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진수(서진) 문서 참고하십시오.
진서(晉書) | ||||||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 1권 「선제기(宣帝紀)」 |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 3권 「무제기(武帝紀)」 | |||
사마의 | 사마사 · 사마소(昭) | 사마염 | ||||
4권 「혜제기(惠帝紀)」 |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 ||||
사마충(衷) | 사마치 · 사마업 | 사마예 · 사마소(紹) | ||||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 |||||
사마연(衍) · 사마악 |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 |||||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 |||||
사마욱 · 사마요 | 사마덕종 · 사마덕문 | |||||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 열전(列傳) ]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 재기(戴記) ]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서진의 역사가 陳壽 | 진수 | |
성 | 진(陳) |
이름 | 수(壽) |
자 | 승조(承祚) |
출생 | 233년 |
익주(益州) 파서군(巴西郡) 안한현(安漢縣) | |
사망 | 297년 (향년 64세) |
국적 | 촉한(蜀漢) → 서진(西晉) |
[clearfix]
1. 개요
중국 삼국시대 촉한과 서진에서 활동한 역사가이자 저술가, 관료이며 역사서 《삼국지》의 저자다.제갈량 사후에 활약한 삼국시대 후반기 인물인데다가, 그나마 그의 행적들도 거의 조명받지 못해서 《삼국지연의》만 접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의외로 진수를 모르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도 실제로는 진수가 쓴 《삼국지》를 참조하여 쓰여졌기에, 애초에 정사(正史)가 없었다면 삼국시대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지금처럼 큰 인기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1][2] 후대에 나온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와 구분하기 위해서 진수가 쓴 역사서 《삼국지》는 흔히 《정사 삼국지》라고 부른다. 이후에 생겨난 삼국시대와 연관된 여러 이야기들은, 대부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아니면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창작된 것들이다. 이하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별다른 상황이 아니면 《삼국지》로 표기한다.
2. 생애
어려서 학문을 좋아해 같은 군의 초주를 스승으로 섬겼다. 초주는 진수에게 학문으로 이름을 떨칠 것이니 도중에 실패를 겪어도 불행이 아니므로 언행에 신중히 해야 한다고 했다. 촉나라에서 벼슬하면서 관각영사(觀閣令史)가 되었다. 환관 황호가 권력을 잡자 그 위세와 권력에 대신들이 뜻을 굽히고 따랐으나, 진수 홀로 이에 굴복하지 않다가 자주 좌천되거나 파면되었다.[3] 진수는 당시 여러모로 불우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 상중에 병이 나서 하녀를 시켜 환약(丸藥)을 만들게 했는데, 마침 찾아온 손님이 이 장면을 보게 되었다. 당시에는 부모의 상중에 병이 나거나 건강을 상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서 사람들에게 불효자라고 욕을 먹었다.촉한이 위나라에게 멸망한 뒤 서진의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했으나, 불효자로 낙인이 찍힌 그는 여러해 동안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었다. 다행히 진수의 재주를 아낀 장화의 천거(薦擧)로 진나라의 관리가 될 수 있었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같이 촉한에서 벼슬을 지냈던 이양과 사소한 일로 사이가 틀어져 서로 악담과 욕설을 주고 받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진수가 진나라의 관직에 오른 뒤에 이양도 진나라의 벼슬길에 나아가려고 했지만, 옛 친구인 진수가 그 취직 활동을 방해했다고 한다. 촉한이 멸망한 후 촉한 출신 신하들인 수량, 이밀, 이양, 두열, 왕숭과 함께 경도 낙양에 같이 들어갔다. 나중에 이들간의 사이는 소원해졌지만 왕숭만은 성정이 너그럽고 후하며 온화하고 순해 나머지 5명과도 여전히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벼슬길에 오르고 제갈량의 글들을 모아 《제갈량집》(諸葛亮集)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역사서 저술에 힘썼다. 또한 삼국시대 때의 여러 역사 기록들을 모아서 《삼국지》를 썼다. 진수는 조위로부터 선양을 받은 사마진의 신하였기에 《삼국지》를 쓸 때 조위를 정통으로 썼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촉한의 관리이기도 했기 때문에 촉한에 대해서도 많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으며, 오나라가 멸망하자 오나라 출신 학자들과 공동으로 동오의 역사 기록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의 《삼국지》는 당대에 이미 뛰어난 글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내용이 간략한 점이 있었으며, 결국 약 한 세기가 지난 뒤에 유송(劉宋)의 문제 유의륭은 대장추(大長秋) 배송지를 시켜 주석을 달게 했고, 배송지의 주석은 이후 《삼국지연의》 창작에 큰 밑거름이 된다.
하후담도 당시 《위서》(魏書)를 지었는데 진수가 쓴 《삼국지》와 비교해 보고 곧 자신의 책을 없애버리고 더 이상 위나라에 관한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은 그만뒀다고 한다. 장화는 《삼국지》를 매우 훌륭하다고 여기며
"《진서》를 편찬하는 일도 맡겨야겠소."
