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0:52:39

진수(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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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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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서진의 역사가
陳壽 | 진수
진(陳)
이름 수(壽)
승조(承祚)
생몰 233년 ~ 297년
출생 익주(益州) 파서군(巴西郡) 안한현(安漢縣)
국적 촉한(蜀漢) → 서진(西晉)
1. 개요2. 생애3. 《삼국지》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
3.1. 촉한의 기록 부족 문제3.2. 촉까?
4. 진식의 아들?5.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중국 삼국시대 촉한과 서진에서 활동한 역사가이자 저술가, 관료이며 역사서 《삼국지》의 저자다.

제갈량 사후에 활약한 삼국시대 후반기 인물인데다가, 그나마 그의 행적들도 거의 조명받지 못해서 《삼국지연의》만 접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의외로 진수를 모르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도 실제로는 진수가 쓴 《삼국지》를 참조하여 쓰여졌기에, 애초에 정사(正史)가 없었다면 삼국시대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지금처럼 큰 인기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1] 후대에 나온 나관중소설 《삼국지연의》와 구분하기 위해서 진수가 쓴 역사서 《삼국지》는 흔히 《정사 삼국지》라고 부른다. 이후에 생겨난 삼국시대와 연관된 여러 이야기들은, 대부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아니면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창작된 것들이다. 이하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별다른 상황이 아니면 《삼국지》로 표기한다.

2. 생애

는 승조(承祚)이고 파서군(巴西郡) 안한현(安漢縣) 출신으로 어려서 학문을 좋아해 같은 군의 초주를 스승으로 섬겼다. 초주는 진수에게 학문으로 이름을 떨칠 것이니 도중에 실패를 겪어도 불행이 아니므로 언행에 신중히 해야 한다고 했다. 촉나라에서 벼슬하면서 관각영사(觀閣令史)가 되었다. 환관 황호가 권력을 잡자 그 위세와 권력에 대신들이 뜻을 굽히고 따랐으나, 진수 홀로 이에 굴복하지 않다가 자주 좌천되거나 파면되었다.[2] 진수는 당시 여러모로 불우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 상중에 병이 나서 하녀를 시켜 환약(丸藥)을 만들게 했는데, 마침 찾아온 손님이 이 장면을 보게 되었다. 당시에는 부모의 상중에 병이 나거나 건강을 상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서 사람들에게 불효자라고 욕을 먹었다.

촉한이 위나라에게 멸망한 뒤 서진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했으나, 불효자로 낙인이 찍힌 그는 여러해 동안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었다. 다행히 진수의 재주를 아낀 장화의 천거(薦擧)로 진나라의 관리가 될 수 있었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같이 촉한에서 벼슬을 지냈던 이양과 사소한 일로 사이가 틀어져 서로 악담과 욕설을 주고 받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진수가 진나라의 관직에 오른 뒤에 이양도 진나라의 벼슬길에 나아가려고 했지만, 옛 친구인 진수가 그 취직 활동을 방해했다고 한다. 촉한이 멸망한 후 촉한 출신 신하들인 수량, 이밀, 이양, 두열, 왕숭과 함께 경도 낙양에 같이 들어갔다. 나중에 이들간의 사이는 소원해졌지만 왕숭만은 성정이 너그럽고 후하며 온화하고 순해 나머지 5명과도 여전히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벼슬길에 오르고 제갈량의 글들을 모아 《제갈량집》(諸葛亮集)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역사서 저술에 힘썼다. 또한 삼국시대 때의 여러 역사 기록들을 모아서 《삼국지》를 썼다. 진수는 조위로부터 선양을 받은 사마진의 신하였기에 《삼국지》를 쓸 때 조위를 정통으로 썼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촉한의 관리이기도 했기 때문에 촉한에 대해서도 많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으며, 오나라가 멸망하자 오나라 출신 학자들과 공동으로 동오의 역사 기록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의 《삼국지》는 당대에 이미 뛰어난 글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내용이 간략한 점이 있었으며, 결국 약 한 세기가 지난 뒤에 유송(劉宋)의 문제 유의륭은 대장추(大長秋) 배송지를 시켜 주석을 달게 했고, 배송지의 주석은 이후 《삼국지연의》 창작에 큰 밑거름이 된다.

