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07 21:43:02

가남풍

파일:진 예서.svg
사마진 황후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873C0 0%, #3797E8 20%, #3797E8 80%, #1873C0); color: #ece5b6;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정식 재위
<rowcolor=#ece5b6> 무제 후 혜제 후
무원황후 무도황후 혜황후 혜헌황후
<rowcolor=#ece5b6> 회제 후 명제 후 성제 후 강제 후
회황후 명목황후 성공황후 강헌황후
<rowcolor=#ece5b6> 목제 후 애제 후 폐제 후 효무제 후
목장황후 애정황후 효황후 효무정황후
<rowcolor=#ece5b6> 안제 후 공제 후
안희황후 공사황후
추존 재위
<rowcolor=#ece5b6> 선제 후 경제 후
선목황후 경회황후 폐후 오씨 경헌황후
<rowcolor=#ece5b6> 문제 후 무제 후 원제 후
문명황후 회태후 원경황후 간문선태후
<rowcolor=#ece5b6> 간문제 후 효무제 후
간문순황후 효무문태후 안덕태후
}}}}}}}}}

<colbgcolor=#3797e8><colcolor=#ece5b6>
서진 혜제의 폐후
가남풍 | 賈南風
출생 257년
조위 사례 하동군 양릉현
(現 허난성 린펀시 샹펀현)
사망 300년 5월 13일 (향년 44세)
서진 사례 하남군 낙양 황궁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서진 황태자비
272년 ~ 290년 5월 16일
서진 황후
290년 5월 16일 ~ 300년 5월 13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3797e8><colcolor=#ece5b6> 본관 평양 가씨
남풍(南風)
부모 부친 노무공 가충
(魯武公 賈充, 217 ~ 282)
모친 광성군 곽괴
(廣城君 郭槐, 237 ~ 296)
배우자 혜황제
자녀 4녀
아명 시(峕)
남풍(南風)
작호 황태자비(皇太子妃)
→ 황후(皇后) → 폐후(廢后)
존호 혜황후(惠皇后)
}}}}}}}}} ||

1. 개요2. 이름 논란3. 생애4. 평가
4.1. 긍정적 평가4.2. 부정적 평가
5. 미디어 믹스6. 둘러보기

1. 개요

진혜제 사마충의 황후이자 아명은 시(峕)로 존호는 혜황후(惠皇后).[1] 아버지는 가충, 어머니곽괴사례 하동군 양릉현 사람.

2. 이름 논란

세설신어전소》(世說新語箋疏)에 인용된 왕은(王隐)의《진서》는 가황후의 가 남풍이라고 하고있다. 또한《태평어람》이 인용한《진서》에서도 당나라에서 편찬한《진서》와는 다른《진서》를 인용한 모양인데도 가황후의 자가 남풍이라고 하고있다. 근데《태평어람》에 적은 또 다른 왕은의《진서》구절에는 가 남풍이라고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당나라에서 편찬된《진서》[2]〈후비전〉에는 가황후의 휘가 남풍이라고 적혀 있다. 한마디로 뒤죽박죽이다.

당나라에서 편찬한《진서》는 사마씨의 진나라가 멸망한 뒤에 편찬되었고 오류가 많은 걸로 유명한 데 반해, 왕은은 진나라 당대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진서》를 따라 남풍은 휘가 아니라 라고 보는게 정설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왕은의《진서》는 이렇듯, 가남풍의 이름에 대해서 앞뒤가 안 맞는 서술을 하고 있으므로 지금 이 문제에 관해 관찬《진서》보다 신뢰성이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워낙 관찬《진서》를 못 믿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듯하다.

일단 당대에 여성의 이름, 그것도 진짜 이름인 휘를 언급하는 것은 매우 꺼려지는 일이었기에[3] 그녀의 자나 호가 아닌 휘가 실제로 남풍이었을 확률은 상당히 낮다고 볼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물론《진서》를 비롯해 남북조 시대 황후들의 휘는 다 사서에 기록되었으므로 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장 위에 나온 황후들의 휘만 봐도 그렇다.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케이스는 이름과 자가 같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는 이름을 피휘하기 지은것인데 무슨 얘기냐 하겠지만 후대 사마씨 종실 가운데서도 이름과 자가 같은 사마도자의 사례가 있고, 가남풍 역시 사서들마다 이름인지 자인지 갈피를 못잡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면 이름 혼선이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오죽했으면 중국어 위키백과도 '아마도 이름과 자가 모두 남풍이었을 것이다(或名及字皆為南風。).'고 쓰고 있다. 사마도자의 케이스는 워낙 특이 케이스고 따라서 이 말대로면 가남풍도 상당히 괴짜 기질이 있는 사람이란 얘기가 될 것이다.

3. 생애

진무제 사마염은 태자비를 고를 때 당시 권신이었던 위관[4]의 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 독발수기능을 토벌하러 떠나야했던 가충순의순욱에게 자신의 딸을 추천하도록 시켰다.

그러나 사마염은 위관의 집안은 현명하고 자식이 많으며, 아름답고 키가 크며 피부가 하얗지만, 가충의 집안은 지나치게 시기하며 아들이 없다시피 하고, 추하며 키가 작고 피부가 까맣다는 이유로 위관의 딸을 선택하고자 했다.[5]

그러나 황후인 양염과 순의, 순욱 등이 거듭해서 가충의 딸의 현명함을 칭찬하자 사마염은 마음을 돌려 가충의 딸을 태자비로 선택했다.

원래는 가남풍의 여동생이자 사마충보다 한 살 어렸던 가오(賈午)를 태자비로 삼으려고 했으나, 가오는 나이가 어려서 성인 옷을 입지 못했기에 가남풍이 내정되었다. 결국 권신인 아버지 가충 덕에 270년인 당시 15세의 나이에 사마염의 아들인 13세의 사마충결혼했는데[6] 질투가 심해 손수 몇 사람을 죽였고 임신한 시첩에게 창을 던져 그 아이가 칼날에 맞아 유산한 일도 있었다. 이에 사마염이 화가 나서 낙양 북서쪽에 있던 금용성을 수리하고 가남풍을 폐비시켜 그곳에 유폐하려고 했지만 순욱, 풍담, 양요, 조찬 등이 "어려서 저러는 거고 나이 먹으면 알아서 나아질 거다"라며 말려 폐비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결혼한 황자 사마충이 워낙 백치이고 어리석은 인물이라[7] 사마염은 아들이 나라를 망칠까 불안해서 자기 동생인 제왕 사마유에게 권좌를 물려줄까 고민도 했지만 결국은 마음을 정해 청주로 사마유를 내쫓았고 사마유는 가는 도중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마염은 아들이 나라를 맡을 만한지 시험이라도 한 번 보게 봐야겠다고 생각해 사마충에게 시험 문제를 풀게 했다. 그러자 가남풍은 시험문제를 출제한 장홍에게 뇌물을 먹이고 시험답안을 대신 쓰게 해[8] 사마염을 속였고 사마충을 정식 황태자로 인정하게 만든다. 거기다 사마충의 아들이자 황손 사마휼이 총명했기에 사마염은 안심했다.