라고 진수에게 말했다.[4]장화는 진수를 중서랑(中書郞)으로 천거하려고 했지만, 순욱은 장화의 정적이었고 진수를 미워하여 이부(吏部)에다가 그를 모함하는 말을 하여 외지인 장광군(長廣郡) 태수(太守)로 자리를 옮기게 했는데, 진수는 모친이 연로함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두예가 나서 이를 무마하고 황제에게 다시 천거하니, 상서(尙書)의 상주(上奏)에 관련된 일을 돕는 것이 좋겠다고 여겼다. 이리하여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이 걱정되어 자리에서 물러났다.
모친이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낙양에 안장했는데, 이는 고인을 고향 땅에 장사지내는 풍습에 어긋나는 일이 었기 때문에 또 다시 불효자라고 욕을 먹고는 파면당했다. 몇 년 후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로 기용되었지만 사양했고, 원강(元康) 7년(297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상서랑(尙書郞) 겸 양주(梁州) 대중정(大中正) 범군(范頵) 등의 신하들이 황제에게 상주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한무제가 명령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위독하니 사람을 보내 그의 글들을 모두 거둬야겠다.' 사자(使者)가 그가 남긴 글들을 거두어보니, 내용 중에 봉선[5]에 대한 기록이 있어서 한무제가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저희가 보건대, 죽은 치사시어사 진수가 쓴 《삼국지》는 내용 중에 훈계하는 말들이 많고, 옛 일의 잘잘못을 명확히 가렸으니 사회의 교화에 유익할 것입니다. 문장의 아름다움은 사마상여에 미치지 못하나 정직하고 왜곡이 없는 점에서는 더 뛰어나니, 이를 모아 기록되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황제가 하남윤(河南尹), 낙양현(洛陽縣) 현령에게 명령를 내려, 진수의 집에 사람을 보내서 그의 책을 베끼게 했다.[6]하마터면 역사속으로 사라질 뻔 했던 진수의 《삼국지》는 이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니, 굴곡 많은 인생을 마친 끝에 참으로 옛 스승의 말대로 학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7]
중국 역사상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시기라고도 볼 수 있던 삼국시기를 다룬 삼국지를 저술하여 삼국지연의라는 전대미문의 베스트셀러를 낳는데 기여했기 때문에 연의의 저자였던 나관중 못지 않게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고향인 쓰촨성 난충시 에서는 동상까지 세워져 그를 기념하고 있다. #
3. 《삼국지》의 서술태도
3.1. 전반적 태도
진수는 역사서를 편찬하면서 사마천의 태도를 이어받아 술이부작 (사실만 쓰되 픽션을 섞지 않는다)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즉, 여러 사료중에서 본인의 판단으로 사실에 기반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만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다른 역사서에 비해 철저한데, 오히려 사마천의 경우는 열전에서는 민간전승으로 전해진 듯한 재미있는 일화들을 기록해 생생한 인물상을 보여주는 반면 진수는 그런 것도 별로 없다. 그리하여 서술은 매우 딱딱해졌고, 이에 불만을 느낀 배송지가 다른 여러 사료를 가져다가 주석을 달아놓았다.[8]이런 진수의 서술 태도를 임용한은 하드보일드하다고 평가했다.[9]사마씨의 집권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사마씨에 불리한 기사는 넣지 않거나 혹은 돌려말하기도 하는데 윤색을 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사마소의 조모 시해에 대해서는 자세한 전후사정을 넣지 않은 채, 조모가 그냥 붕어했다고만 간략히 기술했다. 이는 관찬사서의 성격상 어쩔수 없고 진수의 삼국지부터 1600년후 편찬된 청사고까지 중국의 모든 관찬사서는 똑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10] 애당초 사관을 두고 국가가 재정을 지원하여 이런 역사서를 펴내는 이유가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여 통치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다. 이는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며, 삼국사기나 고려사 같은 경우도 비슷한 목적으로 저술되었다.
삼국지가 다루는 시대는 황건적의 난(184) 부터 오멸망(280) 까지 약 100여년에 걸친 사건인데, 진수가 태어난 연도(233) 는 딱 그 중간에 해당하며, 삼국지의 클라이막스가 끝나갈 무렵, 즉 제갈량이 죽기 1년전이다. 즉 삼국지에 나온 대부분의 주요 사건은 촉나라 및 오나라 멸망 이외에는 진수가 직접 보고 겪은 일이 아니며, 진수도 문서로 된 사료를 보고 저술한 것이다. 진수가 참고한 자료는 위나라는 왕침의 <위서>와 오나라는 위소의 <오서>이다. 또한 어환의 <위략>도 참고한 것으로 보이며, 동시대인인 우부가 서술한 오나라 역사서인 <강표전>도 참고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위나라, 오나라와는 달리 촉나라는 공식적인 역사서가 없었는데, 다행히 진수는 촉나라 출신이었고, 본인과 함께 진나라의 수도인 낙양으로 끌려온 촉나라 유신들과도 인맥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촉나라 역사를 집필하는데는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각국 군주의 호칭들을 보았을 때 위나라는 조조를 무제(武帝)로, 조비를 문제(文帝), 조예를 명제(明帝)로 호칭했고 촉한은 유비와 유선 부자를 각각 선주(先主), 후주(後主)로 불렀다. 그러나 오나라는 모두 그냥 이름으로만 불렀다. 이렇게 위나라가 정통임을 인정하지만 촉나라는 오나라보다 더 권위가 높다는 견해를 드러냈다. 조조가 위왕에 오를 때는 깔끔하게 위왕이 되었다고만 썼지만,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될 때는 촉의 신하들과 유비 본인이 한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자세히 기록하며 좀 더 비중있게 묘사했다. 이는 조조의 위왕 등극은 헌제를 겁박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을 밝히면 조조의 불충이 드러나기 때문에 간략하게 쓴 반면, 유비의 한중왕 등극은 지방정권이 스스로 결정해 헌제에게 통고한 것이기 때문에 충과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또 양희의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241년)[11]을 끼워넣고 자기가 보충한다던지 극정의 평가를 싣는다던지 해서, 촉한의 사람들이 내부에서 촉한의 인물들을 바라봤던 시선을 전하고, 촉한의 인물등 중 <열전>을 남길 수 없었던 사람들에 관한 얘기도 실었다.