하후담도 당시 《위서》(魏書)를 지었는데 진수가 쓴 《삼국지》와 비교해 보고 곧 자신의 책을 없애버리고 더 이상 위나라에 관한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은 그만뒀다고 한다. 장화는 《삼국지》를 매우 훌륭하다고 여기며
"《진서》를 편찬하는 일도 맡겨야겠소."
라고 진수에게 말했다.[3]

장화는 진수를 중서랑(中書郞)으로 천거하려고 했지만, 순욱은 장화의 정적이었고 진수를 미워하여 이부(吏部)에다가 그를 모함하는 말을 하여 외지인 장광군(長廣郡) 태수(太守)로 자리를 옮기게 했는데, 진수는 모친이 연로함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두예가 나서 이를 무마하고 황제에게 다시 천거하니, 상서(尙書)의 상주(上奏)에 관련된 일을 돕는 것이 좋겠다고 여겼다. 이리하여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이 걱정되어 자리에서 물러났다.

모친이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낙양에 안장했는데, 이는 고인을 고향 땅에 장사지내는 풍습에 어긋나는 일이 었기 때문에 또 다시 불효자라고 욕을 먹고는 파면당했다. 몇 년 후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로 기용되었지만 사양했고, 원강(元康) 7년(297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상서랑(尙書郞) 겸 양주(梁州) 대중정(大中正) 범군(范頵) 등의 신하들이 황제에게 상주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한무제가 명령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위독하니 사람을 보내 그의 글들을 모두 거둬야겠다.' 사자(使者)가 그가 남긴 글들을 거두어보니, 내용 중에 봉선[4]에 대한 기록이 있어서 한무제가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저희가 보건대, 죽은 치사시어사 진수가 쓴 《삼국지》는 내용 중에 훈계하는 말들이 많고, 옛 일의 잘잘못을 명확히 가렸으니 사회의 교화에 유익할 것입니다. 문장의 아름다움은 사마상여에 미치지 못하나 정직하고 왜곡이 없는 점에서는 더 뛰어나니, 이를 모아 기록되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황제가 하남윤(河南尹), 낙양현(洛陽縣) 현령에게 명령를 내려, 진수의 집에 사람을 보내서 그의 책을 베끼게 했다.[5]

하마터면 역사속으로 사라질 뻔 했던 진수의 《삼국지》는 이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니, 굴곡 많은 인생을 마친 끝에 참으로 옛 스승의 말대로 학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3.삼국지》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

정의, 정이 형제가 위나라에서 굉장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진수가 그 자식들에게
"쌀 1,000곡[6][7]을 주신다면 귀하의 아버님들을 위해 훌륭한 전(傳)을 써드리리다."
라고 대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진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진수는 정의, 정이 형제의 <열전>을 저술하지 않았다고 한다.[8] 그런데 진수가 태어나기 13년 전(220년)에 문제 조비가 조위의 초대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정씨 형제와 이들 일족의 남자들을 모두 처형했기에 자손이 남아있을 수가 있겠냐는 의문점이 있어 이 기록은 신빙성을 의심받는다.[9]

위의 내용에 이어서 <진수전>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壽父為馬謖參軍,謖為諸葛亮所誅,壽父亦坐被髡,諸葛瞻又輕壽。壽為亮立傳,謂亮將略非長,無應敵之才;言瞻惟工書,名過其實。議者以此少之。
진수의 부친이 마속의 참군(參軍)이었는데, 마속이 제갈량에게 처형당하고 진수의 부친 또한 연좌되어 곤형[10]을 당했으며,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 또한 진수를 경시했다. 진수가 <제갈량전>을 쓰며 평하길, 제갈량은 용병술에는 뛰어나지 않았으니, 적과 맞서는 데 재능이 없었다고 했다. 또한 제갈첨은 글씨나 잘 썼을 뿐인데, 실상에 비해 명성이 지나치다고 했다. 이러한 (개인적인 원한에 따른) 평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 《진서》(晉書) 권 82·<진수전>(陳壽傳) 열전 제 52 출처
《진서》에 나오는 정의 형제와 제갈 부자의 얘기는 각각 지인소설(志人小說)인 《어림》(語林)과 《세설신어》가 출전(出典)이다. 다만, 아래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이 《진서》의 기록들, 특히 정씨 일족에 대한 기록들은 사실 《진서》 가 《정사 삼국지》 이상으로 비판과 논란의 여지가 충분한 기록을 실은 증거가 된다. 《정사 삼국지》 문서에서 '저자 본인에 관한 문제' 항목도 참조하자.

