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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미(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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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1. 개요

王彌
(? ~ 311)

전조의 인물. 청주 동래군 출신. 위나라의 현도태수 왕기의 손자. 전조의 평북대장군 왕상(王桑)의 사촌형.

2. 생애

왕미의 집안 대대로 2천석의 관직을 지냈는데, 왕미는 재간이 있고 여러 서적을 두루 섭렵하여 학식 또한 갖추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협객이 되어 서진의 수도 낙양에서 노닐었으며, 유연과 친구를 맺고 친밀하게 지냈다.

영흥 3년(306년) 3월, 현(惤) 현령 유백근(劉柏根)이 반란을 일으켜 현공(惤公)이라 자칭하자, 왕미는 집안의 노복들을 거느리고 사촌동생 왕상(王桑)과 함께 유백근의 밑으로 들어가 장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안북장군 왕준이 장수를 파견해 유백근을 참수하니, 왕미는 잔당을 이끌고 해안가로 도망쳤다가 연주자사 구희의 동생인 구순(茍純)에게 패해, 장광산(長廣山)으로 들어가 도적떼가 되었다.

영가 원년(307년) 2월, 왕미는 지략이 출중하고, 궁술과 기마술에 특출난데다, 체력까지 보통 사람들에 비해 좋아, 청주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비표(飛豹)'라 칭하였다. 그는 청주와 서주 두 주를 노략질하면서 정동대장군을 자칭하고, 주의 여러 현들을 공격해 그 현령들을 살해함으로써 근심거리가 되었다. 이에 동해왕 사마월이 공령거 국선(鞠羨)을 동래태수로 삼아 토벌하게 했지만, 국선은 오히려 왕미의 공격을 받고 살해당했다.

영가 원년(307년) 12월, 왕미는 영 청주자사 구순에 의해 또 패하고, 사자를 보내어 당시 한(漢)을 건국한 친구 유연에게 귀부하였다. 유연은 왕미를 진동대장군, 청서2주목(青徐二州州牧), 도독연해제군사(都督緣海諸軍事)에 임명하였다.

영가 2년(308년) 4월, 왕미는 일전의 전투로 도망쳐 흩어졌던 무리를 다시 모아 군세를 크게 떨쳤다. 서진의 연주자사 구희가 여러 차례 맞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 했다. 왕미는 장수들을 파견해 청주, 서주, 연주, 예주의 여러 군들을 공략하면서 성을 함락시키면 창고를 열어 재물과 병장기를 취했고, 그 태수나 현령을 살해하였다. 그렇게 여러 지역을 병탄하던 왕미는 4월 13일에 허창(許昌)에 입성했고, 5월에 환원(轘轅)으로 들어가 이수(伊水) 북쪽에서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왕미가 낙양으로 진격해온다는 소식에 조정은 크게 진동하여 낮에도 궁성문을 닫아걸었다. 마침내 파죽지세로 낙양에 도착한 왕미는 진양문(津陽門)에 주둔하자, 사도 왕연 등의 백관들은 출전하여 성을 지켰다. 이때 진나라의 양주독호 북궁순이 용사 100여 명을 선발해 진지를 돌격하여 왕미를 대파하였다.

왕미는 건춘문(建春門)에 불을 지르고 동쪽으로 도망쳤고, 칠리간(七里澗)에 주둔하였다. 이에 사도 왕연은 좌위장군 왕병(王秉)을 파견해 왕미의 뒤를 추격하게 하였다. 왕미는 칠리간에서 왕병의 추격군과 싸웠다가 또 패배하고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계속 도망쳤다. 그는 왕찬(王讚)에게 패하고 도망치던 유령의 패잔병과 만나 함께 유연이 있는 평양(平陽)으로 향했다. 왕미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유연은 크게 기뻐하며 시중 겸 어사대부인 자를 파견해 왕미를 평양군 여정현(黎亭縣) 교외에서 영접하게 하였다. 이윽고 왕미와 대면한 유연은 그를 사예교위로 삼고, 시중, 특진을 더하였으나, 왕미가 굳게 사양하였다. 그리하여 유연의 본군과 합류하게 된 왕미는 유총, 석륵과 더불어 위군(魏郡), 급군(汲郡), 돈구군(頓丘郡)을 유린하며 50여 개의 보루를 허물고, 포로들은 자신의 군대로 편입시켰다.

