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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摯虞
(250? ~ 311?)
1. 개요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중흡(仲洽)[1]으로 지무(摯茂)[2]의 손자이자 지모(摯模)[3]의 아들, 지육(摯育)의 동생이다.옹주 경조군 장안현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재주와 학문이 통달하고 넓어서 저술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황보밀의 제자로 문학에도 뛰어났고 조정에 출사해 중랑에 임명되었으며, 태자사인, 비서감을 지내다가 태상경까지 지냈다.
선비를 사랑하고 사람이 나타나 천거하는 자가 있으면 항상 써줬다고 하며, 함께 논의해서 말로 할 때는 태숙광(太叔廣)[4]에게 대답하지 못하고 문장을 할 때는 태숙광이 자신에게 대답하지 못해 서로 비웃었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도 이 두 사람의 우열을 말하는 것에 있어 어지러웠다고 하며, 옛 일을 무척 좋아해 책이란 책은 다 읽었다고 한다.
291년에 가밀과 곽창의 권세가 대단할 때 가밀의 친구인 24우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310년에는 태상을 지내면서 혜제를 따라 장안으로 갔다가 호, 두 부근에서 유랑했다. 광록대부 부지와 함께 양주자사 장궤에게 경사의 기근과 궁핍합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고 311년에 낙양에 대기근이 들자 굶어죽었다.
문장유별집, 문장유별지론, 문장지, 결의요주 등을 남겼다. 그가 저술한 문장유별을 저술하면서 이를 근본으로 자신의 의견을 서술한 사람이 무려 70여가나 되어 권질이 많았지만 오래 못 가서 모두 흩어졌다고 한다.
저서로는 결의요주, 문장지, 족성소목 등이 있고 그 밖에 삼보결록의 주석을 달았으며, 신례의라는 저서도 지우가 한 것 또는 순개가 편찬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