그 외 황족인 조씨나 사마씨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평가하고 불리한 서술은 은근히 넣지 않기도 했다. 일례로 <동탁전>에서는 동탁의 양성 학살을 두고 흉역하다고 평가했지만 정작 위태조 조조의 경우 서주에서 동탁보다 더 많은 사람을 학살을 저질렀는데도[11] 일말의 평가도 없다. 그외에도 사마소의 고귀향공 조모 시해를 기록하지 않은 것도 유명하지만 당대의 명사이자 많은 인재를 천거하고 인재등용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한 하후현더러 한 평론이 걸작이다.일찍이 그가 조상의 잘못을 바로잡았다거나 훌륭한 인재를 등용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이건 사마씨가 황제가 된 판국이니 스스로 몸을 사린 걸 수도 있고, 혹은 진수가 지은 《삼국지》를 말년에 조정에서 베낀 후에 보관했는데 이때 기록이 있었음에도 배제했을 확률도 있다.

진수는 인물을 평할 때 능력만 아니라 행실이나 성격까지 평가 기준점으로 잡아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공을 세웠어도 성격적 결함이 있으면 반드시 깠다. 관우, 장비, 반장, 위연, 법정, 곽가처럼 유능하지만 성격적으로 두드러진 단점이 있는 인물들도 "유능한 건 맞는데 성격이 영 아니야."라는 평을 남긴 건 유명하다. 반면에 유비제갈량, 황충, 조운, 방통, 순욱같이 능력과 인품 모두 갖춘 인물은 후하게 평가해줬다. 물론 민감한 인물들인 조위와 서진의 핵심 계보들에 대한 인물평은 삼갔다.

3.1. 촉한의 기록 부족 문제

진수의 스승은 초주다. 초주의 활동 경력 또한 오래되었지만 그 한편으로는 <양희전>에도 나오듯이 촉한의 많은 이들로부터 존중받지 못했다고 나오는 아웃사이더였다.[12] 그렇다고 해도 일단 유비 즉위 이후부터는 학계 관련으로는 꾸준히 활동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초주전>에는 아예 진수가 초주와 개인적으로 만났던 이야기까지 쓰고 있는데, 그렇다면 진수는 초주와의 접촉이 상당히 활발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촉한에는 분명히 사관이 존재했다고 볼만한 기록들이 있다. 왕숭처럼 역사에 남은 사관도 있다. 사관의 역할 중에는 천문의 변동이나 자연재해의 기록을 남기는 것도 있는데, 《화양국지》 같은 후세의 기록에서조차 그런 부분들이 나타날 정도라면 뭔가 기록이 남아 있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또 촉한 멸망 후 서진 조정에 사관한 인물 중에 동궐번건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둘 다 제갈량 시절부터 활동했던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관료로서 활약했고, 그 지위를 놓고 볼 때 촉한의 실정에 대해 이 사람들은 전문가라고 할 수 있었다. 극정조차 그렇다. 그런데 진수는
'촉에는 사관이 없고, 있는 기록도 유실되어 전을 못 남겼다.'
고 했다. 수상하지 않은가? 아닌 게 아니라 당나라의 사관이었던 유지기부터가 정사 《삼국지》에서의 촉한에 사관이 없다는 기록을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정사 삼국지》 문서 참고.
동진시대 손성환온을 따라 촉에 갔을 때 만났던 장로처럼 구전 자료도 아니고, 촉한의 권력이나 학계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이 진수의 동시대에 저렇듯 많았다. 네임드만 따져봐도 초주, 극정, 번건, 동궐 정도고, 장소(장비의 차남), 곽익(곽준의 아들, 271년 사망), 제갈경(제갈첨의 차남), 비공(비의의 아들), 등량(등지 아들) 등등 구 촉한 출신 문신들은 서진에서 종사한 이들이 다수 있었다. 이 사람들이 진수가 《삼국지》를 쓰기 시작할 때 타이밍 딱 맞춰서 다 죽었을까?[13] 그렇다면 《화양국지》나 기타 배송지 주석에 달린 인물들의 기록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예 진수랑 다른 관점으로 책을 쓰려고 했거나 실제로 <촉서>를 썼던 수량, 왕숭 같은 인물도 있었는데 진수는 이들과 교류가 없지 않았다.
진수가 왜곡을 했다거나 없는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건 아니지만, 진수가 촉한의 기록을 유독 부실하게 한 것은 쓸 수 없어서가 아니라 쓰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은 제기할 수 있다.[14] '부친이 진식일지도 몰라' 같은 루머나 진수가 제갈첨한테 한 소리 들어서 제갈첨을 깠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라면 이런 진수의 태도를 미심쩍게 여긴 사람들이 없지는 않은 듯하다.