사마염이 죽고 290년에 사마충이 황제가 된 뒤 선제의 외척인 양준이 국가대권을 쥐자 291년에 가남풍은 초왕 사마위에게 밀서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황도로 올라오게 해 양준과 그 일족을 죽였으며, 사마위를 영태자소부로 임명했다가 모함을 씌워 죽이고는 마침내 나라의 대권을 차지했다. 여기에다 양준의 딸인 의붓시어머니[9] 무도황후 양지를 폐서인하고 친모인 방씨와 함께 영녕궁에 감금했다가, 이후 방씨를 처형했다. 양지는 어머니를 구명하고자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통곡하면서, 시어머니 체면에 며느리에게 '소첩'을 자칭하고 머리를 조아려 가며 어머니를 살려달라 애원했지만, 가남풍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방씨가 처형당한 뒤 절망한 양지는 곡기를 끊고 스스로 굶어 죽게 된다.

이 일도 가남풍이 대단히 배은망덕한 일을 한 것인데, 태자비 시절 가남풍의 투기가 매우 심해서 사마염이 폐서인하려 하자 양지가 이를 말리고 '가남풍이 아직 어리니 질투가 심한 것이다.'라고 변명하고 가남풍에게는 '황제께서 심기가 불편한 것 같으니 괜히 튀는 행동을 말고 행실을 반듯하게 하게나.'고 여러 번 당부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황후인 시어머니가 자기 자리를 지켜주고 도와준 것인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황후가 무제에게 참소해 자신을 깎아내리는 걸로 생각해 엉뚱하게 원한을 품어서 이렇게 잔인한 처사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또 양태후가 굶어죽고 나니 무섭긴 했는지, 저승에서 선제에게 호소할까 두려워 시체를 거꾸로 엎어서 빈소를 차렸고 귀신 쫓는 부적과 약물 등을 쓰기도 했다.

남편인 황제는 어리석은 백치였으므로 가남풍은 저잣거리의 미소년이나 절륜한 무관, 궁중 의원들과 놀아나며 음란한 사생활을 즐겼다. 미소년들은 밤에 몰래 거리에서 납치해 침실로 데려와 즐긴 뒤 목 졸라 죽여서 상자에 넣어 강에다 버리곤 했다고 한다. 이런 행실이 얼마나 심했는지 정략적으로 가남풍과 협조 관계였던 가모, 배위, 장화 등이 괴로워하며 고뇌할 정도였다. 그들은 가남풍을 폐위하는 걸 의논해봤지만 사마충이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 그만두었다.

관련 일화로, 낙양성 남쪽의 어느 미소년이 가남풍에게 끌려갔는데, 가남풍이 그를 특히나 아껴 죽이지 않고 비싼 선물들을 주며 풀어줬다. 그런데 그 소년이 갑자기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자 도난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을 받아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그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가남풍이 드물게 살려준 이로 알아채서 풀어줬다고 한다.

299년에 산기상시 가밀이 동궁에서 강의할 때 태자(사마휼)에 대해 오만하게 굴자 성도왕 사마영이 이를 보고 질책했고 가밀이 화가 나서 이를 얘기하자 사마영을 쫓아내 평북장군으로 을 지키게 했다. 가밀은 태자 사마휼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반역의 뜻이 담긴 글을 쓰게 했다가 그 글로 모함해서 사마휼을 폐태자로 만들었다. 이후 가남풍은 사람을 시켜 사마휼을 죽이려다가 죽지 않자 약 찧는 절구로 때려 죽였다.[10] 이는 가남풍의 최악의 악수가 되고, 서진의 이후를 결정짓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태자 사마휼이 살해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다른 황족들과 제후들이 일제히 난을 일으키게 되었다. 300년, 마침내 조왕 사마륜과 제왕 사마경이 군대를 이끌고 황도로 입성해 가남풍을 붙잡아다 폐위시켰다. 가남풍은 멀리 있는 혜제에게 “폐하께서 아내를 두셨다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폐위시키려 하시니, 폐하께서도 곧 폐위될 것입니다.”라고 외쳤고, 끌려가는 도중 사마경에게 "누가 계획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사마경이 "양왕조왕이오."라고 답하자 가남풍은 "개를 묶어 둘 때에는 마땅히 목을 줄로 묶어놓아야 하는데, 도리어 꼬리를 묶어 두었으니 어찌 그렇게 되지 않으랴!”라며 한탄했다.

여름 4월 9일에 사마륜은 조서를 위조해서 가남풍에게 독인 금설주를 마시고 자결하도록 했다. 가남풍은 독약을 강제로 마신 뒤 사마륜을 역적이라고 비난하며 피를 토하고 죽었는데 44세였다. 그녀의 일족은 멸족당했고 이 반란이 팔왕의 난의 시발점이 되었다.

가남풍이 주살된 후에는 상서우복야 양현지의 딸 양씨(양헌용)이 새 황후가 됐다.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비록 암주(혜제)와 학후(가남풍)[11]의 조정이라고 간주하기도 하나, 천하는 이와 같이 편안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백성들 살기에는 좋았다는 얘기가 존재한다.

중국의 많은 왕조에서 자신의 위세 과시나 유흥을 목적으로 과도한 증세를 시도하거나 지나친 부역을 부과해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암군들이 적지 않았던 걸 보면, 저 문구는 적어도 가남풍 시절에는 그런 학정이 없었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백성들을 힘들게 할 대형 사업이 거의 없었다. 즉 백성들만큼은 착취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일부에서는 가남풍을 황족 제후들과 외척들로부터 황권을 굳건히 지킨 여걸로서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선황의 유조까지 숨기며 황궁을 차지하고 앉았던 권신 양준을 포함한 정적을 적절히 제거하며 사마충 같은 바보 황제의 제위를 꽤 오래 지키게 해 준 건 정치적 감각 없이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12]

또, 적절한 시기마다 인재 기용을 대단히 안정적으로 한 점도 장점이다.[13] 아이러니하게도 가남풍은 여남왕 사마량이나 위관, 장화 등 명성과 식견을 두루 가진 정치가들을 적시에 기용했다. 심지어 인재 기용은 대체로 아주 반듯한 인물 위주로 했다. 더구나 장화는 가남풍의 아버지인 가충과는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다. 네 편 내 편을 가리지 않고 정치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높여줄 사람보다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더라도 올곧은 사람을 써서 내치를 안정시킨 다음에, 자신과 대립하게 되면 그때 가서 차도살인하거나 쫓아내는 식으로 숙청했다. 그리고 이럴 때마다 가남풍은 교활한 성격을 살려 특히 사람들 사이의 원한관계나 심리를 잘 이용했다.

가남풍의 일반적인 인식이 '나라를 망친 추녀'다 보니 흔히들 간과하는 사실이 있는데 가남풍은 그야말로 혼돈 파괴 망가였던 당시 상황에서 국경지대가 약간 시끄러웠던 정도만 제외하면 10년 가까이 평온하고 안정적인 시국을 유지했다. 물론 삼국을 통일한 사마염의 체제를 이어받은 것 뿐이라는 비판도 있으나 어찌 됐건 권력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그 권위의 사용에 반발이 컸을 여인의 몸으로 뛰어난 인선을 통해 이 체제를 영리하게 운영해낸 건 탁월한 점이다.

