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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賈疋
(?~312)
서진 말의 무장으로 젊은 시절 높은 뜻과 재능, 야심이 있었다. 양주 무위군 고장현 사람으로 자는 언도(彥度)다. 조위의 관원이자 조조의 모사로 유명한 가후의 증손자다.
안정태수로 안정의 노수호를 토벌해 팽탕중(彭蕩仲)등의 항복을 받았다. 311년 전조에 항복하려는 팽탕중을 죽여 북서부 이민족 세력의 이반을 막으려고 했다. 312년 민제 사마업을 도와 5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공격하여 유총을 몰아내고 장안을 탈환했다. 가을에 서진의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정서대장군, 옹주자사로 승진했다. 하지만 그해 팽탕중의 아들 팽천호(彭天護)에게 피살되었고,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필은 사마업 정권의 제일 큰 기둥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나머지 사람들도 다 끝장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그가 죽자 더 이상 장안의 수비에는 뼈아픈 타격을 입게 되어 국윤과 색침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를 상대로 대부분 패배하였다. [1] 다만, 자기에게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는데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팽천호와 싸우러 나간 것을 보면 조상님만큼의 조심성은 없었던 듯하다.
그래도 충성심이라고는 일절 없던 조상님과는 달리, 이미 멸망이 확정된 서진의 명을 몇 년이라도 더 이어준 큰 충신인데, 원래 서진, 동진 자체가 워낙 처참했기 때문에 그나 수많은 진나라의 충신들의 사적은 묻혀버린 면이 크다. 실제로 진서에서도 그의 능력과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죽음을 사람들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고 했으니 확실히 보신주의자인 조상님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1] 당시에는 장군 자체가 군대였으므로 장군이 죽으면 군대는 저절로 흩어졌다. 가필의 5만 병력이 살아남아 있었으면 장안 정권이 얼마 후 허무하게 나가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