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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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閻鼎(? ~ 312)
서진의 인물로 자는 태신(台臣).
2. 생애
옹주 천수군 기현 출신으로, 태부 동해왕 사마월의 참군으로 출사하여 권(卷)의 현령으로 부임하고, 영예주자사로 임명받아 허창에 주둔했다.311년, 영가의 난으로 인해 서진의 수도 낙양이 함락되고 회제 사마치가 사로잡히자, 진왕(秦王) 사마업은 사공 순번, 사예교위 순조, 중령군 화항, 하남윤 화로와 함께 밀(密)현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염정은 모친상을 당해 밀에서 서쪽에서 도망쳐온 수천 명의 유민들을 규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순번은 염정에게 재능이 있음을 알고 그를 관군장군, 예주자사로 삼아 밀현에 남게 하고, 사도좌장사 유주(劉疇), 중서령 이긍(李暅), 태부참군 추첩(騶捷)과 유위(劉蔚), 진군장사 주의, 진군사마 이술(李述) 등을 붙혀 이들의 보좌를 받게 했다.
염정은 본래 젊었을 적부터 큰 뜻을 품었는데, 서쪽 유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눈치채고 이들을 이용해 공적을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무군장사 왕비(王毗), 무군사마 부손(傅遜)과 진왕 사마업을 황제로 옹립할 계략을 꾸민 뒤 유주, 추첩 등에게 "산동은 패왕의 땅이 아니며 관동만 못하다."라 말하며 장안을 공략하려는 뜻을 내비쳤다. 때마침 하음현령 부창이 염정에게 서신으로 '진왕을 받들고 낙양을 방문하여 선제의 산릉에 배알하고, 그런 뒤 직접 장안을 탈환해 그곳을 본거지로 삼아 이민족과 한족을 규합하여 국가의 치욕을 씻자' 건의하였다.
서신을 받은 염정이 즉시 낙양을 방문하려 하자, 서쪽 사정에 밝은 유민들은 염정에게 북쪽 길로 가면 황하와 가깝기 때문에 앞뒤로 적을 만나면 낙양에 발을 들일 수조차 없으니, 차라리 남쪽으로 빠져서 무관을 통해 장안으로 가야한다 조언했다. 염정은 하는 수 없이 낙양행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우회하여 장안으로 향했다. 유주 등은 원래 산동 출신이라 서쪽으로 이동하길 꺼렸으며, 결국 도중에 순번, 추첩, 유주, 주의 등은 동진으로 달아났다. 염정은 신속히 순번 등을 추격했으나 이긍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놓치니, 중서령 이긍만 잡아 참수했다.
염정은 사마업을 데리고 완(宛)을 거쳐 무관으로 향했지만, 상락(上洛)에 이르렀을 때 산도적의 습격을 받아 100여 명이 죽었다. 염정은 나머지 무리를 거두어 장안 동남쪽에 위치한 남전(藍田)에 도착해 안정태수 가필에게 사람을 보냈다. 가필은 군사를 보내 옹성(雍城)에서 사마업을 받들었다.
312년 4월, 가필이 장안을 점거하고 있던 한나라의 중산왕 유요[1]와 여러 차례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그해 9월, 버틸 수 없다 판단한 유요는 장안의 백성 8만 명을 겁박하여 평양(平陽)으로 달아나니, 염정은 마침내 사마업과 함께 장안에 입성할 수 있었다. 장안을 탈환한 가필은 행대(行臺)를 세우고 염정, 남양왕 사마보, 위장군 양분(梁芬), 경조윤 양종(梁綜)과 한마음으로 사마업을 황태자로 추대하였다. 이때 사마업은 염정을 태자첨사로 삼아 백관을 통솔하게 했다.
312년 12월, 옹주자사, 정서대장군 가필이 죽인 한나라의 양주자사 팽탕중의 아들 팽천호가 이민족들을 거느리고 가필을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사마업의 무리들은 시평태수 국윤을 영옹주자사로 추대했다. 염정은 경조윤 양종과 권력을 다투다, 양종을 죽이고 자신의 부하인 왕비를 대신 경조윤으로 삼았다. 가필과 양종이 죽은 틈을 타 염정이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자 영옹주자사 국윤, 무이호군 삭침(索綝), 빙익태수 양위(梁緯), 북지태수 양숙(梁肅)[2]이 힘을 합쳐 염정을 쳤다. 염정은 옹성으로 쫓겨났다가 저족 사람 두수(竇首)에게 피살되고 그 수급은 장안으로 보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