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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오호십육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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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
大秦 | Qin Dynasty
지도의 분홍색 부분 (376년 기준)
351년 ~ 394년
<rowcolor=#ece5b6>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후조후진
후연
서연
서진
후량
북위
별칭 전진(前秦), 부진(符秦)
위치 중국 화북, 내몽골, 서역 일부
수도 장안(長安)
면적 3,580,000km² (382년 기준)
인구 10,000,000명 (383년 기준)
민족 선비족, 저족, 한족
언어 중세 중국어, 저어, 한문
문자 한자
종교 대승 불교, 유교, 도교
정치체계 군주제
국가원수 천왕, 황제
국성 부(符)
주요 황제 세조 선소제 (357년 ~ 385년)
주요 재상 왕맹
현재 국가
[[중국|]][[틀:국기|]][[틀:국기|]]

[[몽골|]][[틀:국기|]][[틀:국기|]] (일부)

1. 개요2. 역사
2.1. 초기 팽창2.2. 부견의 비상과 비수대전2.3. 혼란과 쇠퇴2.4. 부등의 최후 분전과 멸망
3. 기타4. 역대 황제

[clearfix]

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에 티베트계 저족이 세운 국가. 국호는 (秦)이지만 동시대에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많아 가장 먼저 나타난 이 국가를 전진(前秦)이라고 따로 구분한다. 북진(北秦), 호진(胡秦)[1], 부진(符秦), 저진(氐秦)으로도 불렸다.

고구려소수림왕에게 유교불교를 전해 주고 태학 운영 방식까지 전수해 줬으며, 신라와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2. 역사

2.1. 초기 팽창

황하 연안에서 할거 중이던 포홍(蒲洪)은 후조(後趙)와 염위(冉魏)의 대립으로 화북이 혼란해지자 삼진왕(三秦王)을 칭하고 성을 부(苻)로 고쳤다.[2] 부홍은 서쪽으로 진격해 옛 근거지 관중을 점거하려 했지만, 부하의 배신으로 암살당하고 말았다.

부홍의 뒤를 이은 아들 부건(苻建)은 삼진왕의 칭호를 버리고 동진(東晉)의 관작을 따르면서 관중으로 진격했다. 장안 지역에서 할거하던 두홍(杜洪)은 방심하다가 부건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으며, 부건은 역시 옛 근거지 관중으로 돌아가려는 강족의 요양(姚襄)을 격파하고 관중에서 하남 일대에 걸쳐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351년 부건은 동진의 관작을 버리고 천왕(天王)에 올라 국호를 대진(大秦)으로 정하였으며, 이것이 전진(前秦)이라 불리는 왕조의 시작이다. 352년에 부건은 마침내 황제에 오른다.

그 뒤 고조 경명제 부건은 두홍의 잔당을 소탕하고, 관중으로 쳐들어온 동진의 양주자사 사마훈을 물리치면서 관중을 평정해 나갔다. 그 뒤 동진의 북벌군에게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지만, 승상 부웅(苻雄, 3대 황제 부견의 아버지)이 잘 대처한 덕에 가까스로 살아남았다.[3]

2.2. 부견의 비상과 비수대전

그 뒤 355년 6월, 관중을 통일한 지 1년도 채 안 지나 부건이 병으로 죽었다. 원래 태자였던 부장(苻萇)은 환온의 1차 북벌 때 다쳐 354년에 죽었다. 이에 새로 세운 태자인 부생(苻生)이 뒤를 잇는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애꾸였던 데다가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었던 부생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명재상 부웅의 뒤를 이었던 부견(苻堅)도 목숨이 위험해지자 반정을 계획했다. 왕맹(王猛)[4]이라는 명재상을 얻자 그는 357년, 반정을 일으켜 폭군 부생을 폐위・살해하고 전진의 천왕(天王)에 올랐다.

그 뒤 부견은 내치를 다지고 개혁을 실시하면서 국력을 키워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로의 확장을 시작하면서 동진의 형주(荊州)를 공격하고 이듬해 367년에는 농서(隴西)를 정벌한다. 하지만 그해(367) 전진의 황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뺀 관중 전체가 조각조각으로 나뉠 만큼 전진은 위험했다. 그러나 당시 전연(前燕)의 정권을 잡던 권신 모용평(慕容評)이 소극적으로 대처하자, 368년 한 해를 모두 써 부견은 반란 평정에 성공했다.

