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8 04:36:52

순욱(서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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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ece5b6> 서진의 대신
제북성후(濟北成侯)
荀勗 | 순욱
작호 안양현자(安陽縣子) → 제북군후(濟北郡侯)
시호 (成)
이름 순욱(荀勗)
공증(公曾) / 공로(公魯)
부친 순힐(荀肸)
조부 순비(荀棐)
증조부 순상(荀爽)
출생 ? ~ 289년
출신 예주 영천군(潁川郡) 영음현(潁陰縣)
국적 위(魏) → 진(晉)
1. 개요2. 내력3. 생애4. 기타5. 일화6. 중경신부7.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서진의 정치가로 진서에 따르면 자는 공증(公曾), 순씨가전에 따르면 자는 공로(公魯). 사마염의 측근으로 한때 권신에 준하는 권력을 취했으나, 정권을 농단하며 거만해지자 사마염에게 밉보여 정치권에서 소외당하게 된다.

가충 등과 함께 서진을 대표하는 간신이다. 사마경이 흑화하게 만드는 장본인으로, 사실상 팔왕의 난의 장본인들 중 하나다.

2. 내력

증조부는 순상, 즉 조조의 참모 순욱, 순유와 같은 영천 순씨 일족이다.[1] 또한 어머니는 종요의 딸, 즉 종회의 누나, 딸은 훗날 서진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민제 사마업의 어머니이니 민제의 외조부가 된다. 예주 영천군 영음현 사람.

3. 생애

위의 신하였지만 사마소의 측근으로 활약하며 서진 건국에 일조했으며, 사마소가 촉 정벌을 결심하고 적임자를 묻자 등애와 종회를 추천했다. 양호를 정벌할 것을 주장하자 가충과 함께 이에 반대했다.

또한 진의 제도인 태시율령(泰始律令)의 제정에 관여하는 등 무제의 정치에 공헌했으며, 동료 장화가 진수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승진시킬 것을 사마염에게 상주했을 때 진수가 저술한 위지(魏志)의 내용에 불만을 품고 무제(사마염)에게 참언해 진수를 한직으로 내쫓았다. 음악에도 조예가 있었던 순욱은 음률에 대해 완함과 논쟁을 벌였는데, 완함의 상대가 되지 못하자 이에 불만을 품어 완함도 한직으로 내쫓았다.

이후에도 사마염의 최측근으로 중용되었지만 거만한 태도 등으로 인해 결국 무제의 총애를 잃어 상서(尙書)로 승진하고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으며, 마지막에는 삼공 다음가는 벼슬인 의동삼사(儀同三司)의 대우를 받았으나 정치 일선에서 소외되어 실의에 빠져 쓰러졌다.

289년에 죽었고 작위는 제북후였다가 죽은 뒤의 시호는 성후(成候).

4. 기타

재주와 생각이 있어서 임금의 속마음을 잘 살폈고 이리하여서 총애를 굳게 받을 수 있었다고 하며, 오랫동안 중서성에 일하면서 기밀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관리했다. 상서로 승진하게 되자 실망했지만 어떤 사람이 축하하자 "나의 봉황이 노니는 연못을 빼앗겼는데, 여러분들은 어찌하여 경하한다고 하시오?"라고 대답했는데, 상서성은 전국 민정을 총괄하는 정책의 실행기관, 중서성은 황제 가까이에 있으면서 정책을 결정하는 기관이라 이런 대답을 한 것이다. 일단 서진의 초대 중서감이 그런 대호족 세력의 간판과도 같은 순씨 가문의 순욱이었고,그 이후에도 (장화를 제외하면) 그 자리를 거쳐간 인물들은 화흠의 손자 화이, 노식의 현손 노심 등 쟁쟁한 호족 사대부 가문의 후예들.