물론 애초에 촉한 출신이기에 오나라의 인물들보다 자세히 쓸 수 있고, 유비와 유선을 선주와 후주로 불렀다고 해서 진수가 촉한의 모든 것을 긍정하거나 객관적인 시선으로 썼을 거라고 볼 순 없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진수가 굳이 자기 출신인 촉한보다 오나라를 좋게 써줄 이유도 딱히 없을 뿐더러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손권의 칭제 명분은 조비보다 뒤떨어지면 뒤떨어졌지 나을 건 없었기 때문이다.
3.2. 인물에 대한 태도
진수는 인물을 평할 때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즉 그 사람이 어느나라의 사람이든지) 능력만 아니라 행실이나 성격까지 평가 기준점으로 잡아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공을 세웠어도 성격적 결함이 있으면 반드시 비판했다. 조비, 관우, 장비, 반장, 위연, 법정, 곽가처럼 유능하지만 성격적으로 두드러진 단점이 있는 인물들도 "유능한 건 맞는데 성격이 영 아니야."라는 평을 남긴 건 유명하다.반면에 유비와 제갈량, 황충, 조운, 방통, 순욱같이 능력과 인품 모두 갖춘 인물은 후하게 평가했다. 창업군주인 조조와 손권에 대해서도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물론 민감한 인물들인 서진의 핵심 계보들에 대한 인물평은 삼갔다.[12]
위에서 밝혔듯이 진수의 삼국지 집필 목적은 사실을 온전히 전하기보다는 다분히 사마씨 정권의 집권합리화의 목적이 있었다.[13] 이 때문에 조조나 사마씨에게 누가 될만한 사건은 축소되거나 누락되었다.[14] 다만 이는 후에 남조에서 사마씨(동진)가 몰락한 후 한나라와 동성인 유씨가 집권한 유송 시절 집필된 후한서에서 조조에 대한 평가가 대폭 하락한 것을 보면[15], 집권 세력의 입장에 따라 변화하는 관찬사서들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의외로 유비의 경우, 진수의 삼국지의 평가가 후한서보다 훨씬 더 좋다. 후한서의 유비는 행적만 건조하게 나열되어 있어서 범엽을 비롯한 저자들이 유비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손권도 마찬가지로 삼국지의 평가가 후한서보다 훨씬 더 좋다. 즉 진수는 영웅이나 창업군주에 대해서는 정치적 입장을 떠나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진수는 제갈량에 대해서는 극찬을 했는데, 관중과 소하에 비교를 했으니, 이는 당대에 재상으로서는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평가였다.[16]
可謂識治之良才,管、蕭之亞匹矣。然連年動衆,未能成功,蓋應變將略,非其所長歟!
(나라를 다스릴 줄 아는 좋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 할 만하니, 관중과 소하에 버금간다. 그러나 해마다 군사를 일으켰어도 공을 이루지 못 했으니, 아마도 임기응변의 용병술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나 보구나!)
- 《삼국지》권 35·<촉서>·-제갈량전-출처
진수가 《제갈량집》을 지은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그가 제갈량까라는 것도 어폐가 있다. 사실 《삼국지》-제갈량전-에서 마지막의 평가 부분인 제갈량의 북벌이 실패한 부분에 "임기응변은 제갈량의 장기가 아니었다." 라고 하는 부분도 "우리 승상님이 임기응변만 잘했으면 다 이기는 건데..."라는 뜻이다.[17](나라를 다스릴 줄 아는 좋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 할 만하니, 관중과 소하에 버금간다. 그러나 해마다 군사를 일으켰어도 공을 이루지 못 했으니, 아마도 임기응변의 용병술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나 보구나!)
- 《삼국지》권 35·<촉서>·-제갈량전-출처
3.3. 촉한의 기록 부족?
