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29 07:25:51

장조(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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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7589><colcolor=#ece5b6>
전량 7대 국왕
위왕 | 威王
출생 불명
서진 양주 안정군 오씨현
(現 간쑤성 핑량시)
사망 355년 (향년 ?세)
연호 화평(和平)
능묘 민릉(愍陵)
재위기간 7대 국왕
346년 ~ 3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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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7589><colcolor=#ece5b6> 성씨 장(張)
조(祚)
부모 부친 장준
모친 불명
형제자매 3남 ?녀 중 장남
자녀 2남
태백(太伯)
시호 전량: 위왕(威王)[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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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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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량의 제7대 군주이자 폭군. 이 사람의 치세때부터 전량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자는 태백(太伯)이었다. 장남이었지만 서자 출신이라 부왕인 제4대 세조 문왕 장준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지 못했다. 하지만 장조는 동생인 제5대 세종 환왕 장중화의 총신들과 의형제까지 맺으며 포섭하는가 하면, 장중화의 모친인 마태후와 은밀히 사통했다. 결국 이들을 이용해 어린 조카 장요령을 끌어내리고 황제를 칭했지만 반란으로 인해 금방 살해되었다.

2. 생애

젊어서 장녕후(長寧侯)에 봉해졌고, 위엄과 학식이 있어 정사를 잘 처리했다. 그러나 천성이 교묘하고 음란하며 음침한 구석도 있어, 부왕인 문왕 장준이 승하하자 양어머니인 왕태후 마씨와 간통을 저질렀고, 환왕 장중화 몰래 그의 총신들인 조장, 위집과 의형제를 맺어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353년, 서동생 장중화가 병사하고 어린 세자 장요령이 즉위했다. 장조는 환왕 장중화의 유언장을 멋대로 조작하여 도독중외제군사, 무군대장군에 임명받은 뒤, 어린 장요령을 대신하여 국정을 총괄했다. 장조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장중화의 총신들을 이용해 연장자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했고, 결정적으로 왕태후 마씨의 승인까지 받아 장요령을 폐위시켰다.[2] 장조는 즉위 이후 대도독, 대장군, 양주목, 양공을 자칭했다.

더이상 꺼리낄 것이 없었던 장조는 황음무도하여 더욱 막나가기 시작했다. 선왕인 장중화의 정처인 왕태후 배씨를 강간하고, 부왕인 문왕 장준과 서동생인 환왕 장중화의 비첩들은 물론 아직 시집가지 않은 자신의 조카딸과 이복 여동생들까지 궁중에서 그가 범하지 않은 여자가 없었다. 장조의 이런 막장 행보에 대한 소문이 알려져 전량의 백성들 사이에선 이를 조롱하는 <담자>(牆茨)라는 시가 퍼졌다.

354년, 간신들인 조장과 위집의 말에 따라 종묘와 백관을 설치하고 황제를 칭했으며, 연호를 화평(和平)이라고 했다. 그리고 시조인 장궤를 포함해 전량의 선대 군주들을 모두 추존하여 시호와 묘호를 정했다. 장조가 제위에 오르고 2일이 지났을 때 강풍이 불어 궁궐 정원에 심어둔 나무가 뽑혔다. 이와 비슷한 흉조가 전국에서 여러 차례 발생했지만 장조는 폭정을 이어나갔다. 상서 마급(馬岌)이 간언했다가 면직되었고, 낭중 정기(丁琪)가 폭정을 멈춰달라 간언함과 동시에 칭제한 것을 꾸짖자, 장조는 대노하여 그 자리에서 정기를 참수했다. 각지에서 자잘한 반란들도 터져 부장 화호(和昊)를 보내 토벌하게 했으나 남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융족에게 패배했다.

354년 2월, 동진의 태위 환온저족의 전진을 상대로 제1차 북벌을 개시했다. 진주(秦州) 농서에 주둔 중이던 왕탁은 사람을 보내 환온이 용병에 능하여 전진과 동진 중 누가 이길지 예측할 수 없다는 서신을 보내왔다. 장조는 황제를 칭하면서 동진과 척을 졌기에 매우 두려워하는 한편, 후조의 유신인 왕탁이 배신을 할까 염려했다. 그는 자신이 쫓아낸 마급을 복직시키고 그와 계책을 의논한 뒤, 왕탁을 암살하기로 했지만 중간에 계획이 들통나서 암살은 실패로 끝났다. 급발진하다가 왕탁과도 사이가 틀어진 장조는 황급히 군사를 징집했다. 마침 환온의 제1차 북벌이 실패하고 동진군은 후퇴하던 중이라 평동장군 우패(牛霸)에게 친위대 3,000명을 주고 왕탁을 급습하니, 왕탁은 패배하고 전진으로 달아났다. 5월, 전량에 서리가 크게 내려 농작물들이 모두 죽고 백성들이 굶주리기 시작했다.