가남풍이 질투가 심해 손수 몇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난 적이 있어 풍담, 양요, 조찬 등과 함께 가남풍을 구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의 아들은 회남왕 사마윤의 문학과 조왕 사마륜의 참군을 지낸 순조(荀組)(258~322), 상서복야를 지낸 순번(荀藩)(245~313)이 있다.[2]

많은 악행들 대부분 동료 대신인 풍담과 함께했다. 흙수저 출신으로 사마염의 측근에 오른 장화가 주전파로서 공을 차지해 사랑을 받자 곧바로 모함하여 좌천시키고, 추후 장화의 됨됨이를 높이 산 사마염이 장화를 다시 불러들이려 하자, 이에 풍담이 종회를 예로 들며 장화를 모함하여 끝끝내 조정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병크로는, 사마소의 차남이자 대소신려들에게 명망높은 사마유가 방해가 되자 풍담과 함께 모함하여 축출한 것인데, 평소에도 몸이 좋지않은 사마유는 형인 사마염에 대한 원망으로 깊이 상심해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게 된다.[3] 이렇게 끝나면 상관이 없으나 문제는 이것이 원인이 되어 훗날 서진이 얼마 못가 망하게 되는 하나의 기폭제가 되버린다... 사마유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가 병사한 날을 기점으로 가슴속에 한을 품고 복수심에 가득차 도광양회하며 기다리다, 훗날 사마륜과 함께 팔왕의 난의 서막을 열었으니 이 자가 바로 제헌왕 사마경이다. 비록 순욱이 말년에 사마염에게 팽 당하여 쓸쓸히 여생을 보내게 되나 사마경의 추후 행보를 보면 팔왕의 난이 발생하기 십여년 전 세상을 떠난 게 본의 아니게 행운이었을 것이다. [4]

5. 일화

세설신어에 에피소드가 전한다. 순욱이 사마염의 잔칫상에서 죽순 반찬을 맛보더니 "이 죽순은 고생한 나무를 써서 요리한 것이로군요." 라고 했다는 일화다. 실제로 조용히 사람을 보내 알아봤더니 과연 오래된 수레바퀴를 쪼개 땔감으로 쓴 것이었다고.

6. 중경신부

문헌정보학에 관련된 역사에서는 중요한 인물로 목록을 4가지로 나누는 분류법인 사부분류법의 과도기적인 단계에 해당하는 중경신부(中經新簿)를 수록한 사람이다. 동양에 있어서 도서분류법은 칠분법으로 엮어진 ≪칠략 七略≫에서 비롯한다. 한나라 시기에는 도서분류법이 칠분법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이후 3세기 후기에 와서 사분법(四分法)이 쓰여지기 시작하여 육조시대에 성행하자 칠분법은 쇠퇴하였다. 사분법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3세기에 위나라의 정묵(鄭默)이 엮은 ≪중경부 中經簿≫와 진나라의 순욱이 엮은 ≪중경신부≫에서 '갑(甲),을(乙),병(丙),정(丁)'의 차례로 분류한 것이 그 효시이며 이 사분법의 주제순은 '경(經),자(子),사(史),집(集)'이었고, 4세기 초기인 동진원제 때 이충(李充)이 엮은 장서목록에 이르러 비로소 ‘경,사,자,집‘의 순서로 되었다. 그 뒤 ≪수서≫ 경적지(經籍志)에 이르러서는 분류상의 순서표시인 ‘갑,을,병,정‘을 사용하지 않고 바로 ‘경,사,자,집‘의 명칭을 사용하였으므로, 여기에서 사부분류법의 토대가 처음으로 마련된 셈이다.

7. 미디어 믹스

7.1. 삼국지 시리즈

파일:external/kongming.net/654-Xun-Xu.jpg
삼국지 8~11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369.jpg
삼국지 13, 14

8탄부터 등장하지만, 연의에서 등애와 종회를 추천하는 부분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게임상의 취급은 좋지 않다. 거기다가 사마염의 총애를 잃었다는 일화를 반영하여 매력이 낮은 편이다.[5]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5/무력 19/지력 78/정치력 74. 덫, 매도를 가지고 있다. 혼란이 없는 게 아쉬운 점.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0/무력 16/지력 77/정치력 76/매력 41에 상업, 반목, 명사 특기를 가지고 있다. 통솔력이 10이라 반목 특기는 활용할 일이 없을 것이고, 후방에서 내정 셔틀로나 쓰면 된다.