다만 오히려 촉한 출신의 당대인이어서 촉한의 인사들과 교류하여 촉한사 집필에 몰두할 경우 진나라 조정이 어떻게 바라볼지 크게 걱정하여 촉한 관련 기록을 부실하게 썼을 가능성은 있다.《삼국지》의 절반 분량인 <제갈량집>을 지은 것도 그렇고 아주 관심이 없었다고 보긴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진수가 직접 관리로 있었던 시절이 오히려 더 기록이 빈약한 것은 약간 그렇긴 하다. 집필할 때 왠만해선 자신의 기억 밖에 없으면 기록하지 않았을 수 있다기에는 좀 심한 편이다.

3.2. 촉까?

제갈첨과 사이가 나빴다는 설도 있었는데 이런 설들이 생긴 이유는 진수의 기록에서 제갈량과 제갈첨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수가 《삼국지》를 썼을 때 그가 진나라의 관리였고, 조위를 정통으로 보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촉한의 인물들을 아랫급으로 둘 수밖에 없었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는 것을 바탕으로 보자.

각국 군주의 호칭들을 보았을 때 위나라는 조조를 무제(武帝)로, 조비를 문제(文帝), 조예를 명제(明帝)로 호칭했고 촉한은 유비와 유선 부자를 각각 선주(先主), 후주(後主)로 불렀다. 그러나 오나라는 모두 그냥 이름으로만 불렀다. 이렇게 위나라가 정통임을 인정하지만 촉나라는 오나라보다 더 권위가 높다는 견해를 드러냈다. 조조가 위왕에 오를 때는 깔끔하게 위왕이 되었다고만 썼지만,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될 때는 촉의 신하들과 유비 본인이 한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자세히 기록하며 좀 더 비중있게 묘사했다. 하지만 따지자면 조조가 위왕이 된 것은 권신으로서 헌제를 겁박해 구석을 받은 것인데다가 진수는 그 당시 촉한에 있었으니 함부로 묘사할 수 없었고, 유비의 한중왕 선언은 결국 패배한 지방 정권의 군벌이 혼자 떠든 선언인데다가 딱히 더러운 내막이 있지도 않았을 테니 쉽게 적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양희의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241년)[15]을 끼워넣고 자기가 보충한다던지 극정의 평가를 싣는다던지 해서, 촉한의 사람들이 내부에서 촉한의 인물들을 바라봤던 시선을 전하고, 촉한의 인물등 중 <열전>을 남길 수 없었던 사람들에 관한 얘기도 실었다.

물론 애초에 촉한 출신이기에 오나라의 인물들보다 자세히 쓸 수 있고, 유비와 유선을 선주와 후주로 불렀다고 해서 진수가 촉한의 모든 것을 긍정하거나 객관적인 시선으로 썼을 거라고 볼 순 없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진수가 굳이 자기 출신인 촉한보다 오나라를 좋게 써줄 이유도 딱히 없을 뿐더러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손권의 칭제 명분은 조비보다 뒤떨어지면 뒤떨어졌지 나을 건 없었기 때문이다.
可謂識治之良才,管、蕭之亞匹矣。然連年動衆,未能成功,蓋應變將略,非其所長歟!
(나라를 다스릴 줄 아는 좋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 할 만하니, 관중소하에 버금간다. 그러나 해마다 군사를 일으켰어도 공을 이루지 못 했으니, 아마도 임기응변의 용병술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나 보구나!)
- 《삼국지》권 35·<촉서>·-제갈량전-출처
진수가 《제갈량집》을 지은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그가 제갈량까라는 것도 어폐가 있다. 사실 《삼국지》-제갈량전-에서 마지막의 평가 부분에 "임기응변은 제갈량의 장기가 아니었다." 라고 하는 부분도 "우리 승상님이 임기응변만 잘했으면 다 이기는 건데..." 하는 식으로 볼 여지가 있다.[16]

