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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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팽택목후(彭澤穆侯) 王舒 | 왕서 | |
시호 | 목(穆) |
작위 | 팽택현후(彭澤縣侯) |
성 | 왕(王) |
휘 | 서(舒) |
자 | 처명(處明) |
생몰 | ? ~ 333년 7월 24일 |
출신 |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 |
부친 | 왕회(王會) |
배우자 | 유씨(劉氏) |
자녀 | 왕안지(王晏之), 왕윤지(王允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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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 서진 시기 시어사를 지낸 왕회의 아들. 승상 왕도과 대장군 왕돈의 사촌동생으로, 그의 집안인 낭야 왕씨 가문은 동진에서 상당한 위세를 떨쳤다.2. 생애
젊은 시절, 사촌형 왕돈과 나란히 명성을 떨쳤지만, 천하가 너무 혼란한 나머지 당장의 명성은 중요하지 않다 생각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공부에만 열중했다. 왕서가 40세에 이르렀을 때, 주(州)와 태부(太傅) 부서에서 그를 등용하고자 했지만 왕서는 이를 모두 거절하고 응하지 않았다.영가 원년(307년) 11월, 왕돈이 청주자사(青州)로 발령받자, 왕서도 그를 따라 청주로 이동했다. 그러나 청주에 자리를 잡은지 한 달만에 왕돈이 비서감에 임명되어 다시 낙양(洛陽)으로 돌아가야 했다. 왕돈은 낙양으로 향하던 중, 도적떼가 너무 많이 나타나 길이 험난한 것을 보고 아내 양성공주 사마수위(司馬修褘)와 수많은 짐들을 친척들에게 맡긴 뒤, 먼저 낙양으로 떠났다. 친척들은 왕돈이 남기고 간 수레에 금과 보물이 가득한 것을 깨닫고, 서로 경쟁하면서 정신없이 재화를 챙겼으나 왕서만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된 왕돈은 왕서의 의연한 태도를 높이 칭찬했다. 이후 왕돈은 왕서를 비롯한 친척들을 거느리고 장강을 건너, 건업(建業)을 거점으로 세력을 형성 중이던 진동대장군 낭야왕 사마예에게 귀순했다. 왕서는 진동참군에 임명되었다가, 옮겨져 율양(溧陽)의 현령으로 부임했다.
건흥 원년(313년) 말, 낭야왕 사마예는 세자 사마소를 동중랑장에 임명하고, 서주 광릉군(廣陵)에 주둔하게 했다. 이때 왕서는 사마소의 사마에 임명되어 세자를 수행해 광릉을 진수했다.
건무 원년(317년) 4월, 사마예가 진왕(晉王)에 등극하면서 사마소를 태자로 삼고 도성 건강(建康)으로 불렀다. 그리고 차남인 후장군 선성공 사마부를 낭야왕, 표기장군에 임명하고, 사마소 대신 광릉을 지키게 하였다. 왕서는 사마부 밑에서 자의참군, 사마를 지내면서 그로부터 군사(軍司) 직책을 맡아달라 제안 받았으나 굳게 사양했다. 6개월 뒤, 낭야왕 사마부가 사망하자, 사마예는 왕서를 북중랑장, 감청서2주제군사(監青徐二州諸軍事)로 임명하고 사마부를 대신해 광릉을 진수하게 했다.
대흥 3년(320년) 10월, 동진의 태산태수 서감이 태산을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조의 중산공 석호에게 공격을 받고 후조에 투항했다. 변성(卞城)에 주둔하던 서주자사 채표는 석호의 군대가 오는 것을 물러났으나, 도중에 서감의 공격을 받고 패주했다. 채표는 낙심하여 건강으로 가 죄를 받고자 했지만, 왕서가 이를 막았다. 원제 사마예는 채표의 패배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 채표를 압송해오게 하니, 왕서는 야밤에 병사를 거느리고 채표의 진영을 포위했다. 채표는 도적이 공격하는 줄로만 알고 응전하려 했으나, 왕서에게 조서가 있다는 말을 듣고 순순히 체포당했다. 왕서에게 붙잡힌 채표는 건강으로 압송된 후 참수되었다. 얼마 뒤, 왕서는 조정의 부름을 받고 국자박사, 산기상시에 임명되었으나, 미처 건강에 도착하기도 전에 소부(少府)로 옮겨졌다.
