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4-28 09:27:38

상웅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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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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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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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상단염전(向段閻傳)」
상웅 단작 염찬
向雄
(? ~ 283)

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무백(茂伯)으로 상소의 아들. 사례 하내군 산양현 사람.

처음에는 군에 출사해 주부가 되어 하내태수인 왕경을 섬겼는데, 260년에 왕경이 사마소를 죽이려는 모의에 가담해 처형되자 상웅은 그를 기리고 통곡했다. 상웅은 제사에 쓸 소를 운송하면서 후임 하내태수[1]에게 헌정하지 않고 예에 따라 곧장 낙양으로 운송했다. 그런데 날씨가 너무 더워서 군에서 도성으로 보내는 소가 대부분 더위를 먹어 죽었으며, 주군의 법이 엄정해 상웅은 태수로부터 소환되어 장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

옥 중에서 종회의 부름을 받고 도관종사가 되었으며, 종회가 반란을 일으켜 264년에 처형되자 아무도 장사를 지내주려 하지 않았지만 상웅만이 종회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지냈다. 이를 알게 된 사마소는 상웅을 불러 꾸짖었다.
일전에 그대가 왕경을 위해 울었을 때 나는 죄를 묻지 않았소. 이번에는 종회가 반역을 저지르다 죽으니, 그대는 또 관용을 베풀어 장례를 치러주었구려. 이러면 왕법(王法)을 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상웅이 답했다.
과거 선왕(先王)들은 처형된 죄인의 뼈도 땅에 묻어주니, 그 인덕은 곧 썩은 뼈를 윤택하게 만들었는데, 그때 당시 공과 과를 따져보고 안장을 결정했습니까? 현재 형법은 이미 법령에 따라 시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도의에 감화되어 그의 장례를 치러준 것이고, 도의 교화에는 허물이 없는 줄 압니다. 또, 전하께서 그의 마른 뼈를 황야에 버리신 일은 후대에 어질고 현명한 사람이라 평가받기 아쉬운 일 아니겠습니까?
사마소는 매우 기뻐했고, 이후 연회에서 상웅과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여러 차례 승진해 황문시랑이 되었고, 과거 상관으로 자신을 괴롭혔던 태수가 시중을 지냈지만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를 안 무제가 칙령을 발포해 군신 간의 우호관계를 회복하라 명했다. 상웅은 마지못해 예전 상관을 찾아가 "일찍이 칙령을 받았으나 군신간의 관계가 이미 끊어졌으니 어찌 하겠습니까?"라 말한 뒤 떠났다. 무제는 아직도 화해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해서 상웅을 불러 문책했다.
내 군신의 우호관계를 회복하라 명했건만 어찌하여 일부로 절교까지 하였는가?
상웅이 답했다.
과거 군자는 예의로 사람을 불러들이고, 예의로 사람을 물리쳤습니다. 현재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은 그 사람을 무릎 위에 올리는 것과 같으며, 사람을 물리치는 것은 그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자와 내가 적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인데, 어찌 군신의 우호관계를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무제는 그의 말을 납득하고 강제로 화해시키는 일을 포기하였다.

태시 연간(265년 ~ 274년) 동안 누차 승진해 진주자사가 되어 적당, 곡개, 고취 등과 20만 전을 하사받았다.

275년, 중앙으로 복귀해 어사중승으로 승진하고 시중을 더했으며, 얼마 뒤 정로장군으로 임명받고 다시 조정을 나갔다.

280년, 하남윤이 되고 관내후에 봉해졌다. 무제가 사마유를 영지로 보내려 하자 이를 극구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웅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간언하다가 결국 무제의 마음을 거슬렀고, 스스로 사직해 궁을 나와 이후 화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동생 상광(向𠥆)이 호군장군을 지냈다는 것 외에는 후사에 관한 기록이 없다.


[1] 진서 상웅전에서는 유의(劉毅), 세설신어에서는 유회(劉淮), 세어에는 오분(吳奮)이라고 나오는데, 진서 교감기에 따르면 유회는 유준(劉準)의 잘못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