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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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辛勉생몰연도 불명
서진의 인물. 자는 백력(伯力). 양주 농서군(京兆郡) 적도현(狄道縣) 출신. 좌위장군 신홍(辛洪)의 아들.
2. 생애
신면은 박학하고 굳건한 절개가 있었다. 회제 사마치 재위기에 임관하여 여러 차례 승진해 관직이 시중에 이르렀다.영가 5년(311년) 6월, 한나라의 전군대장군 호연안, 정동대장군 왕미, 시안왕 유요가 낙양을 함락하고, 황궁에 진입해 군사를 풀어 궁녀와 진귀한 보물들을 모두 약탈하였다. 회제는 그 사이에 화림원(華林園)을 통해 황궁을 빠져나오려다 한군에게 붙잡히고 평양(平陽)으로 압송되었다.
신면은 회제를 따라 평양에 이르렀는데, 유총이 그를 광록대부로 삼으려 하자 굳게 사양하였다. 이에 유총이 황문시랑 교도(喬度)를 보내 독약과 술을 가지고 신면을 핍박하게 하니, 신면은
"대장부가 어찌 몇 년의 목숨 때문에 높은 절개를 져버리고 두 성(姓)을 섬길 수 있겠는가! 차라리 지하에 계신 무제께 가리라!"
라 탄식하고는 거침없이 술에 독약을 타 마시려 하였다. 교도는 술을 마시려는 신면을 제지한 뒤"주상께서는 그대를 시험하셨을 뿐인데, 그대는 진실로 고귀한 선비요!"
라 감탄하며 떠났다. 이 일로 유총은 더욱 신면의 정절을 아름답게 여기고 존경하여, 평양의 서산(西山)에 신면을 위해 작은 집을 지어주고 매달 쌀과 술을 지급하였으나 신면은 항상 이를 받지 않고 사양했다. 그리고 나이 80세에 이르렀을 때 세상을 떠났다.3. 기타
- 신면의 족제(族弟) 신빈(辛賓)은 상서랑에 임명되어 민제 사마업을 섬겼다. 장안이 함락되고 민제가 한나라에 항복할 때, 신빈도 황제를 따라 평양으로 이동했다. 소무제 유총은 투항한 진나라 신하들의 의중을 시험하고자, 술자리를 열어 그들을 한 데 불러모은 뒤에 사마업으로 하여금 신하들에게 술을 돌리고 술잔을 씻게 하였다. 황제였던 자가 과거의 신하들에게 술을 따르는 이런 수모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고, 결국 신빈은 참다 못 해 자리에서 일어나 사마업을 붙들고 큰 소리로 통곡하였다. 이를 본 유총이 말했다."일전에 유민(庾珉)의 무리를 주살한 것이 본보기가 되기에 부족했나 보구나!"
그리고 신빈을 끌어내 참수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