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20:17:33

위소(후조)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colbgcolor=#71a6d2><colcolor=#fff> 경조공(京兆公)
韋謏 | 위소
시호 없음
작위 경조공(京兆公)
(韋)
(謏)
헌도(憲道)
생몰 ? ~ 350년 11월
출신 옹주(雍州) 경조군(京兆郡)
국적 후조염위
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후조염위의 인물. 저서로는 《전림》(典林) 22편과 《복림》(伏林)이 있다.

2. 생애

위소는 행실이 고아하고 유학 공부를 무척 좋아했으며, 문서 집필에 능해 기록할 것이 있으면 빠짐없이 살펴서 적었다고 한다. 전조유요에게 임관하여 황문랑을 지내다가, 후조석호에게 항복하여 산기상시에 임명되고 후조에서 7군의 태수를 역임하였다. 위소는 군을 다스리면서 청렴함과 지역의 교화에 능한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중앙으로 돌아가 정위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황문랑에 제수받으니, 당시 지식인들은 그를 전한의 정치인인 우정국(于定國), 장석지(張釋之)와 비견된다 평하였다.

건평 3년(332년) 4월, 후조의 황제 석륵은 당시 한식(寒食)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돌연 수도인 양국(襄國)에 폭풍우가 몰아쳐 큰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때 양국의 저잣거리와 황궁 정문인 건덕문에서 천둥소리를 듣고 놀라 자빠졌다가 사망한 사람이 다섯 명이나 되었다. 또, 하서의 개산(介山)에서 계란만한 우박이 내려, 평평한 곳 기준으로 쌓인 우박의 높이는 석 자나 되었고, 우박이 만들어낸 구덩이의 깊이는 한 장(丈)에 달했다. 당연히 이 거대한 우박을 맞고 사망한 사람과 짐승이 수 만에 이르렀고, 태원(太原), 낙평(樂平), 무향(武鄉), 조군(趙郡), 광평(廣平), 거록(巨鹿)까지 수 천 리에 걸친 나무들이 뿌러지거나 꺾였으며, 밭에 심어진 곡식이 입은 피해도 어마어마하였다.

이 소식에 크게 놀란 석륵은 정복을 갖춰입고 동당(東堂)으로 들어가, 중서령 서광과 상의한 끝에 하늘이 한식을 철폐한 것에 노하여 재해를 일으켰다 여겼다. 이에 다시 조서를 내려 한식을 받들라 명하는 한편, 개자추의 사당을 세우고 백성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자 위소가 논박하며 말했다.
"《춘추》에 의하면 물 위를 떠다니는 얼음이 녹으면서 그 음기가 하늘로 올라가 우박이 되어 내린다 하였습니다. 그 말인 즉, 개자추가 존재하기도 전에 우박은 종종 내렸던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어찌 개자추가 이 사태의 원인이겠습니까. 결국, 이 사태는 음양의 조화가 뒤틀리면서 벌어진 현상으로 보이며,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한들 개자추와 같은 현자가 검은 속내를 품고 이러한 포학한 짓을 할 리는 절대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비록 빙실(氷室)이 있다고 하나, 산이나 개천, 못에 숨겨진 얼음이 하늘로 올라가 음기가 되어 우박으로 내린 것이 자명합니다. 다만, 이번 사태와는 무관하게 면산(綿山)과 개산 사이에서 개자추의 충성스러움과 현명함을 기리는 것을 윤허하신다면 천하에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석륵은 위소의 말에 따르는 동시에, 다시 이런 우박이 내리지 않도록 산천에 숨겨진 얼음을 찾아서 음기가 새어나갈 걱정이 없는 빙실로 옮겨놓을 것을 명하였다.