영가 2년(308년) 9월, 왕미가 석륵과 함께 업(鄴)을 침공하자, 정북장군 화욱(和郁)이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진나라의 예주자사 배헌회제 사마치의 명령을 받고 백마(白馬)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영가 3년(309년) 4월, 왕미는 시중, 도독청서연예형양육주제군사(都督青徐兗豫荊揚六州諸軍事), 정동대장군, 청주목으로 임명되어, 초왕 유총과 함께 호관(壺關)을 포위하였다. 동해왕 사마월은 회남내사 왕광(王曠), 안풍태수 위곤(衛乾), 장수 시융(施融), 조초(曹超) 등을 파견해 토벌케 하였다. 왕미와 유총은 장평(長平) 사이에서 이들을 격파하니, 진나라군 6 ~ 7할이 사망하였고, 장수 시융, 조초도 전사하였다. 유총은 여기서 더 나아가 병주의 둔류(屯留), 장자(長子)를 차례로 공략하고, 19,000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진나라의 상당태수 방순(龐淳)은 호관을 들어 유총에게 항복하였다. 이 공으로 왕미는 동래공(東萊公)에 봉해졌다.

영가 3년(309년) 8월, 왕미는 초왕 유총과 함께 낙양을 쳤고, 시안왕 유요와 안북장군 조고(趙固)가 그 뒤를 이었다. 왕미와 유총은 동해왕 사마월이 파견한 평북장군 조무(曹武)와 평창공 사마모가 파견한 장수 순우정(淳于定)을 모두 격파하고, 의양(宜陽)에 주둔해 태학과 국학을 불태웠다. 그러나 거듭된 승리에 유총은 방비를 게을리 하다가, 이내 홍농태수 원연(垣延)의 위장 투항 작전에 당해 대패하고 평양으로 돌아갔다.

영가 3년(309년) 10월, 유연의 명을 받들어 초왕 유총, 시안왕 유요, 여음왕 유경(劉京)과 함께 정예 기병 50,000명으로 낙양을 공격하고, 대사공 호연익(呼延翼)이 보병을 거느리고 뒤를 받쳤다. 한나라가 빠른 시일 내에 공격해오지 않을 거라 예상하던 진나라의 조정은 크게 놀라 동요하였고, 그 사이에 유총의 군대는 다시 의양을 지나 낙양성 서명문(西明門)에 주둔하였다. 그때 대하문(大夏門)에 주둔하고 있던 정로장군 호연호(呼延顥)가 진나라의 호군 가윤(賈胤)과 북궁순이 이끄는 1,000명의 결사대에 의해 사살당했으며, 후군을 맡고 있던 호연익도 부하들의 반란으로 살해당하니, 유총은 잠시 군대를 낙수(洛水)로 물리는 수밖에 없었다.

유총은 관군장군 호연랑(呼延朗)과 평진장군 유려(留慮)에게 군대를 위임하고, 숭산(嵩山)에 기도를 올리러 자리를 비웠다. 이때 사마월이 참군 손순(孫詢)의 제안에 따라 장수 구광(丘光), 누부(樓裒) 등을 보내 한군을 기습하자, 한군은 격파당해 호연랑이 참수당하고, 유려는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심지어 보급로에도 문제 생겨 양식이 다 떨어졌고, 유연은 태사령 선우수지(宣于脩之)의 진언에 따라 유총과 유요 등을 돌아오게 하였다. 다만 왕미는 남아서 2,000 기병을 이끌고 남진하여 환원으로 들어가니, 유민들이 성읍에 불지르고 2천석의 관리와 장리들을 죽이며 왕미에게 호응하였다. 왕미는 좌장사 조억(曹嶷)을 천거하여 행 안동장군이 되게 하고, 동쪽으로 보내 청주를 경략하게 하였다.

영가 4년(310년) 정월, 진동대장군 석륵이 여양(黎陽)에서 황하를 건너 백마(白馬)를 점령하자, 왕미는 20,000 군대를 이끌고 석륵과 합류하여 동군(陳郡), 영천(潁川)을 무너뜨리고 양적(陽翟)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석륵과 동생 왕장(王璋)을 파견해 서주와 연주를 침략하여 진나라의 연주자사 원부(袁孚), 거기장군 왕감(王堪) 등을 참살하였다.

영가 4년(310년) 10월, 하내왕 유찬, 시안왕 유요, 왕미가 40,000 군대로 낙양을 향해 진격할 때, 석륵이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유찬 등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면지(澠池)에서 배막을 격파하고 점점 낙양성 가까이 접근하면서 진나라의 숨통을 조여왔다.