태녕 원년(323년) 초, 정위(廷尉)에 임명되었다. 동년 8월에 아들 왕윤지가 승상 왕돈과 참군 전봉(錢鳳)의 반역 모의를 왕서에게 밀고하자, 왕서는 이를 그대로 왕도에게 일러 바쳐 왕돈의 반역에 대비케 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왕돈은 낭야 왕씨 가문의 힘을 더하고자, 조정에 상표해 왕서를 응양장군, 형주자사, 영호남만교위(領護南蠻校尉), 감형주면북제군사(監荊州沔南諸軍事)로 삼게 했다.
태녕 2년(324년) 7월, 또다시 반란을 일으킨 왕돈은 형 왕함을 보내 명황제 사마소의 군대와 싸우게 했지만, 왕함이 대패하고 왕돈은 분사하면서 반란군 잔당은 혼란에 빠졌다. 왕함과 그 아들인 왕응은 왕서에게 의탁하기 위해 형주로 달아났다. 이에 왕서는 군대를 보내 왕함 부자를 영접한 뒤, 그들을 장강에 빠뜨려 익사시켜 버렸다. 이 공으로 조정에서 그를 도독형주제군사, 평서장군, 가절로 승진시켰다.
태녕 3년(325년) 5월, 정남장군 도간이 왕서를 대신해 형주자사가 되었고, 왕서는 안남장군, 광주자사로 옮겨졌다. 왕서는 당시 병을 앓고 있어 광주까지 부임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조정에서도 멀리 나갈 수 없는 왕서의 사정을 고려해, 그를 상주자사(湘州刺史)로 옮기고 나머지 직책은 그대로 두었다.
함화 원년(326년) 4월,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중앙으로 돌아가 등유(鄧攸)를 대신해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었다.
함화 원년(326년) 8월, 중서령 유량은 역양내사 소준, 예주자사 조약의 불만이 많은 것을 보고 행여나 반란을 일으킬까 의심해, 왕서를 무군장군, 회계내사로 삼아 널리 원조하게 하고 석두성을 수리하게 했다.
함화 2년(327년) 11월, 역양내사 소준이 조약과 손을 잡고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왕서를 임시로 도독에 임명하고, 양주자사 업무를 대행하게 했다.
함화 3년(328년) 5월, 상서 장개가 왕서에게 의병을 조직하라는 왕돈의 밀명을 전했다. 왕서는 소준에게 패해 도망쳐온 유량의 동생 유빙을 행분무장군, 오왕사 우비(虞𩦎)를 군사(軍司), 어사중승 사조(謝藻)를 행용양장군, 감전봉정토제군사(監前鋒征討諸軍事)로 각각 삼고, 병사 1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군해 절강(浙江)을 건넜다. 그러자 오흥태수 우담, 오국내사 채모, 의흥태수 고중(顧眾), 호군참군 고양(顧颺) 등이 왕서에게 호응해 거병했다. 왕서는 이들과 합류해 고중을 양위장군, 감호오중제군사(督護吳中諸軍事), 고양을 감진릉군사(監晉陵軍事)로 삼고,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군을 재촉했다.
왕서의 거병 소식을 들은 소준은 장수 장건(張健)에게 수천 군사를 주고 의병을 토벌하게 했다. 장건은 무석(無錫)에서 왕서군의 선봉인 유빙, 고양과 교전하여 이들을 크게 무찌르고, 나아가 오군의 여러 현들을 대거 약탈하기 시작했다. 유빙과 고양은 전당(錢唐)으로 도망쳤고, 뒤따라 오던 사조는 영흥(嘉興)으로 들어가 수비에 전념했다. 왕서는 패배의 책임을 물어 유빙과 고양의 군대에 소속되어 있던 수많은 관리들을 참살했다. 유빙과 고양도 책임을 피할 수 없어 면직당했으나, 평민의 신분으로 진영에 남아 업무를 계속 보았다.