몰락의 시발점인 사마휼 살해 건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정치적 자살이었지만, 가남풍과 사마휼의 사이가 거의 파탄 수준이었던 것은 감안해야한다. 이렇게 정실 황후인 자신과 후궁 소생 태자 간의 사이가 나쁘다면 가남풍 본인이 적자 아들을 낳고 이를 핑계로 태자를 교체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가남풍은 줄줄히 딸만 낳았다. 게다가 더 이상 생리적으로 임신을 하지 못하는 나이가 점점 다가오자[14] 이미 시어머니인 양지를 폐위시키고 죽였을 정도로 막장막가파였으니 초조함에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저질러버렸을 수도 있다. 사마휼이 황제가 되면 자기가 몰락하는 건 뻔하니 정치적인 판단으로 보면 납득이 안 가는 수준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팔왕의 난의 전개를 보면 가남풍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엔 팔왕의 난 주동자인 황족들이 가남풍 못지 않게 막장이었고[15] 되려 가남풍 같이 권모술수에 능하고 세상을 꿰뚫어보는 사리에 밝은 사람이 중앙정부에서 황제를 비호해 주었기 때문에 그 동안은 황족들이 가남풍을 두려워하여 감히 난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하면서 옹호해 주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혜제 사마충은 가남풍이 죽은 뒤 폐위당했다가 복위되었다가 하며 생명의 위협까지 겪게 된다.

가남풍을 재평가하고자 하는 사람 중 일부는 조선 문정왕후의 경우처럼 여성이 권력을 가졌다는 자체를 몹시 싫어한 유학자 사관들이 가남풍의 행적을 왜곡해 의도적으로 악녀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장 진서에는 가남풍이 "미소년들과 하루가 멀다하고 놀아날 정도로 음란했다, 못생기고 성품이 포악했다"라고 적혀있으나 이런 종류 가십은 좀 가려들을 필요가 있다. 비판 항목에서도 지적하는 바와 같이 진서는 사마진 왕조 당시 인물들을 폄훼하기 위해 온갖 가십거리를 검증도 안하고 무분별하게 넣은 사서로 굉장히 악명이 높은데다가, 전근대에 규방에 있는 왕실 여성 권력자를 폄훼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성품이 나쁘고 음란하여 남자들과 놀아났다'는 도덕성 관련 네거티브 음해들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서양만 해도 멀리로는 클레오파트라발레리아 메살리나, 소 파우스티나, 가까이는 예카테리나 2세마리 앙투와네트 같이 온갖 말도 안 되는 천박하고 음란한 뒷담화들이나 성품에 대한 모해 가십으로 음해를 당하거나 명예를 훼손당한 왕실 여인들이 한둘이 아니다. 물론 여자도 사람이고 성욕 때문에 품행이 나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규방에서 내조에 전념하지 않고 남성만의 전유물인 권력을 잡은 여성들이 지나치게 성적으로 음란하다는 둥의 기록이 있으면 음해임을 좀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근대 여성들, 특히 정식 혼인관계로 결속된 기혼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정조의 의무 준수에 대한 압박은 굉장히 강한 편으로[16], 칠거지악 문서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여성이 저지른 간통은 이혼사유였으나, 남성의 간통은 이혼사유가 아니었으며 여성의 간통은 심하면 사형에 처할 정도로 중죄였다. 그런데 진서에 따르면 가남풍은 집권기간 동안 일개 서민들에게까지 알려질 정도로 수많은 남성들과 통정을 했고 심지어는 간통의 증거까지 대놓고 잡혔는데도 무사했다. 정말로 가남풍이 이렇게 외간남자들과 간통한 것이 들켰다면 이 간통의 증좌를 잡은 이들은 실실거리며 간통남을 놓아줄 것이 아니라 바로 여남왕 사마량과 초왕 사마위가 숙청된 이래 아래에 하술되었듯이 가남풍에게 대놓고 핍박 당했다고 나오는 사마영처럼 가남풍에게 이를 갈고 있었을 사마씨 종친들에게 고하고, 사마씨 종친들은 사마씨 황실의 위엄을 내다꽂은 가남풍에게 분노해서 진작에 그녀의 죄를 물으며 들고 일어났어야 정상이다.

당장 가남풍 치세 이전 중국사만 살펴봐도 제양공문강의 간통행위가 들켰을 때 제와 노 두 나라간 전쟁이 날 뻔했고 후환이 두려웠던 제양공이 분노로 전쟁을 일으키려던 문강의 남편 노환공을 암살하는 등 굉장한 정치적 후폭풍이 있었고[17], 시황제의 모후 조희의 간통이 들통나자 반란이 일어나고 상방이었던 여불위가 숙청되는 등 심각한 내부적 후폭풍이 있었다.

일국의 왕후가 간통을 저지르는 건 이 정도로 위험한 짓인데, 이런 행위들이 들켜서 소문이 돌 정도인데도 사마씨 종친들이 가만히 있었다가 사마휼이 살해되고 그제서야 이를 명분으로 움직였다는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뒷날 팔왕의 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마씨 종친들이 야심이 없거나 힘이 없는 사람들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10여년 가까이 사마휼을 죽이기 전 까진 아무런 문제없이 통치를 이어갔다. 당대에는 그녀가 전횡한다고 불만을 품은 자들마저도 서진 황후로서 그녀의 정당성에 꼬투리 잡을 여지가 없었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가남풍이 사마휼 살해건으로 몰락하고 죽은 이후에도 그녀의 소생들인 공주 4명은 모두 사마씨 종친으로서 권리를 인정받았다. 정말로 진서에 나온마냥 이놈저놈이랑 붙어먹은 행적이 만천하에 알려졌다면, 그녀 소생들은 그녀가 실각하고 살해당한 이후엔 모두 사마씨로 인정받지 못했어야 정상이다, 유전자 검사도 없던 시절이니 그녀들은 실제론 사마씨가 아니라고 충분히 의심받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당대에 당당한 사마씨의 일원으로 인정받았으며 심지어 그녀의 셋째딸 홍농군공주 사마선화는 영가의 난 당시 사마씨 근왕병을 일으키려고 남편과 같이 각지를 돌아다녔다는 기록까지 존재한다. 정말로 가남풍이 천하의 음녀였다면 유교적 질서가 자리잡은 시대에 이런 뒷이야기들이 나올 순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봤을 경우 그녀가 못생기고 끔찍한 추물이라는 기록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 고대 동양에서는 외모지상주의가 판친다는 지금보다도 신언서판을 중시했기 때문에 "이렇게 내면이 추악한 가남풍은 외모도 못생겼다"라고 음해의 여지가 들어갔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 소생 모두가 모두 진혜제와의 소생이라고 본다면 진혜제의 자식 6명 중 4명이 가남풍의 소생이라는 얘기가 되며, 진혜제는 이렇게 가남풍이 잦은 임신을 경험할 정도로 후비들 가운데 가남풍을 가장 총애했다는 얘기가 된다. 진혜제는 경계선 지능이 의심될 정도로 어리석고 우둔한 황제이기는 했으나 전해지는 일화를 보면 최소한의 사리분별은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진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가남풍이 끔찍한 괴물마냥 묘사되는 외모였다면 정말로 가까이 하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후비들 가운데 진혜제의 자식을 가장 많이 낳을 정도의 총애를 받을 외모는 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4.2. 부정적 평가