진수는 삼국지를 저술하면서 위나라에는 왕침의 위서, 오나라는 위소의 오서를 참고했다고 말하면서도 촉나라는 사서를 출판하지 않았고, 촉나라가 보유하고 있던 기록도 촉한멸망전 와중에 모두 상실했다고 명시했다. 촉에는 사관이 없고, 있는 기록도 유실되어 전을 못 남겼다고 했다. 이를 두고 진수가 일부러 촉나라의 사서인 촉서를 대충 쓴 것이라며 옛날부터 진수를 비판하는 이들이 많았다.그러나 일단 '촉에는 사관이 없다'라는 부분은 어느 정도 사실인듯 하다. 당나라 시기 역사학자 유지기는 촉의 사관이 천문을 전한 기록이 있는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진수를 비판했지만 일단 진수 본인이 겪은 촉한 조정 내 직책 문제이기도하고, 여기서 무슨 진수의 이해관계가 따로 달린것도 아닌 마당에 그가 굳이 사실왜곡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촉에는 '천문을 보는 사관'은 있었을지언정 '전문적으로 역사기록을 남기고 정리하는 관리가 아예 없었다'고 봐야 한다. 각각 삼국지의 위지, 오지의 바탕이 된 위나라 공식사서 왕침의 위서와 오나라 공식사서 위소의 오서의 경우엔 이미 오래전부터 위나라와 오나라의 관리들이 왕침이나 위소의 지휘를 받아 기록들을 초기부터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기록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물론 이럼에도 정권 초기의 기록들은 아직 국가 체제가 완비되지 않아 유실된 부분도 있으나[18] 그래도 한나라의 정사서에 걸맞는 기록의 완비가 이루어 진 것만은 분명하다. 반면 촉서의 그 어떤 기록에도 촉에서 이런 체계적인 기록의 정리와 보존이 이루어 졌다는 얘기, 촉의 정사서를 쓰려고 노력했다는 기록도 없고 이런 기록 정리와 관련 직책이 있었다는 얘기도 없다.
본디 동아시아의 사관은 천문과 역사를 통틀어 기술하는 직책이었는데, 후대에 갈수록 천문관과 전문 사관의 분업이 이루어지는 형태로 변화하며 위나라와 오나라의 정식 사서 편찬의 경우엔 이런 사관의 분업화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촉에서는 제대로 사적을 정리하는 관리가 천문관과 분리되지도 않았고 체계적인 기록의 정리와 보존의 법칙도 없었기 때문에 위나 오보다 많은 기록이 정리되지 못한채 유실되거나 쉽게 잊혀지거나 했던 것이다. 실제로 진수는 촉서 말미에 양희의 개인적인 저작물인 계한보신찬을 이용해 촉에서 활동한 인물들의 사적을 최대한 긁어모르려고 했으나 여기 있는 인물들 가운데 그렇게 촉에서 활약이 많았음에도 열전을 만들만한 기록이 없는 이들이 많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즉 촉나라의 기록을 진수가 고의적으로 간략화된 것이 아니라 촉이 남긴 원전 사료부터가 부실했기 때문에 진수가 촉서를 쓰는데 어려움이 따랐다는 것이다.
이렇게 없는 문서화된 기록은 대체로 관리 부실과 전란등으로 인해 유실된 듯 하지만 촉에게는 어떤 의미에선 다행으로 진수가 촉나라 조정의 관리 출신이었기에 막상 촉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일단 진수가 유비와 제갈량의 활약기에는 태어나지 않았지만, 진수(233-297)의 기억이 생생할 시기인 20-40대는 바로 촉나라의 치세(221-263)와 겹치고 진수의 청년기에는 유비-제갈량과 함께 촉나라를 건국한 개국공신들이 상당수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청년기부터 촉나라의 관리생활을 한 진수는 이들로부터 유비의 건국행적을 상세히 전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마씨는 촉을 멸망시킨후 대부분의 촉나라 조정 중신들을 낙양으로 압송해 살게 했는데, 이들은 같이 끌려온 유선을 중심으로 인맥으로 얽혀 자주 교류 했을 것이다.[19] 진수의 스승인 초주, 이외에도 극정, 번건, 동궐 등은 촉나라 건국 시점부터 일했던 사람들로 당연히 유비나 제갈량의 행적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보다 어린 세대인 장소(장비의 차남), 곽익(곽준의 아들, 271년 사망), 제갈경(제갈첨의 차남), 비공(비의의 아들), 등량(등지 아들) 등등도 모두 낙양으로 끌려와서 서진에 출사했으며, 진수는 《삼국지》를 쓰기 시작할 때 이들을 찾아가서 취재나 증언을 들었을 것이다.[20] 《화양국지》나 기타 배송지 주석에 달린 인물들의 기록에 따르면 아예 진수랑 다른 관점으로 책을 쓰려고 했거나 실제로 <촉서>를 썼던 수량, 왕숭 같은 인물도 있었고, 진수는 이들과도 교류가 있었다.
그러므로 설령 디테일한 부분은 좀 빠졌을지도 몰라도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에는 촉나라의 주요 사건은 대부분 기록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어차피 관찬사서는 현 왕조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편찬되는 것이며, 서진의 전신인 위나라에 비해 지방정권에 불과했던 촉한의 분량이 적은 것은 당연하다.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의 권수는 위촉오가 30:15:20의 비율로 되어 있는데[21], 이는 촉한의 면적이나 인구로 볼 때, 이것이 지나치게 적은 분량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또한 정사 삼국지가 촉한의 사정을 충분히 상세히 기술하지 않은 것은 맞을 수 있으나, 애초부터 위에서 설명했듯이 진수는 삼국지의 모든 내용에 대해서 최대한 간략하고 명료한 부분만 쓰고자 했다. 따라서 위촉오 밸런스로 본다면 위나라나 오나라의 사정도 비슷하게 간략화되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너무 간략해서 불만을 품고 나중에 송나라의 문제와 배송지가 여러 사적을 찾아다가 다시 내용을 대폭 불렸을 정도로 말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1차 사료를 남기는데 부실하고 문화조차 없는 군벌 수준의 촉이라는 나라 자체의 문제를 비판해야 할 것이다.