대신 제갈첨의 경우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좋은 일이 일어나면 제갈첨의 것이라고 했다."
라는 말을 해서 좀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배송지가 단 주석에 따르면 진수가 제갈첨으로부터 치욕을 당해 제갈첨에 대해 안 좋게 썼다는 의혹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진 영화(永和) 3년(347년), 촉의 사관인 상거[17]는 촉의 장로가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진수가 일찍이 제갈첨의 관원이 되었다가 제갈첨에게 모욕당했는데, 이 일 때문에 죄악의 원인을 황호에게 돌리며 '제갈첨이 능히 바로잡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손성의 《이동기》

또한 진수는 초주의 제자였는데, 초주는 도참설[18]의 신봉자로 진수 역시 도참설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초주 문서에도 언급되지만, 진수의 기록을 약간 과장하자면 초주는
"황제의 이름이 재수가 없어 나라가 망국의 길로 가겠으니 쓸데없이 저항은 삼갑시다."
라는 참 어이가 없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제갈첨은 제갈량의 아들이고, 황제 유선의 부마라는 배경 때문이건 뭐건 간에 17세에 기도위를 달고, 36세에 위장군 평상서사에 도호까지 겸한 인물이었다. 즉 40세 이전에 촉한의 군부 및 조정의 요직이란 요직은 다 해먹었다. 그런 인물한테 '시,서,화를 잘했다', '무슨 일이건 좋은 일이면 백성들이 갈후가 한 일이라고 하여 명성이 실제를 넘어섰다' 정도밖에 기록이 없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차라리 무능해서 뭔 실책이 많았다고라도 썼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4. 진식의 아들?

진수가 230년에 제갈량에게 처형당한 의 장수인 진식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삼국지연의》의 명나라 판본에는 진수가 진식의 아들이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실인 양 퍼졌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이다. 하지만 진식이 처형당했다는 건 《삼국지연의》만의 이야기이며, 정사에서 진식은 3차 북벌 때 무도군(武都郡) 및 음평군(陰平郡)을 공격해 함락시킨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기록이 없다. 아니 애초에 진식이 《삼국지연의》에서 처형당한 시점인 4차 북벌은 그 자체가 《삼국지연의》의 허구다. 실제 제갈량의 북벌은 총 5차례인데 《삼국지연의》에서 6차례로 나오는 이유가 이 창작한 4차 북벌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즉 실제 4차 북벌은 《삼국지연의》의 5차 북벌이다. 설령 진짜 진식이 230년에 죽었다 쳐도 진수는 233년생이다. 즉, 진수는 진식의 아들이 아니다. 《정사 삼국지》의 제갈량에 대한 평가가 박한 이유가 진식이 제갈량에게 처형당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간혹 평역(評譯)된 《삼국지》에서 나오는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다.

비슷한 얘기로 부친이 가정(街亭) 전투에서 패배해 참수당한 마속의 부하였기 때문에 곤형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진서》<진수전>에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긴 한데, 정사에는 진식이 가정 전투에 참전했다는 기록 또한 없다.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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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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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3, 14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 등장한다. 삼국지의 저자라는 걸 강조하는 대사가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능력치는 그냥 정치력 하나만 봐줄 만하기 때문에 내정에나 써먹을 수 있는 평범한 문관이다.

첫 등장인 삼국지 5에서는 진식의 아들로 관계가 설정되어 있는데, 자기네들도 말이 안되는 걸 아는지 후기작에서는 부자 관계는 설정되어 있지 않다.[19] 근데 능력치는 C~D급이고, 등장하는 시기도 247년이라서 비중은 공기에 가깝다.