가남풍은 태자 사마휼을 살해하여 사망 후에 팔왕의 난을 부른 책임이 있고, 결정적으로 팔왕의 난과 이후의 영가의 난으로 사실상 진나라가 멸망하고 5호 16국, 남북조시대라는 역대급 혼란을 가져왔기에 나라와 황실을 함께 절단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심지어 미소년 납치나 간통, 살해 같은 엽기적인 범죄행위이자 개인이 권력을 남용한 전형적인 범죄행위가 야사가 아니라 공식 역사서인《진서》에 버젓이 남았다. 물론《진서》는 온갖 야사들을 무분별하게 집어넣어 비판을 받은 사서임은 감안하고 봐야 한다.

황태자 사마휼을 살해한 것은 서진의 사직에게도, 가남풍 자신에게도 결과적으로는 정치적 자살 행위였다. 가남풍 자신에게 장성한 소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마휼은 사마충의 외동아들이라서 사마휼을 대신할 다른 황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할아버지 사마염 때부터 가능성을 인정받은 촉망받던 황태자였던 사마휼을 무고하게 살해함으로서 명백한 반역을 저지른데다[18] 혜제의 정식 후계자가 사라져 버렸으니 황족이라면 누구나 황제가 될 야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사마휼이 경계를 피하느라 좀 노는 것에 몰두하긴 했어도 폐위되고 살해당할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정리하자면 사마휼은 가남풍에게 공조해야 할 관계였지 제거해야 할 존재[19]가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사마휼 살해 이후 역풍이 불 것을 짐작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가남풍은 권불십년이라고 이미 판단력이 떨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장 황태제가 될 욕심에 흑화하여 전면전 수준의 내전을 벌이면서 나라를 절단내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마영은 불과 몇년전만 해도 황태자 사마휼에게 거만하게 대하던 가밀을 대놓고 갈구다가 찍혀서 외지로 좌천되었던 사람이었음을 생각해 보자. 오죽하면 질투와 성깔머리, 그리고 인성질로는 가남풍에 절대 뒤질리가 없는 그녀의 어머니 곽괴까지도 가밀이 싸가지 없게 굴 때마다 혼내가며 병들어 죽기 직전까지 태자를 사랑해야 한다고 그토록 부탁하고 죽었을 정도였는데도 그랬다. 자기 친자식까지 죽게 만든[20] 곽괴의 판단조차도 저랬을 정도로 가남풍의 사마휼 살해는 집안 말아먹기 딱 좋은 짓거리였다. 이렇듯 가남풍의 사마휼 살해라는 만행은 사마씨 친척왕들을 완전히 자극하여 팔왕의 난영가의 난으로 이어지는 대혼란기를 열어버렸다. 이후 백성들의 삶이 어떻게 됐는지를 감안하면 절대로 좋게 볼 수가 없다.

가남풍의 치세는 당시에는 나름 평화롭기는 했으나 권력욕에 눈이 멀어 사마충의 유일한 후계자인 사마휼을 살해하고 말았고, 이 일로 인해 황족들이 황제, 혹은 만만한 황족을 내새워 권신이 되기 위해 서로 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가남풍이 백성들의 삶까지 간접적으로 도탄에 빠지게 한 셈이라고 볼 수도 있다.

5. 미디어 믹스

기록처럼 추녀로 그려지는 경우, 이와 반대로 예쁘게 그려지는 경우로 나뉜다. 고대 중국의 미적 기준이 현대와 많이 다르기에 추녀라고 알려진 부분이 사실 현대 기준으로는 손색없는 미적 요소라든가하는 상상력을 덧댄 결과인데 황부인과 마찬가지다.

5.1. 삼국지대전

한편 삼국지대전에도 등장했는데, 쇼걸 같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파일:external/yuyu-tei.jp/10004.jpg

계략은 성내수계다. 무력 2, 지력 6, 1 코스트 슈레 기병으로, 그냥 이도저도 아닌 스펙이다. 사실 기병일 필요는 없는 게 함정카드 공성게이지가 발생되어야만 스킬이 발동되기 때문에 딱히 기병이라고 좋거나 나쁜 게 없다. 어차피 노려서 쓰는 인간들은 기병 창병 다 씹어 먹고 잘 쓴다. 성내수계를 쓸 일이 없다면 그저 잉여로운 카드며 아무래도 뇌근[21]들이 넘실대는 군웅 애들만 좋은 먹잇거리가 되어버렸다. 성내수계 쓰는 순간 본격 수학지 대전이 되어버린다. 부활 카운트를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5.2.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파일:external/bbsimg.ali213.net/184026vznz58mnzg9ze8z8.jpg
100만인의 삼국지

본편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100만인의 삼국지에 등장했다. 능력치는 기대 말자...

5.3.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 BLAST 등장인물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border: 0px solid; margin: -11px; margin-top: -8px; margin-bottom: -6px"
SR 하후돈, 곽가, 장료, 견희, 순욱(SR), 조비, 조조, 왕이, 문빙(낭아봉)(SR), 조인, 가후, 장합, 만총(요필)(SR), 악진
R 순욱(장검), 조홍(쌍월), 만총(타구곤), 문빙(언월도), 변씨(피리), 문흠(극), 화타(구조), 하후희(위복장)(피리), 조절(권), 장창포(피리), 조모(쌍인검), 조식(비연검), 최씨(양인창)
N 조휴(화염궁), 조진(폭탄), 왕랑(쌍인검), 조아(순패검), 주령(장검), 관구검(쌍월), 조상(폭탄), 하안(타구곤), 왕경(비연검), 마준(신세검)
SR 육손, 주연, 손상향, 감녕, 손책, 태사자, 손권(도), 정봉, 연사(노), 대교, 소교(철선), 여몽, 능통, 주환(SR)(극)
R 서성(극), 서씨(피리), 손익(극), 오국태(쌍두추), 정보(쌍모), 주환(용창), 장흠(쇄분동), 고옹(비연검), 능조(극), 유씨(권), 주이(용창), 손노반(쌍두추), 제갈근(비연검), 육항(비연검), 손노육(적), 보천(비연검)
N 우번(도), 여대(도), 하제(선곤), 원희(권), 주치(극), 제갈각(비연검)
SR 조운, 관우, 장포, 관은병, 성채, 마대, 유선, 관색(양절곤), 유비, 장비, 하후희(SR)(쌍선), 강유, 마초, 제갈량
R 주창(귀신수갑), 하후희(촉복장)(피리), 엄안(박도), 왕평(양인창), 제갈씨(순패검), 왕도(양인창), 미당(쌍모), 호제(용창), 왕열(쌍두추), 비의(비연검), 마량(비연검), 마속(비연검), 이씨(쌍두추), 요화(R)(열격도)
N 간옹(구조), 부사인(신세검), 요화(열격도), 미방(쌍검), 습씨(십자극), 장익(순패검), 황호(비연검)
SR 사마소, 왕원희, 종회, 문앙, 사마의, 사마사, 가충, 하후패, 제갈탄, 등애(나선창)
R 호열(극), 장반(비연검), 초이(극), 문호(용창), 신헌영(순패검), #s-5.3(구조), 양호(구조), 두예(비연검)
N 신창(비연검)
여포 SR 여포, 여령기, 초선, 장료, 장패(언월도)(SR)
R 고순(박도)
N 장패(언월도)
원소 SR 원소
R 안량(연인자), 문추(아벽)
N 없음
SR 수경선생(SR), 호로(ホロウ)(총), 옥새, 잔다르크, 번옥봉(SR)(인노), 소마(금쇄봉), 동탁, 맹획, 동백(단철편)(SR), 아르나스
R 수경선생(R), 화웅(극), 우길(폭탄), 기령(쌍모), 화만(귀신수갑), 하태후(구조), 번옥봉(권), 풍씨(권), 마등(극), 한수(쌍월)
N 동백(십자극), 곽사(극), 황조(아벽), 이각(박도), 수경선생(쌍검), 유표(구조),
엄백호(쇄분동), 왕윤(비연검), 원술(신세검), 장수(비연검), 추씨(피리), 장로(도)
}}}}}}||