건무 8년(342년) 12월, 석륵이 붕어한 뒤 정변을 일으켜서 황위에 오른 석호는 사치와 향락을 일삼고 토목공사를 벌이기 좋아하여, 누대가 딸린 행궁이 40곳이나 있었고, 장안과 낙양의 궁궐을 지을 때는 40여 만 명의 작업공을 투입하기도 하였다. 또, 사냥 역시 무척 좋아해 아침에 출발하면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면서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 당시 시중을 지내던 위소가 이에 대해 간언하자, 석호는 그를 칭찬하고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위소의 간언은 따르지 않고 이전처럼 사냥과 향락을 계속해서 즐겼다. 이후 위소는 9경에 4번 올랐고, 상서를 6번, 시중을 2번 역임했으며, 경조공(京兆公)에 봉해졌다.

영흥 원년(350년) 2월, 후조의 장군을 지내던 염민이 난을 일으켜 염위를 건국하자, 위소는 광록대부에 임명되었다.

영흥 원년(350년) 11월, 염민이 보•기 100,000명을 거느리고 후조의 황제 석지가 있는 양국을 쳤다. 이때 염민은 자신의 아들 태원왕 염윤(冉胤)을 대선우, 표기대장군에 임명하고, 투항해 온 호인(胡人) 1,000여 명을 그의 휘하로 배속시켰는데, 이에 대해 위소가 간했다.
"지금 호인 수 천 명을 불러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인 것은 진실로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족은 본래 우리의 적인지라, 그들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항복했을 것입니다. 만일 저들 가운데 자객이 있어 중요한 순간에 봉변을 당해 패한다면 그때 가서 뉘우쳐도 늦습니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한 명뿐이라도 방심하면 안 된다 하였는데, 하물며 천 명이나 되면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투항한 오랑캐를 모두 주살한 뒤, 선우 칭호를 없애고, 심사숙고하여 만일의 변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하십시오."
그러나 염민은 복종해온 오랑캐들을 위무할 계책이었기에, 크게 화를 내며 위소를 그 아들 위백양(韋伯陽)과 함께 주살하였다.

영흥 2년(351년) 3월, 염민이 석지에게 패해 수많은 병력을 잃은 채 후퇴하자, 염민에게 항복했던 오랑캐인 율특강(栗特康)이 염윤과 좌복야 유기(劉奇)를 사로잡아 석지에게 투항했다. 그제서야 염민은 위소의 계책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위소를 대사도로 추증해주었다.

