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24 11:15:47

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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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왕 위만조선왕 2세 우거왕
'기자'의 재위 및 '기자조선'의 존재는 학계에서 인정되지 아니함.
'한후'는 고조선 군주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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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초대 국왕
위만 | 衛滿
파일:위만왕.jpg
<colbgcolor=#820000><colcolor=#ffd400> 출생 기원전 3세기 추정
연나라(?)
사망 기원전 2세기 추정
위만조선 왕검성
재위기간 초대 국왕
기원전 194년 ~ 기원전 2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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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20000><colcolor=#ffd400> 위(衛 / 魏)[논란]
위만(衛滿) / 만(滿)[논란]
부친 불명
모후 불명
왕자 위만조선왕 2세
왕손 우거왕 }}}}}}}}}

1. 개요2. 생애3. 위만의 정체성
3.1. 중국에서 바라보는 위만3.2. 근대 이전의 위만에 대한 인식3.3. 삼한정통론
4. 이름5. 기타6. 대중매체7. 둘러보기

1. 개요

위만조선의 초대 국왕.

기록상으로 전해지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정변인 위만의 정변을 주동한 인물이다. 통일 제국 전한의 개국공신들 한 명이었던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신하고 흉노로 망명했을 때 위만(衛滿)은 동쪽의 고조선으로 망명하며 서북 땅을 지키다가 위만의 정변을 일으켜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조선 시대를 개막했다.[3] 위만의 성씨가 기록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었는데《잠부론》(潛夫論)과《삼국유사》에서는 성씨가 ''(지킬 위)가 아닌 ''(나라 이름 위)로 기록되어 있다.

2. 생애

초한전쟁 말기인 기원전 202년해하 전투에서 서초패왕 항우를 대파하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며 한(漢) 왕조를 창건한 한고제 유방은 권력에 위협이 되는 통일 공신들과 이성왕 제후들을 토사구팽하기 시작했다. 한고제의 어릴 적 친구이자 공신이었던 연왕(燕王) 노관(盧綰)은 자신 역시 숙청될까 두려워 먼저 모반했다가 흉노로 달아났는데 이렇게 연나라[4]가 혼란스러운 시기에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연나라 땅에서 동쪽에 인접한 고조선으로 망명했다.[5]

참고로 위만이 노관의 수하였다는 설 역시 있으나 사마천의《사기》에는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연왕 노관이 반역해 흉노로 들어갔고, 만[6]은 망명했다.)
라고 나와 있다. 이는 연왕 노관이 모반해서 흉노로 갈 때 위만이 망명했다는 내용인데 이 문구를 가지고 위만이 노관의 수하였다고 무작정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문언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노관이 흉노로 들어갈 때 노관의 수하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위만이라는 사람이 망명했다는 얘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의《사기》에는
'朝鮮王満者故燕人也'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사기》의 용례를 보면 '故' 라는 표현이 국가 이름 앞에 쓰일 때는 전국시대때의 나라와 한나라에 의해 책봉된 나라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앞에 쓰였기 때문에, 노관이 책봉된 연(燕)나라의 장군이나 관료로 위만이 활동했을 가능성은 적다. 노관이 왕으로 있던 연나라의 장군이나 관료로 위만이 봉직했다면, 그의 출신을 '燕'대신 굳이 '故燕'이라고 기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위만은 고조선의 준왕에게 서쪽의 번병(藩屛)이 되기를 청했고, 준왕은 이에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아 100리의 땅을 하사하며 서쪽 변방(상하장)을 지키도록 했다. 이후 위만은 서쪽 변방을 지키며 에서 망명한 무리들을 규합해 계속 세력을 키우다가 기어코 기원전 194년 무렵 반란을 일으켜 왕검성을 함락시키고 자신을 받아준 준왕을 남쪽으로 축출시킨 뒤[7] 스스로 고조선의 군주가 되어 위만조선을 열었다.