영가 5년(311년) 6월, 마침내 낙양성에 도착한 왕미는 호연안과 함께 선양문에서 진나라군을 격파하고, 남궁(南宮)으로 들어가 태극전(太極殿)의 전전(前殿)에 올랐다. 그리고 군사 풀어 크게 노략질해 궁중의 보물과 궁녀를 모두 거두었다. 왕미군의 약탈로 진나라 황제들의 능묘는 도굴되었고, 궁전은 불탔으며, 성의 창고는 텅텅 비었다. 낙양의 백관과 백성 30,000여 명은 사로잡혀 평양으로 끌려갔다.

왕미가 궁성을 약탈할 때, 유요는 왕미가 자신보다 먼저 약탈하는 것에 원망을 품고 약탈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왕미가 따르지 않자, 유요는 왕미의 아문 왕정(王延)을 죽였고, 격분한 왕미는 유요군을 공격하기 시작해 서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때 왕미의 장사 장숭이 간언하자, 왕미는 깨달은 바가 있어 공격을 멈추고 유요에게 가 사죄하였다. 유요 역시 무의미한 싸움임을 알고 있었기에 왕미를 용서하였다. 이후 왕미가 유요에게 말했다.
"낙양은 천하의 중심이요, 사방이 험준한 산과 하천으로 둘러싸여있어 방어가 굳건합니다. 또, 성곽과 황궁을 새로 지을 필요도 없으니, 평양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요는 왕미의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고 낙양성으로 들어가 전부 불태우며 실컷 약탈하기 바빴다. 이를 본 왕미는 노하여
"도각놈의 자식에게 무슨 제왕의 뜻이 있으리오! 네놈이 어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라 한탄하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 항관(項關)에 주둔하였다. 이후 소무제 유총이 왕미를 대장군에 임명하고, 제공(齊公)에 봉하였다.

전(前) 사예교위 유돈(劉暾)[1]이 왕돈에게 동쪽의 청주를 점거하고, 안동장군 조억과 힘을 함쳐 석륵을 도모하라 권유하였다. 왕미는 낙양에서 약탈한 보물과 미녀를 석륵에게도 나눠주는 등 겉으로는 그와 친한 척하였으나, 속으로는 시기해 유돈의 말에 따르기 하였다. 그는 유돈에게 서신을 주어 일단 조억에게 밀명을 전달하게 하고, 석륵을 초청해 함께 청주로 가자는 제안을 하였다. 하지만 조억에게 가던 유돈은 동아(東阿)에서 우연히 석륵의 기병대에게 붙잡혔고, 왕미의 서신을 입수한 석륵은 그 내용을 보고는 매우 분노하여 유돈을 죽여버린 뒤, 왕미를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한편, 유돈이 죽은 줄도 모르고 있던 왕미는 장수 서막(徐邈), 고량(高梁) 등에게 군사를 주어 기존의 계획대로 조억에게 보내면서 왕미의 군세는 약화되었다. 때마침 석륵이 서진의 대장군 구희를 사로잡아 좌사마로 삼자, 왕미는 속으로는 싫었지만 서신을 보내 축하하며 말했다.
"공이 구희를 사로잡아 등용하였으니, 이 얼마나 신묘한 일인가! 구희를 왼편에 두고, 이 왕미를 오른편에 둔다면 천하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이미 왕미의 본심을 눈치채고 있던 석륵은 그를 더욱 꺼리며, 모사 장빈과 더불어 왕미의 제거를 모의하였다.

영가 5년(311년) 10월, 봉관(蓬關)에서 서진 말기에 일어났던 유민 반란군 중 하나인 걸활군(乞活軍)과 싸우던 왕미는 급박한 상황에 몰려 석륵에게 구원을 청했다. 왕미를 제거할 기회만 엿보던 석륵은 직접 군대를 몰아 왕미와 싸우던 걸활군을 무찌르고, 걸활군의 장수 유서(劉瑞)를 잡아 참수하였다. 왕미는 석륵이 진짜로 자신과 친하다 생각하고 더이상 석륵과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았다.

봉관 전투가 끝난 후, 석륵이 왕미를 초청해 기오(己吾)에서 연회를 열었다. 이때 왕미가 의심없이 술을 들이키다가 취하게 되자, 석륵이 칼을 뽑아 왕미를 손수 참하고 그 무리를 병합하였다. 그리고 소무제 유총에게 상표해 왕미가 모반을 꾀하여 처단했다 고하니, 소무제 유총은 보고를 듣고 크게 분노하였으나 석륵이 딴 마음을 먹을까 두려워 오히려 그의 관직을 높여주었다.

3. 대중매체

후삼국지에서는 사서에는 분명히 조부가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왕평의 아들로 나온다.


[1] 진나라가 무너질 때 왕미에게 사로잡혔지만 왕미와 동향 출신이라 왕미가 그를 살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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