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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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檀憑之 단빙지 | |
작위 | 곡아현공(曲阿縣公) |
성 | 단(檀) |
이름 | 빙지(憑之) |
자 | 경자(慶子) |
본관 | 고평군(高平郡) 금향현(金鄕縣) |
생몰 | ? ~ 40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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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장수로 자는 경자(慶子)이다. 고평군 금향현 출신.2. 생애
어린 나이에 총명하고 재능이 있었으며, 집안이 화목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된 단소, 단지, 단도제를 포함한 5형제를 자신의 자식처럼 길렀는데, 단소 형제와 단빙지는 5촌 관계였으며, 단도제는 후대 유송의 명장으로 명성을 날렸다.처음 회계왕 사마도자의 행참군으로 임명되었다가 뒤에 환수의 장류참군長流參軍)으로 전임되었으며, 동관군(東莞郡) 태수를 겸임하고 영원장군(寧遠將軍)이 더해졌다. 단빙지는 여러 차례 유유와 함께 군대를 거느려 정벌에 참가하여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
유유가 환현을 토벌하고자 거병할 때 단빙지는 상중이었음에도 유의(劉毅)와 함께 유유에게 종군하였다. 단빙지는 재주와 명망이 유의보다 부족했지만, 위세와 명성은 유의보다 뛰어났기에 건무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의거를 일으킬 때 하무기와 위영지가 단빙지와 합류했는데, 관상을 잘 보는 위수(韋叟)가 단빙지를 보고 놀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군께 갑작스러운 전란의 재앙이 있을 것이고 그 징후가 3~4일 뒤에 나타날 것입니다. 장군께서 화를 피하시려면 나서지 말고 틀어박혀야 하니 경솔하게 나서지 마십시오.
뒤에 환현의 장수인 황보부(皇甫敷)가 나락교(羅落橋)에 당도하자, 단빙지는 유유와 함께 각각 군대를 거느려 황보부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하여 살해되었다. 사태가 평정된 뒤 단빙지는 기주자사(冀州刺史)로 추증되었다가 다시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추증되고 곡아현공(曲阿縣公)으로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