왕으로 즉위한 위만은 진번(眞番)과 임둔(臨屯) 등 주변의 작은 집단들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위만조선의 영토를 크게 넓혀 현재의 북한에 해당하는 수준의 영역을 조선의 이름 아래 두는 전성기를 열었다. 이후 위만조선은 중국의 전한과 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한 진국(辰) 사이에서 교통을 막고 직접적인 교역 내지 조공을 방해했다. 이로 인해 한나라는 기원전 128년 위만조선 근방에 창해군을 설치한 후 얼마 안 가 폐지하기도 했다. 이후 위만조선은 결국 손자인 우거왕 대에 이르러 치열한 왕검성 전투를 치르다가 한나라군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다.

기원전 2세기경 위만과 위만조선의 등장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정치 집단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3. 위만의 정체성

위만의 출신은 지금도 불분명한 측면이 있다. 이때문에 여러 설들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조선 사람이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근거는 중국 기록에 상투를 틀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사기》에
‘퇴결만이복'(魋結蠻夷服)
, 즉 상투(퇴결)를 틀고, 오랑캐의 옷을 입었다는 기록이 서술되어 있다.

반고가 쓴《한서》또한
‘추결만이복'(椎結蠻夷服)
이라 썼고
, 진수가 쓴《삼국지》에서는
‘퇴결이복'(魋結夷服)
으로 같은 묘사를 했다. 중국의 정사에서 쓴 기록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오랑캐는 중국 바깥, 즉 당대 고조선에 살고 있었던 현지인들의 옷을 입었다는 뜻이다. '퇴결'은 조선만의 습속은 아니고, 흉노, 남월, 서남이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인다는 지적이 있으나 이 기사들은 정황상 고조선의 의복을 입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외지인이 현지식의 복색을 하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남월조타처럼 아주 보기 드문 사례는 아니다. 여담으로 남월도 결국엔 위만조선처럼 전한의 침략으로 멸망하는데, 패배하는 과정에 대해 베트남에서는 위만조선처럼 내분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아주아주 옛날로 가면, 주나라 고공단보의 장•차남인 태백중옹이 똑똑한 3남 계력을 왕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강남으로 이주한 후, 계력이 태백과 중옹을 불렀을 때 그들이 강남 백월족의 풍습인 문신을 온몸에 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외지인으로서 현지인의 복색을 했다면, 적어도 당대 망명지의 민심이나 지배층의 신임을 얻기 위해 자신이 현지인 같은 정체성이 있음을 어필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고조선이 어렵사리 연(燕)나라로부터 수복한 서북 지역의 변경 방어를 위만의 무리에게 맡긴 것을 보면, 단지 복색만 어설프게 현지인으로 바꾼 적의 무리에게 중대한 일을 맡겼다고 볼 개연성이 부족하다. 이는 위만이 적어도 고조선의 지배층과 민심을 설득할만한 자신의 동질성을 성공적으로 어필했고, 어떤 식으로든 고조선 사회의 신임을 얻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앞서 연나라군의 침공으로 벌어진 고조선-연 전쟁에서 연나라가 고조선의 서쪽 2,000여리를 차지하면서 이곳에 거주하던 고조선 사람들이 연왕에게 복속되었는데, 이런 정황을 바탕으로 위만을 이들의 후손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의 초•중•고《국사》교과서에서는 위만을 조선인으로 보고 있다. 학계에서도 위만을 조선인이라고 보는 시선이 상당히 강한 편인데, 다만 중국 유이민 세력 출신이나 이전부터 고조선의 문화에 영향을 받은 형태가 아닌가 하고 추정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위만조선도 고조선의 국가 정체성을 계승한, 고조선 토착 지배층 세력과의 연합 정권 성격이 강한 집단이었다고 본다.

