혼하게 된다.

2.2. 결혼과 답례

3월,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여러 가지 채색 비단 100단을 보덕왕 안승에게 내려주고 임금의 여동생[10]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인륜의 근본은 부부가 무엇보다 우선이고, 왕의 교화의 기초는 자손을 잇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왕의 까치 둥지에 자리가 비어 있어 닭이 울었음을 일러줄 아내를 얻을 마음이 있을 것이다. 내조할 자리를 오래 비워두어 집안을 일으킬 사업을 영원히 잃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좋은 때 길한 날을 맞아 옛 법도를 따라 내 누이의 딸로서 배필을 삼게 하니, 왕은 함께 마음과 뜻을 돈독히 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자손을 무성하게 함이 마땅하리라. 길이 반석같이 번창한다면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며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三月 以金銀器及雜綵百段 賜報德王安勝 遂以王妹妻之[一云迊飡金義官之女也] 下敎書曰 人倫之本 夫婦攸先 王化之基 繼嗣爲主 王鵲巢位曠 雞鳴在心 不可久空內輔之儀 永闕起家之業 今良辰吉日 率順舊章 以寡人妹女爲伉儷 王宜共敦心義式奉宗祧 克茂子孫 永豊盤石 豈不盛歟 豈不美歟

이에 안승은 상표하여 답례한다.
여름 5월, 고구려왕이 대장군 연무(延武) 등을 보내 표(表)를 올려 말하였다.
“신(臣) 안승이 아뢰옵니다. 대아찬 김관장(金官長)이 와서 교지를 받들어 선포하고 아울러 교서를 내려, 임금의 조카 따님을 저의 안주인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4월 15일에 이곳에 이르렀으니 기쁨과 두려움이 엇갈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각컨대 요임금이 자기의 딸을 규(嬀, 순임금)에게 시집보내고 주의 왕이 공주를 제(齊)나라에 시집보낸 것은 본래 성스러운 덕이 드러난 일로써, 사위될 자가 평범한 사람이라도 관계치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원래 용렬한 부류로 행실과 재능에 이렇다 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운이 좋아서 성인의 교화에 젖게 되었고 매번 특별한 은혜를 받았으나, 그 은혜에 보답하려 해도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거듭 대왕의 인척을 보내주시는 총애를 입었습니다. 마침내 만발한 꽃이 경사스러움을 표하고, 정숙하고 화목한 덕이 갖추어졌습니다.
이제 좋은 달 좋은 때에 누추한 저의 집에 시집온다고 하니, 억년(億年)을 살더라도 만나기 힘든 행운을 하루아침에 얻은 셈입니다. 본래 바라지도 못했던 일이며, 생각하지도 못하던 기쁨입니다. 어찌 한두 사람의 부형(父兄)만이 실로 이러한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선조 이하가 모두 다 기뻐할 일인 것입니다. 저는 아직 교지를 받지 못하여 감히 직접 찾아가 뵙지는 못하지만 지극한 기쁨을 어찌할 수 없어 삼가 대장군 태대형 연무를 보내 글을 올려 아뢰옵니다.”
夏五月 高句麗王使大將軍延武等上表曰 臣安勝言 大阿飡金官長至 奉宣敎旨 幷賜敎書 以外生公女 爲下邑內主 仍以四月十五日至此 喜懼交懷 罔知攸寘 竊以帝女降嬀 王姬適齊 本揚聖德 匪關凡才 臣本庸流 行能無筭 幸逢昌運沐浴聖化 每荷殊澤 欲報無堦 重蒙天寵 降此姻親 遂卽穠華表慶 肅雝成德 吉月令辰 言歸弊館億載難遇 一朝獲申 事非望始 喜出意表 豈惟一二父兄 實受其賜 其自先祖已下 寔寵喜之 臣未蒙敎旨 不敢直朝 無任悅豫之至 謹遣臣大將軍太大兄延武 奉表以聞

2.3. 일본과의 외교

보덕국은 '고려' 국명을 걸고, 신라 사신과 나란히 사신을 보내 일본과 국교를 맺었다. 이는 일본 측 사서인 일본서기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다.
671, 봄 정월 己亥 초하루) 丁未 고려가 상부(上部) 대상가루(大相可婁) 등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十年春正月) 丁未 高麗遣上部大相可婁等進調
674, 가을 8월 甲申 초하루) 癸卯 고려가 상부 위두대형(位頭大兄) 감자(邯子)·전부(前部) 대형(大兄) 석간(碩干) 등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리고 신라는 한나마(韓奈末, 대나마) 김이익(金利益)을 보내 고려의 사신을 치쿠시(筑紫)까지 호송하였다.
(秋八月 甲申朔) 癸卯 高麗遣上部位頭大兄邯子·前部大兄碩干等朝貢 仍新羅遣韓奈末金利益 送高麗使人于筑紫
683, 6월 壬戌 초하루 고려왕이 하부(下部)의 조유(助有) 괘루모절(卦婁毛切)와 대고앙가(大古昻加)를 보내 방물을 바쳤다. 신라가 대나마(大那末) 김석기(金釋起)를 보내 고려의 사신을 치쿠시까지 호송하였다.
六月壬戌朔 高麗王遣下部助有卦婁毛切·大古昻加 貢方物 則新羅遣大那末金釋起 送高麗使人於筑紫

참고로 일본서기는 우직하게 보일 정도로 일관적으로(...) 일본 중심적 서술을 하기 때문에 자기들한테 조공을 바쳤다=사신을 주고받았다고 이해하면 된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고려(=보덕국)는 마치 멀쩡한 주권국가와 같이 일본과 외교하고 있다. 위두대형 같은 관직명은 고구려가 멀쩡하던 시절 사용하던 시스템을 보덕국의 고구려인들이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라인의 통제를 받고 있는 속국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측이 보덕국이 괴뢰국인지 뭔지 인식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고 평범하게 사신을 주고받았다. 보덕국에서만 보내는 게 아니라 일본도 보덕국에 사신을 몇 번 보내기도 했으나(견고려사. 보덕국이 일본과 교류할 때 고려 이름을 사용했으므로) 685년 5월 28일에 마지막으로 보냈는데 이미 보덕국은 684년에 신문왕이 토벌해 멸망한 뒤였다(...) 마지막 견고려사는 헛걸음한 셈.