파일:external/vignette4.wikia.nocookie.net/Jia_Nanfeng_%28DWB%29.png

진삼국무쌍 BLAST에 일러스트 참전. 등급은 레어다. 아버지 가충과 마찬가지로 다크포스가 철철 넘치는 인상이 특징. 코에이 트위터에 의하면 황후가 되어 권력을 잡기 위해 암약한 점을 반영하여 본 모습과 야망을 베일로 가린 수상한 여성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조비처럼 막상 삼국지에 등장하는 사마염보다 먼저 참전했으며 궁중변란으론 삼국지에서 먼저 나온 손노반은 어리숙하고 귀엽게 나왔다. 이는 두 사람의 부모인 손권과 보연사, 가충의 이미지 차이 때문인 듯하다. 손권과 보연사는 긍정적인 인물상이지만 가충은 처음부터 사마소를 위한 필요악이란 캐릭터를 지니고 나온 악역이다.

5.4. 삼국전투기

디즈니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악역인 하트 여왕(퀸 오브 하트)로 패러디되었다. 참고로 황태자비 자리를 놓고 경합했던 위관의 딸은 앨리스.[22]

독발수기능의 난 편에서 사진으로 처음 등장한다.[23] 사마충이 가남풍의 모습을 보고 부들부들 떨며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장면까지 있을 정도의 추녀로 묘사됐다. 일단 해설에서는 사마충이 원래부터 바보였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마치 만화 내의 묘사로만 보면 자기 아내 될 사람 보고선 충격 먹고 백치가 되어버린 것처럼 보일 정도다.

서릉 전투 편에서 사마충과 식을 올리는 모습으로 1컷 등장했고, 삼국 통일 마지막편에서 삽을 들고 노래하며 걸어가는 사마충을 지켜보는 모습으로 1컷 등장했다. 만화가 삼국 통일 편에서 끝나기 때문에 가남풍의 악행은 하나도 묘사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최훈 작가는 가남풍이 생긴 건 저래도 마음씨만큼은 착할 수도 있으니깐 힘내라는 말로 사마충을 응원했다.

5.5. 고우영 십팔사략

못생긴 얼굴에 색을 탐하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생김새가 십팔사략 당나라편에 나오는 다른 추녀나 악녀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개성넘치는 디자인을 자랑한다.[24]

가남풍에게 끌려간 미소년들은 가남풍이 하룻밤만 사용하고 죽였는데 당시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후원 내 개구멍에서 고리짝 하나가 나오는 일이 있는데 그 고리짝 안에는 목이 졸린 미소년의 시신이 한 구 들어있다고 한다. 그런데 매우 드물게 한 소년은 가남풍이 봐도 엄청난 미남인데다 테크닉도 너무 절륜해 가남풍이 홀딱 반해버려[25] 그를 죽이기 아까워해서 "너무 아까우니, 특별히 선물을 하나 주마."라며 좋은 보물을 주고 풀어줬다. 소년은 선물을 받고 "아유, 정말 감사합니다! (성을 나오며) 앗싸, 꿩 먹고 알 먹었다."라며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나서는데 하필 허름한 풍색의 소년이 보물을 가지고 있자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병사들이 그를 잡아 "너, 그거 어디서 났냐?", "혹시 훔친 거 아냐?", "빈민굴 내 놈이 이런 귀한 물건을 어디서 얻은 거야?!"라며 취조한다. 이에 그 소년이 "뭔가 오해가 있는 듯 한데요. 이건 훔친 게 아닙니다요!"라 해명해도 심문이 계속되니 소년이 "아이고, 그건 황후마마께서 선물로 주신 겁니다요!" 라고 하니 그 말에 크게 놀란(살아남았으니까) 병사들은 '가만 있자! 그러고보니 황후폐하 거처에 온 미소년들은 거의 시체로 나왔다던데.'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풀어줬다. 풀어준 소년이 "휴~ 살았다! 도둑으로 몰릴 뻔했네." 라고 안도하며 보물을 돌려받고 달아나는 걸 본 병사들이 그 뒷모습을 보고 "남의 마누라를 훔쳤으니 도둑은 도둑 맞네. 우하하하, 낄낄." "유부녀 도둑!"이라 웃어대며 손가락질 한다. 그 이후에도 의관이라던가 군사들 등 여러 남자를 건드렸지만 끝내 소생을 얻지 못해 동생이 낳은 조카들 중 하나를 양자로 들였다고 하며, 이후 사마휼을 제거하기 위해 모략을 꾸민다.
사마휼에게 독이 든 술을 바쳐 먹이려 하지만 사마휼이 "이미 알고 있다! 가남풍 그 여자가 보낸 독주 아니냐?!"라고 눈치채며 화를 내자 결국 "에라 모르겠다. 절구 부대!"를 보내 사마휼의 머리를 절구로 찧어 죽인다. 하지만 이를 사마륜이 보고 종실을 소집시켜 가남풍을 제거하러 나선다.

최후에는 팔왕의 난으로 가씨 일족이 참살 당할 때 달아나려 했으나 사마휼 건으로 화가 단단히 난 사마륜이 앞을 막았다. "네년이 죽인 태자처럼 독잔을 받아라!"라고 하는 사마륜에게 "흥, 못 마실 줄 알고?"라며 스스로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사마륜이 "좋았어! 원 터치!" 라고 말한다.