사마천의《사기》에 따르면
'朝鮮王満者故燕人也'
(조선의 왕 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라고 나와 있다. 엄밀히 말하면 위만의 성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며,[8] 중국 후대의 역사서에서 성과 이름을 쓰는 중국인들의 습관 때문에 당시 그 지역에서 많이 쓰이던 위(衛)씨 성을 가진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해서 위만(衛滿)이라고 표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후한시대에 편찬된《잠부론》(潛夫論) 이전까지의 역사서에서는 성이 알려져있지 않았고, 후대 기록에도 차이가 있는 점을 감안하면 위만은 원래 성이 없는 조선계 인물이었다는 주장이 오히려 설득력있다.[9] 전한의 공신이자 이성왕이었던 연왕 노관 휘하의 장수였다는 설이 있고, 오랫동안 이렇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사기》의 용례를 보면, 국가 앞에 '고'(故) 를 붙인 것은 전국시대에 있었던 나라들과 한나라에 의해 책봉을 받은 나라들을 구분하기 위해 쓰였다. 즉 국가명 앞에 '고'(故)를 붙이는 것은 전국시대의 국가들을 표기하기 위해서 쓰였고, 그냥 나라 이름을 쓰는 경우는 한나라의 천하통일 후 책봉을 받은 나라를 표기하기 위해 쓰였다. 위만을 '故燕人' 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노관이 책봉된 연(燕) 국적으로 살았던 것은 아닐 가능성이 크고, 이는 위만이 전국시대의 7웅 중 하나였던 연나라의 영역에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한나라의 관점에서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만약에 위만이 노관이 책봉된 燕의 관료나 장군으로 생활을 했다면, 위만의 국적은 연인(燕人)이 되기 때문에 굳이《사기》에는 '故燕人'이라고 할 필요가 없이 '燕人' 이라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위만에 대해 기록한 중국 사서는 중국인의 관점에서 쓴 것이기 때문에, 고조선과 교류가 있었던 연이라는 국가가 진나라에 의해 멸망당할 때, 연나라에 살고 있었던 조선인이 다시 조선으로 망명한 것을 기자조선과 같이 중국인이라고 기록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10] 실제로 위만조선이 세워지기 100년 전쯤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영토를 2,000리 정도 정복하여 만번한(滿潘汗)까지 영토를 넓힌 바 있었는데, 원래 거기 살았었던 고조선 사람들은 그냥 그대로 연나라에 편입되었다. 그들의 후손이 바로 위만이며, 위만이 자기 무리들을 끌고 고조선으로 찾아와 귀화한 것이라는 식의 주장이다.

한편, 위만의 국적 및 민족 문제가 위만조선 정권의 정체성 문제와 직결되지는 않는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왜냐하면 위만조선도 '조선'이라는 국호나 그전부터 존재하던 정치체제 및 지배층을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신왕조의 수도도 왕검성에 그대로 뒀다. 여담으로 이게 위만이 조선인이라는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만일 위만이 연나라의 이민족이었다면 기득권층인 고조선 지배층의 반발이 있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당장 군주가 쫓겨난 마당에 휘하의 무리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하기 때문에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 숙청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반란이 성공한 이후 바로 외부 세력과 전쟁을 시작해 성과를 내면서 내부의 불만을 잠재운 것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면 애초에 이 시기에 '근대에 들어서 확립된 민족 정체성'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맞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반론][12][13] 어찌됐든 학계에선 위만조선도 고조선의 국가 정체성을 계승한, 고조선 토착 지배층 세력과의 연합 정권 성격이 강한 집단이었다고 본다.

3.1. 중국에서 바라보는 위만

사서에선 위만이 연(燕)나라 태생으로 연왕 노관의 수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중국의 어용 사학계에서는 이를 근거로 삼아 동북공정, 즉 위만이 중국인이었으며 위만조선은 중화권 왕조의 속국이자 지방 정권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古代卫氏朝鲜的建立者.
公元前二世纪初,辽东局势动荡,燕人卫满率千余人叛西汉入箕子朝鲜, 箕子朝鲜准王任命其为博士, 将其国西部封地百余里与卫满. 公元前194年卫满联合箕子朝鲜的部分反对国君的势力进攻国都王俭城,准王自海路亡命于半岛南部的马韩地区,卫满即位后,卫满统一了箕子朝鲜,并将势力扩展到了鸭绿江以南地区.设立了裨王、相、大臣、将军等官职,完善了古朝鲜的政治体制。
고대 위씨 조선의 건국자
기원전 2세기 초 요동에 세를 가지고 활동했던 연나라인 위만은 약 1,000여 명을 이끌고 기자조선에 입성한다. 기자조선의 준왕이 그를 박사에 임명, 나라의 서부 100여리를 위만에게 봉한다. 기원전 194년 위만은 기자조선과의 연합을 반대하여 왕도 왕검성으로 진공, 준왕은 바다를 통하여 반도 남부의 마한 지역으로 망명한다.