369년에 환온(桓溫)이 북벌을 일으켜 전연을 공격하자 전연에서 구원군을 청하며 낙양 근교 호뢰관(虎牢關) 서쪽의 땅을 할양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자 왕맹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연에 군사를 보내주어 환온의 북벌군을 물리치는 것을 도와줬다. 그 뒤 전연의 황족 모용수(慕容垂)가 망명해오자 그를 받아들이고 호뢰관 서쪽 땅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시작으로 369년 말에 전연을 공격했으며 370년에는 전연을 멸망시켰다. 373년에 동진의 사천(四川) 지방을 정복하고, 승상 왕맹이 죽은 뒤인 376년에는 전량(前凉)과 대나라(代)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고 동진의 장강 이북을 차지하며 서역을 평정하여 오호십육국 시대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한반도 국가와의 교류도 이때 활발해 졌는데, 고국원왕고구려로 망명한 전연의 간신 모용평[5]을 묶어 전진으로 압송시켰으며 소수림왕 때 전진의 승려 순도가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했다. 신라도 377, 382년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신라”라는 국호를 가지고 방문하였다.

이때만 해도 통일 플래그가 선 듯 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나왔다. 부견은 동진까지 멸망시켜 천하통일을 이룩하고자 했지만 비수대전(383)에서 궤멸하면서 그 꿈이 좌절되었다. 이로써 부견에 의해 천하통일을 할 뻔했던 중국 대륙은 다시 혼돈의 카오스로 빠져들어 2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수문제에 의하여 통일을 이루게 된다.

2.3. 혼란과 쇠퇴

그 뒤 농서의 걸복국인(乞伏國仁)이 일으킨 반란을 시작으로 비수전역 패배 직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전진은 멸망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진다.[6] 이로써 오호십육국시대가 계속 연장되고, 남북조시대의 개막은 50여 년 후로 미뤄지게 된다.

부견은 모용홍, 모용충의 서연에게 공격을 받아 장안을 버리고 도주하였다가 강족 출신 후진(後秦)의 요장(姚萇)에게 사로잡혀 선양 요구를 거부하고 그를 모욕하다가 죽음을 당했다.[7] 그 뒤 부견의 서장자인 부비(苻丕)가 385년 8월 말 진양에서 황제에 올랐다. 부비는 피폐한 세력을 이끌고 전진을 부흥시키려 하지만 끝내 상황이 나빠져 진양에서 출진하여 평양(平陽)으로 진출한다. 하지만 거기서 모용영(慕容永)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고, 동진의 낙양을 무모하게 습격하였다가 전사한다.

2.4. 부등의 최후 분전과 멸망

그 뒤, 위평이 이끄는 부한(枹罕)의 저족들의 세력을 얻은 부등(苻登)이 부비의 사망 소식을 듣고 386년 11월, 농동(隴東)에서 황제에 올랐다. 부등은 부견의 복수를 내세우면서 후진의 요장과 여러 차례에 걸친 전투를 펼쳤다. 초반에는 후진군이 많이 졌는데, 후진의 황제 요장은 부견의 귀신이 부등을 돕는다라 생각하고 시신을 훼손까지 했던 부견의 형상을 만들어서 그 형상에 자신의 잘못을 비는 코미디같은 짓을 했다(...). 이는 놀랍게도 《자치통감》에 기록된 엄연한 정사다. 당연히 도움은 없었다. 오히려 요장 진영의 군인들이 부견의 형상을 보고 놀라기만 했을 뿐이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우리들이 알고 있듯이 그 당시 상대하던 부등도 이를 인지하고 한 껏 비웃었다고 한다. 결국 나중에 그 상의 목을 베어 부등한테 보냈다.

하지만 이 일이 있은 뒤 요장의 후진군에게 부등은 대패해 뼈아픈 타격을 받는다. 그 뒤의 상황을 보면 전진의 세력이 투항했다가 전진이 쳐들어오면 그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키는 일 등을 빼면 전진에 비해 후진의 세력은 안정적인 편이었고, 그 상황에서도 전쟁을 잇던 전진의 세력은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394년 봄, 부견이 나오는 악몽 등을 꾸다가 고자가 된(...) 요장이 세상을 뜨자 부등은 그의 뒤를 이은 요흥을 얕보고 대대적인 준비를 해 후진과 싸우지만 요흥의 침착한 대응으로 대패했다. 그 뒤 부등은 산중에 숨어서도 재기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그 사이 자신의 막하에만 이름을 올린 채 거의 도와주지도 않던 금성(金城)의 걸복건귀에게 아들을 인질로, 누이동생을 왕후로 보내 10,000명의 기병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394년 7월에 요흥의 대군이 걸복건귀의 원병을 맞으러 산에서 내려온 부등을, 원군이 오기도 전에 사로잡아 처형시켰다.