3.4. 촉나라에 대해
명칭(황제-선/후주-이름)에 대해서는 철저히 위나라-서진을 정통으로 두고 있지만, 진수의 전반적인 서술태도나 관점은 건조할 정도로 객관적이며, 서술태도만 본다면 무통론에 더 가깝다. 즉, 위/서진을 의도적으로 미화하지 않고, 촉/오를 까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서가 저술된 시점은 대체로 오나라가 멸망(279)와 팔왕의 난(291)의 사이인 280년대 중반부로 보는게 정설이다. 삼국지의 클라이막스 부분은 조조와 유비가 본격적으로 대결하는 서기 200년에서 서기 220년까지의 시기 (유비의 서주 재점거에서부터 조조의 죽음에 이르는 시기)인데, 이 시기는 당시로부터 80년전 일이고, 서진의 시조인 사마의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도 아니기 때문에, 서진입장에서 민감한 시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조조가 특별히 미화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더구나 본인의 출신지인 촉나라를 폄하할 이유도 없다. 사마씨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삼국시대 후반부 (250년 이후)의 사마씨 관련 기사를 제외하면 기사들은 대체로 신뢰할하다고 볼 수 있다.또한 진수가 제갈첨에 대해서는 아버지 덕을 보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는 있지만[22] 전체적으로 제갈첨에 대한 평가는 아주 나쁘진 않다.
(제갈첨은) 서예에 능했고, 아는 것도 많았다. 촉나라 사람들은 제갈량을 깊이 그리워했기 때문에 제갈첨의 재능도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조정에서 좋은 정책을 만들면 비록 그가 하지 않았더라고 하더라도, "그건 제갈후(제갈첨)의 덕이다"라고 칭찬했는데, 그정도로 실제보다 과찬을 받았다. (瞻工書畫,強識念,蜀人追思亮,咸愛其才敏。每朝廷有一善政佳事,雖非瞻所建倡,百姓皆傳相告曰:「葛侯之所為也:」是以美聲溢譽,有過其實)]
배송지가 단 주석에 따르면 진수가 제갈첨으로부터 치욕을 당해 제갈첨에 대해 이렇게 안 좋게 썼다는 의견도 나온다.
진 영화(永和) 3년(347년), 촉의 사관인 상거[23]는 촉의 장로가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진수가 일찍이 제갈첨의 관원이 되었다가 제갈첨에게 모욕당했는데, 이 일 때문에 죄악의 원인을 황호에게 돌리며 '제갈첨이 능히 바로잡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손성의 《이동기》
"진수가 일찍이 제갈첨의 관원이 되었다가 제갈첨에게 모욕당했는데, 이 일 때문에 죄악의 원인을 황호에게 돌리며 '제갈첨이 능히 바로잡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손성의 《이동기》
《삼국지》는 진수의 사사로운 저술이 아니기 때문에 서진의 입장을 반영해야 하고, 서진에게 멸망당한 촉한은 지방정권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감안을 하더라도 진수는 대부분의 촉나라 충신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단 예외적으로 강유에 대해서는 "군대를 부리는데 서툴고, 판단력이 넓지 못해 나라를 말아먹었다 (玩衆黷旅,明斷不周,終致隕斃)"고 서술했다.
3.5. 정의-정이 형제 기술 일화
서진-동진의 역사를 기록한 <진서>의 기록에 의하면 조비-조식의 후계자 경쟁에 조식편을 들었다가 조비에 의해 멸문된 정의, 정이 형제의 기술을 두고 진수가 그 후손들에게 "정씨 형제들의 행적을 좋게 써줄테니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라고 대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진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진수는 정의, 정이 형제의 <열전>을 저술하지 않았다고 한다.[26] 그런데 진수가 태어나기 13년 전(220년)에 문제 조비가 조위의 초대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정씨 형제와 이들 일족의 남자들을 모두 처형했기에 자손이 남아있을 수가 있겠냐는 의문점이 있어 이 기록은 신빙성을 의심받는다.[27]
위의 내용에 이어서 <진수전>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壽父為馬謖參軍,謖為諸葛亮所誅,壽父亦坐被髡,諸葛瞻又輕壽。壽為亮立傳,謂亮將略非長,無應敵之才;言瞻惟工書,名過其實。議者以此少之。
진수의 부친이 마속의 참군(參軍)이었는데, 마속이 제갈량에게 처형당하고 진수의 부친 또한 연좌되어 곤형[28]을 당했으며,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 또한 진수를 경시했다. 진수가 <제갈량전>을 쓰며 평하길, 제갈량은 용병술에는 뛰어나지 않았으니, 적과 맞서는 데 재능이 없었다고 했다. 또한 제갈첨은 글씨나 잘 썼을 뿐인데, 실상에 비해 명성이 지나치다고 했다. 이러한 (개인적인 원한에 따른) 평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 《진서》(晉書) 권 82·<진수전>(陳壽傳) 열전 제 52 출처
《진서》에 나오는 정의 형제와 제갈 부자의 얘기는 각각 지인소설(志人小說)인 《어림》(語林)과 《세설신어》가 출전(出典)이다. 다만, 아래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이 《진서》의 기록들, 특히 정씨 일족에 대한 기록들은 사실 《진서》 는 세설신어를 많이 인용했는데, 세설신어 자체가 픽션이라서 이를 인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진수의 부친이 마속의 참군(參軍)이었는데, 마속이 제갈량에게 처형당하고 진수의 부친 또한 연좌되어 곤형[28]을 당했으며,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 또한 진수를 경시했다. 진수가 <제갈량전>을 쓰며 평하길, 제갈량은 용병술에는 뛰어나지 않았으니, 적과 맞서는 데 재능이 없었다고 했다. 또한 제갈첨은 글씨나 잘 썼을 뿐인데, 실상에 비해 명성이 지나치다고 했다. 이러한 (개인적인 원한에 따른) 평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 《진서》(晉書) 권 82·<진수전>(陳壽傳) 열전 제 52 출처
4. 진식의 아들?