卫满即位后,积极建立国家,并输入中原文化,使国家愈来愈强盛。汉武帝有感卫满朝鲜对汉朝的威胁愈来愈大,决定在公元前109年起兵远征朝鲜半岛。公元前108年,卫满朝鲜被灭,汉武帝把卫满朝鲜的国土分为四郡,分别为:乐浪郡、玄菟郡、真番郡、临屯郡,合称为“汉四郡”。
위만이 즉위 후, 위만은 기자조선을 통일하고, 그 세력은 압록강 이남 지역에 도달했다. 비왕, 상, 대신, 장군 등 관직을 설립하고, 고조선의 정치 체제를 완성했다. 위만 즉위 후 적극적으로 국가를 건립하며 중화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국가는 점차 강력하게 되어갔다. 한무제는 위만조선이 점차 강해지는 것이 한조에 위협된다고 생각하고는(혹은 유감을 가지고), 기원전 109년 병사를 일으켜 조선 반도에 원정을 결정한다.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파멸했고 한무제는 위만조선의 국토를 4군으로 분할했다, 분별은 낙랑군, 현도군, 진번군, 임둔군, 일명 한사군이다.

古朝鲜即箕子朝鲜和卫满朝鲜的合称。箕子朝鲜乃殷商遗裔在朝鲜半岛上所建地方政权,臣于周,后又臣于秦,为周秦海外之属国。箕子朝鲜为卫氏朝鲜所取代,卫氏朝鲜为汉之“外臣”、属国。汉武帝伐朝鲜,裂其地为四郡,为汉的边疆辖区。有了箕子朝鲜,方有卫氏朝鲜,方有汉之四郡,方有高句丽史、渤海史,从而构成了东北古史、东北民族与疆域史的基本系列,而箕子朝鲜是为中国东北史之开端。
고조선, 즉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이르는 이름. 기자조선처럼 은나라의 후예(혹은 후손)로 조선 반도에 세워진 지방 정권이다. 주나라의 신하국 또한 진나라의 신하국, 즉 주 - 진나라의 해외 속국이다. 기자조선처럼 위씨조선 역시 이어받아(신하국), 위씨조선은 한나라의 외신, 속국이다. 한무제가 조선을 벌하고, 그 땅을 4군으로 분열시켰으며, 한나라의 해구 변경이 된다.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나라의 사군, 고구려 역사, 발해 역사, 모두 동북 고사로부터 구성된다. 동북민족 강역사의 기초 계통이며, 또한 기자조선은 중국 동북사의 시작이다.

출처: 중국 바이두 백과 위만 (2012년 6월 24일자)

이를 보면 위만과 그가 세운 위만조선을 기자조선과 함께 중국의 속국이자 중국 동북고사의 시작점으로 칭하고 있으며, 중국의 역사임을 명시하고 있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이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조선 공정이기 때문에 반박되었다.

애초에 중국은 이민족 정복왕조인 청나라의 영토 계승+소수민족 동화라는 정치적인 현실 때문에 역사를 해석할 때 대부분 속지주의를 기본 골자로 삼아왔고, 심지어 칭기즈 칸중화영웅이라는 무리수까지 둘 정도인데, 또 자기들 필요할 때는 혈통주의를 써먹으니 실로 이중잣대가 아닐 수 없다.

