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1 17:52:02

부창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f8c4c4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펼치기 ]
{{{#999,#666666
1권 「전조록일(前趙錄一)」 2권 「전조록이(前趙錄二)」 3권 「전조록삼(前趙錄三)」 4권 「전조록사(前趙錄四)」
유연 · 유화 유총 유총 유총 · 유찬
5권 「전조록오(前趙錄五)」 6권 「전조록육(前趙錄六)」 7권 「전조록칠(前趙錄七)」 8권 「전조록팔(前趙錄八)」
유요 유요 유요 유선 · 유성 · 유익 · 유윤
9권 「전조록구(前趙錄九)」 10권 「전조록십(前趙錄十)」 11권 「후조록일(後趙錄一)」 12권 「후조록이(後趙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석륵 석륵
13권 「후조록삼(後趙錄三)」 14권 「후조록사(後趙錄四)」 15권 「후조록오(後趙錄五)」 16권 「후조록육(後趙錄六)」
석륵 석홍 석호 석호
17권 「후조록칠(後趙錄七)」 18권 「후조록팔(後趙錄八)」 19권 「후조록구(後趙錄九)」 20권 「후조록십(後趙錄十)」
석호 석세 · 석준 · 석감(鑒) 석민 {{{#!folding [ 펼치기 · 접기 ]
21권 「후조록십일(後趙錄十一)」 22권 「후조록십이(後趙錄十二)」 23권 「전연록일(前燕錄一)」 24권 「전연록이(前燕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모용외 모용황
25권 「전연록삼(前燕錄三)」 26권 「전연록사(前燕錄四)」 27권 「전연록오(前燕錄五)」 28권 「전연록육(前燕錄六)」
모용황 모용준 모용준 모용위
29권 「전연록칠(前燕錄七)」 30권 「전연록팔(前燕錄八)」 31권 「전연록구(前燕錄九)」 32권 「전연록십(前燕錄十)」
모용위 토욕혼· 모용한· 모용인· 모용각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33권 「전진록일(前秦錄一)」 34권 「전진록이(前秦錄二)」 35권 「전진록삼(前秦錄三)」 36권 「전진록사(前秦錄四)」
부홍 부건 부생 부견
37권 「전진록오(前秦錄五)」 38권 「전진록육(前秦錄六)」 39권 「전진록칠(前秦錄七)」 40권 「전진록팔(前秦錄八)」
부견 부견 부비 부등
41권 「전진록구(前秦錄九)」 42권 「전진록십(前秦錄十)」 43권 「후연록일(後燕錄一)」 44권 「후연록이(後燕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모용수 모용수
45권 「후연록삼(後燕錄三)」 46권 「후연록사(後燕錄四)」 47권 「후연록오(後燕錄五)」 48권 「후연록육(後燕錄六)」
모용수 모용보 모용성 모용희
49권 「후연록칠(後燕錄七)」 50권 「후연록팔(後燕錄八)」 51권 「후연록구(後燕錄九)」 52권 「후연록십(後燕錄十)」
모용운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53권 「후진록일(後秦錄一)」 54권 「후진록이(後秦錄二)」 55권 「후진록삼(後秦錄三)」 56권 「후진록사(後秦錄四)」
요익중 요양 요장 요흥
57권 「후진록오(後秦錄五)」 58권 「후진록육(後秦錄六)」 59권 「후진록칠(後秦錄七)」 60권 「후진록팔(後秦錄八)」
요흥 요흥 요홍 {{{#!folding [ 펼치기 · 접기 ]
61권 「후진록구(後秦錄九)」 62권 「후진록십(後秦錄十)」 63권 「남연록일(南燕錄一)」 64권 「남연록이(南燕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모용덕 모용초
65권 「남연록삼(南燕錄三)」 66권 「하록일(夏錄一)」 67권 「하록이(夏錄二)」 68권 「하록삼(夏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혁련발발 혁련창 혁련정
69권 「하록사(夏錄四)」 70권 「전량록일(前涼錄一)」 71권 「전량록이(前涼錄二)」 72권 「전량록삼(前涼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장궤 장실 장준
73권 「전량록사(前涼錄四)」 74권 「전량록오(前涼錄五)」 75권 「전량록육(前涼錄六)」 76권 「촉록일(蜀錄一)」
장중화 · 장령요 · 장조 장현정 · 장천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특
77권 「촉록이(蜀錄二)」 78권 「촉록삼(蜀錄三)」 79권 「촉록사(蜀錄四)」 80권 「촉록오(蜀錄五)」
이류 · 이웅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81권 「후량록일(後涼錄一)」 82권 「후량록이(後涼錄二)」 83권 「후량록삼(後涼錄三)」 84권 「후량록사(後涼錄四)」
여광 여소 · 여찬 여륭 {{{#!folding [ 펼치기 · 접기 ]
85권 「서진록일(西秦錄一)」 86권 「서진록이(西秦錄二)」 87권 「서진록삼(西秦錄三)」 88권 「남량록일(南涼錄一)」
걸복국인 · 걸복건귀 걸복치반 · 걸복모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89권 「남량록이(南涼錄二)」 90권 「남량록삼(南涼錄三)」 91권 「서량록일(西涼錄一)」 92권 「서량록이(西涼錄二)」
독발녹단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고 이흠
93권 「서량록삼(西涼錄三)」 94권 「북량록일(北涼錄一)」 95권 「북량록이(北涼錄二)」 96권 「북량록삼(北涼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저거몽손 저거무건 {{{#!folding [ 펼치기 · 접기 ]
97권 「북량록사(北涼錄四)」 98권 「북연록일(北燕錄一)」 99권 「북연록이(北燕錄二)」 100권 「북연록삼(北燕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풍발 풍홍 {{{#!folding [ 펼치기 · 접기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a11>
※ 흠정 24사 관련 틀 둘러보기
||
}}}}}}}}}}}}}}} ||