5.6. 영걸전 시리즈

파일:조조전_마남풍.png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두 명의 가남풍이 존재한다. 게임 출시 때부터 있었던 도사 병종 가남풍과 2019년 6월 업데이트에서 마왕계 병종으로 추가된 가남풍이 있다.

도사 가남풍은 실제 기록상으로 그렇듯 전형적인 추녀로 등장, 마왕 가남풍은 마왕에 의탁한 후 외모를 바꿔 위와 같이 미형으로 등장한다.정확한 설정은 관련 연의가 출시되지 않아 밝혀지지 않았지만 열전을 봐선 마왕 제갈량을 가상루트 엔딩 오장원 제단에서 조조가 퇴치한 이후 마왕이 새로 빙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열전에 따르면 마왕과 손잡고 마왕의 힘을 손에 넣은 가남풍. 표정과 감정을 완벽하게 제어하여 내재된 격한 감정과 마왕의 인격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유저들은 마왕 가남풍은 줄여서 마남풍으로 부르는 편. 성우는 김하루.

5.7. 토탈 워: 삼국

DLC 팔왕의 난에 등장한다.

트레일러에서 화자로 나온다. 트레일러 영상에서는 아주 잠깐 앞모습이 나오지만 흐릿한 원경이어서 외모를 알 수 없다. 홍보 포스터에선 가남풍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모습이 등장한다. 정작 인게임에서는 이벤트로만 등장하고 무장으로 나오지않는다. 이는 남편 사마충도 마찬가지.