3.2. 근대 이전의 위만에 대한 인식

조선단군기자에 대한 제사는 지냈으나 위만에 대한 제사는 지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찬탈자였기 때문이었다. 조선 왕조의 시작이었던 태조 이성계부터가 찬탈자인데 무슨 내로남불이냐는 생각을 하겠지만, 조선의 경우 일단 형식 자체는 고려의 왕위를 선양받은 이성계가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라 찬탈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물론 형식으로 '선양' 어쩌고 하는 그런 걸로 수식하는 거지, 본질은 역사속 왕위 찬탈과 별 다를 바 없었지만...[14]

실제로 당시 학식있는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여서 당연히 안 속았고,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태조 홍무제 주원장도 이걸로 이성계를 은근히 갈궜다.[15] 문제는 이성계도 지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어서 전쟁 직전까지 갈 뻔 했지만...[16] 이렇듯 조선이 쿠데타로 세워진 나라인 만큼 쿠데타에 민감했던 점[17]이 한 몫 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창업군주가 쿠데타로 즉위했다는 이유만으로 쿠데타를 정당화하면 제2, 제3의 쿠데타가 계속 일어나 조선 왕실의 정통성 문제가 극도로 심화될 수도 있었을 테니 더더욱 위만을 좋게 평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18]

3.3. 삼한정통론

삼한정통론은 마한정통론이라고도 불린다. 이 이론은 조선 후기 국학 계열의 실학자들에 의해 발흥한 이론으로 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이유는 위만은 찬탈자로 유교적 사상에 근거하면 적통으로 볼 수 없고, 적통인 준왕이 쫓겨 내려가 마한의 군주가 되었기 때문에 기자조선의 적통은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준왕의 씨족이 기씨(箕氏)에서 한씨(韓氏)로 바뀌었다는 내용이 각 문중의 족보들에 있다. 중국 기록에서는 그전부터 바뀐다고 나온다. 그래서 기자의 혈통과 유지는 마한, 더 넓게는 삼한으로 계승되었고 삼한은 한국사로 이어진다고 봤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적인 실증 사관은 아니고, 조선시대의 관념론적 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4. 이름

이성규는 '만'(滿)이 왕보다 낮은 군장의 명칭이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만'이 임금을 존칭하던 우리 고유어의 차자 표기로 본 서영수(2007:5)의 견해를 일부 수용하면서, 흉노 선우 두만(頭曼)의 '만'(曼), 선비족 천군(天君) 우문(宇文)의 '문'(文),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문'(文) 등이 '군장'을 뜻하는 동계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19] 그러다가 후대에 왕의 명칭으로 재인식되고, 그에 따라 명칭도 북방 민족 군주의 호칭인 두만이나 우문 같은 두 음절 단어인 '위만'으로 변경된 것이라고 했다.

5. 기타

만일 위만이 정말로 중국인이라면 그가 한 나라의 군주인데도 시호가 없다는 것이 의문이다. 예를 들어, 위만과 비교되는 조타는 무왕(武王) 혹은 무제(武帝)라는 시호를 가졌다. 조타는 기록에 남은 확실한 조나라 화하족 출신의 진나라 장군이었다. 위만이 중국인이었다면 위만은 중국식 시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군주가 된 후에 중국식 시법을 도입하였을 것이고, 사후에 시호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위만은 시호가 없고 그냥 이름 그대로 '위만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보아 위만이 조선에 중국식 시법을 도입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위만이 중국인이었다면 중국식 시법을 도입하지 않을리 없는데 위만조선은 그러지 않고 기원전 108년에 멸망할 때까지 중국식 시법을 도입하지 않아서 위만조선의 역대 군주들은 제대로 된 시호 없이 그냥 이름으로 불리거나 굉장히 성의없는 왕호를 가졌다. 그리고 저런 왕호는 중국이 아닌 한국사 초기 국가에 흔하다. 물론 위만 ~ 우거왕 사이의 군주가 누구인지도 모를 만큼 고조선에 대한 사료가 열악하고, 고고학에 의지하는 판국이니 시호가 있었더라도 실전되어 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해당한 우거왕은 망국의 군주였으니만큼 시호가 있을 리가 없기도 하고...
연나라 상국[燕相國] 위만공(衛滿公)으로부터 나왔다. 붓을 잘 만들어 관인의 신분에 올랐다. 이로 인해 필(筆: 후데)이라는 성을 받았다.
燕相國衛滿公之後也善作筆. 預於士流. 因賜筆姓.
신찬성씨록》<미정잡성> - 후데시(筆氏) -

서기 9세기 초 일본에서 편찬된《신찬성씨록》에 후데시(필씨: 筆氏) 씨족의 조상으로 위만이 소개되어 있다. 이들의 성씨는 붓 제작을 담당한 씨족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미정잡성'으로 분류된 점으로 볼 때《신찬성씨록》에 등재되었을 당시 가계를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아 후데시 씨족이 위만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은 낮다.

