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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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오준 | ||||
설겸 | 기첨 | 민홍 | 고영 | 하순 |
薛兼
(? ~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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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 동진의 인물로 자는 영장(令長). 오나라의 태자소부 설종의 손자이며, 서진의 산기상시 설영의 아들이다. 출신지는 양주 단양군.2. 생애
타고난 기품이 있어 같은 군(郡) 출신인 기첨, 광릉군의 민홍, 오군의 고영, 회계군의 하순과 함께 오준(五俊)이라 불렸다. 처음 낙양에 들어왔을 때, 사공 장화가 그들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모두 남방의 금이로다."라 하였다. 머지않아 하남의 효렴으로 천거되어 비양상(比陽相)으로 관직에 임했는데, 유능하기로 유명하였다. 그 뒤로 태자선마, 산기상시, 회(懷)의 현령을 역임하던 중, 당시 사공이었던 동해왕 사마월의 부름을 받고 그의 휘하로 들어가 참군이 되었다. 이후 좨주로 옮겨지고 양정후(陽亭侯)에 봉해졌다.사마예가 안동장군이 되자 설겸을 초빙해 자신의 군자좨주로 삼았다. 설겸은 사마예 밑에서 점차 승진하여 그 직위가 승상장사에 이르렀다. 사마예는 그의 노고를 치하하여 녹봉을 인상하였으나, 설겸이 매번 자신의 녹봉을 깎아달라 청하니 다시 원래대로 되돌렸다. 이후 안향후(陽鄉侯)로 옮겨지고 단향태수에 임명되었다.
건흥(313 ~ 316) 연간에 단양윤에 임명되어 녹봉이 2천석에 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서로 옮겨져 태자소부를 겸했다. 이리하여 조부 설종, 부친 설영에 이어 설겸까지 3대가 태자소부를 거치니, 뭇 사람들은 이를 아름답다 하였다.
영창 원년(322년), 왕돈이 상주하여 설겸은 태상에 임명되었다.
동년 11월 11일, 원제 사마예가 죽고 명제 사마소가 즉위하였다.[1] 명제는 태자 시절 그의 교육을 담당하던 설겸을 항상 존경했기에 산기상시를 더했다. 그리나 그 해에 설겸이 사망하자 명제는 조서를 내려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태상 안향후 겸(兼)은 덕을 충실히 쌓고, 자신의 몸을 바쳐 충성을 다하였다. 덕을 가르칠 방법을 고뇌하고, 정도(政道)를 널리 구제하였으나, 불행히도 죽고 말았으니 그 마음이 애달프도다. 지금 지절, 시어사를 보내 설겸을 좌광록대부, 개부의동삼사로 추증하노라. 이곳에서 영총(榮寵)을 내려 그의 혼을 기리도록 하겠다.」
설겸의 장례를 진행 중일 때, 왕돈이 반역하면서 조정에 변고가 일어나 그의 시호를 정하지 못했다. 왕돈의 난을 진압하고 나서야 조정에서는 사자를 보내 태뢰로 제사를 지내 주었다. 아들로는 설옹(薛顒)이 있었으나 아버지보다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후사가 끊겼다.[1] 양력을 따를 시 323년 1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