왕서는 고중을 장태(章埭)로 보내 그곳에서 둔전을 시행하도록 명했다. 고중과 우담은 병사를 거느리고 가던 도중, 장건의 군대를 만나 감히 진군하지 못하고 일단 오포정(烏苞亭)에 주둔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폭우가 쏟아져 지역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장건과 함께 행동하던 소준의 장수 관상(管商)이 배를 띄워 고중과 우담의 군대를 습격하니, 의병은 곧바로 전멸하고 고중은 유빙과 고양이 있는 전당으로, 우담은 본래 자신의 부임지인 오흥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사태가 많이 심각해지자, 왕서는 장수 진유(陳孺)에게 정예병 1,000명을 감독해 해포(海浦)에 보루를 쌓고 굳게 지키도록 했다.
왕서는 곧장 도성으로 진격하자는 부하의 권유를 물리친 뒤, 사조를 전당에 주둔하게 하고, 고중, 고양을 자벽(紫壁)으로 보내 수비를 더욱 굳건히 하였다. 그러나 장건과 관상이 오흥을 공격하자, 오흥을 지키던 우담은 또 패해 도망쳤다. 반란군은 계속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여항(餘杭), 무강(武康)의 여러 현들을 노략질했다. 이에 왕서는 아들 왕윤지를 행양열장군으로 삼고, 장수 서손(徐遜), 진유, 주도(朱燾)와 함께 정예병 3,000으로 무강에 있는 적들을 공격하게 했다. 연전연승으로 승리에 취해, 적이 반격하리라 예상하지 못하던 장건과 관상은 갑작스런 왕윤지의 습격에 크게 놀라 무너졌다. 왕윤지 등이 적을 대파하고 그 수급 수백개를 얻으니, 반란군은 모두 배랑 병장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급급했다. 왕윤지는 적들이 버리고 간 물품들을 거두고, 병사를 따로 보내 우담을 구원해주었다.
당시 소준의 장수 한황(韓晃)은 의성(宣城)을 허물고, 그곳에서부터 고장(故鄣)까지 이어지는 긴 성벽을 축조하고 있었다. 왕윤지는 겨우 얻은 승세를 놓치지 않고자, 주도, 우담, 하준(何準)[1] 등을 보내 한황을 공격했고, 두 군대는 호수 위에서 전투를 벌였다. 우담이 강노를 이용해 한황군을 궁지에 몰아세우니, 한황 등은 마침내 패배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주도 등은 한황을 격파하고 적군의 수급 1,000여 개와 포로 2,000여 명을 얻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우담은 다시 자신의 부임지인 오흥으로 돌아갔다. 왕윤지가 한창 반란군 본대와 싸우고 있을 때, 왕서는 소준에게 호응한 임해(臨海), 신안(新安)의 여러 현들을 평정했다.
함화 3년(328년) 10월, 도간이 건강에 남겨진 소준의 반란군을 몰아내고 도성 건강에 입성했다. 왕서, 우담 등은 수 차례 반란군에게 패배한 죄에 대해 책임을 지고자 절(節)을 반납했다. 도간은 사자를 보내 만류했지만 왕서 등은 듣지 않았다. 이에 도간은 행대를 세우고 상표해, 왕서를 감절강강동5군제군사(監浙江東五郡諸軍事), 왕윤지를 오군, 의흥, 진릉 3군의 정토군사로 삼았다.
함화 4년(329년) 2월, 소준 사후에도 끝까지 석두성을 지키던 한황 등이 마침내 온교에게 패해,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왕서는 이번에도 아들 왕윤지를 보내 잔당을 추격하게 하니, 왕윤지는 연릉(延陵)과 장당호(長塘湖)에서 이들을 대파하고 남녀 10,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후 소준의 잔당이 모두 평정되자, 왕서는 반란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팽택현후(彭澤縣侯)에 봉해졌다.
함화 8년(333년) 6월 27일[2], 세상을 떠났다. 사후 거기대장군, 의동삼사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목(穆)'. 장남 왕안지(王晏之)는 호군참군을 지내던 중, 소준의 난에 휘말려 피살당하는 바람에 왕안지의 아들인 왕곤지(王崐之)가 작위를 물려받았다. 왕서의 후손들은 그 작위를 대대로 물려받다가 동진이 멸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선 후에야 폐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