진수가 230년에 제갈량에게 처형당한 촉의 장수인 진식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삼국지연의》의 명나라 판본에는 진수가 진식의 아들이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실인 양 퍼졌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이다. 하지만 진식이 처형당했다는 건 《삼국지연의》만의 이야기이며, 정사에서 진식은 3차 북벌 때 무도군(武都郡) 및 음평군(陰平郡)을 공격해 함락시킨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기록이 없다. 아니 애초에 진식이 《삼국지연의》에서 처형당한 시점인 4차 북벌은 그 자체가 《삼국지연의》의 허구다. 실제 제갈량의 북벌은 총 5차례인데 《삼국지연의》에서 6차례로 나오는 이유가 이 창작한 4차 북벌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즉 실제 4차 북벌은 《삼국지연의》의 5차 북벌이다. 설령 진짜 진식이 230년에 죽었다 쳐도 진수는 233년생이다. 즉, 진수는 진식의 아들이 아니다. 《정사 삼국지》의 제갈량에 대한 평가가 박한 이유가 진식이 제갈량에게 처형당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간혹 평역(評譯)된 《삼국지》에서 나오는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다.비슷한 얘기로 부친이 가정(街亭) 전투에서 패배해 참수당한 마속의 부하였기 때문에 곤형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진서》<진수전>에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긴 한데, 정사에는 진식이 가정 전투에 참전했다는 기록 또한 없다.
5. 미디어 믹스
생몰년도상의 문제로 보통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이외에는 서브컬처계에서 삼국지를 다룰 때 네임드로 다룰 이유가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5.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1 |
삼국지 13, 14 |
삼국지 5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삼국지의 저자라는 걸 강조하는 대사가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능력치는 그냥 정치력 하나만 봐줄 만하기 때문에 내정에나 써먹을 수 있는 평범한 문관이다. 삼국지 12편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29]
삼국지 DS 2[30]에서는 지력이 80에 정치력이 78인 군사형인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스페셜 무장이라서 얻으려면 조건을 클리어 해야 한다.
삼국지 5에서는 본편에서 첫 등장이라 그런지 능력치가 무력 31/지력 88/정치력 79/매력 60로 후하다. 특기는 고무, 수습, 내분, 혼란, 진화, 점술이다. 진식의 아들로 관계가 설정되어 있는데, 자기네들도 말이 안되는 걸 아는지 후기작에서는 부자 관계는 설정되어 있지 않다.[31] 근데 능력치는 C~D급이고, 등장하는 시기도 247년이라서 비중은 공기에 가깝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5/무력 22/지력 60/정치력 75. 병법으로는 혼란 뿐이지만 지력이 너무 낮다. 내정용으로나 쓰자.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5/무력 22/지력 60/정치력 71/매력 39에 특기는 혼란 단 1개 뿐. 장수별 엔딩 중에 사서 편찬 엔딩이 있는데, 이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을 달성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통일 당시 남아 있는 장수의 67% 이상과 관계가 면식 이상, 특기 지리 소유, 지력+정치 100 이상, 사서 1권 이상 보유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작 진수는 사서도 가지고 있지 않고, 지리 특기가 없기 때문에 그냥은 이 엔딩을 볼 수 없고 계략 경험과 첩보 경험을 각각 600과 400까지 올려야 하는 아스트랄한 상황이 발생한다.