355년, 평소 싫어하던 친척인 하주자사 장관(張瓘)을 부한으로 보낸 뒤, 부장 이췌(易揣)와 장령(張玲)에게 보•기 13,000명을 주어 기습하게 하고 소부(索孚)로 하여금 장관을 대신하여 하주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 소식을 입수한 장관은 격분하여 황하를 도하 중이던 이췌의 군대를 역으로 기습해 대파하고 자신의 본거지 하주로 돌아가 소부를 죽였다.(장관의 난) 이췌가 패배하고 돌아오자 장조와 그의 측근들은 공포에 떨었다. 이때, 효기장군 송혼(宋混)이 도성을 빠져나와 둔황에 도착하여 아우 송징과 함께 수만 명의 군사를 일으켜 장관에게 호응했다.

황제 장조는 양추호를 보내 반란군이 옹립하려던 폐왕 장요령을 끔찍한 방법으로 암살하고[3] 그 시체를 모래구덩이에 숨기게 했다. 그리고는 반란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장요령을 애공(哀公)으로 추시한 뒤, 그의 사망 사실을 공표했지만 반란군의 사기는 떨어지기는 커녕 더 커져만 갔다. 오히려 사태가 악화되자 이번에는 도성 고장(姑臧)에 남아 있었던 장관의 아우 장거와 장숭을 잡아죽이려 들었다. 이를 눈치챈 장거와 장숭은 집을 뛰쳐나와 사람들이 많은 도성 시장 바닥에서 크게 소리쳤다.
"장조가 무도하여 우리 형이 군대를 이끌고 성 동쪽에 도착했다. 여기에 감히 반항하는 자는 삼족을 멸할 것이다!"
그들의 고함 소리를 듣고 이내 무리가 수백 명 정도 모이자, 장거와 장숭은 이들을 이끌고 궁궐 서문으로 가 그곳의 수비군과 혼란스럽게 몸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본 영군장군 조장 등이 겁을 먹어 태후 마씨의 승인을 받아 장조를 버리고 장현정(張玄靚)을 새로 옹립하려 했다. 하지만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장조가 이췌를 보내 조장 등의 무리들을 살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거, 장숭의 무리들이 대궐로 진입하자 장조는 검을 빼들고 옥좌에 앉아서 좌우 부하들에게 사력을 다해 싸우라고 외쳤다. 그러나 평소 인망이 없었기 때문에 부하들은 반란군 무리에 항복했고, 폭군 장조는 옥좌에서 끌어내려져 분노한 병사들에게 난도질당했다. 뒤늦게 도성에 입성한 장관과 송혼이 장조의 머리를 잘라 성안팎으로 효시하자 백성들이 만세를 불렀다. 송혼은 장조를 서자(庶子)의 예로 매장한 뒤 그의 두 아들들을 죽이고 장현정을 옹립했다.

훗날, 동생 장천석이 왕위에 올라 형 장조의 무덤을 민릉(愍陵)으로 개장하고 예를 갖추어 다시 매장했다. 시호 또한 위왕(威王)으로 추존했다.

3. 평가

당나라 초기의 명신이었던 방현령은 《진서》(晉書)에서
"장조는 성품이 교활하고 비열하여 음침한 구석이 있었고, 정기와 왕란[4]의 직언을 무시하다가 결국 도적질까지 해댔으니 그가 패망한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라고 혹평했다.[5]

4. 둘러보기

전량의 역대 국왕
6대 애공 장요령 7대 위왕 장조 8대 충왕 장현정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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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천석(張天錫)이 즉위한 후 추존했다.[2] 당시 궁궐에서 왕태후 마씨보다 더 발언권이 강했던 태왕태후 엄씨는 이미 세상을 뜬 상황이었다.[3] 12살 짜리 어린 아이의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4] 장관을 기습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기 전 장조는 신통하기로 유명한 점쟁이인 왕란을 불러 점을 치게 했는데 이때 왕란은 출정을 말리다가 처형당했다.[5] 《진서》(晉書) 권86 <열전> 제56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