6. 대중매체

  •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되었던 이현세의《천국의 신화》6부 주인공이다. 조선의 부족에서 태어나 한나라로 넘어가 연왕 노관 휘하의 무사가 되었다. 각성하면 목 뒤에 별 모양의 반점이 생긴다. 결국 여후를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치우 창법 13초식 '동귀어진'을 펼치지만 동료들이 여후에게 잡히자 인질 교환 조건으로 자신의 눈 한쪽을 스스로 떼어내고, 풀려나 조선으로 향하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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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7권 「항우본기(項羽本紀)」 8권 「고조본기(高祖本紀)」 9권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항우 유방 여치
<rowcolor=#ffffff> 10권 「효문본기(孝文本紀)」 11권 「효경본기(孝景本紀)」 12권 「효무본기(孝武本紀)」
유항 유계 유철
보사기(補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
복희 · 여와 · 신농
※ 13권 ~ 22권은 표에 해당, 23권 ~ 30권은 서에 해당. 사기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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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가(世家) ]⠀
||<-2><tablewidth=100%><tablebgcolor=#3d414d><width=33%><rowcolor=#ffffff> 31권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2><width=33%> 32권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2><width=33%> 33권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
⠀[ 열전(列傳) ]⠀
||<-2><tablewidth=100%><tablebgcolor=#3d414d><width=33%><rowcolor=#ffffff> 61권 「백이열전(伯夷列傳)」 ||<-2><width=33%> 62권 「관안열전(管晏列傳)」 ||<-2><width=33%> 63권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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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위만의 '위'가 정말로 성씨인지, 아니면 위만 자체가 하나의 이름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논란] [3] 원래 고조선이라는 단어는 일연이《삼국유사》에서 위만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는 말을 쓴 것이었지만 일연이 생존했던 고려 시대 이전과는 다르게 조선 시대 이후에는 이성계가 세운 근세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의 의미가 위만조선까지 포함하도록 변화했다.[4] 지금의 중국 허베이성 북부 및 랴오닝성에 해당한다. 허베이성의 남부는 조나라 땅이었다.[5] 위만 이전에도 이렇게 연나라 땅에서 고조선으로 유입되는 유민들은 적지 않았는데, 시황제 영정의 폭정과 진나라의 패망, 격렬한 초한전쟁으로 중국 전역이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기 때문이다.[6] 우리가 말하는 위만을 뜻한다. 사기에는 그의 성이 나오지 않고 滿이라고만 기록되고 위만이라는 이름은 나중의 사서에 나오는 이름으로, '위'가 나중에 그의 성을 추정해서 붙인 것일 가능성이 있음[7] 마한으로 망명해 건마국을 세웠다.[8] '위'(衛)는 성씨가 아니라 관직일 가능성도 있는데, 이는 남해군위(南海郡尉)였다가 남월을 개국한 조타가 '위타'(尉陀)로도 불린 것에서 추측한 것이다.[9] 조원진, <위만의 정변과 위만조선 건국>,《고대사회에도 쿠데타가 있었는가?》[10] 중국인이 쓴 사서에는 야마토 왕권진나라 동래설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인(왜인)도 그 선조가 중국인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현 일본 사학계에선 야마토 진나라 동래설에 대한 비판이 거센 편이다.[반론] 국민(nation) 개념은 근대에 등장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민족(ethnicity) 비슷한 것은 고대에도 있었다. 이 두 개념은 한국 특유의 민족주의(ethnonationalism)로 인해 동일시되는 경향이 많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는 군주의 부계 혈통을 매우 중요시했다. 