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5 21:55:42

장보(서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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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輔
(? ~ 305)
1. 개요2. 생애

1. 개요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세위(世偉)로 형주 남양군 서악현 출신. 후한의 저명한 문학가이자 발명가인 장형의 후손이다.

2. 생애

어릴 적부터 재능이 있어 사촌동생 유교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성년이 되었을 때 남전현령이 되었는데, 현지의 호족들에게 절대 굽히지 않았다. 당시 강노장군 방종(龐宗)은 서주의 대호족이었고, 방종의 호군 조준(趙浚)은 그런 방종의 외갓집 사람이었기에, 그 일당들이 지역에서 제멋대로 구니 지역 백성들에게는 큰 재앙이었다. 장보는 법을 엄히 집행하여 만행을 저지르던 조준의 노비 2명을 사로잡아 사형을 집행시켰다. 또, 방종 집안이 수탈한 밭 200여 경을 다시 몰수해 백성들에게 돌려주니, 남전현의 백성들은 모두 장보를 찬양하였다. 장보가 산양현령으로 전임했을 때, 당시 산양에서도 태위 진준 집안의 사람들이 백성들을 멋대로 수탈하고 있었다. 장보가 이번에도 진준 집안의 하인들을 체포해 모조리 사형에 처하자, 그 명성이 높아져 상서랑으로 승진하고 의창정후에 봉해졌다.

얼마 후 어사중승으로 옮겨졌다. 당시 황후 가남풍 파벌에 속한 적노장군 맹관은 명위장군 학언(郝彦)을 사적으로 미워해 군중의 일을 빌미로 학언을 모함하니, 가밀(賈謐), 석숭, 반악 등도 이에 찬동하였다. 장보는 진실을 명백히 따져 학안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주는 동시에 가밀 등의 파벌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정변을 일으켜 가남풍을 살해한 조왕 사마륜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사마륜의 권세를 믿고 나대던 의양왕 사마위를 추궁해 탄핵하였다. 사마위는 앙심을 품고 사마륜의 총신 손수에게 가 장보를 무고하자, 손수는 그 말을 믿고 장보를 벌하려 하였다. 이에 장보는 손수에게 편지를 써 해명했다.
이 보(輔)는 옛 위인들을 존경하고 관리가 되어 일을 처리할 줄만 알지, 자신을 위해 생각할 줄은 추호도 모릅니다. 현재 의양왕께서는 관대하여 저에게 직접 와서 따진 적이 없고 또, 제게 부양해야 할 76세의 노모가 있음을 듣고 놀라 항상 화가 닥칠까 염려해주셨습니다. 명공께서는 저의 임관 전후의 일을 잘 살피어 판단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저 조정에 충성을 다하는 우신(愚臣)에 불과합니다.
손수는 비록 간신배일지라도 장보의 정직함을 잘 알고있어, 이내 사마위가 모함하였다는 것을 눈치채고 장보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다. 이후 장보는 빙익태수에 임명되어 지방으로 나갔다.

303년, 하간왕 사마옹이 장사왕 사마예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자 사마옹의 편에 섰다. 하지만 사마옹의 군대는 사마예를 따르던 옹주자사 유침의 군대에게 연전연패하여 다시 장안성으로 들어갔다. 유침이 위수를 건너서 진을 치고 성 밖에서 요격하러 나온 사마옹의 군대를 또 물리쳤다. 안정태수 아박(衙博)과 공조 황보담(皇甫澹)이 5천 군사를 거느리고 장안성에 입성해 마침내 사마옹의 장막 아래까지 도달했을 정도로 형세가 위태로웠으나, 장보는 유침의 후위대 입성이 늦어진 틈을 타 돌격해 아박, 황보담을 죽였다. 장안 점령에 실패한 유침은 하는 수 없이 패잔병만 거두어 물러갔다. 사마옹의 부하 장방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수 돈위를 보내 유침의 군대를 격파하고 유침을 사로잡아 참했다.

305년, 사마옹은 사마예를 죽이고 그 잔당인 진주자사 황보중까지 사망하자 장보를 진주자사에 임명했다. 진주자사로 부임한 장보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천수태수 봉상(封尙)을 죽이고 동강교위, 농서태수 한치(韓稚)를 소환했다. 한치는 장보가 봉상을 함부로 살해한 사실을 알아, 이에 응하지 않고 자신의 아들 한박(韓朴)에게 군사를 주어 장보를 습격케 했다. 장보는 군사를 이끌고 한박과 차다곡구(遮多谷口)에서 교전했으나 패했고, 얼마 전 자신이 죽였던 봉상의 부장 부정(富整)에게 살해당하면서 그 업보를 치렀다.