3. 둘러보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ff> 1권 「전조록일(前趙錄一)」 2권 「전조록이(前趙錄二)」 3권 「전조록삼(前趙錄三)」 4권 「전조록사(前趙錄四)」
유연 · 유화 유총 유총 유총 · 유찬
<rowcolor=#fff> 5권 「전조록오(前趙錄五)」 6권 「전조록육(前趙錄六)」 7권 「전조록칠(前趙錄七)」 8권 「전조록팔(前趙錄八)」
유요 유요 유요 유선 · 유성 · 유익 · 유윤
<rowcolor=#fff> 9권 「전조록구(前趙錄九)」 10권 「전조록십(前趙錄十)」 11권 「후조록일(後趙錄一)」 12권 「후조록이(後趙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석륵 석륵
<rowcolor=#fff> 13권 「후조록삼(後趙錄三)」 14권 「후조록사(後趙錄四)」 15권 「후조록오(後趙錄五)」 16권 「후조록육(後趙錄六)」
석륵 석홍 석호 석호
<rowcolor=#fff> 17권 「후조록칠(後趙錄七)」 18권 「후조록팔(後趙錄八)」 19권 「후조록구(後趙錄九)」 20권 「후조록십(後趙錄十)」
석호 석세 · 석준 · 석감(鑒) 석민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21권 「후조록십일(後趙錄十一)」 22권 「후조록십이(後趙錄十二)」 23권 「전연록일(前燕錄一)」 24권 「전연록이(前燕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모용외 모용황
<rowcolor=#fff> 25권 「전연록삼(前燕錄三)」 26권 「전연록사(前燕錄四)」 27권 「전연록오(前燕錄五)」 28권 「전연록육(前燕錄六)」
모용황 모용준 모용준 모용위
<rowcolor=#fff> 29권 -2l 「전연록칠(前燕錄七)」 30권 「전연록팔(前燕錄八)」 31권 「전연록구(前燕錄九)」 32권 「전연록십(前燕錄十)」
모용위 토욕혼· 모용한· 모용인· 모용각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33권 「전진록일(前秦錄一)」 34권 「전진록이(前秦錄二)」 35권 「전진록삼(前秦錄三)」 36권 「전진록사(前秦錄四)」
부홍 부건 부생 부견
<rowcolor=#fff> 37권 「전진록오(前秦錄五)」 38권 「전진록육(前秦錄六)」 39권 「전진록칠(前秦錄七)」 40권 「전진록팔(前秦錄八)」
부견 부견 부비 부등
<rowcolor=#fff> 41권 「전진록구(前秦錄九)」 42권 「전진록십(前秦錄十)」 43권 「후연록일(後燕錄一)」 44권 「후연록이(後燕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모용수 모용수
<rowcolor=#fff> 45권 「후연록삼(後燕錄三)」 46권 「후연록사(後燕錄四)」 47권 「후연록오(後燕錄五)」 48권 「후연록육(後燕錄六)」
모용수 모용보 모용성 모용희
<rowcolor=#fff> 49권 「후연록칠(後燕錄七)」 50권 「후연록팔(後燕錄八)」 51권 「후연록구(後燕錄九)」 52권 「후연록십(後燕錄十)」
모용운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53권 「후진록일(後秦錄一)」 54권 「후진록이(後秦錄二)」 55권 「후진록삼(後秦錄三)」 56권 「후진록사(後秦錄四)」
요익중 요양 요장 요흥
<rowcolor=#fff> 57권 「후진록오(後秦錄五)」 58권 「후진록육(後秦錄六)」 59권 「후진록칠(後秦錄七)」 60권 「후진록팔(後秦錄八)」
요흥 요흥 요홍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61권 「후진록구(後秦錄九)」 62권 「후진록십(後秦錄十)」 63권 「남연록일(南燕錄一)」 64권 「남연록이(南燕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모용덕 모용초
<rowcolor=#fff> 65권 「남연록삼(南燕錄三)」 66권 「하록일(夏錄一)」 67권 「하록이(夏錄二)」 68권 「하록삼(夏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혁련발발 혁련창 혁련정
<rowcolor=#fff> 69권 「하록사(夏錄四)」 70권 「전량록일(前涼錄一)」 71권 「전량록이(前涼錄二)」 72권 「전량록삼(前涼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장궤 장실 장준
<rowcolor=#fff> 73권 「전량록사(前涼錄四)」 74권 「전량록오(前涼錄五)」 75권 「전량록육(前涼錄六)」 76권 「촉록일(蜀錄一)」
장중화 · 장령요 · 장조 장현정 · 장천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특
<rowcolor=#fff> 77권 「촉록이(蜀錄二)」 78권 「촉록삼(蜀錄三)」 79권 「촉록사(蜀錄四)」 80권 「촉록오(蜀錄五)」
이류 · 이웅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81권 「후량록일(後涼錄一)」 82권 「후량록이(後涼錄二)」 83권 「후량록삼(後涼錄三)」 84권 「후량록사(後涼錄四)」
여광 여소 · 여찬 여륭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85권 「서진록일(西秦錄一)」 86권 「서진록이(西秦錄二)」 87권 「서진록삼(西秦錄三)」 88권 「남량록일(南涼錄一)」
걸복국인 · 걸복건귀 걸복치반 · 걸복모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rowcolor=#fff> 89권 「남량록이(南涼錄二)」 90권 「남량록삼(南涼錄三)」 91권 「서량록일(西涼錄一)」 92권 「서량록이(西涼錄二)」
독발녹단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고 이흠
<rowcolor=#fff> 93권 「서량록삼(西涼錄三)」 94권 「북량록일(北涼錄一)」 95권 「북량록이(北涼錄二)」 96권 「북량록삼(北涼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저거몽손 저거무건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97권 「북량록사(北涼錄四)」 98권 「북연록일(北燕錄一)」 99권 「북연록이(北燕錄二)」 100권 「북연록삼(北燕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풍발 풍홍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