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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後沙伐國신라의 왕자 박언창이 왕명을 받아 상주 지역에 부임한 뒤 신라와의 연락이 끊어지자 신라가 망했다고 판단하고 왕을 선포해 만들어진 국가이다. 이도학 교수의 '진훤이라 불러다오'에서는 신라와 연결이 끊기자 살아남기 위해 사벌국(沙伐國)으로 독립을 하고 개국한지 11년 만에 멸망했다고 적혀 있다.
후백제에 밀려 멸망하면서 박언창이 피살되자 왕족인 그의 아들 박욱은 고려로 망명했다.
2. 실존했는가?
이러한 기록은 정사에는 한 줄도 안 나오고 박씨 족보에만 나오고 있어서 믿기가 어렵다.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일제강점기 때 발간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사벌국왕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애매하다고 볼 수 있겠다. 거기다 족보상으로 아들로 나오는 왕세자 박욱(朴昱)이 훗날 고려에 항복해서 개국공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정작 고려의 공신으로 제대로 기록에 남은 사람은 박욱(朴郁)으로 경명왕의 첫째 아들로 밀양 박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밀성대군 박언침의 아들이다. 물론 이 박언침이라는 인물 자체도 족보 상에만 알려져 있는 인물일 뿐이다.
상주 박씨 계보에서 기록이 제대로 알려져 있는 사람으로 최초로 나오는 인물이 박욱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 박양유(朴良柔)다. 박양유는 경종에 묘정에 배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이 박양유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전설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는 추정을 해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사벌국이 존재했었다면 고려사에 기록이 안 되어 있을리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또 상주시 사벌국면에 박언창이 묻혔다고 하는 사벌왕릉 역시 후대에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벌국면 일대에 왕성(王城)을 만드는 등 수도로 정비한 뒤 둔진산(屯陣山)을 군사 주둔지로 삼았다고도 하는데 왕성을 만들었는데 현재까지 아무런 유적이 없는 것을 보면... 후사벌국이 위치했다고 하는 곳도 당시 고려와 후백제의 전투가 일어난 곳인데 후사벌국에 대한 기록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때문에 후사벌국은 실존이 의문시되는 나라다.
첨언하자면 설령 후사벌국이란 나라가 있었거나 당시 사벌주 지역에 후사벌국과 비슷한 세력/나라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후백제나 태봉, 고려, 후기 신라의 3개 나라에 견줄만한 세력이 크지 않고 왕봉규 및 가야계 세력들처럼 당시 여러 지방에 수없이 할거해 있던 독자적 호족 세력과 크게 별반 차이가 없는 정도였기에 후사국 시대라고 굳이 칭하진 않는다. 이는 삼국시대에 가야가 끼어 있더라도 삼국시대라고 하지 사국시대라고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이다. 가야의 경우도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이 완전한 중앙집권 체제의 정식 국가체제를 완전히 갖추지 못하고 신라와 백제 틈 사이에서 허무하게 흡수, 합병 멸망되었고 다른 3국에 비해 세력이 너무 약해 3국과 동급으로 쳐주지를 않는다. 다만 가야는 원삼국 시대에 문화적/경제적 등으로 영향을 주기라도 했으니까 절반 정도는 대표적인 역사세력으로 넣어주는데 비해 후사벌국은 뭐...딱히 이렇다할 큰 영향을 끼친 것도 아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