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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 제6대 황제 부숭 | 苻崇 | |
<colbgcolor=#483D8B>묘호 | 없음 |
시호 | 없음 |
연호 | 연초(延初, 394년) |
성씨 | 부(苻) |
휘 | 숭(崇) |
생몰 기간 | ? ~ 394년 |
재위 기간 | 394년 9월 ~ 10월 |
[clearfix]
1. 개요
전진의 마지막 황제.부황 부등이 후진의 제2대 황제인 고조 문환제 요흥에게 붙잡혀 처형되자 제위에 올랐지만, 1개월도 못 채우고, 서진의 걸복건귀에게 패배한 후 전사했다.
2. 생애
388년, 황태제 부의가 병으로 죽는 바람에 태자가 되었다.394년 9월, 부황 부등이 후진과 총력전을 벌이다가 대부분의 국력을 소진시키고 요흥에게 죽자, 전진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후진군의 진격을 막을 길이 없어진 태자 부숭은 남은 무리들을 데리고 양주(梁州)로 피신했다. 황중(湟中)에 도착해 황제를 칭하고 아버지 부등을 '태종 고황제'로 추존했다. 하지만 전진은 이미 국토 대부분을 빼앗겨 거의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화음에서 전진의 장수 두충이 진왕(秦王)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작은아버지 안성왕 부광은 남연의 모용덕에게 항복하면서 세력은 더더욱 약해졌다. 이때 선제 부등이 임명한 양왕(梁王) 걸복건귀[1]에게 공격을 받았고, 부숭은 패배하여 진주(秦州)에 할거하고 있는 농서왕 양정에게로 도망쳤다.
394년 10월, 부숭은 양정과 함께 20,000명의 병력으로 배신한 걸복건귀를 쳤다. 걸복건귀는 휘하 장수들인 걸복가탄, 걸복익주, 월질힐귀(越質詰歸) 3명에게 각기 10,000명의 기병을 주어 요격하도록 했다. 부숭과 양정은 우선 평주(平州)에서 걸복익주의 군대를 격퇴했다. 걸복익주의 패전 소식을 들은 걸복가탄과 월질힐귀는 크게 놀라 후퇴할 궁리만 했다. 이 추태를 지켜보던 걸복가탄의 사마 적온이 분노해 걸복가탄의 면전에서 칼을 휘두르며 당장 그 자리에서 대장의 목을 벨 기세로 따지자, 걸복가탄은 즉시 사과를 하고 그대로 나아가 부숭과 양정의 전진군을 공격했다. 부숭은 걸복가탄과 맞서 싸웠으나, 퇴각하려다가 마음이 바뀐 월질힐귀와 패잔병 수습을 마친 걸복익주까지 가세하여 협공하니, 결국 이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대패했다. 전진군의 병력 20,000명 중 17,000여 명이 사살당했으며, 양정과 부숭 자신은 난전 중 전사했다.
그나마 남아있었던 전진의 저족 세력이 이 전투에서 부숭과 공멸해버린 관계로, 부숭의 아들이자 전진의 태자였던 부선(苻宣)은 감히 황제를 칭하지 못하고, 양정의 뒤를 이은 양성에게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고조 경명제 부건이 건국한 전진은 44년만에 선비 걸복부의 서진에 의해 멸망되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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