예시로 금나라 말기 장종의 치세때 굳이 한족 출신인 왕회가 황제는 한족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장행신과 선종이 고려인이라고 정정한 부분이라든가, 당나라의 선비족 혈통 황제인 태종 이세민을 욕보이려고 법림(法琳)이라는 승려가 당태종은 탁발씨 선비족이라고 한 일화, 그리고 원나라 말기 내현이라는 시인이 쓴 시에서 자신이 고려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게 한이라고 한족이 한탄한 일화들이 있다. 즉 각자 민족의식은 분명히 있었다. 서양에서도 고대 그리스나 로마를 보면 민족 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12] 일단 당시 중국에는 한족의 전신격인 화하족(華夏族) 의식이 있었고, 고조선이 진나라의 통일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것을 봐서 서로 남남으로 취급했음은 유력해 보인다. 그러나 당시 고조선인과 화하족이 서로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무엇보다 토착 고조선인이 위만과 그 세력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추측 이상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삼국유사》등에서 알 수 있듯이 전근대 한국인들도 위만조선을 자국의 역사로 인식해왔다는 것이다.[13] 비교할만한 사례로 노르만 왕조가 정복한 잉글랜드가 있는데, 잉글랜드는 윌리엄 1세의 정복 이후 수백년 동안 노르만/프랑스계 왕조들의 지배를 받았으나, 이들은 오히려 프랑스 본토의 왕조들과 피터지게 싸우며 잉글랜드의 민족 의식 형성에 기여했으며, 아무도 잉글랜드의 역사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위만조선은 오래 못가고 패망했다는 차이가 있으나, 왕조의 혈통과는 무관하게 한나라와 대립하며 조선의 정체성을 유지했다.[14] 북송의 태조 조광윤처럼 전조인 후주의 어린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고, 이후 후주 황실의 시씨 후손들을 송나라가 몽골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우대한 케이스도 있긴 했다. 물론 선양의 대부분은 전대 황실에 대한 피비린내나는 학살로 끝났다.[15]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고려 말기의 주요 가문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 정계에 그대로 출사했다. (서울시 강동구에 있는 고덕동이라는 지명은 고려 멸망 후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조선에 출사하지 않은 선비가 그 동네에 살고 있어 덕이 높다고 칭송받은 데서 유래한 것이었다. 이게 동네 이름에 반영될 일이었다는 건 이렇게 하는 선비들이 흔치 않았다는 것이다.) 홍무제도 그저 핑계였을 뿐, 고려 말부터 이어온 갈등 상황의 연장선이었다.[16] 실제로 홍무제는 주변인들을 무자비하게 갈궈서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도록 강요하는 수법을 즐겨썼다. 일례로 고려 말기에 철령위 땅을 내놓으라고 고려를 갈군 것이 대표적이다. 그나마 고려/조선 군주는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갈구는 선에서만 끝났지만, 자기 신하는 단어 하나만 잘못 써도 그걸 구실로 가차없이 목을 쳤다. 조선의 왕을 대놓고 갈구지 않은 건 조선의 국력에 대한 과대평가 때문이었는데, 당대의 네임드였던 몽골군과 나하추를 물리친 이성계가 북원과 합심해서 중원을 침공하는 것을 염려했다.[17] 실제로 무오사화가 일어난 배경도《성종실록》의 사초에 '조의제문', 즉 항우에게 시해당한 초의제에게 조의를 바치는 문구가 들어간 게 발각당해서 발생한 건데, 이는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을 의제에게,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항우에게 빗대어서 세조를 비난하고자 쓴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조선 왕조에게 있어서 '찬탈'이라는 단어는 가장 심각한 역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개창으로 무너진 고려 또한 쿠데타로 세워진 나라였음을 감안하면, 위만을 좋게 대접하지 않은 것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왔을 수도 있다. 왕건이 쿠데타로 태봉을 무너뜨리고 고려를 세울 당시에도 이에 반발하는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다만 기록이 전해지지 않은 건지, 혹은 그냥 관심이 없었는지 고려시대의 위만에 대한 평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18] 정반대의 케이스는 대한민국군사정권인데,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쿠데타로 집권했다는 이유로 쿠데타 정당화를 위해 고려무신정권 지도자들이나 조선의 세조 같은 역사 속의 찬탈자들을 마구잡이로 미화하는 경향이 강했다.[19] 이성규, <위만 조선의 왕족 인명 연구>,《고조선단군학》27,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