2.4. 보덕국왕을 서라벌로 오게하다.

겨울 10월, 보덕왕 안승(安勝)을 불러 소판으로 삼고, 김씨 성을 주어 서울에 머물게 하고 훌륭한 집과 좋은 밭을 주었다.
冬十月 徵報德王安勝爲蘇判 賜姓金氏 留京都 賜甲第良田

이후 서기 681년 신문왕이 즉위하여 반역자를 처벌하자 소형(小兄) 수덕개(首德皆)를 보내 축하한다. 신문왕 3년 서기 683년에 왕은 안승에게 김씨 성을 주고 소판 관등을 주고 서라벌로 데려온다. 소판은 신라 17관등 중 3관등 잡찬과 같은데, 이는 신라의 골품제에서 진골만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이므로 신라 왕가 이외에 금관국김해 김씨와 더불어 진골 대우를 받은 두 번째 외부 출신이 된 것이다.

2.5. 이후와 몰락

이후 684년에 안승의 조카인 보덕국의 장군 대문(大文)이 반란을 꾀했다가 처형되었고, 남은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신라 조정은 귀당제감 핍실을 파견하지만 반란의 세가 강해 신라군이 패배해 핍실은 전사했고, 이후 김영윤 열전에 따르면 보덕국의 반란을 진압할 때 투입한 부대는 지휘관은 신라인 김영윤이나 휘하는 옛 고구려인들로 구성된 부대인 황금서당(黃衿誓幢)이었다. 즉 고구려인의 반란을 고구려인으로 진압한 셈. 이로서 그나마 이름만 있던 보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보덕국의 중심지였던 금마저는 금마군으로 바뀌어 신라가 직할통치하게 된다.
11월, 안승의 조카뻘인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반역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남은 무리들은 대문이 목이 베여 죽은 것을 보고는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차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병사들에게 명하여 토벌하였는데, 그들과 맞서 싸우던 당주 핍실(逼實) 이 그곳에서 죽었다. 성을 함락하고 그 지방 사람들을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기고, 그 땅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대문(大文)을 혹은 실복(悉 伏)이라고 한다.】
十一月 安勝族子將軍大文 在金馬渚謀叛 事發伏誅 餘人見大文誅死 殺害官吏 據邑叛 王命將士討之 逆鬪幢主逼實死之 陷其城 徙其人於國南州 郡 以其地爲金馬郡【大文或云悉伏】

비록 보덕국 땅(익산)에서 일어난 이 반란 사건에서 동쪽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머물고 있던 안승 본인이 개입했다는 기록이 없지만, 이후 안승의 후손으로 보이는 진골 출신 인물이 아무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인해 안승의 진골 편입도 취소되어서 6두품 이하로 강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단명 등의 이유로 인해 안승에게 후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기록이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적어도 안승의 진골 편입이 취소되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승이 반란에 협조했다는 기록 또한 없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이후 시대에도 성을 생략하고 이름만 나오는 인물이 워낙 많아서, 안승계가 이 중에 있는지 없는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멸망 직후인 686년 보덕국 백성으로 이뤄진 부대인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을 창설하는데, 고구려인[11] 으로 이루어진 서당이 1개, 백제인으로 이루어진 서당이 2개였음을 감안하면 일반적으로 보덕국에 갖는 희미한 이미지와 달리 인구 규모가 상당히 컸을 가능성이 높다.[12]

3. 왕사

대수 왕호 재위기간 비고
- 보덕왕(報德王) 안승 669년 ~ 671년 부흥 운동 때 추대
보덕국 왕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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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혹은 후고구려국(後高句麗國)으로 불린다[2] 안승은 보장왕의 후손이며 또 신라 역시 고구려의 후계자로 대했으나 실제로는 실권이 없는 신라의 괴뢰국이었기에 온전한 고구려의 계승국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더 나중에 건국된 완전한 자주국이고 문화적 요소까지 물려 받은 발해와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되는 것이다.[3] 안승의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다. 심지어 같은 삼국사기 안에서도 말이 달라진다. 보장왕은 연정토의 딸과 결혼했으므로 보장왕의 아들이자 연정토의 손자일 수도 있다.[4] 황해도 재령에 위치해 있던 고구려 3경 중 하나.[5] 현재 인천의 소야도[6] 멸망하기 이전 삼국시대 때에도 신라는 고구려보다는 백제와 훨씬 사이가 나빴다.[7] 주몽을 의미[8] 고구려, 신라, 백제의 별칭.[9] 한군현의 현도군에서 유래한 별칭으로 역시 고구려, 신라, 백제를 의미.[10] 혹은 잡찬 김의관(金義官)의 딸이라고도 한다.[11] 물론 보덕국인들도 옛 고구려인이지만, 당시에는 보덕국인과 고구려인을 편의상 구분해서 다른 부대에 소속시킨 듯 하다. 무슨 기준으로 분류했는지는 불명. 단 보덕국이 신라에 편입되기 전에 황금서당을 창설했으므로 대만의 외성인본성인 구분처럼 고구려→신라에 편입된 시기가 기준일 수도 있다.[12] 이에 의하면 고구려계는 3서당으로 가장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