1. 개요2. 생애

1. 개요

傅暢
(? ~ 330)

서진후조의 인물. 자는 세도(世道). 양주(凉州) 북지군(北地郡) 이양현(泥陽縣) 출신. 조위의 양향후 부하의 손자. 서진의 사도 부지의 아들. 어사중승 부선(傅宣)의 동생.

2. 생애

부창이 5살일 때, 한번은 아버지 친구가 장난삼아 그의 옷을 벗기고 금반지를 빼앗아 시종에게 주었는데, 부창이 이를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칭찬하며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부창은 약관의 나이에 이르기도 전에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쳐 동궁(東宮)의 시강(詩講)으로 조정에 임관하였다가 비서감으로 승진하였다.

영가 5년(311년) 6월, 한나라에 의해 수도 낙양이 함락되고 회제 사마치가 사로잡혀 끌려가자, 아버지 부지는 하음(河陰)으로 도망쳐 대장군 구희와 함께 행대(行臺)를 세우고 승제하였다. 구희와 부지는 회제 사마치의 차남인 예장왕 사마단(司馬端)을 옹립하였고, 이때 부창도 하음현령에 제수받았다.

당시 밀현(密縣)에도 사공 순번(荀藩)이 세운 또다른 행대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오왕 사마안의 아들인 진왕(秦王) 사마업을 받들었다. 부창은 창원(倉垣)에 칩거하면서 나라를 다시 일으킬 생각을 없는 구희보다 진왕 사마업의 무리를 따르고 싶어하여 염정에게 서신을 보내 '진왕을 받들고 낙양을 방문하여 선제의 산릉에 배알하고, 그런 뒤 직접 장안을 탈환해 그곳을 본거지로 삼아 이민족과 한족을 규합하여 국가의 치욕을 씻자' 건의하였다. 염정 또한 그의 말에 동의하여 무리를 이끌고 관중으로 향했고, 부창은 아버지 부지와 함께 삼저(三渚)에 주둔하며 때를 기다렸다.

영가 6년(312년) 4월, 한나라의 중산왕 유요가 삼저를 공격해왔을 때, 부지가 갑자기 병으로 급사하여 성이 금새 함락당했고, 부창을 비롯한 그 아들, 조카들은 모두 적군에게 붙잡혀 한나라의 수도인 평양(平陽)으로 끌려갔다. 평양에 이르러 소무제 유총에게 투항한 부창은 대장군 석륵의 우사마(右司馬)로 배속되었다가 참군으로 옮겨졌다.

광초 2년(319년) 11월, 석륵이 조왕(趙王)에 오르자, 부창은 경학좨주(經學祭酒)에 임명되어 석륵의 지시에 따라 《상당국기(上黨國記)》, 《기거주(起居注)》, 《조서(趙書)》를 편찬하여 후조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부창은 조정의 의례에 정통하였기에, 석륵은 그를 신임하여 중용하고 조정의 기밀에 관한 일을 관리하게 하였다.

건평 원년(330년) 9월 ~ 12월 중에 부창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진제공서찬(晉諸公敘贊)》 22권과 《공경고사(公卿故事)》 9권을 편찬하였고, 훗날 배송지가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달 때 그 서적들을 참고하였다. 아들 부영(傅詠)은 후조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장강을 건너 동진으로 귀순하고, 교주(交州)자사, 태자우위솔을 역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