6. 둘러보기

진서 후비전(后妃傳)
장춘화 하후휘 양휘유 왕원희 양염 양지 좌분 호방 제갈완 가남풍 사구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 -10px -5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5%;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px"
<rowcolor=#ece5b6>1권 「선제기(宣帝紀)」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사마사 · 사마소(昭)사마염
<rowcolor=#ece5b6>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사마치 · 사마업사마예 · 사마소(紹)
<rowcolor=#ece5b6>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rowcolor=#ece5b6>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
[ 열전(列傳) ]
||<-4><tablebgcolor=#3797e8><tablecolor=#181818,#e5e5e5><color=#ece5b6>31·32권 「후비전(后妃傳)」
장춘화 · 하후휘 · 양휘유 · 왕원희 · 양염 · 양지 · 좌분 · 호방 · 제갈완 · 가남풍 · 양헌용 · 사구 · 왕원희(1) · 하후광희 · 순씨
우맹모 · 유문군 · 두릉양 · 주씨 · 저산자 · 하법예 · 왕목지 · 유도련 · 정아춘 · 왕간희 · 이능용 · 왕법혜 · 진귀녀 · 왕신애 · 저영원
<rowcolor=#ece5b6>33권 「왕상등전(王祥等傳)」34권 「양호등전(羊祜等傳)」
왕상 ,왕람, · 정충 · 하증 ,하소, · 석포 ,석숭,양호 · 두예(預)
<rowcolor=#ece5b6>35권 「진건등전(陳騫等傳)」36권 「위관등전(衛瓘等傳)」
진건 · 배수 ,배외 배해 배헌,위관 ,위항 위개, · 장화 · 유변
37권 「종실전(宗室傳)」
사마부(孚) ,사마옹(邕) 사마숭 사마망 사마무 사마보 사마익 사마황 사마부(裒) 사마작 사마위(韡) 사마소(韶) 사마괴, ,사마규 사마송 사마형 사마돈 사마경 사마도, · 사마권 ,사마식 사마석 사마웅, ,사마굉 사마홍 사마소(邵) 사마숭 사마집 사마준(俊) 사마순 사마회, · 사마태 ,사마략 사마등 사마모, · 사마수(綏) ,사마효, · 사마수(遂) ,사마훈, · 사마손 ,사마수(隨) 사마수(邃) 사마승 사마무기 사마념 사마상지 사마회지 사마휴지 사마윤지 한연지, · 사마목 · 사마릉 ,사마순 사마빈,
38권 「선오왕문육왕전(宣五王文六王傳)」
사마간(榦) · 사마주 ,사마근 사마담 사마요 사마최, · 사마경(京) · 사마준(駿) ,사마창 사마흠, · 사마융 · 사마유(攸) ,사마유(蕤), · 사마조 · 사마정국 · 사마광덕 · 사마감 · 사마연조
<rowcolor=#ece5b6>39권 「왕침등전(王沈等傳)」40권 「가충등전(賈充等傳)」41권 「위서등전(魏舒等傳)」
왕침(王沈) ,왕준(浚), · 순의 · 순욱 ,순번 순조 순혁, · 풍담가충 · 양준 ,양요 양제, 위서 · 이희 · 유식 · 고광
<rowcolor=#ece5b6>42권 「왕혼등전(王渾等傳)」43권 「산도등전(山濤等傳)」
왕혼 ,왕제, · 왕준(濬) · 당빈 산도 ,산간 산하, · 왕융 ,왕연 왕징 곽서, · 악광
<rowcolor=#ece5b6>44권 「정무등전(鄭袤等傳)」45권 「유의등전(劉毅等傳)」
정무 ,정묵, · 이윤 · 노흠 ,노지(盧志) 노심, · 화표 ,화이 화항 화교, · 석감 · 온선유의 ,유돈, · 화교 · 무해 · 임개 · 최홍 · 곽혁 · 후사광 · 하반
<rowcolor=#ece5b6>46권 「유송등전(劉頌等傳)」47권 「부현전(傅玄傳)」48권 「상웅등전(向雄等傳)」
유송 · 이중부현 · 부함 · 부지상웅 · 단작 · 염찬
<rowcolor=#ece5b6>49권 「완적등전(阮籍等傳)」
완적 · 혜강 · 상수 · 유영 · 사곤 · 호무보지 · 필탁 · 왕니 · 양만 · 광일
<rowcolor=#ece5b6>50권 「조지등전(曹志等傳)」
조지(曹志) · 유준 · 곽상 · 유순 · 진수(秦秀)
<rowcolor=#ece5b6>51권 「황보밀등전(皇甫謐等傳)」52권 「극선등전(郤詵等傳)」 53권 「민회태자전(愍懷太子傳)」
황보밀 · 지우 · 속석 · 왕접극선 · 완충 · 화담민회태자
<rowcolor=#ece5b6>54권 「육기등전(陸機等傳)」55권 「하후담등전(夏侯湛等傳)」 56권 「강통등전(江統等傳)」
육기 · 육운하후담 · 반악 · 장재강통 · 손초
<rowcolor=#ece5b6>57권 「나헌등전(羅憲等傳)」58권 「주처등전(周處等傳)」
나헌 ,나상, · 등수 · 마륭 · 호분 · 오언 · 장광 · 조유주처 · 주방 ,주무 주초 주효,
59권 「여남왕량등전(汝南王亮等傳)」
사마량 · 사마위(瑋) · 사마륜 · 사마경(冏) · 사마예 · 사마영 · 사마옹(顒) · 사마월
60권 「해계등전(解系等傳)」
해계 · 손기 · 맹관 · 견수 · 무파 · 황보중 · 장보 · 이함 · 장방 · 염정 · 색정 ,색침, · 가필
<rowcolor=#ece5b6>61권 「주준등전(周浚等傳)」62권 「유곤등전(劉琨等傳)」63권 「소속등전(邵續等傳)」
주준 ,주복, · 성공간 · 구희 · 화질 · 유교유곤(劉琨) · 조적소속 · 이구 · 단필제 · 위준 ,위해, · 곽묵
64권 「무십삼왕원사왕간문삼자전(武十三王元四王簡文三子傳)」
사마궤 · 사마간(柬) · 사마경(景) · 사마지 · 사마유(裕) · 사마윤 · 사마연(演) · 사마해 · 사마하 · 사마모(謨) · 사마안 · 사마회 · 사마부(裒) · 사마충(沖) · 사마희 · 사마환 · 사마도생 · 사마욱(郁) · 사마도자
65권 「왕도전(王導傳)」
왕도
<rowcolor=#ece5b6>66권 " 「유홍등전(劉弘等傳)」67권 「온교등전(溫嶠等傳)」68권 「고영등전(顧榮等傳)」
유홍 · 도간온교 · 치감고영 · 기첨 · 하순 · 설겸
<rowcolor=#ece5b6>69권 「유외등전(劉隗等傳)」70권 「응첨등전(應詹等傳)」71권 「손혜등전(孫惠等傳)」
유외 ,유파, · 조협 · 대약사 · 주의응첨 · 감탁 · 변곤 · 유초 · 종아손혜 · 웅원 · 왕감 · 진군 · 고숭
<rowcolor=#ece5b6>72권 「곽박등전(郭璞等傳)」73권 「유량전(庾亮傳)」74권 「환이전(桓彝傳)」
곽박 · 갈홍유량 · 유역 · 유빙 · 유익 환이(彝) ,환운 환활 환비 환충,
<rowcolor=#ece5b6>75권 「왕담등전(王湛等傳)」76권 「왕서등전(王舒等傳)」77권 「육엽등전(陸曄等傳)」
왕담(湛) · 순숭 · 범왕 · 유담 · 장빙 · 한백왕서 · 왕이 · 우담 · 고중 · 장개육엽 · 하충 · 저삽 · 채모 · 제갈회 · 은호
<rowcolor=#ece5b6>78권 「공유등전(孔愉等傳)」79권 「사상등전(謝尙等傳)」80권 「왕희지전(王羲之等傳)」
공유 · 정담 · 도회사상 · 사안 ,사염 · 사혼 · 사현 · 사만 · 사랑 · 사석 · 사막,왕희지
81권 「왕손등전(王遜等傳)」
왕손 · 채표 · 양감 · 유윤 · 환선 ,환이(伊), · 주사 · 모보 · 유하 · 등악 · 주서
82권 「진수등전(陳壽等傳)」
진수(陳壽) · 왕장문 · 우부 · 사마표 · 왕은 · 우예(預) · 손성 · 간보 · 등찬 · 사침 · 습착치 · 서광
<rowcolor=#ece5b6>83권 「고화등전(顧和等傳)」84권 「왕공등전(王恭等傳)」85권 「유의등전(劉毅等傳)」
고화 · 원괴 · 강유 · 차윤 · 은의 · 왕아왕공 · 유해 · 유뇌지 · 은중감 · 양전기유의 · 제갈장민 · 하무기 · 단빙지 · 위영지
<rowcolor=#ece5b6>86권 「장궤전(張軌傳)」87권 「양무소왕전(涼武昭王傳)」
장궤양무소왕 · 양후주
88권 「효우전(孝友傳)」
이밀 · 성언 · 하방 · 왕부 · 허자 · 유곤(庾袞) · 손구 · 안함 · 유은 · 왕연 · 왕담(談) · 상우 · 하기 · 오규
89권 「충의전(忠義傳)」
혜소 · 왕표 · 유심 · 국윤 · 초숭 · 가혼 · 왕육 · 위충 · 신면 · 유민원 · 주해 · 환웅 · 한계 · 주기 · 이웅 · 악도융 · 우괴 · 심경 · 길읍 · 왕량 · 송구 · 차제 · 정목 · 신공정 · 나기생 · 장의
90권 「양리전(良吏傳)」
노지(魯芝) · 호위 · 두진 · 두윤 · 왕굉 · 조터 · 반경 · 범귀 · 정소 · 교지명 · 등유 · 오은지
91권 「유림전(儒林傳)」
범평 · 문립 · 진소 · 우희 · 유조 · 범육 · 서묘 · 최유 · 범륭 · 두이 · 동경도 · 속함 · 서막 · 공연 · 범선 · 위소 · 범홍지 · 왕환
92권 「문원전(文苑傳)」
응정 · 성공수 · 좌사 · 조지(趙至) · 추담 · 조거 · 저도 · 왕침(王沉) · 장한 · 유천 · 조비 · 이충 · 원굉 · 복도 · 나함 · 고개지 · 곽징지
93권 「외척전(外戚傳)」
양수 · 왕순 · 양문종 · 양현지 · 우예(豫) · 유침 · 두예(乂) · 저부 · 하준 · 왕몽 · 왕하 · 왕온 · 저상
94권 「은일전(隠逸傳)」
손등 · 동경 · 하통 · 주충 · 범찬 · 노승 · 동양 · 곽원 · 곽기 · 오조 · 노포 · 범등 · 임욱 · 곽문 · 공장 · 맹루 · 한적 · 초수 · 적탕 · 곽번 · 신밀 · 유린지
삭습 · 양가 · 공손봉 · 공손영 · 장충 · 석원 · 송섬 · 곽하 · 곽우 · 기가 · 구형 · 사부 · 대규 · 공현지 · 도담 · 도연명
95권 「예술전(藝術傳)」
진훈 · 대양 · 한우 · 순우지 · 보웅 · 두불건 · 엄경 · 외소 · 복후 · 포정 · 오맹 · 행령 · 불도징 · 마유 · 선도개 · 황홍 · 색담 · 맹흠 · 왕가 · 승섭 · 곽논 · 나습 · 욕곽 · 태산
96권 「열녀전(列女傳)」
신헌영 · 엄헌 · 종염 · 왕혜풍 · 이락수 · 순관 · 사도온 · 용린 · 유아 · 염부인 · 소혜 · 모황후 · 단원비 · 양황후 · 윤태후
97권 「사이전(四夷傳)」
부여 · 숙신 · 마한 · 진한 · · 토욕혼 · 언기국 · 구자국 · 대완국 · 강거국 · 대진국 · 임읍국 · 부남국 · 흉노
<rowcolor=#ece5b6>98권 「왕돈등전(王敦等傳)」99권 「환현등전(桓玄等傳)」
왕돈 · 환온환현 · 변범지 · 은중문
100권 「왕미등전(王彌等傳)」
왕미 · 장창 · 진민 · 왕여 · 두증 · 두도 · 왕기 · 조약 · 소준 · 손은 · 노순 · 초종
(1) 사마소 부인 왕원희와는 다른 인물로 효회태후로 추존된 사마치의 어머니.
[ 재기(戴記) ]
||<tablebgcolor=#3797e8><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혁련발발
}}} ||