삼국지 11에서는 삼국지 10 때의 능력치보다 정치력이 내려간 대신 매력이 올라 통솔력 8/무력 19/지력 77/정치력 72/매력 53의 능력치로 나온다.

삼국지 12에서는 짤렸다가 삼국지 13에서 복귀했는데 능력치는 매력만 빠진 상태에서 전작과 같으며 특기는 상업 3, 문화 2, 교섭 1. 전수특기는 상업으로 전법은 기방강화. 일러스트는 손을 올리면서 사마소에게 진언하고 있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8, 무력 16, 지력 77, 정치 72, 매력 45로 전작에 비해 무력이 3 하락했다. 개성은 악주, 진흥, 문화, 인맥, 소심, 주의는 명리, 정책은 태학 Lv 3, 진형은 학익, 전법은 혼란, 매성, 친애무장은 가충, 사마소, 사마염, 순상, 종요, 혐오무장은 장화다.

7.2. 삼국전투기

도박묵시록 카이지무라오카 타카시[6]로 등장시켰다. 검각 전투 (2)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소개컷에서는 찌질한놈 이라고 까였다.

검각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사마소가 강유가 자꾸 자신들을 건드리니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어떤 대신[7]이 자객을 보내 강유를 암살하자고 하자 그건 좋지 못한 방법이라고 반대하며 대신 군대를 보내 촉을 정벌하자고 주장했다. 역도에게 뒷공작이 아닌 제대로 된 힘을 보여주는 게 바로 대국의 풍모 아니겠냐고 말했고 이에 사마소가 크게 환영했다고 묘사되었다.

독발수기능의 난 편에서는 졸지에 서량으로 떠나게 생겨 좌절하는 가충에게 가충의 딸을 황태자비로 만들고 그 핑계로 서량행을 피하면 된다고 제안했다.[8] 그리고 가충이 이에 동의하며 가충의 딸을 황태자비로 만들기 위한 작전을 실행하였고, 성공시켰다.

삼국 통일 편에서는 가충 일파로서 가충과 함께 오 정벌을 반대하는 모습으로 간간히 등장한다.


[1] 조조의 참모인 순욱과는 손자뻘이다. 계보를 보면 순숙-순곤-순욱, 순숙-순상-순비-순힐로 순숙까지는 조상이 같다. 간단히 말하면 친할아버지가 한나라때 순욱의 사촌형제다.[2] 순번이 형 순조가 동생인데 둘 다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 가운데서 절대 주변인으로 볼 수 없는 삶을 살았음에도. 그 중심에서 살아남아서 제 명에 죽은 걸 보면 아비를 닮아 처세가 능숙하긴 했던 모양이다. 두 사람 다 평은 진서에서 대놓고 흉신이라 평가받는 아버지보다는 좋은 편이었다.[3] 이 사망도 워낙 타이밍이 묘하다 보니 독살당했다는 설이 파다하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가남풍이 꼽힌다.[4] 다만 그의 아들인 순번과 순조는 조왕 사마륜을 섬기고도 어찌어찌 살아남은데다 나중에 제왕 사마경을 축출할 때 공까지 세운다. 훗날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함락되었을 때 저 두 사람은 조카인 사마업을 데리고 나와 장안에서 즉위시키는데, 그 이후에 염정에게 밀려나며 장안을 떠나 개봉에서 터를 잡게 된다. 형 순번은 얼마 후 죽기는 했지만 70이 가까워 제 명까지 살았고, 동생도 장안을 떠난 덕에 험한 꼴을 좀 덜 보고 제 명까지 살다 죽게 되었으니 생명력이 꽤 좋은 편이었다.[5] 같이 어울려다니던 인물이 풍담, 가충 뭐 이런식인데다 행보도 걔네랑 비슷해서 그 시대에도 애시당초 평판이 좋지 않았다.[6] 무라오카 자체는 이전 전투외편 1에서 무릉의 이민족으로도 한 번 나왔었다.[7] 도박묵시록 카이지의 미요시로 패러디되었으며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8] 자기들 일파의 구심점이 가충이었기에 적극적으로 가충을 도왔다고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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