삼국지 11에서 진수를 참수하면 유언으로 저 대사를 한다. 참고로 짤방의 대사는 문법이 이상하게 나와 있다. '제가 죽으면 누가 이 시대의 기록을 남긴단 말이냐'에서 '제가'를 '내가'로 혹은 '말이냐'를 '말입니까'로 바꾸면 자연스러워진다.[32]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2/무력 22/지력 60/정치력 75다. 전법이 기속강화인데 병기특성은 창병과 궁병 B, 기병 C다, 특기는 문화 7, 언변 7, 전수특기는 문화다. 그가 정사의 저자였음을 감안하면 특기와 전수특기는 적절히 고증된 편. 내정용으로 굴리면 적당하다. 일러스트는 정사 삼국지를 집필할 때의 모습으로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오른손으로 붓을 든 채 왼손을 턱에 올리고 있다. 특이하게도 지력이 60임에도 불구하고 언변이 무려 7이나 된다. PK에서는 엔딩이 위명별로 달라지는데, 신기묘산이나 국사 위명을 달고 엔딩을 보면 X국지 라는 책을 집필하는 대사가 나오므로 진수로 이 엔딩을 보는 것이 이 게임의 진엔딩일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출생 연도가 233년으로 너무 늦기 때문에 영웅집결이나 가상 시나리오인 강유북벌에서만 선택할 수 있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12, 무력 22, 지력 60, 정치 75, 매력 49이며 개성은 사관, 주의는 예교, 정책은 태학 Lv 3, 진형은 방원, 전법은 없고 친애무장은 장화, 초주, 혐오무장은 제갈첨, 황호다.
5.2.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나라 세력이 추가된 6편 기점으로 클론무장 출연을 한다. 또한 인식은 하고 있는지 진삼국무쌍 6 엠파이어스에서 특수 시나리오에서 에디트 무장으로 입체등록 해준 적이 있다. 메인 컬러는 출신지인 촉나라를 따라갔으며 무기는 요필이라 하여 붓을 사용한다.[33] 무기배치는 역사가 특징을 의식한 배치로 보인다.5.3. 삼국전투기
최훈이 고도의 촉까라고 까고 있다. 삼로 전투(11)에서 상조가 죽은 컷 다음 컷에 삼국지 11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염소 수염에 회색 한푸를 입고 있으니 삼국지 11의 모습이 맞다. 또한 영안 전투(2)에서도 나헌의 공적 중 하나가 진수를 추천하여 진나라에서 중용될 수 있게 해준 것이라고 하며 다시 등장한다. 그 덕택에 삼국지도 쓰여질 수 있었으니. 다만 작 중에서는 진수가 자신이 굳이 없었어도 다른 사람이 삼국지를 썼을 거라고 말하며 겸손하게 반응한다.5.4. SD건담 삼국전[34]
진수 자쿠로 등장한 것이 그나마 있는 희귀한 예제 중 하나.[1] 100년여의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된 데다가 구품관인제를 제외하고는 후대에 영향을 미친 게 없기 때문에 중국사에서 배울 때는 그냥 넘어가는 수준이다.[2] 물론 이 시대 삼국이 주변의 다양한 이민족들과 교류하고 다툼으로 결국 후대의 5호 16국 시대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삼국시대의 의의는 그 지속 기간에 비해서 적지 않다.[3] 《진서》권 82·열전 제 52<진수전> : 宦人黃皓專弄威權,大臣皆曲意附之,壽獨不為之屈,由是屢被譴黜。출처[4] 《진서》권 82·열전 제 52<진수전> : 張華深善之,謂壽曰:"當以《晉書》相付耳。"출처[5] 封禪 : 고대 중국에서 군주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어 즉위를 고하던 의식.[6] 《진서》권 82·열전 제 52<진수전> : "昔漢武帝詔曰:'司馬相如病甚,可遣悉取其書。' 使者得其遺書,言封禪事,天子異焉。臣等案:故治書侍御史陳壽作《三國志》,辭多勸誡,明乎得失,有益風化,雖文豔不若相如,而質直過之,願垂採錄。" 於是詔下河南尹、洛陽令,就家寫其書。출처[7] 과거에 역사서를 집필, 편찬하는 사관들은 단순히 역사서를 긁어 모아 복사 붙여넣기하는 자들이 아닌 해당 역사에 대한 고금의 사례와 사상들을 가져와 다양한 논평들을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사관으로 이름을 떨쳤다는 것은 학문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8] 이런 주석에 인용된 자료들은 진수의 본문에 비해 딱히 신빙성이 높지 않은데도 배송지 주석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정사취급을 받기도 한다.[9] 진수는 조조나 유비에 대해 모두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10] 조위의 창시자 조조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우호적이다. 다만 조비부터는 비판적인 시각이 조금씩 들어가며, 그 이후의 조씨 황제에 대해서는 사마씨 정권의 시각에거 기술하고 있다.[11] <촉서> 권 15 -양희전-, 즉 -등장종양전-(鄧張宗楊傳)에 전문을 수록했다.[12] 정사삼국지에는 사마의, 사마소, 사마사, 사마염에 대한 인물평은 없다. 사마염 같은 경우는 삼국지가 완성되기 전에 붕어하지 않아서 평가를 할 수도 없었다.[13] 진수가 사마씨에게 유리하게 않았다고 해도 서진시절 관청이 동원된 필사과정에서 사마씨에게 유리한 편집이 있었을 것이다.