[1]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를 당했으므로 시호가 없으며, 혜황후는 시호가 아니라 부군의 시호를 중복한 존호이다.[2] 현재까지 남아있는《진서》는 당나라에서 편찬한《진서》이고 왕은의《진서》는 소실되어 다른 책에 인용된 구절들만 확인할 수 있다.[3]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유명한 역사 속 여인들은 거의 택호로 알려졌지 본명인 휘로 알려진 경우는 거의 없다. 수많은 왕후들도 휘가 전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사임당 신씨만 해도 그녀의 택호 사임당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휘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남성 위인들조차도 자나 호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여성이 휘만 알려졌을 확률은 그보다 더 적을 것이다.[4] 이것과는 크게 연관이 없겠지만 건국공신인 위관은 후에 가남풍에게 조종당한 초왕 사마위에게 암살된다.[5] 당시 하얀 피부는 고귀함의 상징이었다. 보통 피부가 까매지는 건 태양빛을 보면서 일을 많이 하면서 생기는 현상이기에 귀족적 삶과는 거리가 있는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가문 자체에 아들이 귀한 것도 당시 귀족 사회에선 큰 결격사유였다. 딸 부잣집 가족력이 옮겨가면 자기들도 대 끊길수 있다는 것. 실제로 가남풍 한정으론 혜제와의 사이서 아들을 두지 못하며 우려가 사실이 됐다. 다만 외모가 정말 너무 못생겼다면 신부 후보에 들지도 못했을 거라서 외모 자체는 평타는 쳤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6] 이때 가남풍의 유모 서의도 같이 궁에 들어왔다.[7]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록상으로 사마충은 지적장애 3급 정도의 정신장애를 앓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8] 사마충의 머리로는 아무리 날고 기어도 백점짜리 답안을 써 내는 건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에 백점 만점짜리로 써 줬다가는 대필해 준 게 곧바로 들킬 것이 뻔했으므로 적당히 커트라인만 겨우 넘길만한 답을 써 내는 주도면밀한 모습까지 보였다.[9] 고부관계였지만 나이는 며느리인 가남풍이 3세 연상이였다.[10] 덤으로 사마휼의 모친 사구도 죽였다.[11] 여기서 암주(闇主)는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를 말하며 학후(虐后)는 '사납고 모진 황후'라는 뜻이다.[12] 당장 사마염으로부터 모든 권력을 받은 양준만 해도 1년만에 축출당해 패가망신했다. 양준 외에도 사마염 사후 서진의 실권을 잡은 인물 대부분이 1년 이상을 가지 못했는데 가남풍은 10년 가까이 정권을 잡았으니 정치적 판단은 고평가할 만 하다.[13] 이 부분은 가씨 집안의 당주가 된 사촌 가모의 역할이 크긴 했다. 장화와 배외도 그가 추천한 인사다.[14] 가남풍이 사마휼을 죽였을때 나이는 44세로 가남풍의 시증조모 장춘화가 늦둥이 막내아들 사마간을 낳았을 때보다도 한 살 더 많았다. 노산이 일상화된 현대 기준으로도 30대 중반이 되면 고위험군으로 판정받는데 하물며 그 당시쯤 되면 가남풍은 더 이상 임신을 기대할 수 없었다고 봐야 한다. 시증조모의 사례로 혹시나 기대를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 나이 조차도 넘겨버렸으니 더더욱 초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15] 사마씨들은 가남풍이 죽은 뒤에 자기끼리 싸워대고, 혜제를 폐제시키고 자기가 황제자리에 오르거나 이민족들을 끌어들이는 등 추태만 보였다.[16] 이런 종류의 압박에서 자유로운 여성들은 대개 창녀정부 같이 정식 혼인 관계에서 자유로운 여성들 뿐인데, 정조의 의무가 없는 대신 정식 혼인관계를 맺은 기혼 여성들보다 대우가 매우 나빴다.[17] 심지어 이로부터 200여년 가까이 시간이 지난 제경공노정공 시대에 양국의 국군들이 협곡에서 회맹할 일이 있었는데 당시 연주되던 음악의 내용이 노 환공이 자신의 부인인 문강이 제 양공에게 NTR 당한 것을 까는 내용이라 이를 파악한 공자(孔子)가 그 속 뜻을 완전히 파악해 악공들을 죽여버렸을 정도로 양국 관계에선 두고두고 이 사건이 앙금으로 남았다.[18] 황제의 허락도 없이 죽였기에 명백한 반역이다. 이러면 황족들이 반역자인 황후를 처단한다고 하기에 좋은 명분을 제공해주는 것이다.[19] 폭탄의 뇌관이라고 생각해서 제거한게 사실상 안전핀이였던 셈이다. 111년 전에 십상시하진을 오판으로 죽였다가 역풍으로 몰락한 것과 데자뷰 수준으로 비슷하다.[20] 아들이 유모를 더 따르는 걸 질투하여 유모를 패죽였는데 이 일로 아들은 울다 죽어버린다.[21] 7 뇌근육의 줄임말. 무력만 겁나 높고 지력이 겁나 낮은 것들이었다.[22] 위관의 딸은 딱 1컷만 나왔으며 어린 소녀인 패러디 원본과는 달리 키 크고 글래머러스한 전형적인 최훈 만화식 미녀상으로 등장한다. 굳이 따져보자면 위관의 딸이 덩치가 크고 살이 희다고 했으니 그 점에서는 고증에 맞지 않다고 여길 수는 있으나, 고대에는 키가 크거나 살집이 있고 살결이 흰 것이 전형적인 미인에 대한 평가였다. 다만 미에 대한 건 어느 정도 시대를 관통하는 면도 있어서 마른 몸매의 윤아나 태연 스타일 정도가 미인이 아니다 뿐이지, 저 시대 미인도를 보면 살집이 있다는 게 딱 다이어트 하기 전에 남자들이 하악하악 하는 수준이었던 전효성이나 강소라 정도로 글래머러스했다고 하는 편이 맞다. 그나마도 당나라 때 정도나 미인의 살집이 기준이었지 저 시대는 그정도도 아니었다. 그 면에서 최훈이 위관의 딸도 고증을 잘 한 셈이다. 사서에서의 실제 서술은 위관의 딸이 '풍채가 좋고 살이 희고 곱다', 가남풍은 키가 작고 피부가 검고 거칠다고 묘사되어있다. 위관의 딸을 요즘말로 묘사하자면 '키가 크고 볼륨감있는 몸매에 뽀얗고 매끄러운 피부' 라고 할수 있다.[23] 그 이전에 손노반을 평가하면서 가남풍 이상의 악녀였다고 언급한적이 있다.[24] 거기에 19금 장면에서는 처진 가슴으로 그려놓았다.[25] 가남풍이 "꽤 귀여운 남자네?"라고 하자 소년도 "감사합니다."라 인사하고 테크닉을 선보여 가남풍 왈, "어머머! 얘 좀 보게!! 테크닉이 환상인데! 죽이기 너무 아깝다!!!"라고 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