삼국지 5에서는 첫 등장이라서 그런지 능력치가 무력 31/지력 88/정치력 79/매력 60로 후하다. 특기는 고무, 수습, 내분, 혼란, 진화, 점술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5/무력 22/지력 60/정치력 75. 혼란은 있지만 지력이 너무 낮다. 내정용으로나 쓰자.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5/무력 22/지력 60/정치력 71/매력 39에 특기는 혼란 단 1개 뿐. 장수별 엔딩 중에 사서 편찬 엔딩이 있는데, 이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을 달성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통일 당시 남아 있는 장수의 67% 이상과 관계가 면식 이상, 특기 지리 소유, 지력+정치 100 이상, 사서 1권 이상 보유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작 진수는 사서도 가지고 있지 않고, 지리 특기가 없기 때문에 그냥은 이 엔딩을 볼 수 없고 계략 경험과 첩보 경험을 각각 600과 400까지 올려야 하는 아스트랄한 상황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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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에서 진수를 참수하면 유언으로 저 대사를 한다. 참고로 짤방의 대사는 문법이 이상하게 나와 있다. '제가 죽으면 누가 이 시대의 기록을 남긴단 말이냐'에서 '제가'를 '내가'로 혹은 '말이냐'를 '말입니까'로 바꾸면 자연스러워진다.[20]

삼국지 12에선 삭제되었고 PK에서도 끝내 추가되지 않았다.

삼국지 13에서는 다시 등장했다. 능력치는 통솔력 12/무력 22/지력 60/정치력 75다. 전법이 기속강화인데 병기특성은 창병과 궁병 B, 기병 C다, 특기는 문화 7, 언변 7, 전수특기는 문화다. 그가 정사의 저자였음을 감안하면 특기와 전수특기는 적절히 고증된 편. 내정용으로 굴리면 적당하다. 일러스트는 정사 삼국지를 집필할 때의 모습으로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오른손으로 붓을 든 채 왼손을 턱에 올리고 있다. 특이하게도 지력이 60임에도 불구하고 언변이 무려 7이나 된다. PK에서는 엔딩이 위명별로 달라지는데, 신기묘산이나 국사 위명을 달고 엔딩을 보면 X국지 라는 책을 집필하는 대사가 나오므로 진수로 이 엔딩을 보는 것이 이 게임의 진엔딩일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출생 연도가 233년으로 너무 늦기 때문에 영웅집결이나 가상 시나리오인 강유북벌에서만 선택할 수 있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12, 무력 22, 지력 60, 정치 75, 매력 49이며 개성은 사관, 주의는 예교, 정책은 태학 Lv 3, 진형은 방원, 전법은 없고 친애무장은 장화, 초주, 혐오무장은 제갈첨, 황호다.

삼국지 DS 2[21]에서는 지력이 80에 정치력이 78인 군사형인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스페셜 무장이라서 얻으려면 조건을 클리어 해야 한다.

생몰년도상의 문제로 보통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이외에는 서브컬처계에서 삼국지를 다룰 때 네임드로 다룰 이유가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21세기 작품으로는 SD건담 삼국전에서 진수 자쿠가 등장한 것이 그나마 있는 희귀한 예제 중 하나.

삼국전투기에서는 최훈이 고도의 촉까라고 까고 있다. 삼로 전투(11)에서 상조가 죽은 컷 다음 컷에 삼국지 11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염소 수염에 회색 한푸를 입고 있으니 삼국지 11의 모습이 맞다. 또한 영안 전투(2)에서도 나헌의 공적 중 하나가 진수를 추천하여 진나라에서 중용될 수 있게 해준 것이라고 하며 다시 등장한다. 그 덕택에 삼국지도 쓰여질 수 있었으니. 다만 작 중에서는 진수가 자신이 굳이 없었어도 다른 사람이 삼국지를 썼을 거라고 말하며 겸손하게 반응한다.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진나라 세력이 추가된 6편 기점으로 클론무장 출연을 한다. 또한 인식은 하고 있는지 진삼국무쌍 6 엠파이어스에서 특수 시나리오에서 에디트 무장으로 입체등록 해준 적이 있다. 메인 컬러는 출신지인 촉나라를 따라갔으며 무기는 요필이라 하여 붓을 사용한다.[22] 무기배치는 역사가 특징을 의식한 배치로 보인다.