[14] 일부 삼덕들이 조조측이 벌인 서주대학살이 연의에서 빠진 것을 두고 나관중의 영웅사관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사실 정사에도 이사건은 모호하게 언급되었으니, 나관중을 탓하기보다도 조위를 계승한 서진정권의 입장에서 사건을 기술한 진수를 탓하는게 맞다. 진수는 이 사건을 두고 조조가 도겸군을 격파하고 만명을 죽였다고 기술했는데, 여기에 주를 단 배송지는 손성의 견해를 인용했다. 손성은 "무릇 죄를 벌주고 백성을 달래는 것은 옛날의 다스림인데, 도겸의 죄를 그 수하에 묻는건 지나친 일이다 (夫伐罪吊民,古之令執;罪謙之由,而残其属部,過矣)"라고 밝혀 조조군이 무고한 이들을 학살했음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다. 이 사건이 명백히 조조측이 벌인 학살로 최초로 기록한 것은 정사삼국지보다 150년정도지난 유송시대에 저술한 후한서이다. 아무래도 유송은 한나라 방계 유씨가 세웠기 때문에, 조조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서주대학살이라는 용어 자체는 현대작가인 이중톈이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용어이다.[15] 다만 사마씨는 조위 정권에서 활약하고 조위정권을 찬탈했기 때문에, 후한서에는 사마씨에 대한 불리한 기술은 거의 없다. 사실 사마씨의 시조인 사마의의 활약은 후한보다는 조위가 시작된 조비 시절부터 두드러지니 후한서에는 사마씨가 나올 여지는 거의 없는 셈이다.[16] 소하는 말할 것도 없고 관중은 제환공을 도와 춘추시대에 첫번째로 패업을 이룬 바 있다. 이후에 당나라의 위징이나 명나라의 유기같은 위대한 창업공신들이 나오지만, 서진시대 기준으로는 관중과 소하가 최고의 재상이었다.[17] 훗날 원준도 비슷한 논리를 펼쳤지만 조선시대 간서치로 유명한 이덕무는 '제갈량이 임기응변이 장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진수의 여론(餘論)을 모은 것 뿐이지 제갈량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라고 진수와 원준을 비판했다.[18] 대표적으로 위나라의 경우엔 오자양장에 속하는 장수들의 사적 상당부분이 유실되었다고 진수가 전하고 있다.[19] 유선이 극정의 조언을 받아들여 사마소 앞에서 우는척하려다가 코메디를 한 사건을 봐도, 이들은 사마씨의 감시하에 놓여 있었지만 인적으로 계속 교류를 한 것으로 보인다.[20] 참고로 저들 중 제갈경은 서진에서 강주자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강주라는 행정구역은 291년에 신설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최소 291년에는 제갈경이 생존해 있었다는 소리이다.[21] 실제 분량상으로는 위촉오가 4:1:2 비율 정도가 되며 한국어 번역본 정사 삼국지도 이 비율에 맞춰서 번역본을 간행하는 편이다.[22] 그리고 제갈첨의 생애를 보면 이건 명백한 사실이다. 제갈첨은 현재도 자신의 업적보다는 제갈량의 아들로 더 알려져 있다.[23] 《화양국지》의 저자다.[24] 斛 : 고대 부피ㆍ무게 단위. 당나라 시기까지는 민간에서 '섬'을 일컫는 속칭으로, 1곡 = 1섬 = 10말 = 120근이었다. 송나라 이후로는 1곡 = 5말로 바뀌어, 2곡 = 1섬이 된다.[25] 섬과 석은 같은 단위인데, 당시 태수나 좌장군의 녹봉이 2,000석이었다. 즉 1,000곡이면 지방의 장군이나 고위급 장성 1년 연봉에 절반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이다.[26] 《진서》(晉書) · <진수전>(陳壽傳) : 丁儀、丁廙有盛名於魏,壽謂其子曰:"可覓千斛米見與,當為尊公作佳傳。" 丁不與之,竟不為立傳。출처[27] 《삼국지》권 19·<위서>·-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 文帝即王位,誅丁儀、丁廙并其男口。출처[28] 髡刑 : 고대에 죄인의 머리카락 전부 또는 일부분을 밀어버리는 형벌.[29] 삼국지 12의 경우 삭제된 상태인데다가 PK에서도 끝내 추가되지 않았었다.[30] 삼국지 4를 닌텐도 게임으로 리메이크한 게임이다.[31] 대신 삼국지 11에선 같은 집안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32] 삼국지 11 PK의 경우엔 한국에서 정식 발매가 안 됐기 때문에 한글판이 없다. 그래서 유저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한글패치만이 존재하는데, 그 양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약 10년도 더 전에 미완성인 채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중요도가 좀 떨어지는 부분은 아예 한글화가 되어 있지 않기도 하고, 중요한 대사 부분에서도 저렇게 문법이나 철자가 어색한 경우가 적지 않다. 작업량이 상당히 많아서 최소 몇 달은 잡아야 가능한 작업인데, 막말로 후원금을 받는 일도 아닌 재능기부의 영역인지라 전문가들도 조금 손대다가 결국 GG치고 포기한 것이 오늘날의 삼국지 11 PK 한글패치인 것이다.[33] 마대의 EX무기. 참고로 진삼국무쌍 7 엠파이어스의 한 유저 창작 모드에선 김부식이 같은 무기를 사용한다. 역시 역사가란 설정을 반영한 것이다.[34] 21세기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