그 뒤로 부등의 태자 부숭이 황중(湟中)에서 황제에 오르지만 오히려 걸복건귀의 군사에게 쫓겨나 땅을 빼앗겼다. 그래서 부숭은 구지의 양정에게 도망가 그의 밑에서 전진의 부흥을 꿈꾸지만 끝내 구지의 양정이 걸복건귀에게 지면서 그도 같이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394년 전진은 완전히 멸망했다.

3. 기타

4. 역대 황제

<rowcolor=#fff>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 태조(太祖) 무혜황제(武惠皇帝)[8] 부홍(苻洪) - 350 -
1대 고조(高祖) 경명황제(景明皇帝) 부건(苻健) 황시(皇始) 351 ~ 355 350 ~ 355 원릉(原陵)
2대 - 여왕(厲王) 부생(苻生) 수광(壽光)355 ~ 357 355 ~ 357 -
- - 문환황제(文桓皇帝)[9] 부웅(苻雄) - - -
3대 세조(世祖) 선소황제(宣昭皇帝) 부견(苻堅) 영흥(永興) 357 ~ 359
감로(甘露) 359 ~ 364
건원(建元) 365 ~ 385
357 ~ 385 -
4대 - 애평황제(哀平皇帝) 부비(苻丕) 태안(太安) 385 ~ 386 385 ~ 386 -
5대 태종(太宗) 고황제(高皇帝) 부등(苻登) 태초(太初) 386 ~ 394 386 ~ 394 -
6대 - - 부숭(苻崇) 연초(延初) 394 394 -
비정통 - -
<진왕(秦王)>
두충(竇衝) - 393 ~ 394 -
비정통 - -
<진왕(秦王)>
부광(苻廣) - 399 -


[1] 다만 북진. 호진은 후진이랑 겹친다.[2]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도참설에 따른 것으로 당시 세간에는 "초부응왕(草付應王)"이라는 말이 떠돌았는데, 포홍의 손자였던 견(堅)의 등에도 초부(草付)라는 글씨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포홍은 "초(草=艸)"와 "부(付)"를 모아서 "부(苻)"로 성을 삼았다.[3] 그러나 관중 평정 뒤 행한 논공행상에서 부웅은 이름을 못 올렸는데 그가 관중 평정 2개월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사 소식을 듣자 부건은 피를 토하며 곡을 했다고 한다. "하늘이 나의 사해 평정을 바라지 않는단 말인가? 어찌하여 나의 원재(元才)를 이렇게 빨리 빼앗아 가는가?"라는 부건의 말에서 명재상 부웅을 잃은 부건의 슬픔이 잘 드러난다.[4] 325~375. 자는 경략(景略)이다. 어려서 빈천하였으나 박학하였으며 병서(兵書)를 좋아하였다. 화산(華山)에 은거할 때 동진(東晉)의 환온(桓溫, 312~373)이 왕맹에게 같이 남쪽로 내려갈 것을 원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357년에 부견이 즉위하여 왕맹을 불러보고는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만난 것에 비유하며 중용하였다. 370년에 전연(前燕)을 쳐서 멸망시켰다.[5] 모용수와의 대립으로 모용수가 전진으로 망명하는데 지대한 도움을 준(...) 인물이다.[6] 사실 이 반란의 원인은 부견 그 자신의 정책에 있었다. 이상주의자였던 부견은 멸망시킨 나라의 국민들을 수도로 이주시키고 오히려 저족을 지방으로 내보냈는데, 전진이 비수대전에서 지자 이 정책은 전진을 발목잡는 원인이 되었다.[7] 부견은 이민족이던 요장과 모용수 등을 중용하고 우대했으며 진심으로 포용했다. 그러나 요장은 그가 불리한 틈을 타서 그를 사로잡아 죽이고 말았다. 나중에 동진의 권신 유유가 요장의 손자 요홍을 수도 건강으로 압송해 요씨 일족들과 함께 참수시켜 후진은 멸망했는데 일종의 인과응보, 업보였다. 반면 모용수는 일종의 애증관계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서인지 그가 세운 후연은 상대적으로 번성했다.[8] 경명제 추존.[9] 선소제 추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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