[1] 100년여의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된 데다가 구품관인제를 제외하고는 후대에 영향을 미친 게 없기 때문에 중국사에서 배울 때는 그냥 넘어가는 수준이다.[2] 《진서》권 82·열전 제 52<진수전> : 宦人黃皓專弄威權,大臣皆曲意附之,壽獨不為之屈,由是屢被譴黜。출처[3] 《진서》권 82·열전 제 52<진수전> : 張華深善之,謂壽曰:"當以《晉書》相付耳。"출처[4] 封禪 : 고대 중국에서 군주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어 즉위를 고하던 의식.[5] 《진서》권 82·열전 제 52<진수전> : "昔漢武帝詔曰:'司馬相如病甚,可遣悉取其書。' 使者得其遺書,言封禪事,天子異焉。臣等案:故治書侍御史陳壽作《三國志》,辭多勸誡,明乎得失,有益風化,雖文豔不若相如,而質直過之,願垂採錄。" 於是詔下河南尹、洛陽令,就家寫其書。출처[6] 斛 : 고대 부피ㆍ무게 단위. 당나라 시기까지는 민간에서 '섬'을 일컫는 속칭으로, 1곡 = 1섬 = 10말 = 120근이었다. 송나라 이후로는 1곡 = 5말로 바뀌어, 2곡 = 1섬이 된다.[7] 섬과 석은 같은 단위인데, 당시 태수나 좌장군의 녹봉이 2,000석이었다. 즉 1,000곡이면 지방의 장군이나 고위급 장성 1년 연봉에 절반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이다.[8] 《진서》(晉書) · <진수전>(陳壽傳) : 丁儀、丁廙有盛名於魏,壽謂其子曰:"可覓千斛米見與,當為尊公作佳傳。" 丁不與之,竟不為立傳。출처[9] 《삼국지》권 19·<위서>·-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 文帝即王位,誅丁儀、丁廙并其男口。출처[10] 髡刑 : 고대에 죄인의 머리카락 전부 또는 일부분을 밀어버리는 형벌.[11] 동탁의 경우 양성 하나였지만, 조조의 경우 서주 일대 여러 개의 마을에서 학살을 저질렀다.[12] 물론 진수는 스승을 치켜세우며, 초주는 그렇게 무시한 사람들의 자손보다 더 현달할 것이라는 양희의 평을 싣긴 했지만 말이다.[13] 참고로 저들 중 제갈경은 서진에서 강주자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강주라는 행정구역은 291년에 신설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최소 291년에는 제갈경이 생존해 있었다는 소리이다.[14] <촉서>가 아닌 데서도 마찬가지인 것이, 고귀향공 조모의 죽음도 진수의 본전만 보면 조모가 갑자기 미쳐서 죽은 것밖에 안 된다.[15] <촉서> 권 15 -양희전-, 즉 -등장종양전-(鄧張宗楊傳)에 전문을 수록했다.[16] 훗날 원준도 비슷한 논리를 펼쳤지만 조선시대 간서치로 유명한 이덕무는 '제갈량이 임기응변이 장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진수의 여론(餘論)을 모은 것 뿐이지 제갈량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라고 진수와 원준을 비판했다.[17]화양국지》의 저자다.[18] 圖讖說 :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19] 대신 삼국지 11에선 같은 집안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20] 삼국지 11 PK의 경우엔 한국에서 정식 발매가 안 됐기 때문에 한글판이 없다. 그래서 유저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한글패치만이 존재하는데, 그 양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약 10년도 더 전에 미완성인 채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중요도가 좀 떨어지는 부분은 아예 한글화가 되어 있지 않기도 하고, 중요한 대사 부분에서도 저렇게 문법이나 철자가 어색한 경우가 적지 않다. 작업량이 상당히 많아서 최소 몇 달은 잡아야 가능한 작업인데, 막말로 후원금을 받는 일도 아닌 재능기부의 영역인지라 전문가들도 조금 손대다가 결국 GG치고 포기한 것이 오늘날의 삼국지 11 PK 한글패치인 것이다.[21] 삼국지 4를 닌텐도 게임으로 리메이크한 게임이다.[22] 마대의 EX무기. 참고로 진삼국무쌍 7 엠파이어스의 한 유저 창작 모드에선 김부식이 같은 무기를 사용한다. 역시 역사가란 설정을 반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